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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일 금요일

장거정 평전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동륜

장거정 평전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동륜 지음 | 이화승 옮김 | 에게 | 2010년 04월 25일 출간

책소개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이 되고 있는 개혁가, 장거정
『장거정 평전』은 파격적인 개혁으로 16세기 중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장거정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이다. 정치의 핵심은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여겼던 그는 신속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쓰러져가던 명나라 왕조의 생명을 70여 년이나 연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개혁으로 꼽히는 인사(고성법)와 조세제도(일조편법)의 내용을 살펴본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현 중국의 상황에서 본받아야 할 그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소개

저자 : 주동륜

저자 주동륜(朱東潤)은 1896에 태어나 198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기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서예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1913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South West College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무한대학, 중앙대학, 제로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복단대학 중문과 교수로 부임해 초기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활동했다. 중국의 고대문학과 역사를 연구해 중국 최초로 《중국문학 비평사 대강》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저술했다. 꾸준히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연구 하다가 전기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육우전》, 《두보서론》, 《매요신전》, 《장거정 대전》 등을 집필했고, 자전적 작품인 《주동륜 자전》을 통해 80여 년에 걸친 인생 여정과 20세기 중국의 변화를 잘 묘사해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전기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가 속한 분야

역자 이화승(李和承)은 대만 국립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연수한 뒤 1997년 대만 국립사범대학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사회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 경제, 특히 상업과 상인문화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의 고리대금업》을 썼으며 《중국의 상업혁명》,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 매판》, 《성세위언》,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제국의 상점》 등을 옮겼고, 다수의 논문이 있다

목차

제1장 형주에서 수재가 태어나다
제2장 정치에 발을 들여놓다
제3장 3년의 휴가
제4장 다시 정치의 소용돌이에 뛰어들다
제5장 끊이지 않는 정쟁 1
제6장 끊이지 않는 정쟁 2
제7장 대정변이 일어나다
제8장 개혁을 단행하다 1
제9장 개혁을 단행하다 2
제10장 첫 타격을 입다
제11장 명예와 야망의 기로에 서다
제12장 마침내 개혁을 완성하다
제13장 마지막 힘을 다하다
제14장 최후―개혁의 타살

해제 ― 중국사 속의 개혁과 장거정|이화승

부록
명나라 황제 계보(1356~1644)
명대 중앙관직 조직도
내각 구성 변동표(1567~1582)
장씨 가계도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정치다.”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이 되고 있는 개혁가 , 장거정


장거정,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
20세기 세계사의 근본 틀을 바꾸는 최고의 정책이라 평가받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도입하는 사상 초유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중국은 장거정張居正(1525~1582)이라는 16세기 정치인을 개혁의 온고지신으로 삼고 있다. 장거정의 개혁을 다룬 책들이 성황리에 출간되고 TV에서도 그를 다룬 사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방만함과 무력함으로 쓰러져가던 명나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왕조의 생명을 70여 년이나 연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거정, 과연 그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혁가들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이를 막지 못한 최고 통치권자의 변심으로 중도에 좌초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특히 중국 유가정치 내에서 개혁은 황제는 물론 기득권층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 그런데 장거정만은 정통 유학 관료로서 법치를 내걸고 개혁을 실시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명 중엽은 국가 경제에서부터 민생, 국방, 관료제도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곪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거정은 오랫동안 백성을 울려왔던 이러한 폐단과 부조리한 관료 제도 등을 과감하게 개혁해나갔다. 효율, 부패, 균형의 문제로 늘 고심했으나 시도된 개혁은 반드시 결과가 있었다. 백성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았던 열정의 개혁가 장거정, 오늘날 중국 정부가 그를 개혁의 온고지신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과감한 리더십보다는 민심을 읽을 줄 알았던, 그리하여 백성을 위한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성을 울리는 폐정弊政을 바로잡다
명대에는 재정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1528년부터 40여 년간 국가 재정은 늘 적자였다. 이러한 적자는 종실에 지급되는 과도한 봉록과 역참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국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백성에게 또 다른 과세를 부가시켰다. 또한 당시 남쪽은 왜구가 창궐했고, 북쪽은 알탄 칸의 침입으로 국경의 사정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 장거정은 분노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온갖 재화로 뇌물을 쓰고, 백성은 신음하고 있다. 한, 당 말기와 무엇이 다른가? 조상의 공덕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으나 사직의 존망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후 정권의 핵심에 자리잡은 장거정은 이러한 폐정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정치의 핵심은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로 파면되거나 사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고관이나 지방의 토호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지방관들은 이를 알면서도 그들의 권세에 눌려 세금을 걷지 못했고 이들이 내지 않은 세금은 백성에게 전가되었다. 장거정은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 않고 이 세금만 걷더라도 국가 재정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음을 꿰뚫고 있었고, 이를 개혁한 것이다.

신속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 ― 인사와 조세 제도 개혁
장거정은 1573년부터 10년 동안 내각 수보로서 어린 황제 신종과 황태후 이씨의 절대적 신임과 협조 아래,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행사하며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전방위적으로 벼락치듯 신속했다. 장거정이 단행한 가장 대표적인 개혁은 인사제도의 개혁이다. 늘 “법이 행해지지 않고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먼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지 법을 논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는 고성법考成法이라는 제도를 마련해 방만했던 관료들의 의식을 개혁해나갔다. 관료의 1년 업무 결과를 평가해서 인사에 반영하는 고성법은 문하생과 당파에 좌우되던 당시의 인사 관행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관리들은 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파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했다. 더욱이 정책의 발의부터 추진 과정, 시행, 결과 등이 추적되는 고성법의 도입으로, 인재를 효율적으로 배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가 단행한 조세개혁(일조편법一條編法)은 중국 조세제도 중 가장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제도로 곡물 등 실물로 걷던 세금과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요역이 모두 은으로 통일되었다. 국가는 세금으로 걷은 엄청난 양의 실물 운반, 저장, 화폐 전환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복잡한 요역 체계를 화폐로 대신함으로써 업무가 간소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영에서도 효율을 기하게 되었다. 중국은 은의 생산이 충분하지 않아 밀 무역으로 일본과 남미의 은을 수입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쇄국의 문을 열고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만나는 역사적 단초가 된 것이다.

