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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3일 금요일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 대륙 최고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 장거정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 대륙 최고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장거정 (원전) , 스반산 (역주) 지음 | 김락준 옮김 | 아템포 | 2014년 09월 25일 출간

목차

렁청진 교수의 특별 서문 _사람을 다스리는 지혜, 모략
역주자 서문 _중국 최고의 현자 장거정의 처세절학, 《권모서》

1장 지찰권(智察卷) | 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자객을 놀라게 하여 쫓아낸 제갈량 / 혜안으로 모략을 알아챈 남문자 / 무덤을 파고 도둑을 잡은 소무명 / 보물을 건넨 상황을 자세히 관찰한 후성자 / 위험으로부터 오나라를 안전하게 지킨 주아부 / 화를 막아 자신을 보호한 곽자의 / 소인배를 잘못 기용한 제환공

2장 주모권(籌謀卷) | 책략을 세우는 것에 관하여|
나라를 생각해서 진나라의 법령서를 챙긴 소하 / 약속을 지킨 위문후 / 인내심을 갖고 변경을 잘 지킨 이목 / 지모를 써서 천하를 안정시킨 배광정 / 술자리에서 군 통수권을 빼앗은 송태조 / 정의로 초나라를 정벌한 한고조 / 정확한 계산으로 남당을 손에 넣은 송태조 / 지혜롭게 태자를 보호한 장량 / 모두의 원성을 잠재우기 위해 후에 봉해진 옹치 / 기막힌 생각으로 진나라를 평정한 고영 / 위나라를 포위하고 조나라를 구한 손빈 / 여드레 만에 양요를 물리친 악비 / 조성을 위협한 한세충 / 동쪽을 치는 척하고 서쪽을 친 경감 / 거금으로 재상의 자리를 산 여불위 / 길을 빌려 괵나라를 공략한 진헌공

3장 용인권(用人卷) | 사람을 쓰는 것에 관하여
백기의 옛 사당을 수리하자고 간언한 이비 / 악의에게 지혜를 구한 연소왕 / 혜안으로 영척을 알아본 제환공 / 서신을 태워 사람들을 안심시킨 한광무 / 위서한 사람을 기용한 진회 / 지혜로 병란을 평정한 주금 / 갓끈이 끊긴 부하에게 모욕을 주지 않은 초장왕 / 귀천을 나누지 않고 상을 준 이연 / 공을 치하하고 예를 중시한 조양자 / 도적으로 도적을 다스린 위원충

4장 사상권(事上卷) | 윗사람과 일하는 것에 관하여
황제를 속이지 않은 노종도 / 충심으로 왕의 과실을 덮은 한기 /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제갈각 / 조정의 권위를 세운 이소 / 재치 있게 악감정을 없앤 적방진 / 신하로서 왕을 속이지 않은 조빈 / 큰 틀에서 문제를 생각한 여이간 / 충성심으로 나랏일을 계획한 고필 / 주인을 위해서 의로움을 사온 풍훤

5장 피화권(避禍卷) | 화를 피하는 것에 관하여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때를 기다린 유비 / 자신의 생각을 감춰 화를 면한 습사미 / 논밭을 달라고 해서 목숨을 지킨 왕전 / 병든 척하고 화를 면한 사마의 / 태자를 가르친 왕숙문 / 눈치 빠르게 화를 피한 진평 / 큰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장량과 진평 / 장소를 기용하라고 추천한 이강 / 통곡으로 화를 면한 요숭 / 양흠의에게 교묘하게 선물을 건넨 이덕유 / 생선을 거절한 공손의 / 환온을 모시지 않은 왕맹 / 전체적인 형국을 관찰한 기자 / 일보 전진을 위해서 용퇴한 소숭

6장 도세권(度勢卷) | 형세를 파악하는 것에 관하여
세를 분석해서 진나라를 정벌한 돈윤 / 관인을 잃어버려도 놀라지 않은 배도 / 복숭아 두 개로 세 용사를 죽인 안영 / 지혜로 두 장군을 항복시킨 이광필 / 큰 지혜로 원소를 파악한 조조 / 대세를 내다본 소옹 / 기다렸다가 싸운 주덕위 / 서역에서 탁월한 공을 쌓은 반초 / 지혜와 용맹함으로 진정을 평정한 경순 / 결책으로 천하를 구한 구준 / 권세와 무력으로 적을 이긴 시극굉 / 위기의 난을 평정한 설장유

7장 공심권(攻心卷) | 마음을 공략하는 것에 관하여
사자를 죽이고 고평을 빼앗은 구순 / 대의로 동인을 굴복시킨 공용 / 지혜로 혜시를 곤란에 빠뜨린 장주 / 시간을 헷갈리게 해서 악당들을 물리친 풍 태수 / 기발한 지략으로 항우를 이긴 유방 / 지혜로 완안량을 물리친 유기 / 지혜로 초장왕을 이긴 장의 / 기막힌 계략으로 흉노를 물리친 진평 / 비위를 맞춰 황위를 빼앗은 양광

8장 권기권(權奇卷) | 기묘한 지략에 관하여
기묘한 지략으로 억울한 사정을 조사한 어사 / 성을 쌓아 ‘도둑’을 막은 이윤칙 / 교묘히 ‘타도계’를 쓴 사안 / 신과 통하는 척하고 위엄을 세운 주원장 / 돈을 던져 승패를 정한 적청 / 교묘한 지략으로 도적떼를 소탕한 왕경 / 지혜로 중상모략을 물리친 왕동정 / 편지를 바꿔 사람을 구한 한옹 / 지혜로 강빈을 잡은 양정화 / 지모로 잃어버린 도장을 찾은 교유 /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묵돌

9장 유수권(謬數卷) | 속임수에 관하여
이민족에게 철 공급을 중단한 매국정 / 기지로 지방 세력을 이긴 척현 / 지혜로 의문의 사안을 해결한 최사경 / 첩자로 적을 놀라게 한 왕덕용

10장 기변권(機變卷) | 임기응변에 관하여
지혜로 왕의 자리를 빼앗은 공자 소백 / 속임수로 관중을 얻은 환공 / 빈 바구니로 양수를 속인 오질 / 말 한마디로 천지를 정한 장열 / 기지로 도둑을 잡은 장가윤 / 남의 칼을 빌려서 반란군을 죽인 조위 / 거짓말로 팽총을 설득한 오한 / 적진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진명제 / 지혜로 추격병을 따돌린 위효관 / 진주를 잃어버리고 연나라의 변경을 넘은 장추

