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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8일 월요일

중국-일본 일촉즉발 긴장감 -시진핑,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저널] 시진핑,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박승준 (인천대학교 초빙교수)

박승준교수(2).jpg 

중국-일본 일촉즉발 긴장감… “2014년 한바탕 전쟁 벌어질 것”

중국 사람들이 ‘춘제(春節)’라고 부르는 설날인 1월31일 오전 9시35분(한국 시각 오전 8시35분). 동중국해 연안 중국군 모 비행단 작전당직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모 공역(空域)에 불명(不明)의 목표가 출현했으니 긴급 발진해서 확인하라!”

당직을 서고 있던 부대대장 런취안성(任全勝)과 옌쥔(嚴軍), 겅옌페이(耿艶飛), 양난(楊楠) 등 4명의 조종사가 비상 출격을 했고 잠시 후 목표를 발견했다. 불명의 전투기와 중국 전투기들이 상승과 좌우 회전 등 상호 견제 비행을 벌인 끝에 낮 12시23분 불명의 외국 전투기가 기수를 돌려 사라졌다. 런취안성 부대대장이 지휘하는 중국군 전투기 편대는 인터셉트(차단)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왔다. 때마침 춘제라 기지 근방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편대원들에게는 런취안성 편대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개선한 것을 축하하는 소리로 들렸다.

이상은 중국 해군의 공식 웹사이트인 ‘중국 해군망(中國海軍網)’이 설날 당일 전한 내용이다. 사흘 뒤인 2월3일 홍콩에서 최다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동방일보(東方日報)’는 중국군 소장 뤄위안(羅援)의 말을 인용해 “출현했던 외국 전투기는 일본 전투기였으며, 춘제 오전에 있었던 도발에 대응해서 비상 출격한 중국 전투기는 Su-30 전투기 2대로 실탄을 장착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해군이 제공해서 동방일보에 실린 중국 전투기의 비행 사진에는 2대의 Su-30 전투기 날개에 열추적 공대공미사일이 장착돼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동방일보는 이 2대의 중국 전투기 소속이 중국 동해함대 해군항공대 제4사(師) 10단(團)이라고 전했다.

동방일보는 이와 함께 중국 전투기들의 이번 긴급 발진에 대한 일본 측 반응은 아직 없으며, 영국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에 따르면 지난해10월에서 12월 사이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 대상이 되고 있는 댜오위다오(釣魚島, 일본명 센카쿠 열도)에서 일본 자위대 전투기들이 모두138소티(sortie, 1회 출격이 1소티)의 긴급 발진을 했다고 전했다.
    
“중국 방공식별구역에서 중·일 충돌 우려”

