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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일 금요일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 대륙 최고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 장거정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대륙 최고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장거정 (원전) , 스반산 (역주) 지음 | 김락준 옮김 | 아템포 | 2014년 09월 25일 출간

목차

렁청진 교수의 특별 서문 _사람을 다스리는 지혜, 모략
역주자 서문 _중국 최고의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1장 지찰권(智察卷) | 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자객을 놀라게 하여 쫓아낸 제갈량 / 혜안으로 모략을 알아챈 남문자 / 무덤을 파고 도둑을 잡은 소무명 / 보물을 건넨 상황을 자세히 관찰한 후성자 / 위험으로부터 오나라를 안전하게 지킨 주아부 / 화를 막아 자신을 보호한 곽자의 / 소인배를 잘못 기용한 제환공

2장 주모권(籌謀卷) | 책략을 세우는 것에 관하여|
나라를 생각해서 진나라의 법령서를 챙긴 소하 / 약속을 지킨 위문후 / 인내심을 갖고 변경을 잘 지킨 이목 / 지모를 써서 천하를 안정시킨 배광정 / 술자리에서 군 통수권을 빼앗은 송태조 / 정의로 초나라를 정벌한 한고조 / 정확한 계산으로 남당을 손에 넣은 송태조 / 지혜롭게 태자를 보호한 장량 / 모두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후에 봉해진 옹치 / 기막힌 생각으로 진나라를 평정한 고영 / 위나라를 포위하고 조나라를 구한 손빈 / 여드레 만에 양요를 물리친 악비 / 조성을 위협한 한세충 /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친 경감 / 거금으로 재상의 자리를 산 여불위 / 길을 빌려 괵나라를 공략한 진헌공

3장 용인권(用人卷) | 사람을 쓰는 것에 관하여
백기의 옛 사당을 수리하자고 간언한 이비 / 악의에게 지혜를 구한 연소왕 / 혜안으로 영척을 알아본 제환공 / 서신을 태워 사람들을 안심시킨 한광무 / 위서한 사람을 기용한 진회 / 지혜로 병란을 평정한 주금 / 갓끈이 끊긴 부하에게 모욕을 주지 않은 초장왕 / 귀천을 나누지 않고 상을 준 이연 / 공을 치하하고 예를 중시한 조양자 / 도적으로 도적을 다스린 위원충

4장 사상권(事上卷) | 윗사람과 일하는 것에 관하여
황제를 속이지 않은 노종도 / 충심으로 왕의 과실을 덮은 한기 /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제갈각 / 조정의 권위를 세운 이소 / 재치 있게 악감정을 없앤 적방진 / 신하로서 왕을 속이지 않은 조빈 / 큰 틀에서 문제를 생각한 여이간 / 충성심으로 나랏일을 계획한 고필 / 주인을 위해서 의로움을 사온 풍훤

5장 피화권(避禍卷) | 화를 피하는 것에 관하여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린 유비 / 자신의 생각을 감춰 화를 면한 습사미 / 논밭을 달라고 해서 목숨을 지킨 왕전 / 병든 척하고 화를 면한 사마의 / 태자를 가르친 왕숙문 / 눈치 빠르게 화를 피한 진평 / 큰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장량과 진평 / 장소를 기용하라고 추천한 이강 / 통곡으로 화를 면한 요숭 / 양흠의에게 교묘하게 선물을 건넨 이덕유 / 생선을 거절한 공손의 / 환온을 모시지 않은 왕맹 / 전체적인 형국을 관찰한 기자 / 일보 전진을 위해서 용퇴한 소숭

6장 도세권(度勢卷) | 형세를 파악하는 것에 관하여
세를 분석해서 진나라를 정벌한 돈윤 / 관인을 잃어버려도 놀라지 않은 배도 /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를 죽인 안영 / 지혜로 두 장군을 항복시킨 이광필 / 큰 지혜로 원소를 파악한 조조 / 대세를 내다본 소옹 / 기다렸다가 싸운 주덕위 / 서역에서 탁월한 공을 쌓은 반초 / 지혜와 용맹함으로 진정을 평정한 경순 / 결책으로 천하를 구한 구준 / 권세와 무력으로 적을 이긴 시극굉 / 위기의 난을 평정한 설장유

7장 공심권(攻心卷) | 마음을 공략하는 것에 관하여
사자를 죽이고 고평을 빼앗은 구순 / 대의로 동인을 굴복시킨 공용 / 지혜로 혜시를 곤란에 빠뜨린 장주 / 시간을 헷갈리게 해서 악당들을 물리친 풍 태수 / 기발한 지략으로 항우를 이긴 유방 / 지혜로 완안량을 물리친 유기 / 지혜로 초장왕을 이긴 장의 / 기막힌 계략으로 흉노를 물리친 진평 / 비위를 맞춰 황위를 빼앗은 양광

8장 권기권(權奇卷) | 기묘한 지략에 관하여
기묘한 지략으로 억울한 사정을 조사한 어사 / 성을 쌓아 ‘도둑’을 막은 이윤칙 / 교묘히 ‘타도계’를 쓴 사안 / 신과 통하는 척하고 위엄을 세운 주원장 / 돈을 던져 승패를 정한 적청 / 교묘한 지략으로 도적떼를 소탕한 왕경 / 지혜로 중상모략을 물리친 왕동정 / 편지를 바꿔 사람을 구한 한옹 / 지혜로 강빈을 잡은 양정화 / 지모로 잃어버린 도장을 찾은 교유 /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묵돌

9장 유수권(謬數卷) | 속임수에 관하여
이민족에게 철 공급을 중단한 매국정 / 기지로 지방 세력을 이긴 척현 / 지혜로 의문의 사안을 해결한 최사경 / 첩자로 적을 놀라게 한 왕덕용

10장 기변권(機變卷) | 임기응변에 관하여
지혜로 왕의 자리를 빼앗은 공자 소백 / 속임수로 관중을 얻은 환공 / 빈 바구니로 양수를 속인 오질 / 말 한마디로 천지를 정한 장열 / 기지로 도둑을 잡은 장가윤 / 남의 칼을 빌려서 반란군을 죽인 조위 / 거짓말로 팽총을 설득한 오한 / 적진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진명제 / 지혜로 추격병을 따돌린 위효관 / 진주를 잃어버리고 연나라의 변경을 넘은 장추

11장 풍간권(諷諫卷) | 넌지시 나무라는 것에 관하여
한무제에게 교묘하게 간언한 동방삭 / 지혜로 대당을 지킨 적인걸 / 풍간으로 사람을 구한 안영 / 지혜로 유현좌를 설득한 정섭 / 웃긴 말로 악법을 없앤 간옹 / 소릉을 보고 충간한 위징 / 재미있는 말에 뼈를 숨긴 우전

12장 중상권(中傷卷) | 중상모략에 관하여
현묘한 지혜로 미인을 중상한 정수 / 계획적으로 태자를 해친 여희 / 날조된 말로 상국의 자리를 지킨 감무 / 계획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한 여이간 / 교묘하게 위지고를 깎아내린 요숭 / 음모를 꾸며 충신을 해친 노기 / 말 한마디로 적청을 끌어내린 문언박 / 진언으로 화를 자초한 탁경

13장 미색권(美色卷) | 미인계에 관하여
덕을 잃고 색욕을 좇은 명무종 / 호부를 훔쳐 은혜를 갚은 여희 / 미색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킨 서시 / 향락으로 황제를 미혹시킨 합마 / 황후의 총애를 받고 해친 무측천 / 정수를 이용해서 목숨을 구한 장의 / 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한 여불위 / 대의를 위해서 남편을 쫓아 보낸 중이의 부인

부록 _《권모서》 원문 및 독음

책 속으로

《권모서權謨書》는 명나라의 대정치가 장거정張居正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장거정은 강성했던 명나라가 몰락하는 전환의 시기에 살았고, 10년 동안 수보(수석 대학사)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운을 되돌리고 대명 왕조에 희망과 생기를 다시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중국 역사학자 레이황(중국명 황런위黃仁宇, 1918~2000)은 저서 《만력십오년萬歷十五年》에서 장거정을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장거정은 영원한 지혜의 상징이다. 그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에 수염을 길게 길렀고, 몸에 장식품을 두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도포는 날마다 새것처럼 접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장거정의 성품은 용모와 완전히 일치해서, 좀처럼 말을 하지 않지만 한번 말하면 핵심을 찔렀다. 또한, 말이 간단하고 정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중국의 옛 격언인 ‘부인불언, 언필유중夫人不言, 言必侑中(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는다)’에 부합했다.”
《권모서》가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에 안 나오는 이유는 후세 사람들이 권모술수에 관한 장거정의 글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고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본은 일본의 학자가 원본을 베껴 적은 수사본이고,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권모서》는 권모술수에 관해 참고 가치가 매우 높은 보기 드문 중국의 고대 서적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권모서》에 해설을 더했고, 관련 고사 및 고사 속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평가했다. 오류가 있으면 비판하고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역주자 서문 : 10~11쪽]

月暈而風, 礎潤知雨. 人事雖殊, 其理一也. 惟善察者能見微知著.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비록 사람의 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치는 같고, 오직 관찰을 잘하는 사람만이 미세한 것에서 본질을 발견한다.
어느 날 손님이 유비를 찾아왔다. 황위에 막 오른 유비는 정무를 보느라 많이 바빴지만 성정이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므로 그 손님을 만나기로 했다.
손님도 예의가 발랐다. 그는 유비가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찬양했고, 좋은 입담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치에 맞게 말해 유비도 그의 말을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유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손님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이때 제갈량이 문을 열고 들어와 유비에게 긴히 보고할 것이 있다고 말했고, 제갈량을 본 손님은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손님이 나간 뒤에 제갈량이 물었다.
“폐하, 방금 여기에 있던 손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비는 손님을 칭찬한 후 의아한 듯 물었다.
“승상은 그를 의심하오?”
제갈량이 말했다.
“신이 보기에는 조조가 보낸 자객 같습니다.”
유비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제갈량이 말했다.
“신이 들어올 때 그가 폐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는 표정은 즐거우나 눈빛에 두려움이 있었고, 아래를 쳐다보며 눈알을 사방으로 굴렸습니다. 겉모습이 간사하고 속으로 못된 마음을 품었으니, 필시 조조가 폐하를 죽이려고 보낸 자객입니다.”
유비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병사들에게 자객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자객은 담을 넘어 도망가고 없었다. [1장. 지찰권_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 19~20쪽]