11장 풍간권(諷諫卷) | 넌지시 나무라는 것에 관하여
한무제에게 교묘하게 간언한 동방삭 / 지혜로 대당을 지킨 적인걸 / 풍간으로 사람을 구한 안영 / 지혜로 유현좌를 설득한 정섭 / 웃긴 말로 악법을 없앤 간옹 / 소릉을 보고 충간한 위징 / 재미있는 말에 뼈를 숨긴 우전

12장 중상권(中傷卷) | 중상모략에 관하여
현묘한 지혜로 미인을 중상한 정수 / 계획적으로 태자를 해친 여희 / 날조된 말로 상국의 자리를 지킨 감무 / 계획적으로 반대파를 제거한 여이간 / 교묘하게 위지고를 깎아내린 요숭 / 음모를 꾸며 충신을 해친 노기 / 말 한마디로 적청을 끌어내린 문언박 / 진언으로 화를 자초한 탁경

13장 미색권(美色卷) | 미인계에 관하여
덕을 잃고 색욕을 좇은 명무종 / 호부를 훔쳐 은혜를 갚은 여희 / 미색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킨 서시 / 향락으로 황제를 미혹시킨 합마 / 황후의 총애를 받고 해친 무측천 / 정수를 이용해서 목숨을 구한 장의 / 희를 바치고 은총을 구한 여불위 / 대의를 위해서 남편을 쫓아 보낸 중이의 부인

부록 _《권모서》 원문 및 독음

책 속으로

《권모서權謨書》는 명나라의 대정치가 장거정張居正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장거정은 강성했던 명나라가 몰락하는 전환의 시기에 살았고, 10년 동안 수보(수석 대학사)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운을 되돌리고 대명 왕조에 희망과 생기를 다시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중국 역사학자 레이황(중국명 황런위黃仁宇, 1918~2000)은 저서 《만력십오년萬歷十五年》에서 장거정을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장거정은 영원한 지혜의 상징이다. 그는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에 수염을 길게 길렀고, 몸에 장식품을 두르는 것을 좋아했으며 도포는 날마다 새것처럼 접은 흔적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장거정의 성품은 용모와 완전히 일치해서, 좀처럼 말을 하지 않지만 한번 말하면 핵심을 찔렀다. 또한, 말이 간단하고 정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중국의 옛 격언인 ‘부인불언, 언필유중夫人不言, 言必侑中(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는다)’에 부합했다.”
《권모서》가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에 안 나오는 이유는 후세 사람들이 권모술수에 관한 장거정의 글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고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본은 일본의 학자가 원본을 베껴 적은 수사본이고,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권모서》는 권모술수에 관해 참고 가치가 매우 높은 보기 드문 중국의 고대 서적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권모서》에 해설을 더했고, 관련 고사 및 고사 속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평가했다. 오류가 있으면 비판하고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역주자 서문 : 10~11쪽]

月暈而風, 礎潤知雨. 人事雖殊, 其理一也. 惟善察者能見微知著.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비록 사람의 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치는 같고, 오직 관찰을 잘하는 사람만이 미세한 것에서 본질을 발견한다.
어느 날 손님이 유비를 찾아왔다. 황위에 막 오른 유비는 정무를 보느라 많이 바빴지만 성정이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므로 그 손님을 만나기로 했다.
손님도 예의가 발랐다. 그는 유비가 황제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찬양했고, 좋은 입담으로 세상의 흐름을 이치에 맞게 말해 유비도 그의 말을 재미있게 들었다.
그런데 유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손님의 눈빛이 이상해졌다. 이때 제갈량이 문을 열고 들어와 유비에게 긴히 보고할 것이 있다고 말했고, 제갈량을 본 손님은 잠시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 손님이 나간 뒤에 제갈량이 물었다.
“폐하, 방금 여기에 있던 손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유비는 손님을 칭찬한 후 의아한 듯 물었다.
“승상은 그를 의심하오?”
제갈량이 말했다.
“신이 보기에는 조조가 보낸 자객 같습니다.”
유비는 깜짝 놀랐다.
“그럴 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제갈량이 말했다.
“신이 들어올 때 그가 폐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는 표정은 즐거우나 눈빛에 두려움이 있었고, 아래를 쳐다보며 눈알을 사방으로 굴렸습니다. 겉모습이 간사하고 속으로 못된 마음을 품었으니, 필시 조조가 폐하를 죽이려고 보낸 자객입니다.”
유비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병사들에게 자객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자객은 담을 넘어 도망가고 없었다. [1장. 지찰권_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 19~20쪽]

所謀在勢, 勢之變也, 我强則敵弱, 敵弱則我强. 傾擧國之兵而伐之, 不如今自伐.
지혜를 모으는 목적은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형세의 변화란 내가 강해지면 적이 약해지고, 적이 약해지면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전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정벌하는 것보다 적을 스스로 약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

양견은 주정제를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수나라의 개국 황제인 수문제이다. 어느 날 그는 대신인 고영을 불러서 물었다.
“이제 수 왕조를 세웠으니 마땅히 나라를 통일해야 합니다. 나라 땅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국면을 끝내고 진陳나라를 평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영은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수나라는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력이 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군사력이 아닌 지혜로 싸워야 합니다.”
수문제는 고영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지혜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찍이 지혜로 싸우는 것에 대해서 전략을 세웠던 고영은 거침없이 말했다.
“강북 지역은 추워서 농작물이 늦게 익지만 강남 지역은 더워서 벼를 일찍 추수합니다. 적들이 수확할 시기에 우리가 사병과 말을 모으고 전쟁을 준비하는 척하면 적들은 반드시 방어하기 위해서 군대를 정비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농사를 돌볼 수 없어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합니다. 적들이 대비를 마치면 우리는 다시 경계를 풀고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면 적들은 우 닫기

출판사 서평

“비 오기 전날,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모략이다!”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명재상 장거정의 지혜, 《권모서(權謀書)》
수천 년 동안 대륙이 품어온 위대한 모략의 지혜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비록 사람의 일은 서로 다르지만 이치는 같고, 오직 관찰을 잘하는 사람만이 미세한 것에서 본질을 발견한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상 물정을 통해 거짓된 본질을 발견하겠는가? 자세히 관찰하면 진위를 알고 허와 실을 분별할 수 있다.
알아차리면 분명해지고, 분명해지면 분별하고 처리해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뚜렷한 효과를 얻지 못한다. (…)
_ 《권모서》 〈지찰권(智察卷)〉, 본문 17쪽

청 말기의 대학자이자 개혁가였던 양계초(梁啓超)는 자신의 저서 《중국 6대 정치가》에서 명(明)대의 재상 장거정(張居正·1525~1582)을 전국시대의 상앙(商?)·춘추시대의 관중(管仲)·위진시대의 제갈량(諸葛亮)·당나라의 이덕유(李德裕)·송나라의 왕안석(王安石) 등과 함께 중국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했다.
명나라 300년을 대표하는 걸출한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천하의 기재로 불리며 특히 정치, 병법, 권모술수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손꼽힌다.
장거정 사후에 후세 사람들이 그가 생전에 처세와 병법 등에 관해 남긴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 바로 《권모서(權謀書)》다. 이번에 나온 신간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장거정 원전·스반산 역주, 김락준 옮김, 아템포 펴냄)는 중국의 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 중인 스반산(史半山) 교수(헤이룽장黑龍江 대학교)가 《권모서》 원문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고,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일화나 제갈량 같은 중국의 대표적인 모략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권모서》의 내용을 더 알기 쉽고 생생하게 풀이한 책이다.