현재 중국과 일본 사이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인식, 집단 자위권 행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의 헌법 개헌 등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해군 당국의 인터넷 뉴스와 홍콩 신문 등 최근 일련의 보도는 심상찮은 분위기가 고조되는 동북아 정세를 잘 보여준다. 즉 중국이 지난해 11월23일 설정한 동중국해 방공식별구역 상공과 댜오위다오 상공에서 중국 전투기들과 일본 전투기들 사이에 근접 조우(遭遇)가 빈번하게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댜오위다오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첨예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중국이 댜오위다오를 자국의 방공식별구역 내에 전격 포함시킴으로써 중국과 일본 사이에 언제든 충돌의 불꽃이 튀겨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발행하는 국제 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지난 1월2일 ‘2014년은 한바탕의 전쟁이 벌어지는 한 해가 될 것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올해는 1914년 세르비아에서 울린 한 발의 총소리를 시작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진 지 100년 되는 해이며, 1894년 중국과 일본 간의 갑오전쟁(청일전쟁)이 개전한 지 120년이 되는 해”라고 전제하고 “2014년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가장 큰 광경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서 양국 전투기들 사이의 공중전이나 해상 전투가 발생해서 수십 명 정도가 사망하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해 중국과 일본이 댜오위다오와 방공식별구역 공역 및 해상에서 충돌하고, 이로 인해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을 미국의 격월간 국제 문제 전문지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The National Interest)’도 2월5일 발행된 최신호에서 제기했다.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조지프 보스코 연구원이 쓴 ‘아시아에 커다란 붉은 선(비행 금지선) 그리기(Draw a Big Red Line in Asia)’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동아시아 일원에서 중국의 잘못된 행동을 제어하기 위한 붉은 선을 잘못 그릴 경우, 세계는 또다시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오판으로 빚어진) 1950년의 한국전쟁을 보게 될지 모른다. (닉슨 전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한국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우리 미국은 (북한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했고, 중국은 (전쟁에 즉각 개입한) 우리 미국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키신저가 말한 이러한 상호 오판이 되풀이될 경우 이 지역과 세계에서는 한국전쟁 당시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CSIS의 보스코 연구원은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 기고문을 통해 “따라서 오바마 대통령은 1950년 애치슨 국무장관이 동아시아에 공산주의 저지선을 그리면서 한반도를 제외시킨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고, 중국과 북한에 맞서 한국·일본·필리핀·호주에 대한 방어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아베 과욕으로 ‘힐러리 구상’ 헝클어져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국과의 영해 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시점은 2011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하와이에서 열린 APEC(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를 앞두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하와이 이스트 웨스트 센터에서 ‘미국의 태평양 세기(America’s Pacific Century)’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태평양 서쪽 동아시아에 번영하는 시장경제 지역을 건설할 것이며, 중국에 대해서는 국제 규범을 잘 지키는지, 인권을 소홀히 하지 않는지 등을 지속적으로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다시 말해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견제 정책을 전개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미국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일본·필리핀·태국·호주 등 전통적인 맹방 5개국과 협조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연설은 중국의 굴기(起)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이들 5개국을 가르는 커다란 ‘레드 라인’을 그린 셈이다. 실제로 이후 일본과 필리핀은 중국과의 영해 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島)에 배치돼 있던 자위대 최강의 탱크부대를 남하시켜 오키나와 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이제 더 이상 러시아가 일본의 주적(主敵)이 아니라 중국이 주적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아시아에 대한 재개입’이라고 불리는 힐러리 클린턴의 정책 선언 이후 일본은 ‘근해 해군’의 개념을 벗어나 ‘원양 해군’의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중국의 해양 확대 전략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해군력을 건설하지 않았던 중국은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임기 후반부터 시진핑 현 국가주석 임기 초반에 이르는 동안 일본 남부 오키나와에서 동남아의 말래카 해협을 연결하는 이른바 제1 도련(島)을 넘어 일본 동부 해안에서 뉴질랜드를 연결하는 이른바 제2 도련으로, 다시 말해 태평양 중심부에 가까운 해역으로 이동해서 해군 훈련을 실시해왔다. 이 훈련에는 특히 중국 최초의 항모 랴오닝(遼寧) 호도 참가해서 일본과 미국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일본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일본 열도 남단에 근접한 항로를 통해 제1 도련을 넘어 제2 도련 해역으로 항해하는 중국 해군의 전함들을 공중에서 감시하기 위해 전투기들을 파견해 추적했다. 중국군은 일본 전투기들의 이런 추적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과 중국이 120년 전의 1894년 청일전쟁 당시처럼 충돌할 경우 그 불꽃의 진원지는 어디가 될까. 중국 전투기와 일본 전투기가 중복해서 순찰 비행을 하고 있는 댜오위다오 상공 또는 해역에서 공중전이나 함포 포격전의 형태로 불꽃이 튈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엉뚱하게도 세르비아에서 울린 한 발의 총소리로 시작된 것처럼, ‘총소리’가 엉뚱하게도 한반도 주변이나 이어도 상공에서 울리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재개입을 선언한 힐러리 클린턴의 구상대로라면 현재 동아시아 정세는 중국과 북한이 한 편이 되고, 한국·일본·필리핀·태국·호주가 한 편이 되는 진영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확고하게 지원할 것이라고 판단한 아베 총리의 과욕은 이런 구조를 완전히 헝클어뜨리고 말았다. 아베 총리는 이 기회에 일본을 전쟁 수행이 가능한 보통 국가로 변화시키기 위한 개헌을 하겠다는 선을 훨씬 넘어 한국의 고유 영토인 독도마저 분쟁 지역으로 만들고, 중국과 영해 분쟁을 빚고 있는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갈등에서도 중국에 대한 공세를 적극적으로 펼치는 과정에서 중대한 착각과 실수를 저질렀다. 전쟁범죄자인 기시 노부스케의 후손이라는 혈통에서 출발한 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의 갈등에 불을 붙인 오판이 대표적이다. 때문에 당초 미국이 구상했던 중국·북한 대 한국·일본·필리핀·태국·호주 구도는 헝클어졌다. 한일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중국 시진핑 주석의 입장에서는 한국을 활용해서 일본에 대한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생일 때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한중 사이의 갈등 요소인 이어도 문제에 대해서도 중국은 “이어도는 해수면 아래의 암초이므로 우리와 한국 사이에 영토 분쟁은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에 축전 보낸 시진핑

국제 문제 전문가들은 시진핑의 승부수를 주목한다. 만약 시진핑 주석이 말래카 해협 부근에 남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경우 동북아 정세는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말래카 해협은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를 실은 일본 유조선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 외교부 훙레이(洪磊) 대변인은 일본 아사히신문이 지난 1월31일 “중국이 곧 남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것”이라고 보도한 데 대해 2월1일 논평을 내고 “일본 우익 세력들이 마치 중국이 남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것처럼 떠들면서 자신들의 개헌과 군사력 확대에 대한 국제적인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려 애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이 가까운 시일 내에는 남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셈이다. 하지만 격발용 방아쇠에 걸려 있는 시진핑의 손가락이 언제 당겨질지는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사저널, 2014-02-12]

2014년 9월 6일 토요일

2014년 8월 26일 화요일

개번 매코맥 · 노리마쯔 사또꼬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개번 매코맥 · 노리마쯔 사또꼬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8.22 18:34:23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9686