所謀在勢, 勢之變也, 我强則敵弱, 敵弱則我强. 傾擧國之兵而伐之, 不如今自伐.
지혜를 모으는 목적은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형세의 변화란 내가 강해지면 적이 약해지고, 적이 약해지면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전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정벌하는 것보다 적을 스스로 약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

양견은 주정제를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수나라의 개국 황제인 수문제이다. 어느 날 그는 대신인 고영을 불러서 물었다.
“이제 수 왕조를 세웠으니 마땅히 나라를 통일해야 합니다. 나라 땅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국면을 끝내고 진陳나라를 평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영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수나라는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력이 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군사력이 아닌 지혜로 싸워야 합니다.”
수문제는 고영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지혜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찍이 지혜로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전략을 세웠던 고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강북 지역은 추워서 농작물이 늦게 익지만 강남 지역은 더워서 벼를 일찍 추수합니다. 적들이 수확할 시기에 우리가 사병과 말을 모으고 전쟁을 준비하는 척하면 적들은 반드시 방어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농사를 돌볼 수 없어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합니다. 적들이 대비를 마치면 우리는 다시 경계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적들은 우 닫기

출판사 서평

“비 오기 전날,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모략이다!”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명재상 장거정의 지혜, 《권모서(權謀書)》
수천 년 동안 대륙이 품어온 위대한 모략의 지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비록 사람의 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치는 같고, 오직 관찰을 잘하는 사람만이 미세한 것에서 본질을 발견한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 물정을 통해 거짓된 본질을 발견하겠는가? 자세히 관찰하면 진위를 알고 허와 실을 분별할 수 있다.
알아차리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분별하고 처리해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한다. (…)
_ 《권모서》 〈지찰권(智察卷)〉, 본문 17쪽

청 말기의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양계초(梁啓超)는 자신의 저서 《중국 6대 정치가》에서 명(明)대의 재상 장거정(張居正·1525~1582)을 전국시대의 상앙(商?)·춘추시대의 관중(管仲)·위진시대의 제갈량(諸葛亮)·당나라의 이덕유(李德裕)·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 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했다.
명나라 300년을 대표하는 걸출한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천하의 기재로 불리며 특히 정치, 병법, 권모술수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손꼽힌다.
장거정 사후에 후세 사람들이 그가 생전에 처세와 병법 등에 관해 남긴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권모서(權謀書)》다. 이번에 나온 신간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장거정 원전·스반산 역주, 김락준 옮김, 아템포 펴냄)는 중국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 중인 스반산(史半山) 교수(헤이룽장黑龍江 대학교)가 《권모서》 원문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고,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일화나 제갈량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모략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모서》의 내용을 더 알기 쉽고 생생하게 풀이한 책이다.

수천 년 중국 역사가 증언하는 나를 지켜내는 최고의 요령, 모략
행운은 영원히 충성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지혜를 믿고 타인의 도움을 얻어내라!


(…) 지혜를 모으는 목적은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형세의 변화란 내가 강해지면 적이 약해지고, 적이 약해지면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전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정벌하는 것보다 적을 스스로 약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책략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작은 것을 갖지만 난 큰 것을 갖고, 다른 사람은 가까운 곳을 보지만 난 먼 곳을 본다. 비가 오기 전에 준비를 마치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_ 《권모서》 〈주모권(籌謀卷)〉, 본문 47쪽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는 장거정의 《권모서》에서 다룬 13개의 지혜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세심한 관찰의 힘을 다루는 〈지찰권〉에서 시작해 모략의 영원한 테마 미인계를 다루는 〈미색권〉까지가 그 지혜의 길이다. 각 장에서 소개하는 지혜의 주제와 첫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1장. 지찰권(智察卷, 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2장. 주모권(籌謀卷, 책략을 세우는 것에 관하여) “군자는 나라를 생각하지만 소인배는 자신을 생각한다.”
3장. 용인권(用人卷, 사람을 쓰는 것에 관하여) “정치의 이치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상과 벌을 분명하게 주는 것에 있다.”
4장. 사상권(事上卷, 윗사람과 일하는 것에 관하여)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모실 때 성실해야 한다.”
5장. 피화권(避禍卷, 화를 피하는 것에 관하여) “가슴에 천하를 구하려는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숨겨야 한다.”
6장. 도세권(度勢卷, 형세를 파악하는 것에 관하여) “세는 ‘적응’하는 추세이다.”
7장. 공심권(攻心卷, 마음을 공략하는 것에 관하여) “성지(城池)는 파괴할 수 있지만 마음은 굴복시킬 수 없고, 적장을 체포할 수 있지만 의지는 빼앗을 수 없다.”
8장. 권기권(權奇卷, 기묘한 지략에 관하여) “정세를 잘 살피는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9장. 유수권(謬數卷, 속임수에 관하여) “상대의 속임수를 알아차렸을 땐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알아도 티 내지 않으며 상대를 황당한 지경으로 유도해야 한다.”
10장. 기변권(機變卷, 임기응변에 관하여) “개인의 존망은 아침에 달렸고, 국가의 안위는 저녁에 달렸다.”
11장. 풍간권(諷諫卷, 넌지시 나무라는 것에 관하여) “함축적인 비유는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충고할 수 없는 내용을 거리낌 없이 말할 때 쓴다.”
12장. 중상권(中傷卷, 중상모략에 관하여) “세상에서 헐뜯는 것보다 더 악독한 짓은 없다.”
13장. 미색권(美色卷, 미인계에 관하여) “덕행을 어지럽히면 현명한 사람이 떠나고, 정사를 그르치면 소인배가 득세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이자 현자로 손꼽히는 장거정의 지혜는 팍팍한 현실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고 나아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슴에 새길 만한 인생독본으로서 그 몫을 다할 것이다.
역주자 스반산 교수는 일본 학자가 원본을 손으로 베껴 쓴 《권모서》 수사본을 토대로 이 역주 작업을 진행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수사본은 현재 일본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 《권모서》에 관하여
《권모서》는 명나라 대정치가 장거정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장거정은 강성했던 명나라가 몰락하는 전환의 시기에 살았고, 10년 동안 내각수보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운을 되돌리고 대명 왕조에 희망과 생기를 다시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중국 역사학자 레이 황(중국명 황런위黃仁宇, 1918~2000)은 그의 저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에서 장거정을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장거정은 영원한 지혜의 상징이다. 장거정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지만 한번 말하면 핵심을 찔렀다. 또한, 말이 간단하고 정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중국의 옛 격언인 ‘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는다(夫人不言, 言必侑中)’에 부합했다.”
《권모서》가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에 나오는 않는 이유는 후세 사람들이 권모술수에 관한 장거정의 글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고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본은 일본 학자가 원본을 베껴 적은 수사본으로, 현재 일본의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권모서》는 권모술수에 관해 참고 가치가 매우 높은 보기 드문 중국의 고대 서적이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중국의 지도부 교체, 어떻게 볼 것인가? - 메리토크라시 vs 클렙토크라시

지난 11월 8일 제18차 중국공산당 당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중국의 차기 지도부가 확정되었는데요. 국내 여러 매체에서는 미국 대선 못지않게 비중 있게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미지북스 역시 이번 지도부 교체를 관심 있게 지켜 보았고, 미지북스의 책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을 번역하신 하남석 선생님께서 이번 지도부 교체를 두고 짧은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중국의 지도부 교체,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남석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 정치 경제를 전공하여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중국의 체제 이행과 신자유주의의 문제,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사회와 사회적 모순에 저항하는 대중 운동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중국, 자본주의를 바꾸다』(훙호펑, 조반니 아리기 외 지음, 미지북스, 2012),「중국은 미국의 집사인가」(『뉴 레프트 리뷰』 3호) 등을 옮겼다. 


2012년 11월은 G2라고 불리는 세계의 양대 강국, 미국과 중국에서 권력교체가 예정되어 있어 크게 주목받았다. 작년만 해도 오바마의 재선은 불투명해 보였고, 중국의 지도부 교체는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미국의 대선은 별 쟁점도 없이 오바마의 압승으로 싱겁게 끝난 반면, 중국에서는 봄부터 보시라이 사건과 쿠데타 루머 등으로 시끄러웠으며, 막후에서 계파 간에 치열하게 권력투쟁이 벌어진 것으로 관측되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중국 공산당 내부의 계파들과 주요 정치인들의 이름이 주요 언론들에 오르내렸으며, 중국의 정치 시스템이나 권력 이양 제도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 글에서는 이번 중국 공산당의 지도부 교체의 현황에 관해 알아보고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하여 간략하게 논해보고자 한다.       

5세대 지도부의 등장

중국의 모든 권력은 공산당에 집중되어 있고, 중국 공산당은 여전히 레닌주의식 민주집중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중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은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이다. 중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8천만 명이 넘는데 전국대표대회에 모이는 인원이 2천여 명이고, 이 중에서 중앙위원회로 선출된 인원이 2백여 명(후보위원은 160여 명)이다. 이 중앙위원회에서 25명의 중앙정치국원이 추려지며, 또 이 중에서 7명이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이 7명의 상무위원들이 각각 공산당을 비롯하여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 국무원(중국의 중앙정부), 정협(인민정치협상회의) 등 주요 국가기관의 책임자를 맡아 중국을 통치해 나가는 것이 중국 정치의 시스템이다.

당대회에서 이러한 주요 직책의 인선이 내정되면, 이듬해 3월 우리로 치면 국회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전인대에서 인준을 받게 되어 있다. 물론 당에서 내린 결정이 전인대에서 뒤집어지는 일은 없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당이 손을 흔들면, 국무원은 일을 하고, 전인대는 거수로 통과시키고, 정협은 옆에서 박수친다”는 우스개가 있는데, 한마디로 중국의 정치시스템을 정리한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에 열린 18차 당대회(2012년 11월 8일~14일)에서 시진핑은 후진타오로부터 당의 총서기 및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승계 받았고 리커창은 원자바오로부터 국무원 총리를 이어받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나머지 5명의 상무위원이 새로 선임되었으며, 이로서 중국 공산당은 5세대 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엘리트주의 분파 VS 인민주의 분파?