수천 년 중국 역사가 증언하는 나를 지켜내는 최고의 요령, 모략
행운은 영원히 충성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지혜를 믿고 타인의 도움을 얻어내라!


(…) 지혜를 모으는 목적은 유리한 형세를 조성하기 위해서이다. 형세의 변화란 내가 강해지면 적이 약해지고, 적이 약해지면 내가 강해지는 것이다. 전국의 군대를 동원해서 정벌하는 것보다 적을 스스로 약하게 만드는 것이 낫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책략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은 작은 것을 갖지만 난 큰 것을 갖고, 다른 사람은 가까운 곳을 보지만 난 먼 곳을 본다. 비가 오기 전에 준비를 마치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_ 《권모서》 〈주모권(籌謀卷)〉, 본문 47쪽

《권력이 묻거든 모략으로 답하라》는 장거정의 《권모서》에서 다룬 13개의 지혜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다. 세심한 관찰의 힘을 다루는 〈지찰권〉에서 시작해 모략의 영원한 테마 미인계를 다루는 〈미색권〉까지가 그 지혜의 길이다. 각 장에서 소개하는 지혜의 주제와 첫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1장. 지찰권(智察卷, 지혜롭게 살피는 것에 관하여) “달무리가 지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주춧돌이 축축해지면 반드시 비가 내린다.”
2장. 주모권(籌謀卷, 책략을 세우는 것에 관하여) “군자는 나라를 생각하지만 소인배는 자신을 생각한다.”
3장. 용인권(用人卷, 사람을 쓰는 것에 관하여) “정치의 이치는 선과 악을 분별해서 상과 벌을 분명하게 주는 것에 있다.”
4장. 사상권(事上卷, 윗사람과 일하는 것에 관하여)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모실 때 성실해야 한다.”
5장. 피화권(避禍卷, 화를 피하는 것에 관하여) “가슴에 천하를 구하려는 뜻을 품었다면 마땅히 숨겨야 한다.”
6장. 도세권(度勢卷, 형세를 파악하는 것에 관하여) “세는 ‘적응’하는 추세이다.”
7장. 공심권(攻心卷, 마음을 공략하는 것에 관하여) “성지(城池)는 파괴할 수 있지만 마음은 굴복시킬 수 없고, 적장을 체포할 수 있지만 의지는 빼앗을 수 없다.”
8장. 권기권(權奇卷, 기묘한 지략에 관하여) “정세를 잘 살피는 사람은 분명하게 알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롭다.”
9장. 유수권(謬數卷, 속임수에 관하여) “상대의 속임수를 알아차렸을 땐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알아도 티 내지 않으며 상대를 황당한 지경으로 유도해야 한다.”
10장. 기변권(機變卷, 임기응변에 관하여) “개인의 존망은 아침에 달렸고, 국가의 안위는 저녁에 달렸다.”
11장. 풍간권(諷諫卷, 넌지시 나무라는 것에 관하여) “함축적인 비유는 말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충고할 수 없는 내용을 거리낌 없이 말할 때 쓴다.”
12장. 중상권(中傷卷, 중상모략에 관하여) “세상에서 헐뜯는 것보다 더 악독한 짓은 없다.”
13장. 미색권(美色卷, 미인계에 관하여) “덕행을 어지럽히면 현명한 사람이 떠나고, 정사를 그르치면 소인배가 득세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이자 현자로 손꼽히는 장거정의 지혜는 팍팍한 현실에서 나 자신을 지켜내고 나아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가슴에 새길 만한 인생독본으로서 그 몫을 다할 것이다.
역주자 스반산 교수는 일본 학자가 원본을 손으로 베껴 쓴 《권모서》 수사본을 토대로 이 역주 작업을 진행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수사본은 현재 일본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 《권모서》에 관하여
《권모서》는 명나라 대정치가 장거정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장거정은 강성했던 명나라가 몰락하는 전환의 시기에 살았고, 10년 동안 내각수보로 있으면서 기우는 국운을 되돌리고 대명 왕조에 희망과 생기를 다시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중국 역사학자 레이 황(중국명 황런위黃仁宇, 1918~2000)은 그의 저서 《만력십오년(萬曆十五年)》에서 장거정을 생동적으로 묘사했다.
“장거정은 영원한 지혜의 상징이다. 장거정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지만 한번 말하면 핵심을 찔렀다. 또한, 말이 간단하고 정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어 중국의 옛 격언인 ‘저 사람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는다(夫人不言, 言必侑中)’에 부합했다.”
《권모서》가 《장문충공전집(張文忠公全集)》에 나오는 않는 이유는 후세 사람들이 권모술수에 관한 장거정의 글을 모아 책으로 정리하고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본은 일본 학자가 원본을 베껴 적은 수사본으로, 현재 일본의 도쿄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권모서》는 권모술수에 관해 참고 가치가 매우 높은 보기 드문 중국의 고대 서적이다

장거정 평전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동륜

장거정 평전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동륜 지음 | 이화승 옮김 | 에게 | 2010년 04월 25일 출간

책소개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이 되고 있는 개혁가, 장거정
『장거정 평전』은 파격적인 개혁으로 16세기 중국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장거정의 일대기를 담은 평전이다. 정치의 핵심은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여겼던 그는 신속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쓰러져가던 명나라 왕조의 생명을 70여 년이나 연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개혁으로 꼽히는 인사(고성법)와 조세제도(일조편법)의 내용을 살펴본다. 또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현 중국의 상황에서 본받아야 할 그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소개

저자 : 주동륜

저자 주동륜(朱東潤)은 1896에 태어나 198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기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했으며 서예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1913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South West College에서 유학한 뒤 돌아와 무한대학, 중앙대학, 제로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복단대학 중문과 교수로 부임해 초기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활동했다. 중국의 고대문학과 역사를 연구해 중국 최초로 《중국문학 비평사 대강》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저술했다. 꾸준히 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연구 하다가 전기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육우전》, 《두보서론》, 《매요신전》, 《장거정 대전》 등을 집필했고, 자전적 작품인 《주동륜 자전》을 통해 80여 년에 걸친 인생 여정과 20세기 중국의 변화를 잘 묘사해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전기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가 속한 분야

