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 | |
저서명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출판사 | 동녘 |
연도(ISBN) | 2013(978897297695)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지그문트 바우만 저, 안규남 역, 동녘, 2013): 소수의 부가 모두에게 혜택을 미치는가?
1.
알랭 투렌(Alain Touraine)과 함께 후기 산업사회의 가장 진지한 비판자로 손꼽히는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새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그런데 제목이 다르다. 원제는 "Does the Riche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인데, 한국어 제목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원제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 즉 '트리클 다운'(trickle down)과 같이 대기업이 성장하면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의 삶도 나아지는지, 아니면 '매튜 이펙트'(Matthew Effect)와 같이 가진 사람은 더 가지게 되고 갖지 못한 사람은 더 빈곤하게 되는 사회적 부조리를 전달한다. 반면 한국어 제목은 '불평등'이라는 모호하고 논쟁적인 주제 속에 양극화와 빈곤의 대물림에 불쾌한 우리의 심성을 자극한다. 원래 저자가 전달하려던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설득적인 제목을 버리고, 불평등한 사회에 대해 이미 반감이 굳어지거나 특정한 방향으로의 해결책을 이미 다짐한 사람들에게 책을 사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출판사가 책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은 일일까? 밋밋한 제목으로 독자를 끌 수 있는 시장은 아니라는 점은 백번 인정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견이 고스란히 전달되면서도 독자를 끌 수 있는 주제를 더 고민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출판사에서 목차 옆에 기록해 놓은 '저작권' 관련 기록도 석연치 않다. "Does the Richness of The Benefit Us All? By Zygmunt Bauman"이다. 즉 원제를 잘못 기입한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야할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부주의는 어쩌면 지금의 제목이 갖는 미세한 차이가 가져올 부분에 대한 무관심으로 확대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바우만은 서문에서부터 "경제성장 근본주의"(economic grwoth fundamentalism)가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10쪽, 원문 2쪽). 그리고 그는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관적이며, 자신감에 차고, 활기찬"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심해지고 있다고 한탄한다(원문 2쪽). 즉 '소수'와 '다수'의 문제,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의 대를 이어가며 벌어지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the prime victim of deepening inequality will be democracy"(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주된 피해자는 민주주의, 원문 2-3쪽)라고 말이다. 즉 지금의 불평등은 소수와 다수의 갈등을 이제는 민주적 절차로 풀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우만의 지적은 그의 책이 단순히 '불평등'을 '평등'으로 전환시켜야할 의무를 가르치거나 지금의 부조리를 참지 말라는 선동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일차적으로 그의 지적은 '민주적 절차'를 통한 '민주적 심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당신들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불평등'의 문제를 고민해야한다는 경고다. 플루토크라시(부가 지위를 결정하는 정치)가 메리토크라시(능력이나 실적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을 잠식했고, "개인적 이익 추구가 공공선의 추구를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도 제공한다"(the pursuit of individual profit also provides the best mechanism for the pursuit of the common good)는 소위 '자유시장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정당성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원문 3쪽). 다시 말하자면, 바우만의 지적은 인류의 삶과 함께 시작한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감정적 접근이 아니라는 점을 유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지금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이면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편견과 잘못된 원칙들을 다시 살펴보자고 권하고 있다(원문 5쪽).
2.
'매튜 이펙트'에 대한 좋은 책이 하나 있다. 산 안토니오에 있는 세인트 매리(St. Mary) 대학의 다니엘 릭니(Daniel Rigney) 교수가 쓴 책이다. 제목이 "The Matthew Effect: How Advantage Begests Further Advantage"(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인데, 성경의 마태복음 13장 12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에 기초한 '매튜 이펙트'라는 논쟁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실제로 '매튜 이펙트'는 콜롬비아 대학의 사회학과를 이끌었던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 1910-2003)이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불평등'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그런데 릭니교수는 머튼의 뒤를 이어 계속된 학계의 논쟁이 '왜 이러한 불평등이 지속될까에만 관심이 있었고,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했"는지에 대한 반성에서, 이른바 수정주의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Rigney, 2-3).