이번 지도부 교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 중 하나가 계파간 갈등이었다. 다수의 중국 전문가들이 중국 공산당의 계파를 엘리트주의 파벌과 인민주의 파벌으로 나누고 이 틀 속에서 중국 정치를 파악한다. 엘리트주의 파벌은 상하이방1, 태자당2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제 성장과 수출을 중시하고 연해지역의 발전에 역점을 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민주의 파벌은 공청단3 출신으로 내수와 분배를 중시하고 낙후한 내륙 농촌 지역의 발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파악된다. 많은 국내외 언론들이 이 틀 속에서 새로 구성된 상무위원회 성원의 성향을 분석하여 이번 지도부 교체를 보수파(엘리트주의 파벌)의 승리와 개혁파(인민주의 파벌)의 패배로 평가했다. 즉 이번 상무위원회의 인적구성4으로 볼 때 태자당과 상하이방 연합세력이 공청단파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리기에 중국 정치의 파벌구도는 훨씬 더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 정치의 파벌은 출신배경에 따라 태자당, 공청단파 등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한국처럼 ‘친이’면 ‘친이’, ‘친박’이면 ‘친박’이라는 식으로 딱 떨어지기 보다는 개인이 지방에서 중앙까지 성장해 오면서 맺게 된 여러 꽌시(관계 關係)들과 은퇴한 당 원로들의 후원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과 파벌의 성향을 일치시키기기 힘들다. 

게다가 실제 정책적인 면을 살펴보면 엘리트주의 파벌과 인민주의 파벌의 차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이 두 파벌의 대립이 마치 1960-70년대의 마오주의파와 당권파(개혁파)의 대립처럼 좌파와 우파의 갈등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인민주의 파벌의 경우, 분배를 강조하고 있고 “균형 잡힌”, “지속가능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경제 성장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엘리트주의 파벌의 경우도 현재와 같이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분배의 측면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보시라이의 경우, 태자당으로 분류되지만 충칭에 부임해서는 인민주의 파벌보다 더 좌파적인 색채를 나타내기도 했다. 리커창의 경우 후진타오의 뒤를 잇는 공청단파의 수장이지만, 올 3월 본인의 주도 하에 세계은행과 함께 내놓은 <중국 2030 보고서>의 내용을 살펴보면, 금융시장 개방과 민영화 등 국가개입을 비판하고 시장 중심의 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 두 파벌이 격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허구적인 구도일 수도 있다.   

메리토크라시? 클렙토크라시?

이번 지도부 교체에서는 최고 권력층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했다. 청렴한 이미지로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던 원자바오 총리 일가의 엄청난 규모의 재산이 서구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올 여름에 시진핑 일가의 재산 규모가 4천억 원에 달한다고 보도한 블룸버그 통신은 한동안 중국에서 인터넷 접속이 차단되었고 당국으로부터 여러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보시라이 사건은 마치 헐리우드의 삼류 첩보치정극 같아 보였다.  

많은 전문가들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온 공산당의 통치 성격을 놓고 능력과 실력을 갖춘 엘리트들이 효율적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고 판단해 왔다. 하지만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관료들의 부정부패 사건에다 이번에 드러난 최고위층들의 양태를 보면 중국 정치는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즉 권력을 쥔 자들이 국가 재산을 약탈해가는 ‘도둑정치’에 가까워 보인다. 

게다가 이번 지도부 교체에서 혁명 원로의 자식들인 태자당이 대를 이어 최고 권력의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상대적으로 공청단파들은 평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집안 배경들을 살펴보면, 최고위층이 아니어서 그렇지 대부분 중간관료의 자식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 빗대어 보자면, 태자당이 성골이나 진골이라면, 공청단파는 육두품쯤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도 중국의 앞날을 둘러싼 커다란 갈등은 공산당 내부의 파벌이나 노선 경쟁에 있기보다는 당과 인민(특히 개혁개방 이후 삶의 안정성이 크게 파괴된 노동자와 농민들) 사이에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에서 “官二代, 富二代, 窮二代(관직도 세습되고, 부도 세습되고, 가난도 세습된다)”라는 말이 유행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과잉중복투자를 낳고 있는 후계양성 시스템

한편, 중국 공산당의 후계 양성과 선발에 관해서도 한번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생전에 차기와 차차기 지도자로 지명했었다. 반면 시진핑을 비롯한 5세대 지도부들은 뒤에서 당의 원로들이 끌어준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본인들이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실적을 기록하고 그것이 자신의 성과가 되어 중앙정치에 진입하게 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방에서의 성과라고 하는 것은 결국 경제성장률일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각 지방들 사이의 경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중국에는 31개의 발전국가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각 지방정부들은 경쟁적으로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되고, 결국 중국 전체로 보면 이러한 투자경쟁은 과잉중복투자로 나타나게 되어 중국경제에 커다란 거품을 형성하게 되었다. 게다가 각 지방들이 서로 자기 지역의 기업을 육성하고 세원을 키우기 위해서 유무형의 보호주의 정책을 사용하게 되면서 중국 전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기도 하다. 

전망

위에서 지적했듯이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국내외에 많은 불안감을 주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번에 중국 공산당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5세대 지도부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 과정을 보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과 같이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기보다는 집단이 지도부를 구성하여 권력을 분점하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안정화, 제도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지도부 내부에서 서로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에 파벌 간에 협력과 균형을 잘 맞춰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이 분점되어 있는데다 기존에 비해 원로들이나 전임지도부의 입김도 세질 것으로 보여 5세대 지도부들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든 조건이 형성된 것으로도 보인다. 기존의 정책 기조를 끌고 나가면서 그럭저럭 중국 사회를 관리해나가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위기가 닥쳐왔을 때 어떻게 잘 대처하는가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더블딥 상황, 특히 많은 경제전문가들이 중국의 경착륙을 우려하는 상황 속에서 새 지도부가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하다. 특히 인민들은 현재의 중국 사회를 양극화된 “격차사회”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민생을 우선하겠다는 정책이 수사적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어떻게 실행될 지도 잘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 [편집자주] 상하이방: 덩샤오핑의 차기 후계자였던 장쩌민을 중심으로 한 세력.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 재임 시절 같이 일했던 인물들을 주석 취임 이후 중용하면서 형성되었다. [본문으로]
  2. [편집자주] 태자당: 중국 공산당 혁명 원로의 자제와 친인척으로 구성된 세력. 지난 18차 대회에서 주석으로 취임한 시진핑 역시 태자당계 인물로 분류된다. [본문으로]
  3. [편집자주] 공청단: '중국공산주의청년단'의 약자. 전 주석 후진타오가 공청단계 인물이다. [본문으로]
  4. [편집자주] 2012년 11월 현재 태자당이 3석, 상하이방이 2석, 공청단이 2석. [본문으로]

능력만 있으면 인정 받는 메리토크라시

능력만 있으면 인정 받는 메리토크라시
http://blog.daum.net/kiehl1851/792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Michael Young)은 그의 저서 'Rise of the Meritocracy(메리토크라시의 반란)'에서 능력 위주 사회(메리토크라시, meritocrac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메리토크라시를 개개인의 IQ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라고 묘사했다. 이른바 지능이 뛰어난 엘리트(elite)들이 높은 지위에서 사회를 통치하게 되지만, 점차 권위적이고 오만한 그들은 대중의 반감을 사게 되어 혁명의 희생양이 된다고 이 책에서 적고 있다. 비록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이 책에서는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능력 위주의 메리토크라시를 선호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프랑스이다.

프랑스에서 능력의 기준은 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일반대학 졸업, 특수대학인 그랑제콜 졸업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몰리는 그랑제콜 출신들은 출세가 보장되는데, 프랑스의 유명 정치인, 정부 고위 관리, 주요 기업체 임원들은 대개가 그랑제콜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랑제콜은 부유층이나 지식층에서만 독식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은 모든 이에게 동일한 기회를 준다. 교육 자체가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모두 무료이며,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는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는 환경인 셈이다.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 다음, 시험과 콩쿠르 등의 아주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선발된 엘리트만이 그랑제콜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학벌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프랑스 국민은 불평하지 않는다고 한다. 성별, 인종, 나이, 지역을 떠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런 정서는 나폴레옹 시절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이전 관리들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책을 펼치기 위해 정부 관리가 될 만한 인물들을 물색해야 했다. 나폴레옹은 인재를 구하기 위해 지위나 출신 배경을 막론하지 않고, 능력만 되면 이들을 선발했다. 군대 장교, 시민 혁명을 주도한 시민 운동가, 귀족 등이 골고루 능력에 따라 나폴레옹 정부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에 능력 위주 사회가 처음 정착한 배경이 되었다.

[예문] The prime minister claims he wants to create a classless meritocracy in Britain.
         총리는 영국에서 계급 없는 실력 사회를 창출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ㆍ메리토크라시, 능력 위주 사회 - meritocracy
ㆍ사회적 지위 - social status
ㆍ부 - wealth
ㆍ경쟁 - compet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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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메리토크라시

[중앙일보] 입력 2005.07.08 20:36 / 수정 2006.01.27 16:59
프랑스를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능력 위주 사회)라고 규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능력에 따라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 체제라는 뜻이다. 프랑스에서 능력의 잣대는 학력이다.

고졸이냐, 일반 대학 졸업자냐, 특수 대학인 그랑제콜 출신이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수재들이 몰리는 그랑제콜 출신에겐 출세가 보장된다. 유명 정치인과 정부 고위 관료, 주요 기업체 임원은 대개 그랑제콜에서 엘리트 과정을 밟았다.

프랑스식 메리토크라시는 무료.의무.종교 중립적 교육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는 기회의 평등에서 출발한다.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빼앗겼다는 말은 프랑스에선 통하지 않는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비가 거의 없다.

교육 기회는 공평하지만 대학의 인재는 엄정한 선발 절차를 거쳐 걸러낸다. 에그자맹(examen)과 콩쿠르(concours)가 그 방법이다.

에그자맹은 일정 점수 이상만 얻으면 되는 자격시험이다. 일반 대학에 입학자격을 주는 바칼로레아가 그 예다. 응시자 중 절반 이상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일반 대학에 간다.