실패조차 담대히 인정할 줄 알았던 개혁가, 장거정
명조 때의 수리水利는 정치, 군사적인 이유로 황하에 집중되었다. 수도 북경이 북쪽에 있어 전체 국방 문제가 북쪽에 힘이 쏠렸고 이 때문에 조운漕運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매년 남쪽에서 운반되는 조운은 국가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하가 수시로 범람해 조운에 어려움이 발생했고 황하 일대는 공황 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장거정은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의 수리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장거정 자신이 물길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 일대를 지나가본 적도 없어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의지와 정치적 역량이 있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가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담담히 실패를 인정하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는 철저하게 전문가를 믿고 지원했다. 그리하여 황하 치수는 반계순에게, 북방 이민족 문제는 척계광에게 맡겼다. 이들은 장거정의 전폭적 신임과 지지를 받으며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책을 실시해 광대한 지역의 안정에 기여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의 말로
“신들은 언제나 성현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관리들입니다.” 어린 신종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신종에게 늘 성현의 말씀을 가르쳤고 특히 정치의 본질에 대해 매번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권력에 연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능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서툴렀다”, “의심이 많고 도량이 적었으며 언관을 억압하고 아첨배를 맹신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0년을 하루 같이 전력을 다해 정치 개혁에 매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자가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집요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권력을 잡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버리고 스승도 내치며 환관과 결탁하면서, 오직 권력만 유지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 초상을 치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도 괘념치 않고 오직 일에만 매달렸다. 그에게서 온순하고 관대한 유학자의 모습보다 엄격하고 권술과 책략에 능하며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냉철하고 노련하게 언관과 여론을 주도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장거정의 모습에서 신종은 존경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고 장거정과 자신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지금까지 자신을 제지해왔던 장거정이 죽자, 신종은 그의 모든 개혁 정책을 무산시키고 부관참시와 멸족을 명했다. 또한 자신의 욕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상업세, 광업세 등의 세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명조의 멸망이 신종 때 뿌려진 씨앗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개혁, 그 어려운 도전
중국사를 읽다 보면 수많은 인물을 접하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면 시대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서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역사에서 개혁은 마치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한시도 계속되지 않으면 바로 넘어져버리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가 계속되는 한 크든 작든 개혁이 없는 시대는 없었고 수많은 개혁가들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어 훗날 중국 최초 통일국가의 기초를 세운 상앙商?, 서한 말의 혼란 정국을 《주례周禮》가 지배하던 시대로 되돌리려 했던 왕망王莽, 송대 화려한 문민정치 실현으로 이상과 나약한 대외관계라는 현실과의 차이를 메우려 했던 왕안석王安石, 명말 어린 황제를 보필해 왕조의 새로운 중흥을 시도했던 장거정, 청말 쓰러져가는 늙은 제국을 근대식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던 강유위康有爲 등이 있었지만, 이중 장거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혁에 실패했다.
개혁은 일시적인 욕심이나 무리한 추진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철학과 오랜 준비, 높은 도덕적 처신, 철저한 주변 관리가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도전이다. 더욱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장거정의 삶에 투영된 개혁을 거울로 삼아, 개혁의 방향을 새롭게 세워야 할 때다. 오늘도 개혁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능력만 있으면 인정 받는 메리토크라시

능력만 있으면 인정 받는 메리토크라시
http://blog.daum.net/kiehl1851/792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그의 저서 'Rise of the Meritocracy(메리토크라시의 반란)'에서 능력 위주 사회(메리토크라시, meritocrac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메리토크라시를 개개인의 IQ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라고 묘사했다. 이른바 지능이 뛰어난 엘리트(elite)들이 높은 지위에서 사회를 통치하게 되지만, 점차 권위적이고 오만한 그들은 대중의 반감을 사게 되어 혁명의 희생양이 된다고 이 책에서 적고 있다. 비록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이 책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능력 위주의 메리토크라시를 선호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이다.

프랑스에서 능력의 기준은 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일반대학 졸업, 특수대학인 그랑제콜 졸업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몰리는 그랑제콜 출신들은 출세가 보장되는데, 프랑스의 유명 정치인, 정부 고위 관리, 주요 기업체 임원들은 대개가 그랑제콜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랑제콜은 부유층이나 지식층에서만 독식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기회를 준다. 교육 자체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모두 무료이며,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인 셈이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 다음, 시험과 콩쿠르 등의 아주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만이 그랑제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학벌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프랑스 국민은 불평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별, 인종, 나이, 지역을 떠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런 정서는 나폴레옹 시절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이전 관리들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해 정부 관리가 될 만한 인물들을 물색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지위나 출신 배경을 막론하지 않고, 능력만 되면 이들을 선발했다. 군대 장교, 시민 혁명을 주도한 시민 운동가, 귀족 등이 골고루 능력에 따라 나폴레옹 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에 능력 위주 사회가 처음 정착한 배경이 되었다.

[예문] The prime minister claims he wants to create a classless meritocracy in Britain.
         총리는 영국에서 계급 없는 실력 사회를 창출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ㆍ메리토크라시, 능력 위주 사회 - meritocracy
ㆍ사회적 지위 - social status
ㆍ부 - wealth
ㆍ경쟁 - compe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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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메리토크라시

[중앙일보] 입력 2005.07.08 20:36 / 수정 2006.01.27 16:59
프랑스를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 위주 사회)라고 규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능력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 체제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능력의 잣대는 학력이다.

고졸이냐, 일반 대학 졸업자냐, 특수 대학인 그랑제콜 출신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수재들이 몰리는 그랑제콜 출신에겐 출세가 보장된다. 유명 정치인과 정부 고위 관료, 주요 기업체 임원은 대개 그랑제콜에서 엘리트 과정을 밟았다.

프랑스식 메리토크라시는 무료.의무.종교 중립적 교육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는 기회의 평등에서 출발한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빼앗겼다는 말은 프랑스에선 통하지 않는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비가 거의 없다.

교육 기회는 공평하지만 대학의 인재는 엄정한 선발 절차를 거쳐 걸러낸다. 에그자맹(examen)과 콩쿠르(concours)가 그 방법이다.

에그자맹은 일정 점수 이상만 얻으면 되는 자격시험이다. 일반 대학에 입학자격을 주는 바칼로레아가 그 예다. 응시자 중 절반 이상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일반 대학에 간다.