릭니의 수정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지적들을 분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 '가능성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은 다르다는 점이다(Rigney 7). 특히 미국사회에 만연된 이른바 '성공할 기회(an opportunity to suceed)'는 '성공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an equal opportunity to suceed)라는 말과는 엄연하게 다른 말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우리도 요즘 '개천에서 용나던 시대는 끝났다'고 개탄하고, '반전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이렇듯 미국도 이제는 '기회의 나라'가 아니라는 말을 자주 듣고, 이런 말 속에 담긴 가장 미세한 차이를 '균등한 기회' 즉 '성공할 가능성'(capability)에서 찾는 것이다.
둘째, 파이가 커질수록 나누어 먹을 것이 커진다는 이야기의 허상을 지적한다. 소위 상대적인 매튜 이펙트, 큰 몫은 부자가 먹고 작은 여분을 가난한 사람이 먹더라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더 잘살게 될 수 있다는 신화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바로 바우만이 지적하는 '트릭클 다운'의 실패, 그리고 크리스티아 프리랜드(Christia Freeland)의 "Plutocrats: The Rise of the New Global Super-Rich and the Fall of Everyone Else"(Penguin Books, 2013; 한국어 번역, 플로토크라트, 열린 책들, 2013)가 지적하듯 빈부의 격차외에도 새롭게 등장하는 초국가적 거부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는 주장인 것이다. 단순히 양극화의 심화로 감정을 부추기보다, 부를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질시와 분노를 유발하기보다, 진지하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원칙부터 하나씩 짚어보는 것이다.
셋째, '매튜 이펙트'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 기제를 묻고 있다. 콜롬비아 대학의 머튼이 왜 특정 과학자에게 연구비가 몰리냐는 질문에서 시작된 문제를 이제 정치사회적 것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운동에 선재하는 관찰자적 성찰'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부유한 엘리트들은 점점 부유해진다는 분노의 응어리, 앞으로 남은 것은 절망 뿐이라는 개탄의 목소리, 이것들을 새로운 제도 또는 새로운 형태의 도덕적 원칙을 찾는 시민들의 활력으로 승화시키려는 몸짓인 것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이 '가능성'의 평등에 대한 논의로부터 구체화되고, '탁월성'에 대한 염원이 로마의 공화정의 '원로원'을 낳았듯이, 우리도 매튜 이펙트를 막을 방도를 논의하자는 제안이다.
3.
바우만의 논의도 릭니의 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비록 '좌파'라는 꼬리표가 붙는 단어나 학자들의 인용문이 뒤를 잇지만, '좌파'라는 꼬리표 속에 담긴 무지막지하고 대책없는 비판꾼이라는 비난과 그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바라보는 불평등의 심화에 대한 태도는 이미 이러한 문제를 시장 또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지적해온 학자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조셒 스티클리츠(Joseph Stiglitz)를 '좌파'라고 한다면, 아마도 바우만의 비판도 좌파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 중, 지금의 불평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도 마사 너스바움(Martha Nussbaum)도 모두 '불평등'이 가져올 폐해가 자유주의의 원칙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큰 위협이라고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기회'의 평등을 '가능성'(capability)의 평등으로 대체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바우만이 제시하는 이미 공인된 자료의 수치들은 우리의 보다 신중한 관심을 요구한다. 특히 2007년 금융위기 이후에 "재앙의 채찍"이 선택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아픔을 주었고(번역 18쪽), 글로벌한 자본은 이제 개발도상국의 노동으로 몰려감으로써 "선진 경제들에서는 일자리들이 가속적을 사라지면서" 소위 중산층의 '프리카리아트(pricariat,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의 전락을 가져오고 있으며(번역 20-21쪽), 이제 세계는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 W.W. Norton & Company, 2013; 이순희 역, 열린 책들, 2013)가 말하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점을 차분히 설명한다(번역 25쪽).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바우만의 관찰을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 몇 가지 진지한 토론을 벌여야할 주제들이 노정되어 있다. 첫째는 메리토크라시가 가져온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이 주제는 오랫동안 정치사회적 구조에 대한 진지한 논의에서 빠지지 않았다. 다만 대처 수상과 같이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던 사람들에게서, 소위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filling prophecy)을 통해 불공정한 사회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그와 이전의 접근이 조금 다른 이유다(번역 36-37쪽). 