미군 기지와 일본 리조트, 하나로 이어진 두 개의 오키나와

오키나와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코발트빛으로 물든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야트막한 산자락을 뒤덮은 미답(未踏)의 원시림, 오키나와 꽃으로 불리는 붉은 데이고 꽃과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서는 사탕수수 밭, 곳곳에서 눈에 들어오는 붉은색 기와(琉球赤瓦)와 거북이 등을 닮았다는 귀갑묘(龜甲墓). 이 같은 '이색적'인 풍광에 밀가루로 만든 오키나와 소바, 각종 돼지고기 음식, 고야(여주)라 불리는 채소를 섞은 '찬푸르' 볶음 요리를 즐기며 오키나와 술 아와모리(泡盛)를 곁들인다.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이 남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열대의 땅에서 안식을 찾아 헤맨다. 1990년대 이후 바닷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각종 리조트에는 이런 이색적인 경관에 더해 도시적인 편리한 생활양식을 그대로 이식해놓았다. 사람들은 해양 스포츠를 만끽하고 도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이색적인 경관과 문화를 즐기다가도 밤이 되면 도쿄의 중심가에 있는 유흥 숙박 시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고급 리조트에서 오키나와의 냄새가 살짝 가미된 무언가를 즐기면서 편리한 도시의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오키나와는 관광과 휴양의 마을이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아도 이색적인 풍광과 함께 사람들의 눈에 뛰어 들어오는 또 하나의 오키나와가 있다. 바로 미군 기지와 미군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또 하나의 오키나와이다. 특히 국도 58번 선을 따라 북상하다 마주치게 되는 수없이 많은 미군 차량과 거대한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를 찾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특히 극동 최대의 군사 비행장인 가데나(嘉手納) 기지의 크기는 도쿄 하네다 공항의 두 배에 달한다. 한국전쟁 때도 베트남전쟁 때도 수없이 많은 전투기들이 이 공항을 이륙해 폭탄을 한반도와 베트남 인민들의 머리에 떨어뜨렸다. 이 군사 비행장 밖에 자리한 국도 휴게소 옥상에 올라서면, 엄청난 폭음을 뿜으며 이착륙을 반복하는 각종 군용기를 목측(目測)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군사 마니아나 평화 활동가에 더해 많은 관광객들이 이 자리에 올라서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이 '비극'을 관람한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 전시 시설에선 폭음의 엄청남을 군용기종에 따라 체험해볼 수 있는 전시물이 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면적의 20퍼센트 이상. 일본 전체에 있는 미군 기지의 70퍼센트 이상이 오키나와에 몰려 있다. 일본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부분의 미군 기지를 떠안는 부조리한 현실. "오키나와는 밝은 빛인 헌법 제9조가 야기한 암흑의 미일 안보에 갇혀 있다"(390쪽)는 미야기 야시히로의 말대로 일본(야마토)의 '평화'가 오키나와(우치나)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듯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의 또 하나의 '일상'이다. 전자가 탈정치적인 오키나와 '소비'의 한 단면이라면, 후자는 미군이라는 존재가 오키나와에 어떤 식으로 군림하고 이 군림을 통해 동아시아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두 개의 오키나와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노마 필드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의 기지와 일본의 리조트, 이것은 두 개의 깃발 아래 각각 결집되는 세력의 구체적인 실현체이다." (노마 필드,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 66쪽).

이 두 개의 오키나와 중, 주로 군사기지의 마을 오키나와를 다룬 책이 바로 개번 매코맥과 노리마쯔 사또꼬가 지은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창비, 2014년 7월 펴냄)이다. 저자인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은 호주국립대학의 명예교수이며 동아시아를 배경으로 일본의 현대를 분석해온 대표적인 일본 전문가이다. 최근에는 The Asia-Pacific Journal : Japan Focus의 책임 편집자로 일하면서 일본 관련 비평을 세계로 발신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미 한국에는 <종속 국가 일본>, <일본, 허울뿐인 풍요> 같은 책이 번역 소개되어 있다. 노리마쯔 사또코(乗松聡子)는 주로 캐나다에 거주하면서 2007년에 설립한 평화철학센터(Peace Philosophy Centre)의 대표를 맡고 있다.


1996년 '전환론'과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창비
ⓒ창비
이 책에서는 오키나와(<저항하는 섬, 오끼나와>에서는 출판사 창비의 독자적인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서평에선 인용문을 제외하고 국립국어원 일본어 표기법에 따른다) 사람들의 '저항'의 역사를 다룬다. "압도적인 외부 세력에 의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빼앗기고 군사주의라는 맹독을 주입 당했던 역사", 즉 "1609년부터 시작된 사쯔마번의 지배, 1879년부터 시작된 근대 일본 국가의 지배, 1945년부터 1972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군사 지배, 그리고 1972년 이후 일본의 명목상 지배"(35∼36쪽)에 맞서는 저항의 역사이다.