역자 이화승(李和承)은 대만 국립 사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연수한 뒤 1997년 대만 국립사범대학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사회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 경제, 특히 상업과 상인문화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중국의 고리대금업》을 썼으며 《중국의 상업혁명》,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를 잇는 상인 매판》, 《성세위언》,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제국의 상점》 등을 옮겼고, 다수의 논문이 있다

목차

제1장 형주에서 수재가 태어나다
제2장 정치에 발을 들여놓다
제3장 3년의 휴가
제4장 다시 정치의 소용돌이에 뛰어들다
제5장 끊이지 않는 정쟁 1
제6장 끊이지 않는 정쟁 2
제7장 대정변이 일어나다
제8장 개혁을 단행하다 1
제9장 개혁을 단행하다 2
제10장 첫 타격을 입다
제11장 명예와 야망의 기로에 서다
제12장 마침내 개혁을 완성하다
제13장 마지막 힘을 다하다
제14장 최후―개혁의 타살

해제 ― 중국사 속의 개혁과 장거정|이화승

부록
명나라 황제 계보(1356~1644)
명대 중앙관직 조직도
내각 구성 변동표(1567~1582)
장씨 가계도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정치다.”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이 되고 있는 개혁가 , 장거정


장거정, 중국 개혁의 온고지신
20세기 세계사의 근본 틀을 바꾸는 최고의 정책이라 평가받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도입하는 사상 초유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중국은 장거정張居正(1525~1582)이라는 16세기 정치인을 개혁의 온고지신으로 삼고 있다. 장거정의 개혁을 다룬 책들이 성황리에 출간되고 TV에서도 그를 다룬 사극이나 다큐멘터리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방만함과 무력함으로 쓰러져가던 명나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왕조의 생명을 70여 년이나 연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거정, 과연 그는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개혁가들은 기득권층의 반발과 이를 막지 못한 최고 통치권자의 변심으로 중도에 좌초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다. 특히 중국 유가정치 내에서 개혁은 황제는 물론 기득권층의 지지를 얻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 그런데 장거정만은 정통 유학 관료로서 법치를 내걸고 개혁을 실시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명 중엽은 국가 경제에서부터 민생, 국방, 관료제도 등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곪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장거정은 오랫동안 백성을 울려왔던 이러한 폐단과 부조리한 관료 제도 등을 과감하게 개혁해나갔다. 효율, 부패, 균형의 문제로 늘 고심했으나 시도된 개혁은 반드시 결과가 있었다. 백성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았던 열정의 개혁가 장거정, 오늘날 중국 정부가 그를 개혁의 온고지신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의 과감한 리더십보다는 민심을 읽을 줄 알았던, 그리하여 백성을 위한 것이 곧 나라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성을 울리는 폐정弊政을 바로잡다
명대에는 재정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1528년부터 40여 년간 국가 재정은 늘 적자였다. 이러한 적자는 종실에 지급되는 과도한 봉록과 역참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국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백성에게 또 다른 과세를 부가시켰다. 또한 당시 남쪽은 왜구가 창궐했고, 북쪽은 알탄 칸의 침입으로 국경의 사정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이러한 상황에 장거정은 분노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온갖 재화로 뇌물을 쓰고, 백성은 신음하고 있다. 한, 당 말기와 무엇이 다른가? 조상의 공덕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으나 사직의 존망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 이후 정권의 핵심에 자리잡은 장거정은 이러한 폐정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정치의 핵심은 무엇보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로 파면되거나 사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고관이나 지방의 토호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면서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지방관들은 이를 알면서도 그들의 권세에 눌려 세금을 걷지 못했고 이들이 내지 않은 세금은 백성에게 전가되었다. 장거정은 새로운 세금을 만들지 않고 이 세금만 걷더라도 국가 재정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음을 꿰뚫고 있었고, 이를 개혁한 것이다.

신속하고 과감한 개혁 정책 ― 인사와 조세 제도 개혁
장거정은 1573년부터 10년 동안 내각 수보로서 어린 황제 신종과 황태후 이씨의 절대적 신임과 협조 아래,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행사하며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개혁은 전방위적으로 벼락치듯 신속했다. 장거정이 단행한 가장 대표적인 개혁은 인사제도의 개혁이다. 늘 “법이 행해지지 않고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먼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지 법을 논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는 고성법考成法이라는 제도를 마련해 방만했던 관료들의 의식을 개혁해나갔다. 관료의 1년 업무 결과를 평가해서 인사에 반영하는 고성법은 문하생과 당파에 좌우되던 당시의 인사 관행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관리들은 수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파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했다. 더욱이 정책의 발의부터 추진 과정, 시행, 결과 등이 추적되는 고성법의 도입으로, 인재를 효율적으로 배치,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가 단행한 조세개혁(일조편법一條編法)은 중국 조세제도 중 가장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제도로 곡물 등 실물로 걷던 세금과 직접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요역이 모두 은으로 통일되었다. 국가는 세금으로 걷은 엄청난 양의 실물 운반, 저장, 화폐 전환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복잡한 요역 체계를 화폐로 대신함으로써 업무가 간소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운영에서도 효율을 기하게 되었다. 중국은 은의 생산이 충분하지 않아 밀 무역으로 일본과 남미의 은을 수입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쇄국의 문을 열고 세계와 마주하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만나는 역사적 단초가 된 것이다.

실패조차 담대히 인정할 줄 알았던 개혁가, 장거정
명조 때의 수리水利는 정치, 군사적인 이유로 황하에 집중되었다. 수도 북경이 북쪽에 있어 전체 국방 문제가 북쪽에 힘이 쏠렸고 이 때문에 조운漕運이 중요했다. 그러다 보니 매년 남쪽에서 운반되는 조운은 국가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황하가 수시로 범람해 조운에 어려움이 발생했고 황하 일대는 공황 상태에 빠지기 일쑤였다.
장거정은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의 수리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장거정 자신이 물길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 일대를 지나가본 적도 없어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그는 의지와 정치적 역량이 있다 하더라도 능력 있는 인재가 없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담담히 실패를 인정하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는 철저하게 전문가를 믿고 지원했다. 그리하여 황하 치수는 반계순에게, 북방 이민족 문제는 척계광에게 맡겼다. 이들은 장거정의 전폭적 신임과 지지를 받으며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책을 실시해 광대한 지역의 안정에 기여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의 말로
“신들은 언제나 성현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관리들입니다.” 어린 신종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신종에게 늘 성현의 말씀을 가르쳤고 특히 정치의 본질에 대해 매번 언급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권력에 연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능했지만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서툴렀다”, “의심이 많고 도량이 적었으며 언관을 억압하고 아첨배를 맹신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0년을 하루 같이 전력을 다해 정치 개혁에 매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자가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대단히 집요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권력을 잡으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도 버리고 스승도 내치며 환관과 결탁하면서, 오직 권력만 유지할 수 있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 초상을 치르지 않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으면서도 괘념치 않고 오직 일에만 매달렸다. 그에게서 온순하고 관대한 유학자의 모습보다 엄격하고 권술과 책략에 능하며 치열한 권력 투쟁 속에서 냉철하고 노련하게 언관과 여론을 주도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장거정의 모습에서 신종은 존경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고 장거정과 자신은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지금까지 자신을 제지해왔던 장거정이 죽자, 신종은 그의 모든 개혁 정책을 무산시키고 부관참시와 멸족을 명했다. 또한 자신의 욕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상업세, 광업세 등의 세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명조의 멸망이 신종 때 뿌려진 씨앗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게 했다.