반면 콩쿠르는 경쟁을 벌여 소수 정원만을 선발하는 논술형 주관식 시험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콩쿠르에 응시해야 한다.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처럼 재수.삼수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벌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프랑스 국민은 불평하지 않는다. 성별.인종.나이.지역을 떠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회가 열려있는데도 공부를 안한 건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본고사 부활 논란이 한창이다. 한 사회조직이 필요한 사람을 골라내는 제도가 시험이다. 시험에 공정한 경쟁과 평가 장치가 있다면 그 권위와 효용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도 프랑스 못지않게 학력을 중시한다. 하지만 메리토크라시라고 말하기엔 이르다. 경쟁을 외면하는 무차별적 평등 지상주의에 자꾸 매몰된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으로 인재를 발굴할 수 없고, 경쟁이 없으면 상대의 우월성을 인정하는데도 인색해진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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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6 19:17
기
학력·학벌에 집약된 ‘실력주의’가
온 사회에 여과없이 받아들여지는
지독한 메리토크라시 사회, 한국
민주통합당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씨를 비롯한 5명 안팎의 노동계 인사를 비례대표 당선 가능권에 올렸다. 친노동 경제민주화의 의지를 담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노동자의 커진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일까?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은 빈민운동가 출신을 비례대표 1번으로 올린 적이 있다. 그것이 새누리당의 빈민친화성을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민주당은 이번에 36명의 법조인을 공천했는데 공천자 215명의 17%에 달한다. 새누리당의 29명을 합하면 두 당이 공천한 법조인이 모두 당선될 경우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034%에 불과한 법조인이 국회의 5분의 1을 차지하여 무려 588배나 과잉대표된다고 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어떤가? 거대 여야의 비례대표나 지역구 후보로 공천된 노동운동 출신을 다 합해도 10명이 안 되고, 그들의 이력을 보면 실제로는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다수다. 노동자가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정도 된다고 보면 이들은 양당에서 10분의 1 이하로 과소대표되는 셈이다. 18대 국회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결국 학벌이 없는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야당으로서는 지역에 노동자를 공천하고 싶어도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지역정치의 경륜과 사회운동의 이력을 가진 노동자 후보를 거의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더욱이 현장 노동자들 자신이 동료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화 25년은 곧 민주노조운동 25년이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10석이나 얻은 적이 있고, 통합진보당·진보신당이 지금 활동하고 있지만, 그 대표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 나온 엘리트들이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가 진보정당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렇게 보면 한국 정치는 ‘노동자 대표’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학벌 엘리트들의 합작에 의한 지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나 진보나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노동자들을 권력권에서 완전히 배제해 놓고, 그들이 스스로 힘을 기를 수 있는 조건도 만들지 않고 진보니 개혁이니 외치고 있는 꼴이다. 사실 노동자들 자신도 사법부의 극히 편향적인 판결이나 퇴직 후 한 해 동안 수십억원을 번 변호사들의 수입에 시비를 걸지 않은 채 자기 자식도 판검사·변호사 만들고 싶어 한다. 똑똑한 사람들이고 그 자리에 갈 능력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도 좋고 그 정도의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면 한국은 정말 학력·학벌에 집약된 ‘실력주의’가 온 사회에 여과없이 받아들여지는 지독한 메리토크라시 사회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 아니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이후 하나도 안 변했다. 재벌의 지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메리토크라시다. 그 실력·학력·학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평생 쉼 없이 일해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사는가? 메리토크라시는 온 사회를 경쟁과 스트레스로 몰아넣는 우리 사회의 중병이다. 학벌 좋은 사람이 대표로 있는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사회가 아닌, 노동자들이 사교육에 목매달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의 과잉교육열과 학교폭력, 청소년 자살의 상당부분은 노동천시·실력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최근 진보신당이 탈학벌을 선포하면서 공천 후보자들의 학력을 일체 올리지 않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정부와 기업이 고졸자를 더 많이 채용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 그게 바로 이 시대 진보의 길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5270.html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30 | HIT : 2,002 | VOTE : 351 |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1.들어가며.
 
1990년대 초부터 서방에서 핫 이슈가 된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중국에서도 1990년 초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다가 90년대 중반부터 학계의 핫 이슈가 되고있다.
1990년대 초 세계화에 관한 논의가 서방 학계의 핫 이슈로 등장하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에 대한 서방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세계화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중국내 학자들에게 제기하였다.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논의가 중국에 등장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1993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編譯局)이 초청한 미국의 듀크대학의 드리크 교수가 서방의 세계화에 대한 이론을 소개한 강연이었다. 이 강연에서 드리크 교수는 세계는 이미 세계경제시대로 접어들었고,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반드시 경제의 세계화에 기반하여 분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전제 하에서 그는 세계화의 특징으로 자본과 생산과정의 세계화, 생산의 무국적화, 다국적 기업이 일국 시장을 대체하여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 세계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보편적인 생산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연설 내용은 얼마 후 {戰略與管理} 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중국 내 학자들의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1994년 원래 중국의 사회과학원 부원장이었던 리선즈(李愼之)교수가 {東方}과 {太平洋學報} 잡지에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중국 내에서 가장 일찍 세계화에 관한 연구를 주창한 학자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국 내 학자들로 하여금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켜 세계화에 대한 연구가 학계의 핫 이슈가 되도록 한 사건은 1997년에 폭발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도 중국은 어렵게 위기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경제의 세계화로 인한 국내 금융부문의 취약성은 중국의 지도자들과 학자들에게 높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리하여 1998년 3월 9일 장쩌민 국가 주석은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홍콩대표단 토론회에서 "경제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세계경제발전의 객관적인 추세로 그 어느 나라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 참여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같은 세계화의 추세를 변증법적으로 대처하여 세계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이익과 문제점을 동시에 보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에 처해 있는 국가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최고지도자인 장쩌민의 지적으로 인해 세계화에 대한 연구는 중국 학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 당대연구소는 세계화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각종 논쟁을 종합하여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세계화에 대한 논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全球化的悖論], [全球化時代的馬克思主義], [全球化時代的社會主義], [全球化時代的資本主義], [全球化與中國] ,[全球化與世界], [全球化與后殖民批評])

그 후 1999년 말 중국의 WTO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쌍무적 협상이 완료된 이후 WTO가입을 위한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중국내의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 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인민일보는 바로 이같은 추세를 반영하여 2000년부터 세계 각 국의 학자와 관료 및 기업인을 초청하여 '세계화 포럼'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 포럼은 2001년 1월 15일에 두 번째로 개최되어 세계 10여 개 국에서 온 관료, 학자, 기업인들이 WTO 가입을 앞두고 있는 중국의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세계경제 속에서 중국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한 각종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중국 학계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다음 4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고 있다. 1. 세계화의 개념. 즉, 세계화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2. 세계화의 유형. 즉, 경제의 세계화 외에 민족국가의 정치, 문화 역시 경제의 세계화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문화의 세계화와 정치의 세계화라는 추세가 존재하는가? 3. 중국에서 세계화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즉, 중국은 세계화의 영향과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에 대응하여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인가? 4. 세계화는 중국의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래에서 이같은 쟁점을 둘러싼 논쟁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2. 세계화란 무엇인가?
 