누구에게 저항하는가? '미국과 일본에 맞선 70년간의 기록'이라는 부제대로 저항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과 미국이라는 두 민족국가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민족국가"라는 번역어보다는 "국민국가"라는 말이 현실에 더 조응하는 말인 듯하다). 이 저항은 역사 속에서 강요당해온 "섬의 운명뿐만 아니라, 미국과 '속국' 일본이 부과한 지역적 및 전 지구적 질서 자체를 지탱하는 기둥에 도전"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책에서 지은이는 "처분, 억압, 그리고 소외가 마침내 저항으로 전환된 과정에 대한 해명"(36쪽)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전환은 언제 일어났으며 전환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지은이는 1996년으로 보고 있다. 그전에는 "압도적인 외부 세력의 힘에 의해" 속수무책이었던 오키나와가 1996년 이후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지역적 및 전 지구적 씨스템에서 점점 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저항국가(state of resistant)"로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1996년 '전환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1995년 9월, 미군 병사 3명이 12세 소녀를 렌터카로 납치해 한적한 바닷가에서 성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항의 운동이 오키나와 전역에서 일어났고 오키나와 사람들은 미일지위협정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미군 기지와 미일 동맹에 심각한 위협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부상한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해결하고자 협상을 개시해 결국 1995년 12월 '오키나와 특별행동위원회'(SACO) 최종 보고를 발표한다. 내용은 후텐마 기지의 전면 반환이었다.

후텐마 기지(MCAS FUTENMA, Marine Corps Air Station Futenma)는 오키나와 중부 도시 기노완(宜野湾) 시에 자리한 미 해병대의 전투비행장으로 기노완 시 면적의 무려 25퍼센트를 차지한다. 게다가 기노완 시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지"(도널드 럼스펠드 전 미국 국방부 장관의 발언)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보수파 정치인인 오키나와 지사 나카이마 히로가즈(仲井眞弘多)가 후텐마 기지를 도쿄의 히비야 공원 같은 곳이라 했겠는가? 실제로 1972년부터 2002년까지 각종 비행기 사고가 77건이나 발생했고, 급기야 2004년에는 기지에 인접해 있는 오키나와 국제대학 캠퍼스에 해병대 헬기가 추락하는 사고까지 발생한 곳이다.

따라서 SACO 최종 보고대로 만일 후텐마 기지가 철거된다면, 오키나와 주둔 미군 기지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면 반환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즉 후텐마 기지는 철거하되 이에 따른 대체 시설을 오키나와 내에 마련한다는 것이었고 대체 시설은 그 후 오키나와 북부에 자리한 나고(名護) 시의 헤노코(辺野古)로 압축되었다. 이후 후텐마 기지 철거와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려는 미국·일본 양 정부와, 후텐마 기지 완전 철거와 신기지 건설 반대를 주장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대립 구도가 만들어진다. "거대한 군사기지를 이 장소에 밀어붙이는 것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이나 호주의 카카두 국립공원을 군사기지로 만드는 것"(286쪽)이라는 지은이의 설명대로, 헤노코 이전은 멸종 위기종인 듀공, 바다거북이, 해초, 산호로 가득한 이곳에 원자력 잠수함이 정박 가능한 항만 시설과 긴 활주로 두 개, 각종 부속 시설을 포함한 해병대 및 육해군 공용의 거대 군사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미국과 일본에 맞선 70년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오끼나와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알리는"(181쪽) 1996년 이후 부상한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헤노코 신기지 건설 문제를 주제로 삼아, 이 시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본격화되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저항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제1장부터 4장까지(19∼178쪽)를 오키나와의 근현대 이야기에, 5장부터 13장까지(179∼457쪽)를 헤노코 문제를 포함한 미군 기지 문제에 각각 할애한 것만 보아도 지은이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어떻게 보면, 오키나와 기지 문제에 대한 최고의 개설서라 볼 수 있다.

▲ 후텐마 기지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미국 해병대의 수직 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리(2013년 11월 12일). 숱한 사고를 일으켜 '미망인 제조기'로 불리는 기종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망인 제조기' 배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 후텐마 기지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미국 해병대의 수직 이착륙 수송기 오스프리(2013년 11월 12일). 숱한 사고를 일으켜 '미망인 제조기'로 불리는 기종이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망인 제조기' 배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위키미디어커먼스

"하토야마의 난"은 어떻게 '하토야마의 항복'으로 귀결됐나

그중에도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2009년 8월 총선거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 특히 하토야마 정권과 오키나와 문제의 관련성에 대한 분석이다. 지은이는 1955년부터 2009년 8월말까지 지속된 자민당의 장기 일당 지배를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속국' 씨스템이 체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 있던 시대로, 그리고 민주당 정권의 등장을 "극적인 변화의 전조"이면서 "구체제의 붕괴 후 신질서의 개막을 예고"(214쪽)하는 것으로 각각 자리매김하고 있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을 이렇게까지 평가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지만,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정권이 후텐마 기지를 "최소한 현외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으니 오키나와 사람들이 하토야마 정권에 거는 기대가 남달랐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지은이는 "최소한 현외로"라는 공약을 내건 하토야마의 시도를 "하토야마의 난(亂)"이라 하고 이것이 좌충우돌을 거쳐 어떻게 하토야마의 '항복'으로 이어지는지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하토야마가 미국의 일극 지배에서 다극화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동아시아 공동체'(215쪽)를 제시하면서, "혁명의 기치가 되는 전투적인 개념"으로 "생명을 지킨다"는 뜻을 담아 자신의 정치적 열쇳말로 우애(Fraternire)를 제시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생명 중시의 정치적 신념이 "생명이야말로 보물"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오키나와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오키나와 기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이 같은 생명 중시의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워싱턴은 하토야마의 평화 중시가 미일 동맹의 경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하토야마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이 같은 불편함은 부시 정권 하에서 아시아 태평양 안보 문제 차관보를 지내면서 2006년과 2010년 대일 협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리처드 롤리스가 하토야마 정권에 대해 비판한 아래의 내용에 거칠게 드러나 있다.