개혁, 그 어려운 도전
중국사를 읽다 보면 수많은 인물을 접하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면 시대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서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의미한다. 역사에서 개혁은 마치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처럼 한시도 계속되지 않으면 바로 넘어져버리는 속성이 있다. 따라서 정치가 계속되는 한 크든 작든 개혁이 없는 시대는 없었고 수많은 개혁가들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춘추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어 훗날 중국 최초 통일국가의 기초를 세운 상앙商?, 서한 말의 혼란 정국을 《주례周禮》가 지배하던 시대로 되돌리려 했던 왕망王莽, 송대 화려한 문민정치 실현으로 이상과 나약한 대외관계라는 현실과의 차이를 메우려 했던 왕안석王安石, 명말 어린 황제를 보필해 왕조의 새로운 중흥을 시도했던 장거정, 청말 쓰러져가는 늙은 제국을 근대식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했던 강유위康有爲 등이 있었지만, 이중 장거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개혁에 실패했다.
개혁은 일시적인 욕심이나 무리한 추진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철학과 오랜 준비, 높은 도덕적 처신, 철저한 주변 관리가 뒤따라야 하는 어려운 도전이다. 더욱이 혼자만의 힘으로는 결코 성과를 거둘 수 없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장거정의 삶에 투영된 개혁을 거울로 삼아, 개혁의 방향을 새롭게 세워야 할 때다. 오늘도 개혁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2일 목요일

신칸트학파,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

신칸트학파


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은 1830년대의 헤겔 철학에 이르러 정점(頂點)에 도달하였다. 피히테나 셸링이 칸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것이 헤겔에게서 절대관념론(絶對觀念論)으로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념론으로 내닫는 경향에 반대하고, 실증적(實證的)·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유물론적(唯物論的)인 실재론(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학파들이 이미 1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헤겔 철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헤겔 학파가 좌·우·중간파로 분열되어 혼선을 일으키고 자연주의·실증주의·통속적 유물론이 한편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이들 양자를 모두 불신하고 오히려 칸트의 담백한 이성비판(理性批判)으로 돌아가 지식·과학의 기초를 새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신칸트학파(혹은 신칸트주의)이다. 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칸트 철학을 그의 비판주의(批判主義)에 연결지어 그 정신을 부활·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헤겔 생전에도 자기의 사상을 칸트에 연결지으려 한 사람들이 있었고, <칸트 전집>이 두 곳에서나 나왔으며, 헤겔 사후에 이런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져 칸트의 입장으로 돌아가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1840년대에 현저해졌다.
<제1기> 19세기 중엽에 통속적 유물론자들의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 정신(精神)을 단순한 물질의 부대현상 내지 대뇌(大腦)현상으로 보는 데 반발하여 이것을 인식론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칸트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생리학자 헬름홀츠(1821-1894), 철학자 랑게(<유물론자(唯物論者)>) 등이다. 그들은 유물론 역시 다른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인 것이라고 반박하고 일종의 특수한 아프리오리한 정신의 제 법칙, 즉 정신의 체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역시 <칸트와 그의 아류(亞流)들>(1865)을 쓴 리프만이었다. 그는 사실판단도 가치판단도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치적인 요청 또는 규범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인간이성의 한계내에서 비판적인 형이상학을 수립하려고 하여 칸트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2기> 1870년대부터는 칸트 철학의 연구가 본격화되어 코헨의 <칸트 경험의 이론>(1871)이 나오고, 빈델반트가 <역사와 자연과학>(1874) 속에서 개성기술적 방법과 법칙정립적 방법을 분류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 밖에 문헌학(文獻學)적인 칸트 연구가 1880년에 융성하여 아르놀파이힝거 등의 활약이 있었다.
<제3기> 그러나 신칸트학파의 독자적인 철학체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890년대 이후였다. 마르부르크 학파(혹은 마부르크 학파)에서는 코헨·나토르프·카시러, 서남(독일) 학파에서는 빈델반트·리케르트·라스크 등이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자기의 철학체계를 구성해 내놓았고, 1896년에는 잡지 <칸트 연구>도 창간되었으며, 이 때부터 개별과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독일 이외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에도 파급되었다.
법철학에서는 루돌프 슈탐러가 마르부르크 학파의 생각을 순수법학에 응용하였고, 교육학에서는 나토르프가 헤르바르트주의에 대해 사회교육학을 설했으며, 신학에서는 알브레히트 리츨이 종교를 가치판단의 총괄로 보았고, 트뢸치도 신학에서 리츨의 제자로 서남독일학파 계통이다. 베버도 리케르트와 관계가 있고 사회문제에서는 베른슈타인·슈타우딩거·아들러카를 포를렌더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코헨 자신도 윤리적 사회주의를 부르짖었고, 나토르프는 이를 사회이상주의로 전개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르누비에·필롱·라슐리에,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케어드·토머스 힐 그린,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칸토니 등이 신칸트 학파에 속한다.
이와 같이 발전하던 신칸트학파도 1930년대에 와서는 현상학자(現象學者) 후설·하이데거, 마르부르크 학파 출신의 하르트만 등의 칸트 형이상학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생철학자(生哲學者) 딜타이·지멜 등의 칸트 인식주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자,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쇠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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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트 학파
현상학

신칸트 학파〔槪說〕[편집]