중국 내 학자들이 내리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정의는 대략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화란 인류 생활의 통합과정이고, 지역 특히 민족국가의 주권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전 세계의 정체성(整體性)의 발전 추세, 혹은 인류 사회 생활이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뛰어 넘어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전방위적 교류 및 상호영향이라는 객관적인 역사적 추세로 간주하는 시각이다(蔡拓,"全球化與當代國際關系", 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더 나아가 혹자는 세계 통합의 실질적인 의의는 인류가 공간의 장애와, 제도와 문화의 장애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 범위에서 더욱 더 많은 공통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교통과 통신이 발전함에 따라 전 세계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국가와 지역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 되어 간다. 동시에 세계 각 국은 갈수록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다시 말하면 인류가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협조와 협력의 정신을 통하여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세계화를 자본주의화, 자본주의의 일종의 새로운 형식 혹은 발전단계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보편화이다. 오늘날 경제의 세계화는 실제로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로, 세계화의 문제 역시 현대 자본주의 특히 선진 자본주의의 문제"이다(紀玉祥,"全球化與當代資本主義的新變化",『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세계화의 과정이 비록 사회 생활의 모든 주요한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 동력의 메카니즘과 현실적인 기초를 볼 때, 세계화 진행 과정의 역사적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찾아야 하고, 시장경제의 비밀로부터 찾아야 한다."(楊朝仁, 韓志偉, "全球化,制度開放與民族復興",『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 따라서 이 시각에 근거하면 세계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식이고, 자본주의의 일종의 별칭이다. 그것은 또한 후기 자본주의, 발달된 자본주의, 비조직적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 세계적 자본주의 등등으로 칭해질 수 있다(王逢振, "全球化, 文化認同和民族主義", 王寧 等 主編,『全球化與后殖民批評』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셋째, 세계화를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세계화는 인류 가치의 동질화와 보편화로 표현되고, 서방국가 특히 미국의 가치가 인류의 공통가치로 대변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화 또한 바로 서방화 혹은 미국화"라고 주장한다.(『環球時報』(2000年9月22日) "全球化背景下的國家利益改變了 ?").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은 "중국어권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세계사조, 보편가치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세계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서방 혹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인류의 궁극적인 공통 가치로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한정되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張 武, "全球化:亞洲危機中的反思",『全球化與后殖民批評』,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상술한 3가지 시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세계화를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즉 이 시각은 상술한 3가지 관점은 단지 세계화의 본질적 속성 가운데 특정 특성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화 과정을 내재적으로 모순이 충만한 과정이고,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이 시각은 다음 3가지 점을 통하여 세계화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첫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이러한 모순은 합리적인 것이다. 즉, 세계화는 통합과 분열의 추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며, 단일화와 다양화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는 집중화이고 분산화이며, 국제화이고 본토화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하나의 모순의 통일체이고,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보완적인 과정이며, 하나의 상충되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 충돌이다. 둘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필연적이다. 세계화의 배경 하에서 개방의 정도가 가장 높은 국가 역시 자기 민족의 민족적 뿌리와 색채가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반대로 가장 보수적인(혹은 폐쇄적인) 민족도 세계화의 흔적이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셋째, 세계화의 모순은 인류 사회의 진보에 유리하며, 사회는 원래 다양성의 통일이고, 다원적인 것의 통합화 과정이든, 일원적인 것의 다원화 과정이든, 이들 모두는 인류 발전의 진리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 『戰略與管理』, 1999年3期).

 
3. 세계화의 다양한 유형
중국 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계화의 주요 지표를 경제의 세계화 및 정보 통신의 세계화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정치와 문화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동시에 거론하고 있다. 즉 "경제 생활이 통합되어 가면서 각 국의 정치와 문화 역시 그 속도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지만 통합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경제적 함의와 정치 문화적 함의를 동시에 가진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고 정치적 현상이며, 경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李林,"全球化背景下的中國立法發展",『學習與探索』1998年 第1期;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1998年). 이같은 시각에 대하여 중국 내의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를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한정시키고, 세계화를 경제의 통합 혹은 국제화로 한정시키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일반적인 세계화 개념, 특히 정치와 문화적 세계화 개념을 중국의 현재의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를 방치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반대하기도 한다. 중국 내의 세계화의 유형에 관한 논의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성장요소, 특히 자본과 기술 및 인력자원이 시장 법칙의 작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적 이동과 조합으로, 개별 국가경제와 지역경제가 갈수록 세계경제체제로 통합되어 인류의 사회경제발전의 상호 보완성, 관련성 및 의존성 역시 이로 인해서 증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각 국의 상품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을 통하여 판매되고, 인류에 의해서 공통으로 향유되는 것을 말한다"(穆光宗,"經濟全球化與中國人口",『當代世界與社會主義』1998年 第3期). 어떤 학자들은 이를 더욱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생산활동의 전 세계적 차원의 통합으로, 전통적인 국제적 분업이 세계적인 분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2. 세계의 다변적인 무역체계가 형성되고 국제무역이 통합되어 가고 있다. 3. 각 국의 금융이 갈수록 통합되고 금융의 국제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다. 4. 투자활동이 전 세계에 걸쳐서 진행되고, 세계적인 투자 규범이 형성되고 있다. 5. 다국적 기업의 역할이 강화되고, 갈수록 국제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국제시장에서의 전통적인 역할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6. 국제 무역 전문가와 고급 경영자들인 이른바 '세계인'이 갈수록 늘어나 각 국 정부와 회사가 이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다(薛榮久,"經濟全球化的影響與挑戰",『管理經濟』1998年 第4期).

또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같은 경제의 세계화 추세는 어느 국가도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중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피동적으로 경제의 세계화 흐름에 합류하기보다 능동적으로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경제의 세계화가 세계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를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세계화는 중국이 선진국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한다( 劉力, "經濟全球化:發展中國家后來居上的必由之路', 『國際經濟評論』1997年 第11-12期).

둘째, 정치의 세계화이다. 중국내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의 세계화를 각 국의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의 동질화 추세로 간주하고, 이것은 우선 자유와 평등을 핵심으로 한 민주적 가치의 일치와 자유, 평등, 인권이 충분히 실현되는 민주제도의 보편화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일부학자들은 정치의 세계화를 정치의 민주화로 간주하고, 민주화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의 세계화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같은 이해에 기초하여 이들은 "세계화의 유형적인 동력은 경제의 세계화이고, 세계화의 무형적인 동력은 가치의 통합이고, 민주정치와 세계적 가치의 통합"으로 주장한다(劉軍寧,"全球化與民主政治", 『當代世界與社會主義』 (季刊) 1998年 第3期).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세계화 시대의 민주정치를 '善治'로 그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선치'란 공공이익을 최대화하는 통치과정으로, 이는 정부와 시민들(혹은 공민)이 협력하여 공공 생활을 관리하고,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일종의 새로운 관계로써 양자간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간주한다. 이들은 '선치'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다음 6가지를 들고 있다. 1.정당성으로, 사회 질서와 권위가 최대한도로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과 인정을 통하여 유지되어야 한다. 2. 투명성, 정치정보의 공개성으로, 모든 주민이 자기의 권리와 관련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권리를 가진다. 3. 책임성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4. 법치로, 법률이 정치적 통제의 최고의 준칙이고, 정부의 관료와 시민들이 모두 법에 의거하여 행동해야 하며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5. 행위에 대한 보상과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兪可平,"從善政到善治", 『方法』1999年 第1期)

셋째, 법률의 세계화이다. 각 국이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할 국제 관례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면서, 법률의 세계화의 문제가 중국 법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 내 일부 학자들은 법률적인 관점에서 즉 세계 경제와 국가 이익의 충돌, 전통문화와 근대화와의 괴리 및 국가주권과 세계화와의 관계, 법률 다원주의, 국가의 입법자와 법률 연원으로서의 지위 등의 정치 법률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법률의 세계화를 법률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간주하고, 법률의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세계적 법률 의식을 확립하고, 세계의 문제해결을 입법의 중요한 근거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국가주권개념을 개혁하고, 국가의식을 완화하며, 입법의 비국가화를 주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문화의 세계화이다. 개혁개방 이후 서방의 유행가나 의상, 새로운 사상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문화의 세계화는 중국 내에서 사실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 내의 학자들이 말하는 문화의 세계화는 주요하게 일국의 문화와 가치를 초월한 세계적 차원의 공통된 문화와 가치의 형성 혹은 소위 말하는 '세계 문화'의 형성이다.  어떤 학자들은 세계화 과정 중 '세계 가치'의 확립의 필연성과 현실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의 사회적 과정은 일정한 문화적 환경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오늘날 인간들이 근거하고 있는 문화적 환경은 이미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한사람의 세계인은 출생부터 세계의 문화와 정보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으며, 세계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받아들이고 누린다. 이러한 세계적 사회화 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우선 세계인이 되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중국인 혹은 미국인 등 한 국가의 국민이 되도록 한다. 비록 모든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여전히 상당정도 각자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들 문화 또한 부분적인 융합이 이루어졌고, 세계문화는 바로 이러한 융합의 산물이다. 세계문화의 형성은 국경과 사회제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가 이미 일종의 현실로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