"하또야마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루고 있는 이슈가 얼마나 중대한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일본의 안보를 위한 더 큰 그림에서 보면, 그들은 다이너마이트로 가득 찬 방에 앉아서 성냥갑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스스로 무덤을 판 뒤에야, 진정한 재해가 일본이라는 집을 덮칠 것이다. 일단 집을 불태우기로 결정해버린다면, '소방관' 미국은 더 이상 주변에 없을 것이다. (…)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면, 스스로 그것을 중지하거나 누군가 삽을 빼앗아야만 한다. (…) 일단 힘과 선의가 일본을 떠나버리면 일본이 이 문제를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 민주당의 지도자로서 하토야마 씨는 그와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설정한 것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 일본이라는 범위를 넘어선 결과들, 국가로서 그리고 안보의 파트너로서 일본이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자기소외의 결과들 말이다." (230쪽)

민주당 정권에 대한 모멸과 협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이 글은 <아사히신문> 2010년 3월 4일 자에 실렸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 문제에 대해 하토야마가 갈지자 행보를 거듭하던 시점이다. 이런 중차대한 시점에 <아사히신문>이 보수파 리처드 롤리스의 인터뷰를 진행해 이를 게재했다는 것은, '야마토'의 주류 언론이 오키나와 문제와 민주당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민주당 고위 당직자도 또 일본 정부 내의 고위 관료도 하토야마의 '최소한 현외로' 공약이 미일 동맹의 손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해 물밑에서 '하토야마 죽이기'를 시도했다. 예를 들면,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은 "오키나와 현민의 의지를 존중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미국 대사관에 연락했고,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당시 외무사무차관은 "미국이 총리대신에게 안보의 기본을 가르쳐 주면 도움이 될 것"(224쪽)이라고 미국에 조언했을 정도라니, 하토야마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같은 미국과 민주당 및 일본 정부 내의 방해 공작을 지은이는 위키리크스 정보 등을 활용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위키리크스 정보를 일본의 언론이 거의 무시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위키리크스 전문을 실은 <아사히신문>조차 관료들의 이름을 누락하는 방법을 통해 진실의 인화력을 잠재우려 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일 동맹의 손상을 우려하는 미국과 이에 동조하는 친미 동맹파 민주당 고위 정치인과 관료들의 암묵적인 방해 등으로 '하토야마의 난'이 '하토야마의 항복'으로 귀결되었다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이로써 오키나와의 우군은 적어도 '야마토'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하토야마 이후에 등장한 간 나오토를 비롯한 '야마토' 정권은 마치 하토아먀 시대에 나타났던 미일 동맹의 일시적인 '공백 기간'(335쪽)을 서둘러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헤노코 기지 건설안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었다.

▲ 미국은 오키나와를 전초기지로 삼고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왔다. 사진은 미군이 2006년 태평양에서 대규모 훈련을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스
▲ 미국은 오키나와를 전초기지로 삼고 주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해왔다. 사진은 미군이 2006년 태평양에서 대규모 훈련을 하는 모습. ⓒ위키미디어커먼스

국민국가 뛰어넘는 지향성 내포한 오키나와의 저항

이 책의 열쇳말은 '저항하는 섬, 오키나와'라는 제목대로 오키나와의 주체적 '저항(resistant)'이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저항'이 구체적으로 오키나와 내부에서 어떻게 내재적으로 구성되어 어떤 논리와 모순을 가지고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계통적인 고민을 이 책에서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은이는 1996년 전환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헤노코 문제의 근(近)기원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저항하는 주체로서 오키나와인에게도 저항의 방향과 사상이라는 면에서 1996년을 계기로 어떤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저항의 전환을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포착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면, 이 책 곳곳에서 오키나와의 저항을 '비폭력'이라는 개념으로 형용하고 있다. 예컨대 나폴레옹 보나파르뜨의 전언을 인용하면서 "무기도 없고 전쟁도 모르는 왕국"이라고 류큐 왕국을 묘사하는 것은 오키나와의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보면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면서 이에 대한 저항의 끈을 놓지 않았던 오키나와의 근현대에서 발견되는 "견고하며 꺾이지 않는 비폭력적 저항"(439쪽)을 오키나와 저항의 특징이라 한다면, 이 같은 특징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책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키나와의 저항 앞에 붙는 비폭력이라는 형용은 그 자체가 역사적인 사실이라도, 왜 저항이 비폭력으로 일관되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자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류큐왕국 시대의 '비무장'이 사실은 류큐왕국의 군사 반란을 우려한 사츠마 번의 '무기 금지' 정책의 결과라는 주장도 한편에 있고, 또 일본의 비무장 평화주의가 주일 미군의 '강무장'에 의해 지탱되는 역설적인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는 주장도 있는 것처럼, 비폭력주의라는 것은 주어진 정치·경제적 조건에 대한 전략적 선택의 결과가 문화적 전통과 결합되어 제도로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996년을 계기로 해서 전환되었다는 저항이 어떤 이유에서 오키나와의 비무장 전통과 결합하여 비폭력주의로 일관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천착이 필요하다. 이 점에 대한 이 책의 설명과 분석은 다소 미흡하다. 비폭력주의, 생명 중시와 관련해서는 오키나와 운동에서 1960년대 이후부터 왜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없어졌는지에 주목해 평화적 감수성을 강조한 정유진의 연구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정유진, '오키나와에는 왜 '양키 고 홈' 구호가 없을까', <당대비평> 14호, 삼인, 2001).