칸트에서 시작된 독일 관념론은 1830년대의 헤겔 철학에 이르러 정점(頂點)에 도달하였다. 피히테나 셸링이 칸트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것이 헤겔에게서 절대관념론(絶對觀念論)으로 완결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념론으로 내닫는 경향에 반대하고, 실증적(實證的)·자연주의적(自然主義的)·유물론적(唯物論的)인 실재론(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학파들이 이미 19세기 초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헤겔 철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헤겔 학파가 좌·우·중간파로 분열되어 혼선을 일으키고 자연주의·실증주의·통속적 유물론이 한편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자 이들 양자를 모두 불신하고 오히려 칸트의 담백한 이성비판(理性批判)으로 돌아가 지식·과학의 기초를 새로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니 이것이 바로 신칸트 학파이다. 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칸트 철학을 그의 비판주의(批判主義)에 연결지어 그 정신을 부활·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등의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헤겔 생전에도 자기의 사상을 칸트에 연결지으려 한 사람들이 있었고, <칸트 전집>이 두 곳에서나 나왔으며, 헤겔 사후에 이런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져 칸트의 입장으로 돌아가 철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1840년대에 현저해졌다. <제1기> 19세기 중엽에 통속적 유물론자들의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 정신(精神)을 단순한 물질의 부대현상 내지 대뇌(大腦)현상으로 보는 데 반발하여 이것을 인식론적으로 비판하기 위하여 칸트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생리학자 헬름홀츠(1821-1894), 철학자 랑게(<유물론자(唯物論者)>) 등이다. 그들은 유물론 역시 다른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허구적인 것이라고 반박하고 일종의 특수한 아프리오리한 정신의 제 법칙, 즉 정신의 체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칸트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역시 <칸트와 그의 아류(亞流)들>(1865)을 쓴 리프만이었다. 그는 사실판단도 가치판단도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치적인 요청 또는 규범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인간이성의 한계내에서 비판적인 형이상학을 수립하려고 하여 칸트 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제2기> 1870년대부터는 칸트 철학의 연구가 본격화되어 코헨의 <칸트 경험의 이론>(1871)이 나오고, 빈델반트가 <역사와 자연과학>(1874) 속에서 개성기술적 방법과 법칙정립적 방법을 분류하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하였다. 그 밖에 문헌학(文獻學)적인 칸트 연구가 1880년에 융성하여 아르놀(1828-1905), 파이힝거 등의 활약이 있었다. <제3기> 그러나 신칸트 학파의 독자적인 철학체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890년대 이후였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는 코헨·나토르프·카시러, 서남(독일) 학파에서는 빈델반트·리케르트·라스크 등이 칸트 철학의 입장에서 자기의 철학체계를 구성해 내놓았고, 1896년에는 잡지 <칸트 연구>도 창간되었으며, 이 때부터 개별과학에도 영향을 미치고, 독일 이외의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에도 파급되었다. 법철학에서는 루돌프 슈탐러(1856-1938)가 마르부르크 학파의 생각을 순수법학에 응용하였고, 교육학에서는 나토르프가 헤르바르트 주의에 대해 사회교육학을 설했으며, 신학에서는 알브레히트 리츨(1822-1889)이 종교를 가치판단의 총괄로 보았고, 트뢸치도 신학에서 리츨의 제자로 서남독일학파 계통이다. 베버도 리케르트와 관계가 있고 사회문제에서는 베른슈타인·슈타우딩거(1865-1923)·아들러카를 포를렌더(1860-1928)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코헨 자신도 윤리적 사회주의를 부르짖었고, 나톨프는 이를 사회이상주의로 전개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루느비에·피롱(1830-1914)·라셸리에,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케어드(1835-1908)·토머스 힐 그린(1836-1882),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간트니(1840-1906) 등이 신칸트 학파에 속한다. 이와 같이 발전하던 신칸트 학파도 1930년대에 와서는 현상학자(現象學者) 후설·하이데거, 마르부크크 학파 출신의 N. 하르트만 등의 칸트 형이상학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 생철학자(生哲學者) 딜타이·짐멜 등의 칸트 인식주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자, 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쇠퇴하게 되었다. <田 元 培>

신칸트주의의 선구자[편집]

新Kant主義-先驅者 1855년 헬름홀츠가 칸트의 업적을 찬양하고 2년 후 루돌프 하임(1821-1901)이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선험적(先驗的)인 것으로 바꾸어야 될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신칸트 주의는 실제로 1860년대에 개시되었고, 젤러·피셔·랑게·리프만의 이름을 들 수 있다. 피셔의 <근세철학사> 중 <칸트>(1860)는 칸트 철학을 상세히 서술하고, 젤러의 <인식론의 의의와 과제에 대하여>는 헤겔의 사변적인 논리학을 비판하고 인식론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리프만은 <칸트와 그 아류들>(1865), 랑게는 <유물론사>(1866)에서 각기 칸트 철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였다. 또 로체의 <철학체계>(제1부), <논리학>(1874)은 현실과 당위를 구별하여 서남독일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젤러[편집]

(에두아르트) Eduard Zeller (1814-1908) 독일의 고대철학사가. 이미 1862년부터 칸트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뷔르템베르크주(州)에서 태어났으며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1839년 튀빙겐 신학원의 복습교사(復習敎師), 다음해에 튀빙겐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847년 베를린의 신학교수, 1849년 마르부르크의 교수, 1862년 하이델베르크의 철학교수가 되고, 1872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으며 1894년 퇴직하였다. 처음에는 헤겔에서 출발하였으나 철학사가(哲學史家)로서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했다. 주저 <그리스인의 철학>(1844-1852)은 처음 3권으로 나오고 후에는 6권이 되었는데 고대철학에의 좋은 안내서이다. 인식론의 의의도 강조하였다.

피셔[편집]

(쿠노) Kuno Fischer (1824-1907) 독일의 근세철학사가. 실레지아 출신으로 1844년부터 라이프치히에서 언어학, 할레에서 신학과 철학을 배우고 2년간의 가정교사 생활 후에 1805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교수 자격을 얻었으나 3년 후에 강의가 불허되었다. 1856년에는 베를린에서 새로이 교수 자격을 얻어, 동년 예나 대학 교수로 초대되었다. 1872년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하였다. 헤겔 학파의 중앙파에 속해 있었으나 1860년의 칸트 연구서로 칸트 철학의 부활에 기여하였다. 대저 <근세철학사>는 1852년부터 1877년에 걸쳐 나온 6권으로 된 저서로, 1897년에는 10권이 되었다. 이 철학사는 유려하고 빛나는 필치로 쓰여졌으며 근세철학 연구가에게는 좋은 입문서이다.

랑게[편집]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Friedrich Albert Lange (1828-1875) 독일의 철학자. <유물론사(唯物論史)>로 유명하며,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은 생리학과 칸트에 의해 반박되었다고 한다. 헬름홀츠와 함께 신칸트 학파의 단서를 열었다. 마르부르크 대학에 코헨을 초빙, 마르부르크 학파 형성의 계기를 만들었다.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취리히와 본에서 언어학을 배우고 4년간 본에서 강사 생활을 한 후, 1858년부터 1862년까지 고등학교에 재직, 후에 저널리즘과 실업계에 종사하고, 1866년에 취리히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 1870년에 취리히의 철학교수, 1872년에 마르부르크의 교수가 되어 거기서 사망했다. 유물론을 자연과학의 개별연구 방법으로 인정하였다.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해 반박된다. 랑게의 칸트 해석은 헬름홀츠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감각생리학(感覺生理學)의 성과에 입각하고, 인식은 인간이 유(類)로서 갖는 심신적(心身的)인 체제에 따른다고 생각하였다.