4. 세계화가 중국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
이 문제는 중국 내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대다수의 중국 내 학자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들이 지적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세계화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국제 협력의 질을 제고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며, 과학 기술과 정보의 전 세계적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고, 대기오염, 마약의 남용, 불법 이민 등의 세계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유리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한편,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패권적인 지위의 강화, 국내경제에 외자와 국제금융이 끼치는 위협요소 증가, 남북 차이의 확대 등으로 인해 후진국가의 경제가 더욱 쉽게 국제자본의 종속과 영향하에 놓이는 점 등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戰略與管理』,1999年3期).

중국내 학자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영향은 중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세계화는 중국으로 하여금 외자의 유치, 선진 국가의 선진적인 과학 기술과 관리 경험 및 제도적인 배치를 배우고, 중국의 상품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며, 각종 형식의 국제적인 협력에 참여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가 중국 발전에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중국 내 많은 학자들은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폭발과 함께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중국의 경제 안전의 위협이다. 외자의 국내 경제에 대한 통제 강화와 기술 독점이 중국의 산업구조조정과 고도화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또한 외채가 일정 한도를 초월했을 때 큰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무역과 자본의 대외 의존도가 증가됨으로써 중국경제가 세계경제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대규모의 금융시장의 개방이 금융 위기를 증가시킬 수 있다. 2. 국가 주권의 약화이다. 세계화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국제적인 관례, 국제적인 공약, 관련 협정을 반드시 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분의 국제적인 계약은 선진국가의 이익과 기준에 근거하여 제정된 것으로, 서방 선진 국가의 제도적 배치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개발도상국가는 경제의 세계화가 가져온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부득이 하게 일부 통제 권한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국가의 주권은 일정 정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5. 중국은 어떻게 세계화 과정에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은 현재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중국 내 학자들은 이같은 참여에 동의한다. 이는 세계화 과정에의 참여는 중국과 같은 개발 도상국가에겐 스스로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 시기와 방식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의 문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중국 내 학자들은 선진국가가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 과정이 중국에게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세계화 과정이 개발도상국가가 자본과 기술을 흡수하고 무역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시장화를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입하는 데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들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통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한 것은 바로 주동적으로 이같은 기회를 움켜진 전형적인 모범 사례로 간주한다. 반면에, 이들은 세계화 과정은 개발도상국가의 전통적인 주권을 침해하고, 개발도상국가의 경제적 패권을 위협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개발도상국가의 세계화 과정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는 과정이다. 이같은 인식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통하여 중국내 학자들에게 더욱 더 각인되었으며, 동아시아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중국 내 학자는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더욱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참여해 가야 한다고 느끼도록 하였다.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어떻게 참여해 갈 것인가에 대한 중국 내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사회, 경제적 수준이 아직 낙후되어 있다는 점과 현재의 세계화 과정이 소수 선진국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서, 중국은 선진국가와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중국은 이미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들과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와 같은 속도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같은 주장이 세계화 및 그 조건을 개혁과 발전의 전제로써 간주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중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李克穆,"關于經濟全球化進程的 点認識",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선택적이고 유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여, 독립적인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국제경제와 국제무역에 대한 관리와 감독을 강화하며, 서방 선진국가의 경제와 정치에서의 패권을 시종 경계하고, 자본시장과 상품시장, 금융시장을 일정한도로 개방하며, 중국의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경제의 세계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이다.

셋째,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의 민족화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우선적으로 민족 공업을 발전시키고, 민족경제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현재 민족국가의 전통적인 장벽을 깨고 있으며, 세계경제의 통합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민족화 추세 역시 세계화에 따라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지역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라 선진국가의 보호무역주의는 강화되고 있으며, 모든 국가는 모두 자기의 민족 공업을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면서, 각 국 간의 각종 형태의 치열한 무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의 세계화와 민족화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즉 경제 발전의 중점을 세계경제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의 민족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각 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주요한 목적은 본국의 민족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본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는 각 국 경제가 독립적인 의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반되게 각 국이 모두 자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갈수록 세계화되어 가고 있으며, 동시에 민족경제의 이익도 두드러져 가고 있다. 따라서 개방만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경제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상과 노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高德步,"全球化還是民族化?",『中國黨政干部論壇』 1997年 第期).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어떠한 다양한 유형이 있는가, 세계화가 세계정치경제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인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들 논쟁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24 | HIT : 4,429 | VOTE : 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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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
사망하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총서기였지만,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축출된 후 지금까지 근 16년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 (趙紫陽)이 마침내 지난 1월 17일 사망했다.
 