물론 이 책에서 1996년 이후의 저항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면, 후텐마 기지 문제를 둘러싸고는 "'혁신과 보수'라는 대립이 더 이상 존재"(264쪽)하지 않게 되었고, 혹은 "국가기구를 가지지 못한" 오키나와 사람들이 "합법적 투쟁의 제도 공간"을 이용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군사적 공모를 견제하면서 탁상공론이 아닌 다원적이고 구체적이고 끈질기게 투쟁"해왔다는 점을 지은이는 저항의 특징으로 들고 있다. 즉 지은이는 "견고하며 꺾이지 않는 비폭력적 저항"(439쪽)을 오키나와 저항의 핵심으로 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지만, 이런 오키나와 저항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에 대한 설명과 분석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예를 들면 나카이마 지사를 비롯한 오키나와의 보수 정치가들이 왜 헤노코 신기지 건설 문제에서 혁신 진영과 거의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되었는지, 혹은 군사기지 건설로 막대한 부를 얻고 있던 오키나와의 건설업자들이 왜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찬성하기 위한 적극적인 여론몰이에 실패하게 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분석을 거의 찾아보기 힘든 점은 매우 아쉽다. 역시 1990년대 이후, 오키나와 사회 변동이 반(反)기지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저항의 섬, 오키나와'라는 제목과는 달리, 저항에 대한 내재적 분석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기지를 둘러싼 미국·일본이라는 국가기구와 이에 대항하는 오키나와의 갈등·대립의 상호 규정 과정을 실증적으로 재구성·분석했다는 의미에서 '헤노코 기지의 지배 정치와 저항'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듯하다.

그렇다면 '국가기구'를 가지지 못한 오키나와의 반기지 평화 운동은 어디를 지향하는 것일까?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당연히 독립의 흐름도 있고 자치의 흐름도 있다. 전자가 미국의 통치와 일본의 주권 범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흐름이라면, 후자는 일본의 주권 범위 내에서 오키나와의 자기 결정권을 확대해 일본을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전자이든 후자이든, 지은이가 쑨꺼의 말을 인용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오키나와의 저항은 국민국가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어떤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는 평자가 과거에 쓴 책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이른바 독립론도 복귀론도 아닌, 국민국가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상, 즉 '반(反)복귀론'과 상통한다(권혁태,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교양인, 2011년 참조).

오키나와에 관한 책이 조금씩 출판되고 또 한반도와 맺은 깊은 관련성과 유사성 때문에 오키나와 평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한국에서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오키나와 현대사에 대한 포괄적인 개괄서이면서 입문서인 <오키나와 현대사>(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정영신 외 옮김, 논형, 2008년)를 곁들여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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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집단 심리를 읽는 네 가지 코드
불안, 분열, 트라우마, 그리고 자기 기만



불안, 분열, 자기 기만에 빠진 일본의 내면 읽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가해자의 심리를 해독한다!

일본 우익은 왜 불안에 떠는가? 일본의 내면은 왜 분열되어 있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평화주의는 왜 자기 기만적인가? 일본 좌파를 과격화와 자멸로 이끈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작은 나라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큰 나라, 평화헌법으로 무장한 호전적인 군사대국, 피해자 심리에 빠진 기묘한 가해자 국가……. 전후 일본 사회를 연구해 온 일본 현대사 학자가 일본이라는 나라의 집단 심리를 ‘분열’, ‘트라우마’, ‘자기 기만’, ‘불안’이라는 네 가지 사회심리적 코드로 해독한다.
극우 지식인들에게 환호한 일본 좌익 학생 운동의 자기 분열적 행보,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돌출한 흉기’로 인식하는 우익 히스테리,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 사건에 묻어버린 조선 식민 지배와 난징 대학살의 역사, 전 세계 평화 운동의 중심을 자처하면서 침략과 전쟁을 지워버리는 자기 기만…….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일본 사회의 표면을 걷어내고 내면의 심리를 들여다본다. 이 책은 일본의 집단 무의식이 표출된 사건들, 현상들, 일화들을 소재로 삼아 그려낸 일본 정신의 단면도이며 일본 사회의 해부학이다. 