반면 콩쿠르는 경쟁을 벌여 소수 정원만을 선발하는 논술형 주관식 시험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콩쿠르에 응시해야 한다. 그랑제콜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처럼 재수.삼수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

학벌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프랑스 국민은 불평하지 않는다. 성별.인종.나이.지역을 떠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회가 열려있는데도 공부를 안한 건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서울대의 본고사 부활 논란이 한창이다. 한 사회조직이 필요한 사람을 골라내는 제도가 시험이다. 시험에 공정한 경쟁과 평가 장치가 있다면 그 권위와 효용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도 프랑스 못지않게 학력을 중시한다. 하지만 메리토크라시라고 말하기엔 이르다. 경쟁을 외면하는 무차별적 평등 지상주의에 자꾸 매몰된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으로 인재를 발굴할 수 없고, 경쟁이 없으면 상대의 우월성을 인정하는데도 인색해진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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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26 19:17
기
학력·학벌에 집약된 ‘실력주의’가
온 사회에 여과없이 받아들여지는
지독한 메리토크라시 사회, 한국
민주통합당은 전태일의 동생인 전순옥씨를 비롯한 5명 안팎의 노동계 인사를 비례대표 당선 가능권에 올렸다. 친노동 경제민주화의 의지를 담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노동자의 커진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일까? 18대 국회에서 새누리당은 빈민운동가 출신을 비례대표 1번으로 올린 적이 있다. 그것이 새누리당의 빈민친화성을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을까?

민주당은 이번에 36명의 법조인을 공천했는데 공천자 215명의 17%에 달한다. 새누리당의 29명을 합하면 두 당이 공천한 법조인이 모두 당선될 경우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034%에 불과한 법조인이 국회의 5분의 1을 차지하여 무려 588배나 과잉대표된다고 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어떤가? 거대 여야의 비례대표나 지역구 후보로 공천된 노동운동 출신을 다 합해도 10명이 안 되고, 그들의 이력을 보면 실제로는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이 다수다. 노동자가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정도 된다고 보면 이들은 양당에서 10분의 1 이하로 과소대표되는 셈이다. 18대 국회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결국 학벌이 없는 노동운동가 출신 의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야당으로서는 지역에 노동자를 공천하고 싶어도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지역정치의 경륜과 사회운동의 이력을 가진 노동자 후보를 거의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더욱이 현장 노동자들 자신이 동료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화 25년은 곧 민주노조운동 25년이다. ‘민주노동당’이 원내 10석이나 얻은 적이 있고, 통합진보당·진보신당이 지금 활동하고 있지만, 그 대표들은 대부분 ‘좋은 대학’ 나온 엘리트들이며,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동자가 진보정당의 지도자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렇게 보면 한국 정치는 ‘노동자 대표’임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학벌 엘리트들의 합작에 의한 지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수나 진보나 이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노동자들을 권력권에서 완전히 배제해 놓고, 그들이 스스로 힘을 기를 수 있는 조건도 만들지 않고 진보니 개혁이니 외치고 있는 꼴이다. 사실 노동자들 자신도 사법부의 극히 편향적인 판결이나 퇴직 후 한 해 동안 수십억원을 번 변호사들의 수입에 시비를 걸지 않은 채 자기 자식도 판검사·변호사 만들고 싶어 한다. 똑똑한 사람들이고 그 자리에 갈 능력이 있었으니, 그렇게 해도 좋고 그 정도의 대우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면 한국은 정말 학력·학벌에 집약된 ‘실력주의’가 온 사회에 여과없이 받아들여지는 지독한 메리토크라시 사회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 아니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이후 하나도 안 변했다. 재벌의 지배보다 더 무서운 것이 메리토크라시다. 그 실력·학력·학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평생 쉼 없이 일해도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사는가? 메리토크라시는 온 사회를 경쟁과 스트레스로 몰아넣는 우리 사회의 중병이다. 학벌 좋은 사람이 대표로 있는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사회가 아닌, 노동자들이 사교육에 목매달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의 과잉교육열과 학교폭력, 청소년 자살의 상당부분은 노동천시·실력주의가 만들어낸 것이다. 최근 진보신당이 탈학벌을 선포하면서 공천 후보자들의 학력을 일체 올리지 않기로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정부와 기업이 고졸자를 더 많이 채용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자. 그게 바로 이 시대 진보의 길이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25270.html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중국연구 사이트 -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중국정치연구실 | 2005·06·07 23:07 | HIT : 1,735 | VOTE : 122 |
  
Internet Guide for Research

Institutes

    * 다음은 Internet을 통해 접근 가능한 주요 연구기관 및 전문 잡지들 중에서 특히 중국 및 동아시아 연구 활동으로 유명한 해외 연구기관 및 잡지들을 선별, (I) 미국과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II) 일본 연구기관 및 잡지; (III) 중국 및 중국어권의 연구기관 및 잡지; (IV) 대만 관련 연구기관 및 잡지등으로 분류 소개한다.

    * 2004년 3월 5일 현재 정리 작업 ; 필요하면 추후에 계속 수정 보완 할 것
(I)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 AAS- The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1941년 당시 <계간 극동> (the Far Eastern Quarterly) 창간 기관으로 출발하여 현재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시아 전문가들의 학회로 발전

    -현재에도 매년 4번씩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을 발간하면서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학술활동을 장려

  • AEI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미국 기업가 집단의 공공정책에 대한 관점을 대변하는 연구원; 1943년에 미국 와싱턴에 설립, 약 50여명의 상주 연구원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 전개

    -대체로 정부의 규제철폐와 사기업 활동 장려, 그리고 강력한 대외정책과 국방정책을 주장하는 보수 지향적 연구와 정책 제안으로 유명;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기업가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여 정책 로비 활동오?주도하기도 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 AFPC-The American Foreign Policy Council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자문하는 비영리 민간 연구단제로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탈 사회주의 과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에 대해서도 개혁과 중미관계에 대해 관심 표명.

    -1997년 클린턴과 장쩌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개혁과정을 모니터하기 위해 China Reform Monitor 를 운영하고 있는데, 1997년부터 2003년까지의 주요 사건 개요가 정리되어 있다.

  • Asia Society 

    -아시아 연구의 확산과 미국과 아시아 제국의 문화 및 지식인 교류로 유명한 비영리 단체; 1956년 록커펠러 3세가 주도하여 뉴욕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는 단체

    -이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AsiaSource 는 아시아 각국의 현황은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 정치 및 경제 사회와 교육등 각 분야의 최근 연구업적과 각종 자료에 대해 안내 하고 있다.

  • Asian Studies WWW Virtual Library 

    -호주 국립대학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이 1994년에 설립,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아시아 관련 On Line 도서관.

    -현재는 Dr T.Matthew Ciolek와 51명의 Co-editors가 활동하고 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국 및 각 지역 연구 관련 자료에 On Line 접근이 가능함.

  • Asian Survey 

    -미국 버클리의 칼리포니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가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는 아시아 문제 전문 연구지

  • BCAS/CAS -The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Critical Asian Studies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67년에 젊고 진보적인 아시아 전공자들의 집단을 결성하고, 1968년부터 기존의 아시아 연구를 비판하는 내용의 연구잡지인<아시아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잡지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를 발간

    -2001년 1월 이후 그 명칭을 <비판적 아시아 연구 (Critical Asian Studies)>로 변경, 현재까지 활발하게 아시아 연구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Brookings : The Brookings Institution 

    -1927년에 현재 이름으로 통합 발족한 미국 최초의 민간 연구기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문제에 대한 중요한 연구논문이나 저술, 자료 등 발표

  • The Carnegie Endowment 

    -1910년에 창설된 개인 재단으로 미국의 민주주의와 대외정책, 법치의 원칙과 정부의 투명성 제고등과 관련된 개혁, 환경과 무역 질서등에 관심;

    -그러나 또 한편 최근 사회주의권의 대변혁과 더불어 러시아와 동구 프로그램, 그리고 중국 프로그램을 확장; 특히 중국프로그램은 중국의 중앙 당교와 상해 사회과학원과 협동으로 연구사업을 추진

  • CECC -Congressional-Executive Commission on China 

    -2000년 10월 중국의 인권과 법치를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미국 의회-행정부 공동 위원회로서 매년 대통령과 의회에 중국 인권과 민주화 상황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음

    -따라서 수시로 중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포함, 중국의 WTO가입등 관련 주요 쟁점에 대한 청문회 등을 운영하면서 연중 보고서와 청문회 자료등을 수집 공표

  • CEFC- The French Centre for Research on Contemporary China 

    -불란서 정부가 지원하는 홍콩 주재 연구기관으로 중국, 대만, 홍콩과 마카오의 정치, 경제등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활동을 지원 -1992년부터 영문으로 된 China Perspective 발간

  • CFP Net-Chinese Foreign Policy Net 

    -스텐포드 대학 Taylor Fravel교수가 운영하는 중국 외교정책 관련 홈페이지이고, 중국외교 개괄-안보-교역-인권-쌍무적 관계 (미국-일본-한반도-러시아-대만-인도등)-WTO 가입문제등에 대한 영문 자료 제공

  • CHGIS-The 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미국의 Luce 재단의 지원으로 2000년 12월이후 활동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 지도 관련 인터넷 연구기관

  • The China Business Review 

    -미국과 중국의 기업가들의 친목 및 협력관계를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설립된 중미기업협회 (US-China Business Council)가 1974년이후 발간하고 있는 잡지

  • China Leadership Monitor 

    -미국 스텐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가 지원하는 인터넷 사이트로서 2002년 겨울호를 창간호로 낸 이후 현재 매년 4번 중국 국내외 정치, 경제, 군사 안보등에 대한 논평을 발표

  • China WWW Virtual Library -Internet Guide for China Studies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중국연구소 (the Institute of Chinese Studies at Heidelberg University)가 운영하고 있는 중국 관련 On Line 도서관, 1995년에 설립

    -현재는 네델란드 Leiden 대학의 Hanno Lecher박사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각종 자료와 문헌들을 정리, 소개

  • The Chinese Military Power Page 

    -미국의 국방정책의 대안을 모색하는 시민단체 성격의 민간 국방연구단체인 Project on Defense Alternatives 가 운영하는 중국 군사문제 관련 웹사이트

    -중국 군사 및 국방 문제 전문가들의 명단, 이들의 연구활동과 관련 자료등을 찾아 볼 수 있다.