 
    (1) 85세의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자오쯔양 사망하다
지난 2005년 1월 17일, 중국의 관영 신화사통신은 짤막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인민일보가 전재한 신화통신의 자오쯔양 사망 고지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자오쯔양 동지는 장기간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질병으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최근에 병세가 악화,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 향년 85” (赵紫阳同志长期患呼吸系统和心血管系统的多种疾病,多次住院治疗,近日病情恶化,经抢救无效,于1月17日在北京逝世,终年85岁)。
이처럼 중국 정부 당국은 신화통신과 인민일보를 통해 가능한 간략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보도하게 하고,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간단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자오쯔양와 1989년 천안문 사태에 대한 당시 당과 정부의 판단과 결정에 착오가 없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와 같이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직접 관계가 없는, 그래서 그 당시의 역사적 결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의 지도부까지도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천안문사태의 재평가 요구에 대해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같이 정치적으로 미묘한 잇슈를 만들어 낸 자오쯔양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오쯔양은 지난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결정에 반대한 탓으로 당 총서기직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고, 지금까지 근 16년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그야말로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당시 당 총서기이었던 후야오방은 정치 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업무 분담체제하에서 이들 두 사람은 덩샤오핑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개혁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국내외에서 사실상 덩샤오핑 후계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6년말 합비 학생시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세로 19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가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후야오방-자오쯔양 양두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비록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격으로 퇴진했지만, 덩샤오핑은 여전히 개혁 개방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등장, 명실 공히 개혁 지도부의 핵심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후야오방 사망으로 촉발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결 방법을 둘러싼 당 내부의 논쟁이 다시 폭발했을 때, 덩샤오핑이 보수파의 견해를 수용, 무력 진압을 결정하자,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의 이런 결정에 반발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운명은 비극적인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자오쯔양은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실세를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당원로들에게 일시에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무기한의 가택 연금 상태로 유폐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들 원로들은 자오쯔양을 제거하고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유혈진압을 강행한 다음,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발탁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자오쯔양의 정치적 운명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논쟁과 결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치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서 자오쯔양의 명예와 권리 회복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개방의 기수로 시작하여 마오쩌둥 이후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앞장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당 총서기에서 몰락, 모든 권리와 직위를 박달당하고 가택에 유폐되어 16년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보내야했던 불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에 대한 중국 내외의 관심과 연민은 아직도 상당히 깊게 남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부근 푸창후퉁(富强胡同)의 자오쯔양 자택앞
 따라서 일부 외신에 의하면 자오쯔양의 입원과 사망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베이징 시내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에 위치한 그의 자택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의 옛 부하들이거나 친구들, 그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일반 대중들과 대학생들도 자오쯔양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에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자오쯔양 자택 주변에는 평소에도 공안요원들이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고, 일부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공개하고, 공안의 허락을 받아야 자오쯔양 자택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국의 통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근황을 정확하게 외부세계에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그동안 일부 홍콩 언론들은 전화나 또는 인편을 통해 자오쯔양의 근황을 탐색해 보려고 노력했었지만, 단편적인 소식이외에는 자오쯔양의 동향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일이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
1989년 5월 19일 오전 4시 45분 캄캄한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중인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면서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단식투쟁을 중단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진 자오쯔양은 이처럼 지난 16년간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채 감시와 억류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가택 연금이 항상 엄격하게만 집행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0년대에 자오쯔양은 베이징 근교 골프장에서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골프 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으며, 또 일부 지방 여행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언행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부에서 그의 건강 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망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금년 2월에 일부 소식통은 자오쯔양이 폐렴으로 3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하였고, 2004년 4월에는 CNN이 자오쯔양 사망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2) 자오쯔양 연금 해제와 명예회복 청원이 있었지만...
     물론 천안문 사태의 상처가 점차로 아물어지면서 국내외에서 자오쯔양의 연금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축출과 숙청을 직접 지시한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안문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 후임으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이 발탁한 장쩌민 총서기가 물러난 이후에도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인권단체들이나 국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로 잡고, 자오쯔양에 대한 연금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맞는 지난 10월 18일에도 자오쯔양 총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천안문사태 당시 자오쯔양을 ‘잘못’ 보좌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이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7년간 복역한 후 석방,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바오퉁 (Bao Tong)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저명한 민주파 지식인들 69명이 공동 발기인이 되어 ‘자오쯔양 선생 석방과 자유 회복을 위한 인터넷 상의 공개 서명운동’을 착수하기도 하였다. (공개 서명 운동의 인터넷 주소= http://chinaway.org/zzy2004101785/ )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공식적으로 기소도 되지 않았고,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당과 국가의 원로 지도자인 자오쯔양을 연금하고 그의 인신자유를 구속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런 불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윤리적인 사태를 바로 잡지 않고 어떻게 후진타오 정권이 ‘헌법에 의한 통치’와 ‘공민의 권리 존중’을 주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오쯔양의 연금 해제와 자유 회복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은 누구이고, 자오쯔양 노선이란 무엇인가.
 

    (3) 자오쯔양 (趙紫陽)은 누구이고 趙紫陽 路線은 무엇인가
이처럼 천안문사태이후 16년간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게 살다간 노 정객 자오쯔양은 누구인가. 우선 이 홈페이지 < 중국인물정보-당정간부>에 소개된 간략한 자오쯔양 약력을 여기에 다시 게재하면 아래와 같다

    Zhao Ziyang: 趙紫陽 (1919-2005 ): 천안문 사태 당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강경진압책을 반대하다 실각 당한 중공당 총서기였던 대표적 개혁파 지도자; 河南省 출신; 하남 제1 중학 중퇴; 32년 공청단 가입; 38년 공산당 가입; 하남성 滑縣 당위 서기; 지구 당위 서기; 건국 후에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 광동성 성당위 부서기, 서기; 문혁 당시 일시적으로 숙청되었다 71년 이후 내몽고자치구 서기, 혁명위 부주임; 광동성위 제1서기; 광동성 혁명위 주임; 73년 10기 중앙위원; 75년 사천성 제1서기, 혁명위 주임; 77년 11기 정치국 후보위원; 78년 5기 全人大 부주석;
79-80년 11기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80년 9월 국무원총리; 81년 11기 중앙위 부주석; 82년 12기 정치국 상임위원; 87년 총서기, 군사위 제1 부주석을 역임; 그러나 천안문사태 직후인 89년 6월 당원 자격을 제외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 96년부터 광동성과 사천성 시찰이 허용, 가택연금이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지만 2004 년초 폐염등 건강 이상설 제기되고 사망설도 유포;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 향년 85세

위의 간략한 소개 글을 보충하면 자오쯔양은 1919년 10월 18일에 河南省 滑현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이 13세이었던 1932년에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세인 1938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의 본명은 趙修業이었지만, 중학교 시절에 오늘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학습을 하였고, 그가 소속한 지역당 (하남-하북-산동성)위가 운영하는 당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처럼 그의 고향마을이 있는 지역에서 지방 당 활동을 하였고, 1947년 가을에는 지방 군 부대와 더불어 남부 지방으로 이동, 활동하였다.
1949년 10월 건국 후 자오쯔양은 중공당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65년에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남부 중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순탄했던 정치적 성장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좌절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다오주(陶鑄)를 공격하면서 자오쯔양도 '다오주의 주구'라고 공개 비판하였고, 자오쯔양은 이런 좌파의 공격을 받고 1967년에 실각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서 자오쯔양은 복권되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1년 내몽고 자치구 서기로 재기한 직후, 1972년에 광동성에 복귀, 마침내 1974년에 광동성 제1서기로 재취임하였고, 1975년에는 사천성 제1서기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다시 언급하겠지만, 덩샤오핑의 고향인 사천성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농촌경제를 크게 발전시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입신한 자오쯔양은 1977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78년에는 전인대 부주석, 그리고 79년에는 중앙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 이어 1980년에는 중공당의 최고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자오쯔양이 중앙정계에서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정권이 등장하면서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적 관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고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 기구를 재정비하고 인민대중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이고 경험이 있는 실무관료들이 필요했는데, 자오쯔양은 바로 덩샤오핑이 찾고 있는 그런 실무적 개혁 지도자이었다.
따라서 1980년에 당과 정부기구를 개편하고, 마오시대의 유산인 華國鋒體制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당 총서기로 후야오방을, 그리고 국무원 총리로 자오쯔양을 선임,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양두 개혁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7년초 후야오방이 낙마하기 전까지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후야오방 총서기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오쯔양 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처럼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지도자로 내외에 알려졌으며, 실질적으로도 거의 모든 주요 개혁 정책은 이들의 책임하에입안되고 집행되었다. 특히, 후야오방이 실각한 이후에는 자오쯔양은 개혁세력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보수파와 맞서 더 대담한 개혁 개방을 추진하려고 하였다.사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천한 개혁개방정치는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대부분 자오쯔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혁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파와 민주파의 의견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점진적 개혁노선인 <자오쯔양 노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 노선이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천안문 사태로 자오쯔양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자오쯔양 노선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오쯔양 노선은 아마도 오늘날의 중국 당국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장쩌민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덩샤오핑 후계 정권의 개혁 노선이 기본적으로 자오찌양의 13차 당대회 정치보고,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전진하자 (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에서 밝힌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의 이론과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오쯔양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에 대한 이론과 정책이 집약된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의 자오쯔양 총서기 정치보고 전문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1)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9.html)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2)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1.html)