간 나오토 총리 사과 담화에 담긴 기만성
2010년 8월 10일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한국인들에게 과거 식민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해방 65주년이 되는 8월 15일과 한일 강제 병합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8월 22일을 앞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강제 병합의 불법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같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야노 히데키 ‘강제 병합 100년 공동행동 일본실행위원회’ 사무국장은 8월 12일 한국실행위원회에 보내온 의견서에서 “(간 총리의 담화는) 식민 지배에 의해 한국인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표기하는 데 머물러 그 식민 지배의 주체가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며 “(식민 지배의) 주체를 빠뜨린 이런 표기는 일본의 책임을 애매하게 하는 것으로 지난 1995년의 무라야마 총리 담화보다 후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사과를 하면서도 식민 지배의 주체로서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의 태도는 전쟁의 가해자이면서도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의 피해자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분열적이고 기만적인 심리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1945년 패전 후 평화․민주주의 체제에서 형성된 일본의 집단 멘털리티를 해부해 일본에서 급속하게 진행 중인 우경화 현상과 비틀린 역사 의식의 원인을 찾는다.


일본 우경화의 뿌리는 ‘불안’이다
몇 년 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는 일본의 우파 단체가 만든 역사 교과서가 한반도를 ‘일본을 향해 돌출한 흉기’라 표현한 적이 있다. 검정 과정에서 ‘흉기’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자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팔뚝’으로 표현이 바뀌었다. 과거에 “일본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는 칼날”이라는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팔뚝’은 한결 순화된 표현이다. 하지만 ‘칼날’이 ‘흉기’가 되고 그것이 다시 ‘팔뚝’으로 순화되었다고 해서 이웃 나라를 표현하는 용어로 그리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에 큰 차이는 없다. ……
그렇다면 반대의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게 무엇이었는가? 전근대 시대는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19세기 이후 일본은 한반도에 ‘흉기’였다. 가능성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서 ‘흉기’였다. 더구나 이는 일본의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괴롭혔던 ‘칼날’을 거두어들인 것은 스스로의 주체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적으로 일본에 ‘흉기’가 된 적이 없는 한반도를, 주체적으로 한반도에 ‘흉기’가 되었던 일본이 21세기에 와서도 한반도를 ‘흉기’라 표현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_‘머리말’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도 자각도 없이 오히려 한반도를 ‘흉기’라 표현하는 일본 우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나타난 일본의 우경화 흐름이 운동이나 사상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제도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왜곡 교과서의 검정 통과, 독도 영유권 주장에 더하여 자위대의 국외 활동에 대한 법적 족쇄도 대폭 완화되었다. 이제 군사 무장을 금지하는 ‘평화헌법’만 개정하면 명실상부한 군사 대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군국주의의 부활과 국가주의의 강화를 주장하며 세력을 키워 가는 일본의 우익 세력. 저자는 이러한 급속한 우경화 뒤에 감춰진 일본의 ‘불안’ 심리를 지적한다. 

일본은 왜 불안한가? 패전 후 1946년에 공포된 ‘평화헌법’으로 일본은 전쟁과 군대가 없는 ‘현실적’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미국과의 군사 동맹을 통하여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또한 한국을 포함한 주변 아시아 국가들의 친미 반공 군사 독재정권도 일본 전후 평화 체제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주변 아시아 국가들이 ‘민주화’되면서 군사․외교적으로 무방비 상태인 ‘안보 소국’ 일본은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거나 한반도 분쟁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더욱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핵실험 등은 일본이 침략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불을 질렀다. 일본 우익은 그 불안을 국민적 불안으로 확산시키면서 군사력 증강과 안보 대국화에 대한 일본 사회 전반의 동의를 끌어냄으로써 우경화를 획책하고 있다.

일본 평화주의의 기만적 실체를 읽는다!