  • CPS -Communist and Post-Communist Studies 

    -중국의 개혁개방과 변화 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특히 사회주의 몰락이후 구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개방과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 논문을 수록

  • CQ--The China Quarterly 

    -영국의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원의 현대중국연구소 ( Contemporary China Institut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가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는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중국 전문 학술지

  • CR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미국 의회조사연구소에서도 중국 관련 연구 자료와 논문, 그리고 보고서등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관점에서 중미관계에 중요한 경제적, 군사-안보적 이슈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층적인 조사 연구 결과를 제공

  • CSIS-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190여명의 연구자와 직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전략 안보 연구기관 -1994년부터 Bates Gill 박사를 중국 전문 의장으로 임명하고, 중국 관련 홈페이지 Freeman Chair in China Studies 를 운영

  • FA/CFR -Foreign Affairs/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1921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민간 자문 기구로 출발한 외교관계 위원회 (CFR)는 전직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국방장관등 고위 관료들과 학자 및 전문가를 비롯한 민간단체의 대표자들로 구성

    - 현재 약 34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외교관계 위원회가 1922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Foreign Affairs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 잡지

  • FAS-The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1945년 핵물리학자들의 반핵 운동단체로 출발, 현재로는 약 5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하는 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

    -과학자들의 전문적 지식과 공공정책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과학자 중심의 시민운동 단체로서 핵과 미사일등 대량파괴 무기의 세계적 확산 방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

  • FEER-Far Eastern Economic Review 

    -아시아지역의 경제 및 기업 관련 기사 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적 이슈에 대한 기사도 주목되는 홍콩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 Hoover Institution 

    -1919년 미국 31대 대통령 후버가 창설한 연구소로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 보관, 활용, 스텐포드대학이 전쟁과 혁명, 평화 연구 의 구심역할을 하게 했고,

    -특히 2002년부터 앞에서 소개한 China Leadership Monitor를 운영하고 , 또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 이를 테면, The End of Communism / Transition to Democratic Capitalism / The End of Communism / The National Security Forum/ International Rivalries and Global Cooperation 등을 추진

  • IISS-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1958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군사전략, 군비통제, 지역안보 및 갈등해소등에 대한 연구활동으로 유명

    -이 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세계 각국의 군비확장 및 축소에 대한 보고서 The Military Balance 를 비롯하여 역시 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정치 군사동향에 대한 Strategic Survey; 전략문제와 지역안보등에 대한 논문집 Adelphi Paper 시리스; 그리고 계간지 Survival등은 모두 유용한 자료원

  • Nautilus Institute-The Northeast Asia Peace and Security Network (NAPSNet)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 비핵화와 관련된 각 국의 동향과 뉴스자료를 제공;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남북한의 관련 뉴스도 영문으로 제공

  • NBR-The National Bureau of Asian Research 

    -미국 시애틀 소재 와싱턴 주립대학이 주도하는 아시아 관련 연구기관으로 중국, 일본, 한국등에 대한 연구가 주목

  • NED-Journal of Democracy 

    -1983년 비영리 민간 단체로 설립된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기금 ( 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이 1990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학술적 전문지

  • Rand 

    -미국 국방과 안보 관련 연구에 집중하였지만, 점차로 관심 영역이 다각화되면서 넓은 의미에서 미국의 안보적 이익의 차원에서 중국의 군사 안보전략을 포함?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등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도 진행

  • UCLA Center for East Asian Studies

    -중국 및 아시아 관련 자료는 크게 (1) Asia via the Web-동아시아 연구와 관련된 on-line 참고자료들; (2) Today in Asian History-동아시아의 역사 및 현재에 대한 자료들; (3) Asian Studies Documents-주요 역사적 사건과 문건 자료? (5) Statistical Information on Asia- 도표와 통계자료; (6) Asian Language Study Programs; (7) Asian Studies Journals등으로 분류 관리

  • University of Michigan-China Data Center 

    -미국 미시간 대학이 소장하고 중국 관련 각종 자료; 특히, 최근 발표된 중국의 통계자료를 비롯해서 중국 지도와 환경 관련 자료 제공

  • USCC: United States-China Economic and Security Review Commission Charter

    -2000년 10월, 미국 의회 결의로 조직; 미국과 중국간의 경제와 안보 문제에 대해 폭넓은 연구, 조사, 매년 연차보고서도 제출하고, 미-중간 주요 경제-안보 문제에 대한 연구와 청문회도 운영

  • USIP- The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1984년이후 미국 의회의 기금 지원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민간 연구기관으로 국제적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기 위한 연구활동 전개

  •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 Asia Program 

    -1968년 민간 학술 교류기관으로 설립된 윌슨 센터의 아시아 프로그램은 저명한 아시아 문제 학자와 전문가들의 다양한 세미나와 논문 발표 및 저술등을 소개하는 이벤트와 사업 전개

  • World Politics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이 출판하는 국제정치 분야의 저명한 계간지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30 | HIT : 2,002 | VOTE : 351 |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1.들어가며.
 
1990년대 초부터 서방에서 핫 이슈가 된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중국에서도 1990년 초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다가 90년대 중반부터 학계의 핫 이슈가 되고있다.
1990년대 초 세계화에 관한 논의가 서방 학계의 핫 이슈로 등장하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에 대한 서방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세계화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중국내 학자들에게 제기하였다.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논의가 중국에 등장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1993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編譯局)이 초청한 미국의 듀크대학의 드리크 교수가 서방의 세계화에 대한 이론을 소개한 강연이었다. 이 강연에서 드리크 교수는 세계는 이미 세계경제시대로 접어들었고,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반드시 경제의 세계화에 기반하여 분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전제 하에서 그는 세계화의 특징으로 자본과 생산과정의 세계화, 생산의 무국적화, 다국적 기업이 일국 시장을 대체하여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 세계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보편적인 생산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연설 내용은 얼마 후 {戰略與管理} 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중국 내 학자들의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1994년 원래 중국의 사회과학원 부원장이었던 리선즈(李愼之)교수가 {東方}과 {太平洋學報} 잡지에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중국 내에서 가장 일찍 세계화에 관한 연구를 주창한 학자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국 내 학자들로 하여금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켜 세계화에 대한 연구가 학계의 핫 이슈가 되도록 한 사건은 1997년에 폭발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도 중국은 어렵게 위기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경제의 세계화로 인한 국내 금융부문의 취약성은 중국의 지도자들과 학자들에게 높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리하여 1998년 3월 9일 장쩌민 국가 주석은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홍콩대표단 토론회에서 "경제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세계경제발전의 객관적인 추세로 그 어느 나라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 참여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같은 세계화의 추세를 변증법적으로 대처하여 세계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이익과 문제점을 동시에 보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에 처해 있는 국가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최고지도자인 장쩌민의 지적으로 인해 세계화에 대한 연구는 중국 학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 당대연구소는 세계화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각종 논쟁을 종합하여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세계화에 대한 논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全球化的悖論], [全球化時代的馬克思主義], [全球化時代的社會主義], [全球化時代的資本主義], [全球化與中國] ,[全球化與世界], [全球化與后殖民批評])

그 후 1999년 말 중국의 WTO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쌍무적 협상이 완료된 이후 WTO가입을 위한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중국내의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 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인민일보는 바로 이같은 추세를 반영하여 2000년부터 세계 각 국의 학자와 관료 및 기업인을 초청하여 '세계화 포럼'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 포럼은 2001년 1월 15일에 두 번째로 개최되어 세계 10여 개 국에서 온 관료, 학자, 기업인들이 WTO 가입을 앞두고 있는 중국의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세계경제 속에서 중국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한 각종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중국 학계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다음 4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고 있다. 1. 세계화의 개념. 즉, 세계화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2. 세계화의 유형. 즉, 경제의 세계화 외에 민족국가의 정치, 문화 역시 경제의 세계화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문화의 세계화와 정치의 세계화라는 추세가 존재하는가? 3. 중국에서 세계화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즉, 중국은 세계화의 영향과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에 대응하여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인가? 4. 세계화는 중국의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래에서 이같은 쟁점을 둘러싼 논쟁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2. 세계화란 무엇인가?
 
중국 내 학자들이 내리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정의는 대략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화란 인류 생활의 통합과정이고, 지역 특히 민족국가의 주권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전 세계의 정체성(整體性)의 발전 추세, 혹은 인류 사회 생활이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뛰어 넘어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전방위적 교류 및 상호영향이라는 객관적인 역사적 추세로 간주하는 시각이다(蔡拓,"全球化與當代國際關系", 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더 나아가 혹자는 세계 통합의 실질적인 의의는 인류가 공간의 장애와, 제도와 문화의 장애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 범위에서 더욱 더 많은 공통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교통과 통신이 발전함에 따라 전 세계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국가와 지역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 되어 간다. 동시에 세계 각 국은 갈수록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다시 말하면 인류가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협조와 협력의 정신을 통하여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세계화를 자본주의화, 자본주의의 일종의 새로운 형식 혹은 발전단계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보편화이다. 오늘날 경제의 세계화는 실제로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로, 세계화의 문제 역시 현대 자본주의 특히 선진 자본주의의 문제"이다(紀玉祥,"全球化與當代資本主義的新變化",『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세계화의 과정이 비록 사회 생활의 모든 주요한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 동력의 메카니즘과 현실적인 기초를 볼 때, 세계화 진행 과정의 역사적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찾아야 하고, 시장경제의 비밀로부터 찾아야 한다."(楊朝仁, 韓志偉, "全球化,制度開放與民族復興",『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 따라서 이 시각에 근거하면 세계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식이고, 자본주의의 일종의 별칭이다. 그것은 또한 후기 자본주의, 발달된 자본주의, 비조직적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 세계적 자본주의 등등으로 칭해질 수 있다(王逢振, "全球化, 文化認同和民族主義", 王寧 等 主編,『全球化與后殖民批評』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셋째, 세계화를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세계화는 인류 가치의 동질화와 보편화로 표현되고, 서방국가 특히 미국의 가치가 인류의 공통가치로 대변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화 또한 바로 서방화 혹은 미국화"라고 주장한다.(『環球時報』(2000年9月22日) "全球化背景下的國家利益改變了 ?").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은 "중국어권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세계사조, 보편가치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세계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서방 혹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인류의 궁극적인 공통 가치로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한정되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張 武, "全球化:亞洲危機中的反思",『全球化與后殖民批評』,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상술한 3가지 시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세계화를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즉 이 시각은 상술한 3가지 관점은 단지 세계화의 본질적 속성 가운데 특정 특성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화 과정을 내재적으로 모순이 충만한 과정이고,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이 시각은 다음 3가지 점을 통하여 세계화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첫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이러한 모순은 합리적인 것이다. 즉, 세계화는 통합과 분열의 추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며, 단일화와 다양화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는 집중화이고 분산화이며, 국제화이고 본토화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하나의 모순의 통일체이고,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보완적인 과정이며, 하나의 상충되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 충돌이다. 둘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필연적이다. 세계화의 배경 하에서 개방의 정도가 가장 높은 국가 역시 자기 민족의 민족적 뿌리와 색채가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반대로 가장 보수적인(혹은 폐쇄적인) 민족도 세계화의 흔적이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셋째, 세계화의 모순은 인류 사회의 진보에 유리하며, 사회는 원래 다양성의 통일이고, 다원적인 것의 통합화 과정이든, 일원적인 것의 다원화 과정이든, 이들 모두는 인류 발전의 진리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 『戰略與管理』, 1999年3期).