결국 자오쯔양 노선이란 국가의 주도하에서 대담한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실천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체제전환을 모색하는 자오쯔양의 정책노선은 1989년 천안문사태로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하려면 더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이 필요하고,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민주파의 논리와,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당국가체제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보수파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오쯔양과 자오쯔양 노선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내몰린 것이다. 여기서 자오쯔양은 민주파의 논리와 명분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결정에 저항함으로써 마침내 비극적 개혁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4) 중국의 개혁 정치와 정책 논쟁, 그리고 자오쯔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기념하여 민주파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자오쯔양 연금 해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미국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자오쯔양의 업적에 대해 검토하기도 하였다.

*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중문으로 쓰여진 것들이며, 이런 논문의 개괄적 내용은 뉴욕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 <多維新聞 (2004년 10월 17일자)>의 기사, ‘컬럼비아 대학,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에 대한 연구토론회 개최’를 참고할 수 있다.
(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SinoNews/Oversea/2004_10_17_13_22_10_808.html )

* 또한 위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도 원문 그대로 <多維新聞>에 게재되었다

(i) 鲍彤 : “检验中国宪法的有效性的试金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2_30_788.html )
(ii) 陈一谘:再谈 “我不入地狱,谁入地狱”的赵紫阳精神---“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5_54_661.html)
(iii)汤本:新升的太阳是紫红的---“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8_5_335.html )
(iv) 吴国光:走‘赵紫阳道路’----“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9_31_427.html )
(v) 吴仁华:80年代的精神境界与赵紫阳的政治实践----“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11_45_493.html )
여기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자오쯔양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개혁의 기수로 기술되고 있다. 그는 당과 국가가 문화대혁명 좌파들의 정치투쟁, 사상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중국이 부강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모택동과 좌파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었던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가장 많은 지방 중의 하나인 四川省 성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쌀이 필요하면 완리 (万里)를 찾고, 식량이 필요하면 쯔량 (紫陽)을 찾으라 (要吃米,拔万里;要吃粮,拔紫陽)’는 말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인구가 많은 四川省과 빈곤한 지방으로 알려진 安徽省에서 자오쯔양과 완리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경제활동의 자율권을 과감하게 보장하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농촌 경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덩샤오핑 정권은 이들이 시험적으로 운행했던 농업생산책임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마침내 중국 경제의 활로를 찾게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84년 와싱턴에서 부시 당시 부통령과 함께
이처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의 초기부터 실질적인 경제 개혁의 지도자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과감한 경제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자오쯔양은 1980년에 국무원 총리로 발탁되어 1980년대 중국의 경제개혁 전반을 총괄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중국이 도입했던 과감한 경제체제 개혁은 거의 모두가 그의 책임 하에 입안, 집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오쯔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했으며, 국제대순환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의 중국의 경제개혁은 모두 자오쯔양을 통해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정당화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쯔양의 업적은 경제개혁 분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87년 1월,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세로 물러나게 되자, 개혁파를 대표하여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취임,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1987년과 1988년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치가 중대한 시련에 봉착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지만,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충돌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이 발생하였고, 시장경제의 부작용도 노출되면서 개혁 정책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협공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보수파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과장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고, 민주파들은 계획경제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려면 더 대담한 시장경제가 필요 하고, 정치개혁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 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라고 주장하는 보수파, 시장경제에로의 이행을 제대로 진행시키고 시장경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경제개혁에 발맞추어 대담한 정치개혁도 추진해야 한다는 민주파의 압박에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양두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야오방 총서기가 좀 더 민주파 지식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보적 세력의 의견을 반영하였다면, 그렇기 때문에 보수파들의 총공세의 표적이 되어 1987년 1월에 실각하였다면, 자오쯔양은 좀 더 실무관료형 개혁 지도자로서 정치-이념 문제보다는 경제문제에 집중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1987년을 전후로 한 미묘한 시기에 민주파 지식인들보다는 정치안정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민주파와 보수파의 협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사실 논리적으로 신권위주의론자들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논쟁에서 제3의 중국적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987년 10월의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가 한 정치보고의 제목,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따라 전진하자>는 것은 바로 보수파와 민주파의 주장을 절충하면서도 국가 중심의 단계적 정치-경제의 상호 보완적 발전노선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자오쯔양은 이 보고서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당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개혁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오쯔양은 차액선거제도를 전국적이고 전면적으로 확산 적용시킬 것을 선언하였고, 당정 분리, 당기 분리의 원칙을 관철시켜 정부와 사회단체의 분리, 그리고 기업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였으며, 다양한 이익집단들과의 상호 협력과 협상을 통해 당의 이익 대표성을 넓히려는 제도 개혁도 강조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당 지배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중국 당국이 추구하는 정치개혁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오쯔양은 지금 당장 당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서구적인 민주제도를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도 경제개혁과 더불어 점진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당 국가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기존의 당국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천안문 사태로 양극화되기 이전에 중국 사회와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정책 논쟁은 보수파와 민주파, 그리고 신권위주의론자들간의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이면서 권력투쟁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국을 산출하였다.
특히, 1986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경제적 위기가 복합적으로 사회적 긴장을 높이고, 이에 따라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두개의 기둥으로 형성된 개혁 세력에 대한 보수파들의 대공세가 집중되는 시점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미묘한 균열이 나타나고, 후야오방의 퇴진으로 이어지면서 천안문 사태 이전에 이미 개혁지도부는 내상을 입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갈등이 언제 어떤 계기로 발생했고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이었는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1986년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후야오방에 대해 자오쯔양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1986년 12월 말, 후야오방 총서기가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보수파의 공세에 대해 덩샤오핑이 동조하고, 자오쯔양마저 당 내부 회의에서 후야오방을 비판하자 후야오방 총서기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진 것을 알고 크게 낙담, 대성통곡한 후 사임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미무라 고지 지음, 송현웅 옮김, [중국 권력 핵심] (청어람미디어: 2002), pp. 56-63 참조)
물론 자오쯔양 측은 지금도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간의 갈등과 차이는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배신했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을 사임하는 과정에서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오쯔양은 이런 점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이런 점은 자오쯔양의 측근이었던 张钢이 최근 콜럼비아 대학 학술회의에서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 张钢:“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10)“ <多維新聞 (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5) 천안문 사태와 자오쯔양-- 자오쯔양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정책 노선은 경제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도입등 대담한 개혁 개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치 분야에서는 당의 지배 원칙에 도전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1986년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후야오방에 대해서 보수파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총서기로 취임한 이후 후야오방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학생운동에 대해서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마침내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분노를 사, 정치적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천안문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자료가 공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지난 2001년초 장 리앙(張良)이라는 가명의 중국 공산당 간부 출신에 의하여 편찬 출판된 [천안문 페이퍼]가 발표된 이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의 논의과정이 드러나면서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 [천안문 페이퍼] 에 대해서는 이 홈페이지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으니 참고
(http://www.suh-china.com/bbs/zboard.php?id=situati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무력 진압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부 자료를 폭로한 [천안문 페이퍼]와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시 총리였던 리펑등은 처음부터 강경노선을 주장했지만, 자오쯔양은 ‘민주와 법제에 의한 해결책’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평화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건한 노선을 주장했던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4월 23일 북경을 떠나고, 자오쯔양 총서기가 부재중에 리펑 총리는 양상쿤 (楊尙昆) 국가주석등의 동의를 받아 덩샤오핑을 설득,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하는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운동을 정치동란으로 규정하고, ‘기치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한다’는 당의 방침을 천명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발표되자 학생들의 반발이 오히려 확대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4월 30일 북한에서 귀국한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참모인 바오퉁으로 부터 이런 전후 사정을 보고 받고, 5월 초에 정치국 상위 등을 통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주장했으며, 대체로 ‘민주와 법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는 기본 방향에 대해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의 사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단식투쟁 등으로 더욱 격렬해 지고 악화되면서 보수파들의 반발도 심화되는 과정에 5월 16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그리고 고르바초프와 자오쯔양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역사적인 중소 화해가 선언되는 정상회담이 천안문 사태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이었지만, 자오쯔양과 고르바초프 회담에서 자오쯔양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날 오후 5시 40분, 댜오위타이 (釣魚臺) 영빈관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 모두에 자오쯔양은 ‘중대한 문제의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으며, 그런 결정은 덩샤오핑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지난 13기 1중전회에서 내려졌다’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자오쯔양의 이같은 발언의 진의가 무엇이든, 이런 발언이 국내외에 공개되면서 덩샤오핑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중국 정치를 독단하고 있다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오쯔양의 이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 덩샤오핑의 딸 鄧楠이 전화로 자오쯔양을 격렬히 비판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의 폭로는 덩샤오핑에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 씨우려는 것이라면서 자오쯔양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직후 5월 17일 천안문 광장은 100만의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슬로간 에서부터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까지 등장하면서 천안문 사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 이런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천안문 페이퍼];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핵심]이외에도 최근 자오쯔양의 85세를 기념해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 개혁과 자오쯔양’이란 회의에서 발표된 아래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张钢, “ 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沈昆, “赵紫阳在89学运期间的两件大事”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20_9_29_30_656.html)