그런데 바우만의 접근은 수사학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효과적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동체 전체'에 기여한다는 신념은 대처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장례식 연설'에서 보듯, 아테네인들도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의 실현'을 하나의 같은 축에 놓고 이해하고 믿었다. 즉 자유주의의 극소수가 만든 신화를 시장에 대한 일반적 이해로 치환한 것이 문제이고,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라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자 숙제를 대안처럼 언급한 것이 아쉽다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과 '공공선'의 조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치사회적 구조, 즉 바우만이 말하느 "현실적인 선택지들이 선택될 확률들의 분포 또한 운명"이 되어버린 구조(번역 40쪽), 그리고 자유주의자들도 개탄하는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지 않는 달음박질 또는 무한 경쟁에 대해 이야기의 초점을 모았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둘째, '경제성장'의 구호아래 은폐된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이 경제성장의 구호아래에서 사회적 규제의 고삐에서 해방된 은행과 자본에 대한 이야기다. '경제성장의 신화'에 가려진 슬픈 역사를 우리만큼 뼈져리게 경험하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따라서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에서 만들어졌다는 '경제성장'의 신화 이전에, 우리는 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그 부작용을 충분히 경험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장' 중심의 경제정책이 가져오는 문제점에 대해서, 특히 1997년 IMF를 경험한 우리는 더욱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다만 '아이'도 '어른'이 되고자하는 욕심에서 '성장'에 대한 야릇한 나르찌시즘을 갖고 있다는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철학적 성찰을 다시한번 고민해 보아야한다. 아울러 구약성서에 나오듯 '번성하라'(parah rabah)는 말처럼, 성장은 신화로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인간의 욕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한번 검토해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고민과 성찰이 없다면, 바우만의 지적은 곧 '대안없는 비판' 또는 '이상주의'로 비난받기 쉽상이다. 아니라면 'One-upmanship'(남들보다 한발 앞서기, 번역 79쪽)을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밖에 안된다는 지적에 무력하다.
5.
짧은 책은 그것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한 마디로 바우만의 이번 책은 지금까지 자기가 말해왔던 바를 간결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에, 이것만으로 그의 학문적 여정이 보여주는 첨예하고 처절한 연구자의 업적을 깎아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공공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들은 지금에 있어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들을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통해 해결하려는 저자의 숨결이 담겨있다. '신뢰,' '연대,' 그리고 '상호협력'에 대한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번역 87-106쪽). 그러기에 '불평등의 자연스러움'을 지킬 노력만큼이나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움'을 막을 정치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느낀 사람들은 바우만의 다른 저서들도 읽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그 어떤 번역자도 오역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번역은 저술만큼이나 힘든 작업임을 안다. 그래서 이런 때마다 비판을 자제하거나 지나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마디 해야겠다. 전체적으로 괜찮은 번역이지만, 이렇게 작은 책에 그렇게 많은 자극이 필요할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제목이 번역과 관련된 문제는 번역서의 제목의 주제가 되는 부분에 이르면 더욱 심해진다. 세 번째 파트인 '성장'이 대세가 된 "몇몇 큰 거짓말"(some big lies)에 대한 논의가 "새빨간 거짓말, 그보다 더 새빨간 거짓말"로 번역된 것에서부터 이런 과장이 시작된다(27-89; 번역, 45-106쪽). 섹션의 제목이 매우 선정적으로 선택되었지만, 바우만의 진정한 초점은 '경제성장'이라는 신화를 통해 정치사회적 규제로부터 해방된 시장과 자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즉 번역본의 조금 과장된 태도가 전체적인 내용을 가린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자극이 없었다면, 은행과 자본의 탈규제가 '노동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부는 한없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경고가 무시된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정치사회적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의미있는 지적들이 크게 손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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