 
3. 세계화의 다양한 유형
중국 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계화의 주요 지표를 경제의 세계화 및 정보 통신의 세계화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정치와 문화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동시에 거론하고 있다. 즉 "경제 생활이 통합되어 가면서 각 국의 정치와 문화 역시 그 속도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지만 통합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경제적 함의와 정치 문화적 함의를 동시에 가진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고 정치적 현상이며, 경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李林,"全球化背景下的中國立法發展",『學習與探索』1998年 第1期;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1998年). 이같은 시각에 대하여 중국 내의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를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한정시키고, 세계화를 경제의 통합 혹은 국제화로 한정시키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일반적인 세계화 개념, 특히 정치와 문화적 세계화 개념을 중국의 현재의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를 방치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반대하기도 한다. 중국 내의 세계화의 유형에 관한 논의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성장요소, 특히 자본과 기술 및 인력자원이 시장 법칙의 작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적 이동과 조합으로, 개별 국가경제와 지역경제가 갈수록 세계경제체제로 통합되어 인류의 사회경제발전의 상호 보완성, 관련성 및 의존성 역시 이로 인해서 증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각 국의 상품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을 통하여 판매되고, 인류에 의해서 공통으로 향유되는 것을 말한다"(穆光宗,"經濟全球化與中國人口",『當代世界與社會主義』1998年 第3期). 어떤 학자들은 이를 더욱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생산활동의 전 세계적 차원의 통합으로, 전통적인 국제적 분업이 세계적인 분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2. 세계의 다변적인 무역체계가 형성되고 국제무역이 통합되어 가고 있다. 3. 각 국의 금융이 갈수록 통합되고 금융의 국제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다. 4. 투자활동이 전 세계에 걸쳐서 진행되고, 세계적인 투자 규범이 형성되고 있다. 5. 다국적 기업의 역할이 강화되고, 갈수록 국제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국제시장에서의 전통적인 역할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6. 국제 무역 전문가와 고급 경영자들인 이른바 '세계인'이 갈수록 늘어나 각 국 정부와 회사가 이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다(薛榮久,"經濟全球化的影響與挑戰",『管理經濟』1998年 第4期).

또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같은 경제의 세계화 추세는 어느 국가도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중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피동적으로 경제의 세계화 흐름에 합류하기보다 능동적으로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경제의 세계화가 세계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를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세계화는 중국이 선진국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한다( 劉力, "經濟全球化:發展中國家后來居上的必由之路', 『國際經濟評論』1997年 第11-12期).

둘째, 정치의 세계화이다. 중국내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의 세계화를 각 국의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의 동질화 추세로 간주하고, 이것은 우선 자유와 평등을 핵심으로 한 민주적 가치의 일치와 자유, 평등, 인권이 충분히 실현되는 민주제도의 보편화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일부학자들은 정치의 세계화를 정치의 민주화로 간주하고, 민주화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의 세계화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같은 이해에 기초하여 이들은 "세계화의 유형적인 동력은 경제의 세계화이고, 세계화의 무형적인 동력은 가치의 통합이고, 민주정치와 세계적 가치의 통합"으로 주장한다(劉軍寧,"全球化與民主政治", 『當代世界與社會主義』 (季刊) 1998年 第3期).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세계화 시대의 민주정치를 '善治'로 그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선치'란 공공이익을 최대화하는 통치과정으로, 이는 정부와 시민들(혹은 공민)이 협력하여 공공 생활을 관리하고,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일종의 새로운 관계로써 양자간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간주한다. 이들은 '선치'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다음 6가지를 들고 있다. 1.정당성으로, 사회 질서와 권위가 최대한도로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과 인정을 통하여 유지되어야 한다. 2. 투명성, 정치정보의 공개성으로, 모든 주민이 자기의 권리와 관련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권리를 가진다. 3. 책임성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4. 법치로, 법률이 정치적 통제의 최고의 준칙이고, 정부의 관료와 시민들이 모두 법에 의거하여 행동해야 하며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5. 행위에 대한 보상과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兪可平,"從善政到善治", 『方法』1999年 第1期)

셋째, 법률의 세계화이다. 각 국이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할 국제 관례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면서, 법률의 세계화의 문제가 중국 법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 내 일부 학자들은 법률적인 관점에서 즉 세계 경제와 국가 이익의 충돌, 전통문화와 근대화와의 괴리 및 국가주권과 세계화와의 관계, 법률 다원주의, 국가의 입법자와 법률 연원으로서의 지위 등의 정치 법률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법률의 세계화를 법률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간주하고, 법률의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세계적 법률 의식을 확립하고, 세계의 문제해결을 입법의 중요한 근거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국가주권개념을 개혁하고, 국가의식을 완화하며, 입법의 비국가화를 주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문화의 세계화이다. 개혁개방 이후 서방의 유행가나 의상, 새로운 사상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문화의 세계화는 중국 내에서 사실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 내의 학자들이 말하는 문화의 세계화는 주요하게 일국의 문화와 가치를 초월한 세계적 차원의 공통된 문화와 가치의 형성 혹은 소위 말하는 '세계 문화'의 형성이다.  어떤 학자들은 세계화 과정 중 '세계 가치'의 확립의 필연성과 현실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의 사회적 과정은 일정한 문화적 환경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오늘날 인간들이 근거하고 있는 문화적 환경은 이미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한사람의 세계인은 출생부터 세계의 문화와 정보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으며, 세계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받아들이고 누린다. 이러한 세계적 사회화 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우선 세계인이 되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중국인 혹은 미국인 등 한 국가의 국민이 되도록 한다. 비록 모든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여전히 상당정도 각자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들 문화 또한 부분적인 융합이 이루어졌고, 세계문화는 바로 이러한 융합의 산물이다. 세계문화의 형성은 국경과 사회제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가 이미 일종의 현실로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

4. 세계화가 중국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
이 문제는 중국 내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대다수의 중국 내 학자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들이 지적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세계화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국제 협력의 질을 제고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며, 과학 기술과 정보의 전 세계적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고, 대기오염, 마약의 남용, 불법 이민 등의 세계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유리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한편,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패권적인 지위의 강화, 국내경제에 외자와 국제금융이 끼치는 위협요소 증가, 남북 차이의 확대 등으로 인해 후진국가의 경제가 더욱 쉽게 국제자본의 종속과 영향하에 놓이는 점 등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戰略與管理』,1999年3期).

중국내 학자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영향은 중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세계화는 중국으로 하여금 외자의 유치, 선진 국가의 선진적인 과학 기술과 관리 경험 및 제도적인 배치를 배우고, 중국의 상품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며, 각종 형식의 국제적인 협력에 참여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가 중국 발전에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중국 내 많은 학자들은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폭발과 함께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중국의 경제 안전의 위협이다. 외자의 국내 경제에 대한 통제 강화와 기술 독점이 중국의 산업구조조정과 고도화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또한 외채가 일정 한도를 초월했을 때 큰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무역과 자본의 대외 의존도가 증가됨으로써 중국경제가 세계경제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대규모의 금융시장의 개방이 금융 위기를 증가시킬 수 있다. 2. 국가 주권의 약화이다. 세계화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국제적인 관례, 국제적인 공약, 관련 협정을 반드시 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분의 국제적인 계약은 선진국가의 이익과 기준에 근거하여 제정된 것으로, 서방 선진 국가의 제도적 배치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개발도상국가는 경제의 세계화가 가져온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부득이 하게 일부 통제 권한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국가의 주권은 일정 정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5. 중국은 어떻게 세계화 과정에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은 현재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중국 내 학자들은 이같은 참여에 동의한다. 이는 세계화 과정에의 참여는 중국과 같은 개발 도상국가에겐 스스로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 시기와 방식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의 문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중국 내 학자들은 선진국가가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 과정이 중국에게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세계화 과정이 개발도상국가가 자본과 기술을 흡수하고 무역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시장화를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입하는 데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들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통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한 것은 바로 주동적으로 이같은 기회를 움켜진 전형적인 모범 사례로 간주한다. 반면에, 이들은 세계화 과정은 개발도상국가의 전통적인 주권을 침해하고, 개발도상국가의 경제적 패권을 위협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개발도상국가의 세계화 과정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는 과정이다. 이같은 인식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통하여 중국내 학자들에게 더욱 더 각인되었으며, 동아시아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중국 내 학자는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더욱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참여해 가야 한다고 느끼도록 하였다.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어떻게 참여해 갈 것인가에 대한 중국 내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사회, 경제적 수준이 아직 낙후되어 있다는 점과 현재의 세계화 과정이 소수 선진국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서, 중국은 선진국가와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중국은 이미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들과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와 같은 속도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같은 주장이 세계화 및 그 조건을 개혁과 발전의 전제로써 간주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중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李克穆,"關于經濟全球化進程的 点認識",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선택적이고 유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여, 독립적인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국제경제와 국제무역에 대한 관리와 감독을 강화하며, 서방 선진국가의 경제와 정치에서의 패권을 시종 경계하고, 자본시장과 상품시장, 금융시장을 일정한도로 개방하며, 중국의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경제의 세계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이다.