이런 가운데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원로들의 회의가 개최되고, 이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 방침이 결정되었으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물론 덩샤오핑은 더 이상 자오쯔양을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쯔양에게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자오쯔양은 일단 수궁했지만, 곧 이어 개최된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워회도 계엄령 시행을 결정하자 건강을 이유로 총서기직 사임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5월 19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한 학생들 앞에 나타나 ‘학생제국,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대중앞에서 살아진 이후 오늘까지 오랜 연금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6)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과 정치-경제의 동시적 발전론 좌절 

자오쯔양이 1989년 5월 19일 새벽에 학생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들어 내 고별인사를 하던 그 순간, 자오쯔양 총서기를 수행, 자오쯔양의 바로 뒤에서 굳은 얼굴로 자오쯔양의 연설을 지켜보았던 당시 당 판공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 (溫家寶)가 오늘의 국무원 총리가 되어 자오쯔양의 복권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직답을 피하고, 대신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역설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의 변화 무쌍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원자바오나 후진타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오쯔양이나 후야오방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내심 인정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장쩌민이나 리펑 등과는 달리, 이들은 천안문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고, 또 당시의 권력 투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 지도부의 정통성은 천안문 사태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수호했고, 동시에 대담한 경제개혁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장쩌민 노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 지도부의 입장에서 천안문사태에 대해 재평가하기 어렵고, 또한 자오쯔양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처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개혁파의 지도자로 출발해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역사적 공헌을 했으면서도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등 발전과정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모순에 직면,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희생은 결국 중국 현대화과정에서 정치-경제의 동시 발전론의 좌절과 신권위주의와 경제발전 우선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2014년 9월 13일 토요일

중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중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책소개

중국식 ‘사회주의적 민주’를 조감하며

이 책에서 소개된 학자들과 견해는 대부분 중국내에서 활동하거나 중국내부의 논의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담론 논의에 참여하는 학자들을 넓게 포괄하고자 노력했으나, 중국내의 논의는 명확한 갈래로 구분하기 쉽지 않고 다른 주장에 대한 반론이 적다는 점에서 명료한 주장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중국 민주주의의 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을 큰 틀에서 반영하고자했다.

대체적으로 중국당정의 입장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중국식 민주론’을 중심으로 좀 더 인민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내의 민주(democracy in socialism)를 주장하는 견해, 새로운 길이나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견해, 민주주의 논의에 국가 역할을 강조하는 견해 그리고 좀 더 자유주의적 지평을 열고자 하는 견해로 구분해서 정리했다.

장윤미(張允美)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이다.
김도희(金都姬) : 한신대학교 중국지역학과 교수이다.
이문기(李汶紀) : 세종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이다.
이민자(李民子) :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이다.
이종화(李鍾華) : 목원대학교 중국학과 교수이다.
이홍규(李弘揆) : 동서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이다.
전성흥(全聖興) :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다.

목차

책을 펴내면서

1부 | 사회주의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민하다
ㆍ가오팡(高放)의 ‘사회주의다당제론’
ㆍ왕구이슈(王貴秀)의 ‘사회주의 삼권분립론’
ㆍ팡닝(房寧)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민주론

2부 | 제3의 민주를 모색하다
ㆍ시에타오(謝韜)의 ‘민주사회주의론’
ㆍ딩쉐량(丁學良)의 ‘중국모델과 사회민주주의’
ㆍ추이즈위안(崔之元)의 ‘자유사회주의론’
ㆍ장무성(張木生)의 ‘신민주주의 회귀론’

3부 | 중국식 민주를 새롭게 해석하다
ㆍ위커핑(兪可平)의 ‘점진개혁식 민주론’
ㆍ왕샤오광의 ‘인민민주론’
ㆍ허바오강(何包鋼)의 ‘협상민주론’

4부 | ‘국가’를 통해 중국식 민주를 말하다
ㆍ정융녠(鄭永年)의 ‘국가건설론’
ㆍ캉샤오광(康曉光)의 ‘협력주의 국가론’
ㆍ판웨이(潘維)의 ‘자문형 법치국가론’

5부 | 중국 자유주의자들, 민주의 지평을 넓히다
ㆍ류쥔닝(劉軍寧)의 ‘자유주의론’
ㆍ차오쓰위안(曹思源)의 ‘민주사회주의론’
ㆍ친후이(秦暉)의 ‘자치민주(自治民主)론’
ㆍ류샤오보(劉曉波)의 ‘자유민주주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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