2009년 9월 총선에서 54년간 장기 집권해 온 자민당이 참패하고 민주당이 정권을 넘겨받았다. 우경화 행보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바람이 일부 수렴된 결과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렇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우경화 이전, 즉 패전 이후 일본 전후란 어떤 공간인가? 과연 돌아가기를 꿈꿀 만큼 평화로운 공간인가? 저자는 가해와 피해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상태에서 모든 역사적 과실을 덮어놓은 채 전쟁 없는 평화만을 말하는 일본의 자기 기만적 모습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일본의 전후 평화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규범적 가치, 명분으로서 평화를 뛰어넘어 이를 ‘평화주의’로 현실화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쟁과 무장을 포기하는 헌법 9조와 핵무기 제조와 반입을 금지하는 비핵 3원칙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후 평화주의가 비무장 평화로 일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평화헌법과 자위대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 평화주의가 지닌 한계를 제대로 보려면 과거의 경험, 즉 식민 지배, 전쟁, 피폭 체험과 일본의 전후 평화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1953년에 일본 국회는 도쿄 전범재판의 판결을 무효화하면서 전쟁 범죄자 사면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일본이 자랑하는 전후 민주주의가 미국이라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껍데기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었다. 또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체험을 내세워 전쟁 침략자로서의 기억을 지우고 세계 평화 운동의 중심에 서는가 하면, 국적에 따라 피폭 보상 제도에 차별을 두는 데서 전후 일본 평화주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도쿄 북쪽에 자리한 ‘군마 현 원폭 피재자 모임’의 스도 요시히코는 2005년에 현 내에서 열린 전몰자 위령식에서 나가사키 피폭 체험을 들려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야스쿠니 문제나 헌법 문제는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자신이 왜 피폭을 당했고, 피폭 후에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며, 이런 고통이 세계 각지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이니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문제의 배제란 또 다른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 피폭 체험은 1945년 8월 9일에 정지되어 있다. 그 이전도 그 이후도 없다. 오직 순간의 사실만이 피폭 체험이다. 피폭을 가져다준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고 그 전쟁을 결행한 최고 권력자인 천황이 그 후 피폭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그리고 피폭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전쟁을 찬양하는 야스쿠니 신사가 피폭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과 같은 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다. …… 피폭 경험은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 3장 ‘자기 기만’ 302~304쪽. 

일본이 말하는 ‘평화’의 허구성은 ‘책임’을 부정하는 일본의 비틀린 과거 인식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56년에 일본의 경제기획청은 ‘전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전후란 ‘어둠의 시대’였던 전시(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5년 패전까지)를 지나 전쟁의 폐허로부터 회복하는 기간이나 과정을 뜻한다. 중요한 점은 일본이 생각하는 어둠의 시대에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과 패권주의 정책 아래 이루어졌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 침략 등은 빠져 있다는 것이다. 타이완과 조선의 식민지화, 괴뢰국가 ‘만주국’의 건설은 어둠의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등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된 ‘종군 위안부’ 문제 등은 1956년에 일본이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 ‘전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다른 한편에서는 미 군정기에 매듭을 지었다고 생각한 전범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일본의 전후나 그 이후의 ‘번영’이 실제로는 “끝나지 않은 전후”를 “끝났다”고 결론 내림으로써 유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문제 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 나라의 ‘쇳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모든 것이 이 ‘쇳덩어리’를 잠깐 숨겨주었던 도금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 1945년 패전은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헌법을 가져다주었지만, 이 나라의 ‘쇳덩어리’에 본질적 변화는 없었던 것이리라. 지금 다시 전쟁과 차별의 시대가 오고 있다.”
(2004년에 창간된 잡지) <젠야(前夜)>의 언급은 2000년대 이후에 일본 사회에서 급격하게 진행된 우경화를 경고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경화 이전, 즉 평화와 민주주의의 전후 혹은 포스트 전후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젠야>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의 목적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도금’에 가려져 있던 일본의 전후가 과연 어떤 사회였는가를 밝혀내는 데 있다. ― 들어가는 글․2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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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개

권혁태
1959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일본 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야마구치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학 일어일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릿쿄대학 초빙 연구원, 규슈대학 대학원 초빙 교수를 지냈고,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이다.
만화, 영화 등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으며, 일본 진보 운동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재일조선인과 한국 사회>, <교과서 문제를 통해 본 일본 사회의 내면 읽기>, <일본의 헌법 개정과 한일 관계의 비대칭성> 등의 논문을 썼으며 《아시아의 시민사회》, 《반일과 동아시아》, 《한․중․일 3국의 8․15 기억》 을 함께 저술했고 《히로히토와 맥아더》를 우리말로 옮겼다. (email :kwonht@skhu.ac.kr)

차 례

■ 머리말
■ 들어가는 글 
일본의 ‘전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

1장 분열
전후 평화주의에 대한 반란
일본 좌파는 왜 몰락했는가?
‘혁명’을 찾아 나선 어느 적군파의 삶
죽음 위에 세워진 나리타 공항
나리타 반대 운동의 40년 진화
참치가 일으킨 반핵 평화 운동
아시아를 보는 자기 분열적 시선

2장 트라우마
히로시마 체험, ‘가해’와 ‘피해’ 사이
파괴자의 트라우마
원폭은 누구의 잘못인가?
평화 없는 평화 도시 히로시마
히노마루와 기미가요
‘가미카제’ 나라의 병역 기피
비핵 3원칙이 비핵 2원칙으로?

3장 자기 기만
‘니혼’인가 ‘닛폰’인가?
‘작은 나라’ 콤플렉스
일본군과 정신주의
후지산의 불편한 진실
일본 음식과 내셔널리즘
<일본 침몰>로 본 영토 관념
부부 별성(別姓)을 허하라!
‘평화’와 ‘헤이와’

4장 불안
번지는 ‘불안’ 증후군
‘위험한 북한’과 인종주의
일본에는 인권위원회가 없다
‘잃어버린 세대’
이라크에서 살해된 일본인 청년
재일조선인이 던지는 질문
오키나와, 일본 이탈의 꿈
아이누, 선주 민족을 위한 투쟁 

■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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