셋째,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의 민족화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우선적으로 민족 공업을 발전시키고, 민족경제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현재 민족국가의 전통적인 장벽을 깨고 있으며, 세계경제의 통합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민족화 추세 역시 세계화에 따라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지역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라 선진국가의 보호무역주의는 강화되고 있으며, 모든 국가는 모두 자기의 민족 공업을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면서, 각 국 간의 각종 형태의 치열한 무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의 세계화와 민족화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즉 경제 발전의 중점을 세계경제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의 민족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각 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주요한 목적은 본국의 민족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본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는 각 국 경제가 독립적인 의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반되게 각 국이 모두 자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갈수록 세계화되어 가고 있으며, 동시에 민족경제의 이익도 두드러져 가고 있다. 따라서 개방만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경제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상과 노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高德步,"全球化還是民族化?",『中國黨政干部論壇』 1997年 第期).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어떠한 다양한 유형이 있는가, 세계화가 세계정치경제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인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들 논쟁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24 | HIT : 4,429 | VOTE : 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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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
사망하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총서기였지만,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축출된 후 지금까지 근 16년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 (趙紫陽)이 마침내 지난 1월 17일 사망했다.
 
 
    (1) 85세의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자오쯔양 사망하다
지난 2005년 1월 17일, 중국의 관영 신화사통신은 짤막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인민일보가 전재한 신화통신의 자오쯔양 사망 고지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자오쯔양 동지는 장기간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질병으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최근에 병세가 악화,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 향년 85” (赵紫阳同志长期患呼吸系统和心血管系统的多种疾病,多次住院治疗,近日病情恶化,经抢救无效,于1月17日在北京逝世,终年85岁)。
이처럼 중국 정부 당국은 신화통신과 인민일보를 통해 가능한 간략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보도하게 하고,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간단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자오쯔양와 1989년 천안문 사태에 대한 당시 당과 정부의 판단과 결정에 착오가 없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와 같이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직접 관계가 없는, 그래서 그 당시의 역사적 결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의 지도부까지도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천안문사태의 재평가 요구에 대해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같이 정치적으로 미묘한 잇슈를 만들어 낸 자오쯔양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오쯔양은 지난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결정에 반대한 탓으로 당 총서기직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고, 지금까지 근 16년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그야말로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당시 당 총서기이었던 후야오방은 정치 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업무 분담체제하에서 이들 두 사람은 덩샤오핑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개혁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국내외에서 사실상 덩샤오핑 후계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6년말 합비 학생시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세로 19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가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후야오방-자오쯔양 양두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비록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격으로 퇴진했지만, 덩샤오핑은 여전히 개혁 개방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등장, 명실 공히 개혁 지도부의 핵심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후야오방 사망으로 촉발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결 방법을 둘러싼 당 내부의 논쟁이 다시 폭발했을 때, 덩샤오핑이 보수파의 견해를 수용, 무력 진압을 결정하자,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의 이런 결정에 반발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운명은 비극적인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자오쯔양은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실세를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당원로들에게 일시에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무기한의 가택 연금 상태로 유폐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들 원로들은 자오쯔양을 제거하고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유혈진압을 강행한 다음,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발탁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자오쯔양의 정치적 운명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논쟁과 결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치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서 자오쯔양의 명예와 권리 회복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개방의 기수로 시작하여 마오쩌둥 이후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앞장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당 총서기에서 몰락, 모든 권리와 직위를 박달당하고 가택에 유폐되어 16년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보내야했던 불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에 대한 중국 내외의 관심과 연민은 아직도 상당히 깊게 남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부근 푸창후퉁(富强胡同)의 자오쯔양 자택앞
 따라서 일부 외신에 의하면 자오쯔양의 입원과 사망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베이징 시내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에 위치한 그의 자택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의 옛 부하들이거나 친구들, 그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일반 대중들과 대학생들도 자오쯔양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에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자오쯔양 자택 주변에는 평소에도 공안요원들이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고, 일부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공개하고, 공안의 허락을 받아야 자오쯔양 자택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국의 통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근황을 정확하게 외부세계에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그동안 일부 홍콩 언론들은 전화나 또는 인편을 통해 자오쯔양의 근황을 탐색해 보려고 노력했었지만, 단편적인 소식이외에는 자오쯔양의 동향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일이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
1989년 5월 19일 오전 4시 45분 캄캄한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중인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면서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단식투쟁을 중단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진 자오쯔양은 이처럼 지난 16년간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채 감시와 억류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가택 연금이 항상 엄격하게만 집행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0년대에 자오쯔양은 베이징 근교 골프장에서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골프 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으며, 또 일부 지방 여행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언행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부에서 그의 건강 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망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금년 2월에 일부 소식통은 자오쯔양이 폐렴으로 3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하였고, 2004년 4월에는 CNN이 자오쯔양 사망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2) 자오쯔양 연금 해제와 명예회복 청원이 있었지만...
     물론 천안문 사태의 상처가 점차로 아물어지면서 국내외에서 자오쯔양의 연금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축출과 숙청을 직접 지시한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안문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 후임으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이 발탁한 장쩌민 총서기가 물러난 이후에도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인권단체들이나 국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로 잡고, 자오쯔양에 대한 연금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맞는 지난 10월 18일에도 자오쯔양 총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천안문사태 당시 자오쯔양을 ‘잘못’ 보좌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이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7년간 복역한 후 석방,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바오퉁 (Bao Tong)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저명한 민주파 지식인들 69명이 공동 발기인이 되어 ‘자오쯔양 선생 석방과 자유 회복을 위한 인터넷 상의 공개 서명운동’을 착수하기도 하였다. (공개 서명 운동의 인터넷 주소= http://chinaway.org/zzy2004101785/ )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공식적으로 기소도 되지 않았고,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당과 국가의 원로 지도자인 자오쯔양을 연금하고 그의 인신자유를 구속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런 불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윤리적인 사태를 바로 잡지 않고 어떻게 후진타오 정권이 ‘헌법에 의한 통치’와 ‘공민의 권리 존중’을 주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오쯔양의 연금 해제와 자유 회복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은 누구이고, 자오쯔양 노선이란 무엇인가.
 

    (3) 자오쯔양 (趙紫陽)은 누구이고 趙紫陽 路線은 무엇인가
이처럼 천안문사태이후 16년간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게 살다간 노 정객 자오쯔양은 누구인가. 우선 이 홈페이지 < 중국인물정보-당정간부>에 소개된 간략한 자오쯔양 약력을 여기에 다시 게재하면 아래와 같다

    Zhao Ziyang: 趙紫陽 (1919-2005 ): 천안문 사태 당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강경진압책을 반대하다 실각 당한 중공당 총서기였던 대표적 개혁파 지도자; 河南省 출신; 하남 제1 중학 중퇴; 32년 공청단 가입; 38년 공산당 가입; 하남성 滑縣 당위 서기; 지구 당위 서기; 건국 후에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 광동성 성당위 부서기, 서기; 문혁 당시 일시적으로 숙청되었다 71년 이후 내몽고자치구 서기, 혁명위 부주임; 광동성위 제1서기; 광동성 혁명위 주임; 73년 10기 중앙위원; 75년 사천성 제1서기, 혁명위 주임; 77년 11기 정치국 후보위원; 78년 5기 全人大 부주석;
79-80년 11기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80년 9월 국무원총리; 81년 11기 중앙위 부주석; 82년 12기 정치국 상임위원; 87년 총서기, 군사위 제1 부주석을 역임; 그러나 천안문사태 직후인 89년 6월 당원 자격을 제외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 96년부터 광동성과 사천성 시찰이 허용, 가택연금이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지만 2004 년초 폐염등 건강 이상설 제기되고 사망설도 유포;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 향년 85세

위의 간략한 소개 글을 보충하면 자오쯔양은 1919년 10월 18일에 河南省 滑현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이 13세이었던 1932년에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세인 1938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의 본명은 趙修業이었지만, 중학교 시절에 오늘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학습을 하였고, 그가 소속한 지역당 (하남-하북-산동성)위가 운영하는 당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처럼 그의 고향마을이 있는 지역에서 지방 당 활동을 하였고, 1947년 가을에는 지방 군 부대와 더불어 남부 지방으로 이동, 활동하였다.
1949년 10월 건국 후 자오쯔양은 중공당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65년에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남부 중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순탄했던 정치적 성장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좌절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다오주(陶鑄)를 공격하면서 자오쯔양도 '다오주의 주구'라고 공개 비판하였고, 자오쯔양은 이런 좌파의 공격을 받고 1967년에 실각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서 자오쯔양은 복권되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1년 내몽고 자치구 서기로 재기한 직후, 1972년에 광동성에 복귀, 마침내 1974년에 광동성 제1서기로 재취임하였고, 1975년에는 사천성 제1서기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다시 언급하겠지만, 덩샤오핑의 고향인 사천성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농촌경제를 크게 발전시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입신한 자오쯔양은 1977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78년에는 전인대 부주석, 그리고 79년에는 중앙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 이어 1980년에는 중공당의 최고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자오쯔양이 중앙정계에서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정권이 등장하면서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적 관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고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 기구를 재정비하고 인민대중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이고 경험이 있는 실무관료들이 필요했는데, 자오쯔양은 바로 덩샤오핑이 찾고 있는 그런 실무적 개혁 지도자이었다.
따라서 1980년에 당과 정부기구를 개편하고, 마오시대의 유산인 華國鋒體制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당 총서기로 후야오방을, 그리고 국무원 총리로 자오쯔양을 선임,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양두 개혁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7년초 후야오방이 낙마하기 전까지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후야오방 총서기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오쯔양 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처럼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지도자로 내외에 알려졌으며, 실질적으로도 거의 모든 주요 개혁 정책은 이들의 책임하에입안되고 집행되었다. 특히, 후야오방이 실각한 이후에는 자오쯔양은 개혁세력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보수파와 맞서 더 대담한 개혁 개방을 추진하려고 하였다.사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천한 개혁개방정치는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대부분 자오쯔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혁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파와 민주파의 의견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점진적 개혁노선인 <자오쯔양 노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 노선이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천안문 사태로 자오쯔양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자오쯔양 노선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오쯔양 노선은 아마도 오늘날의 중국 당국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장쩌민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덩샤오핑 후계 정권의 개혁 노선이 기본적으로 자오찌양의 13차 당대회 정치보고,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전진하자 (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에서 밝힌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의 이론과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오쯔양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에 대한 이론과 정책이 집약된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의 자오쯔양 총서기 정치보고 전문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1)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9.html)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2)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1.html)

결국 자오쯔양 노선이란 국가의 주도하에서 대담한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실천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체제전환을 모색하는 자오쯔양의 정책노선은 1989년 천안문사태로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하려면 더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이 필요하고,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민주파의 논리와,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당국가체제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보수파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오쯔양과 자오쯔양 노선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내몰린 것이다. 여기서 자오쯔양은 민주파의 논리와 명분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결정에 저항함으로써 마침내 비극적 개혁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4) 중국의 개혁 정치와 정책 논쟁, 그리고 자오쯔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기념하여 민주파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자오쯔양 연금 해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미국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자오쯔양의 업적에 대해 검토하기도 하였다.