유물론사[편집]

唯物論史 (1866) <유물론의 역사와 현대에 있어서의 의의 비판>은 랑게의 주저. 초판은 1권이나 1873년부터 1875년에 걸쳐 증보되어 2권으로 된 제2판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책 중의 하나이다. 이 책의 의의는 유물론의 역사를 서술하고, 당시 유물론의 한계를 밝혀 간접적으로 신칸트 주의를 촉진시켰다는 점에 있다. 랑게의 칸트 해석은 당시 감각심리학의 대표자인 요하네스 페터 뮐러(1801-1858)나 헬름홀츠와 마찬가지로 칸트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인식론에만 의존하여, 이를 인간이 유(類)로서 가지고 있는 체제에 대한 이론이라고 하였다. 칸트는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회(轉回)를 주장하고 대상은 우리들의 개념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개념은 인간의 심신적(心身的)인 체제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사물을 공간과 시간에 따라 직관한다. 우리들의 지각은 이러한 심리학적 조직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형이상학은 전체를 생각하려고 하지만, 전체는 시(詩)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인류의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형이상학은 개념시(槪念詩)인 것이다. 그것은 종교나 예술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를 보충하는 이상계(理想界)에 속한다. 유물론은 자연과학의 개별연구의 격률(格律)이며 방법인 한에서만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으나, 하나의 철학적 세계관이 되려고 하면 사변적으로 되어 현실세계를 초월하게 된다. 이것이 랑게의 주장이다.

리프만[편집]

Otto Liebmann (1840-1912) 독일의 철학자. 25세 때의 저작 <칸트와 그 아류들>은 각장 끝에 "그러므로 칸트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풀이하여 칸트에의 관심을 고취하였다. 그는 예나·라이프치히·할레에서 수학·자연과학·철학을 배우고 1865년 튀빙겐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 1872년 슈트라스부르크의 조교수, 1882년에 예나의 교수가 되었다. 랑게처럼 감각심리학에 입각하여 칸트를 인식론적으로 이해한다. 우리들의 경험은 오성의 선물이다. 사실의 언명은 언제나 사실을 넘은 것에 대한 언명을 포함하며 후자가 전자를 가능하게 한다. 주어진 지각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동일성(同一性)·연속성(連續性) 등의 비경험적인 전제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다.

마르부르크 학파[편집]

Marburg 學派 랑게, 코헨, 나토르프처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신칸트 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을 말한다. 카시러, 게르란트(1869-1952), 카를 포를렌더(1860-1928) 등도 이 학파에 포함시킬 수 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도 처음에는 이 학파에 속해 있었다. 창립자는 코헨으로 코헨과 나토르프가 죽은 다음에는 마르부르크 학파가 해체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코헨은 칸트처럼 감성(感性)과 오성(悟性)의 2원론을 취하지 않고 공간과 시간도 카테고리(범주)라 하고 순수사유(純粹思惟)야말로 근원(根源)의 산출(産出)이며 근원의 사유라고 하여 과학의 논리학을 수립하고 수학과 자연과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하였다. 근원의 사유는 근원의 산출이며 근원은 곧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다. 곧 인식의 내용은 이러한 사유의 형식에 의해 근거가 부여되고 구성된다. 순수인식(純粹認識)은 끊임없이 근원으로부터 산출되고 있는 것이다. 나토르프도 인식은 무한한 과정이라고 한다. 그도 논리학은 과학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여러 법칙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였다. 순수한 사유가 내용을 구성한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마르부르크 학파는 논리주의(論理主義)라고 지목되지만, 코헨이나 나토르프는 칸트의 정신을 살린 윤리학을 세우려고 했으며, 코헨은 미학(美學)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했고 나토르프는 사회교육학을 주장했다. 슈탐러의 법철학이나 포를렌더의 사회철학도 이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학파는 인식 곧 과학비판을 사명으로 하였다.

코헨[편집]

Hermann Cohen (1842-1918) 유대계 독일 철학자. 마르부르크 학파를 창설하였다. 안할트주(州) 출신으로 1861년부터 브로츨라프 대학에서 철학·언어학·유대 신학을 배웠고, 1864년 베를린으로 옮겼으며, 철학을 트렌데렌부르크(1802-1872), 민족심리학을 슈타인탈(1823-1899)에게 배웠다. 다음해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까지의 필연성·우연성에 관한 논문으로 할레 대학을 졸업했다. 베를린에서 청강을 계속하고, 플라톤을 연구하는 한편 수학·자연과학도 연구했다. 칸트 연구는 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1871년에 <칸트의 경험의 이론>을 출판, 이 책으로 베를린의 사강사(私講師)가 되려고 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하고 랑게의 초청으로 마르부르크의 사강사가 되었으며, 1875년 조교수, 다음해에 랑게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다. 70세까지 마르부르크에 살았으며, 퇴직 후에는 베를린의 유대 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거기서 사망했다. <칸트 윤리학의 기초 부여>(1877), <칸트 미학의 기초 부여>(1889)는 전기한 <칸트의 경험의 이론>과 함께 칸트 연구의 3부작이며, <순수인식의 논리학>(1902), <순수의지의 논리학>(1904), <순수감정의 미학>(1912)은 체계의 3부작이다. 체계의 제4부는 문화의식의 통일을 논하는 심리학이었으나 출간되지 않았다. 코헨은 칸트 철학을 발전시켜 주관은 과학의 의식이며 인식은 대상의 산출(産出)이라고 하여 과학의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순수인식의 논리학[편집]

純粹認識-論理學 (1902) 코헨의 <철학체계> 제1부에 해당되는 것. 논리학은 사유의 교설이며 인식에 관한 이론이다. 사유의 특질은 인식이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사유는 그 자체 외에는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사유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자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와 같은 순수한 사유만이 순수한 인식을 산출한다. 인식을 행하는 사유는 창조적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존재의 근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존재는 사유와 상관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유는 근원에 관한 사유이다. 근원에는 외부로부터 무엇이든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근원은 원리인 것이다. 원리란 바로 근거를 세우는 것이다. 근거는 근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사유가 근원에 있어서 존재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하면, 이 존재는 사유가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는, 근거와 다른 근거를 가질 수는 없다. 일체의 순수인식은 이 근원의 원리가 변화한 것이다. 근원의 사유는 합일(合一)에 있어서의 분화(分化)의 전개이며, 분화에 있어서의 합일의 전개이다. 인식은 폐쇄된 체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인식은 산출하는 데에만 존재한다. 이것이 이상적인 것이 갖는 성격이다. 개념은 사유의 요구를 만족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개념은 새로운 물음인 것이다.