*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중문으로 쓰여진 것들이며, 이런 논문의 개괄적 내용은 뉴욕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 <多維新聞 (2004년 10월 17일자)>의 기사, ‘컬럼비아 대학,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에 대한 연구토론회 개최’를 참고할 수 있다.
(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SinoNews/Oversea/2004_10_17_13_22_10_808.html )

* 또한 위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도 원문 그대로 <多維新聞>에 게재되었다

(i) 鲍彤 : “检验中国宪法的有效性的试金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2_30_788.html )
(ii) 陈一谘:再谈 “我不入地狱,谁入地狱”的赵紫阳精神---“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5_54_661.html)
(iii)汤本:新升的太阳是紫红的---“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8_5_335.html )
(iv) 吴国光:走‘赵紫阳道路’----“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9_31_427.html )
(v) 吴仁华:80年代的精神境界与赵紫阳的政治实践----“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11_45_493.html )
여기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자오쯔양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개혁의 기수로 기술되고 있다. 그는 당과 국가가 문화대혁명 좌파들의 정치투쟁, 사상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중국이 부강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모택동과 좌파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었던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가장 많은 지방 중의 하나인 四川省 성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쌀이 필요하면 완리 (万里)를 찾고, 식량이 필요하면 쯔량 (紫陽)을 찾으라 (要吃米,拔万里;要吃粮,拔紫陽)’는 말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인구가 많은 四川省과 빈곤한 지방으로 알려진 安徽省에서 자오쯔양과 완리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경제활동의 자율권을 과감하게 보장하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농촌 경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덩샤오핑 정권은 이들이 시험적으로 운행했던 농업생산책임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마침내 중국 경제의 활로를 찾게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84년 와싱턴에서 부시 당시 부통령과 함께
이처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의 초기부터 실질적인 경제 개혁의 지도자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과감한 경제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자오쯔양은 1980년에 국무원 총리로 발탁되어 1980년대 중국의 경제개혁 전반을 총괄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중국이 도입했던 과감한 경제체제 개혁은 거의 모두가 그의 책임 하에 입안, 집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오쯔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했으며, 국제대순환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의 중국의 경제개혁은 모두 자오쯔양을 통해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정당화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쯔양의 업적은 경제개혁 분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87년 1월,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세로 물러나게 되자, 개혁파를 대표하여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취임,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1987년과 1988년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치가 중대한 시련에 봉착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지만,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충돌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이 발생하였고, 시장경제의 부작용도 노출되면서 개혁 정책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협공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보수파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과장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고, 민주파들은 계획경제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려면 더 대담한 시장경제가 필요 하고, 정치개혁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 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라고 주장하는 보수파, 시장경제에로의 이행을 제대로 진행시키고 시장경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경제개혁에 발맞추어 대담한 정치개혁도 추진해야 한다는 민주파의 압박에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양두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야오방 총서기가 좀 더 민주파 지식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보적 세력의 의견을 반영하였다면, 그렇기 때문에 보수파들의 총공세의 표적이 되어 1987년 1월에 실각하였다면, 자오쯔양은 좀 더 실무관료형 개혁 지도자로서 정치-이념 문제보다는 경제문제에 집중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1987년을 전후로 한 미묘한 시기에 민주파 지식인들보다는 정치안정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민주파와 보수파의 협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사실 논리적으로 신권위주의론자들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논쟁에서 제3의 중국적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987년 10월의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가 한 정치보고의 제목,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따라 전진하자>는 것은 바로 보수파와 민주파의 주장을 절충하면서도 국가 중심의 단계적 정치-경제의 상호 보완적 발전노선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자오쯔양은 이 보고서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당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개혁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오쯔양은 차액선거제도를 전국적이고 전면적으로 확산 적용시킬 것을 선언하였고, 당정 분리, 당기 분리의 원칙을 관철시켜 정부와 사회단체의 분리, 그리고 기업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였으며, 다양한 이익집단들과의 상호 협력과 협상을 통해 당의 이익 대표성을 넓히려는 제도 개혁도 강조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당 지배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중국 당국이 추구하는 정치개혁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오쯔양은 지금 당장 당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서구적인 민주제도를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도 경제개혁과 더불어 점진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당 국가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기존의 당국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천안문 사태로 양극화되기 이전에 중국 사회와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정책 논쟁은 보수파와 민주파, 그리고 신권위주의론자들간의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이면서 권력투쟁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국을 산출하였다.
특히, 1986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경제적 위기가 복합적으로 사회적 긴장을 높이고, 이에 따라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두개의 기둥으로 형성된 개혁 세력에 대한 보수파들의 대공세가 집중되는 시점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미묘한 균열이 나타나고, 후야오방의 퇴진으로 이어지면서 천안문 사태 이전에 이미 개혁지도부는 내상을 입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갈등이 언제 어떤 계기로 발생했고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이었는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1986년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후야오방에 대해 자오쯔양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1986년 12월 말, 후야오방 총서기가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보수파의 공세에 대해 덩샤오핑이 동조하고, 자오쯔양마저 당 내부 회의에서 후야오방을 비판하자 후야오방 총서기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진 것을 알고 크게 낙담, 대성통곡한 후 사임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미무라 고지 지음, 송현웅 옮김, [중국 권력 핵심] (청어람미디어: 2002), pp. 56-63 참조)
물론 자오쯔양 측은 지금도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간의 갈등과 차이는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배신했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을 사임하는 과정에서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오쯔양은 이런 점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이런 점은 자오쯔양의 측근이었던 张钢이 최근 콜럼비아 대학 학술회의에서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 张钢:“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10)“ <多維新聞 (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5) 천안문 사태와 자오쯔양-- 자오쯔양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정책 노선은 경제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도입등 대담한 개혁 개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치 분야에서는 당의 지배 원칙에 도전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1986년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후야오방에 대해서 보수파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총서기로 취임한 이후 후야오방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학생운동에 대해서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마침내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분노를 사, 정치적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천안문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자료가 공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지난 2001년초 장 리앙(張良)이라는 가명의 중국 공산당 간부 출신에 의하여 편찬 출판된 [천안문 페이퍼]가 발표된 이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의 논의과정이 드러나면서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 [천안문 페이퍼] 에 대해서는 이 홈페이지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으니 참고
(http://www.suh-china.com/bbs/zboard.php?id=situati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무력 진압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부 자료를 폭로한 [천안문 페이퍼]와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시 총리였던 리펑등은 처음부터 강경노선을 주장했지만, 자오쯔양은 ‘민주와 법제에 의한 해결책’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평화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건한 노선을 주장했던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4월 23일 북경을 떠나고, 자오쯔양 총서기가 부재중에 리펑 총리는 양상쿤 (楊尙昆) 국가주석등의 동의를 받아 덩샤오핑을 설득,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하는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운동을 정치동란으로 규정하고, ‘기치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한다’는 당의 방침을 천명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발표되자 학생들의 반발이 오히려 확대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4월 30일 북한에서 귀국한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참모인 바오퉁으로 부터 이런 전후 사정을 보고 받고, 5월 초에 정치국 상위 등을 통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주장했으며, 대체로 ‘민주와 법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는 기본 방향에 대해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의 사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단식투쟁 등으로 더욱 격렬해 지고 악화되면서 보수파들의 반발도 심화되는 과정에 5월 16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그리고 고르바초프와 자오쯔양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역사적인 중소 화해가 선언되는 정상회담이 천안문 사태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이었지만, 자오쯔양과 고르바초프 회담에서 자오쯔양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날 오후 5시 40분, 댜오위타이 (釣魚臺) 영빈관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 모두에 자오쯔양은 ‘중대한 문제의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으며, 그런 결정은 덩샤오핑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지난 13기 1중전회에서 내려졌다’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자오쯔양의 이같은 발언의 진의가 무엇이든, 이런 발언이 국내외에 공개되면서 덩샤오핑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중국 정치를 독단하고 있다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오쯔양의 이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 덩샤오핑의 딸 鄧楠이 전화로 자오쯔양을 격렬히 비판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의 폭로는 덩샤오핑에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 씨우려는 것이라면서 자오쯔양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직후 5월 17일 천안문 광장은 100만의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슬로간 에서부터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까지 등장하면서 천안문 사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 이런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천안문 페이퍼];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핵심]이외에도 최근 자오쯔양의 85세를 기념해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 개혁과 자오쯔양’이란 회의에서 발표된 아래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张钢, “ 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沈昆, “赵紫阳在89学运期间的两件大事”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20_9_29_30_656.html)

이런 가운데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원로들의 회의가 개최되고, 이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 방침이 결정되었으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물론 덩샤오핑은 더 이상 자오쯔양을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쯔양에게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자오쯔양은 일단 수궁했지만, 곧 이어 개최된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워회도 계엄령 시행을 결정하자 건강을 이유로 총서기직 사임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5월 19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한 학생들 앞에 나타나 ‘학생제국,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대중앞에서 살아진 이후 오늘까지 오랜 연금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6)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과 정치-경제의 동시적 발전론 좌절 

자오쯔양이 1989년 5월 19일 새벽에 학생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들어 내 고별인사를 하던 그 순간, 자오쯔양 총서기를 수행, 자오쯔양의 바로 뒤에서 굳은 얼굴로 자오쯔양의 연설을 지켜보았던 당시 당 판공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 (溫家寶)가 오늘의 국무원 총리가 되어 자오쯔양의 복권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직답을 피하고, 대신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역설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의 변화 무쌍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원자바오나 후진타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오쯔양이나 후야오방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내심 인정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장쩌민이나 리펑 등과는 달리, 이들은 천안문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고, 또 당시의 권력 투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 지도부의 정통성은 천안문 사태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수호했고, 동시에 대담한 경제개혁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장쩌민 노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 지도부의 입장에서 천안문사태에 대해 재평가하기 어렵고, 또한 자오쯔양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처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개혁파의 지도자로 출발해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역사적 공헌을 했으면서도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등 발전과정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모순에 직면,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희생은 결국 중국 현대화과정에서 정치-경제의 동시 발전론의 좌절과 신권위주의와 경제발전 우선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