나토르프[편집]

Paul Natorp (1858-1924) 코헨과 함께 마르부르크 학파의 중심적 철학자. 1871년 이래 베를린과 본에서 우제너(1834-1905)에게 언어학을 배우고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라스(1837-1885)에게 철학을 배웠다. 1881년 마르부르크의 코헨 밑에서 철학 교수 자격을 얻었다. 4년 후 조교수가 되고, 1892년에 교수가 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1903), <정밀과학의 논리적 기초>(1910), <일반심리학>(1912) 등 외에 <사회교육학>(1899), <사회이상주의(社會理想主義)>(1920) 등의 저서가 있다. 이로 미루어 그가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행한 광범한 활동을 알 수 있다. 코헨이 죽은 후, 사유·존재·인식에 일체의 통일적인 의미를 주는 것, 사유와 존재의 원점에 있는 것을 구해 그때까지의 논리주의(論理主義)로부터 이상주의적인 존재론(存在論)으로 전환하였다.

카시러[편집]

Ernst Cassirer (1874-1945) 유대계의 독일 철학자. 브로츨라프 태생으로 1892년부터 1896년까지 법률·독어학·근대문학사를 베를린, 라이프치히, 하이델베르크, 다시 베를린에서 배웠으며, 짐멜로부터 코헨의 말을 듣고, 1896년부터 마르부르크의 코헨 밑에서 철학을 배우고 1899년 졸업하였다. 베를린에서 연구하고 <근세의 철학과 과학에서의 인식문제>(1906-1920)에 착수, 1906년 베를린의 강사(講師), 1919-1933년 함부르크의 교수. 주저 <상징형식(象徵形式)의 철학>(1923-1929)을 공간(公刊), 나치스 정권에 쫓겨 스웨덴·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서 예일·컬럼비아에서 가르쳤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 출발하였다. 인식문제를 넘어서 의식(意識)을 학(學)의 의식으로부터 신화적(神話的)인 의식으로 확대하고 자연과학의 사유구조(思惟構造)로부터 정신과학·문화과학의 사유구조로 나아가, 문화의 기본개념으로서의 상징의 의미를 명백히 하였다. 고대·근세의 철학사적 연구나 인식론 분야에서도 유명하며 <칸트 전집>을 편집(1912-1918)하였다.

인간[편집]

人間 (1944) 카시러가 미국에서 영어로 출판한 책으로 만년의 사상을 아는 데 편리하다. 주저 <상징형식의 철학>에서 언어·신화적인 사고·인식의 현상학(現象學)을 분석한 카시러는 인간의 문화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상징형식을 찾아내려고 한다. 인간도 생물이므로 환경 안에 있으나 생물처럼 환경의 자극에 직접 반응할 뿐 아니라 상징형식이 개재(介在)한다는 점이 인간의 특성이다. 의미있는 상징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서 응답하는 것이 인간이므로 인간이란 상징적 동물(象徵的動物)인 것이다. 문화는 의미의 세계이며 상징의 형식적 전체이다. 신화·종교·언어·예술·역사·과학의 분야에 걸쳐 카시러는 상징형식을 구했다.

서남독일 학파(바덴 학파)[편집]

西南-學派(Baden 學派)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빈델반트, 리케르트, 라스크 등으로 대표되는 신칸트 학파의 하나로, 주명(州名)을 따서 바덴 학파(Baden 學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르부르크 학파가 주로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비판, 곧 근거 부여를 주안점으로 한 데 대하여 역사과학·문화과학의 근거 부여를 시도했고, 또 사실적인 존재에 대해 타당한 가치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빈델반트는 피셔의 후임인데, 피셔는 원래 헤겔 학파에 속해 있었다. 라스크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함으로써 이 학파는 리케르트로 끝난다. 리케르트의 뒤를 이은 것은 야스퍼스였기 때문이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브루노 바우흐(1877-1942)나 리하르트 크로너(1884- ? )를 들 수 있다. 또 막스 베버도 리케르트의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있으며, 또한 신학에서는 리츨과 트뢸치 등이 서남독일 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 학파가 철학계에 기여한 것은 역사과학 내지 문화과학을 대상과 방법면에서 자연과학과 대비시켜 그 방법론적 특성을 보여준 점에 있으며, 문화과학의 기본이 되는 문화가치, 일반적으로 그 가치의 철학에 대해서 반드시 영향력이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학파는 가치의 철학을 주장함으로써 인식론적인 칸트 해석으로부터 객관주의와 존재론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컨대 라스크는 신칸트 주의를 고대철학과 종합하려고 했으며, 대상의 원형(原型)으로서의 형식이나 범주를 생각하고 인식주관(認識主觀)은 이미 형식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감각적인 사태를 체험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년의 리케르트도 지각될 수 있는 존재, 이해될 수 있는 예지적인 존재,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되기 이전의 체험할 수 있는 전 대상적(前對象的)인 존재의 세 가지를 생각하고 존재론적인 다원론(多元論)을 말하고 있다. 마르부르크 학파에서도 나토르프나 하르트만이나 카시러는 인식론으로부터 존재론으로 전환하는 경향을 보였다.

빈델반트[편집]

Wilhelm Windelband (1848-1915) 리케르트와 함께 서남독일 학파의 대표적 철학자. 포츠담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었다. 예나·베를린·괴팅겐에서 철학·역사·자연과학을 배우고 피셔와 로체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괴팅겐 대학의 로체 밑에서 <우연론(偶然論)>으로 학사가 되었으며, 1873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인식의 확실성>으로 철학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1876년에 취리히의 철학교수, 다음해에 프라이부르크의 교수, 1882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리프만의 후임교수가 되었으며, 1894년부터 총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03년에는 피셔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어 죽기까지 재직하였다. <철학사교본>(1892)과 <근세철학사>(1878-80)는 현대에도 잘 읽히는 책이며, <철학개론>(1914)은 자신의 체계적 입장을 밝힌 것이다. 자연과학은 법칙과학이며 법칙정립적(法則定立的)인 데 대하여, 역사과학은 사건의 과학이며 개성기술적(個性記述的)이고, 전자가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데 대해 후자는 일회적(一回的)인 가치가 있는 것을 향한다고 하며, 자연과학에 대한 역사과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철학은 보편타당적인 가치를 취급하고 인간의 문화창조의 목표이며 규범인 문화가치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독일 학파의 문화철학·가치철학이라는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철학사가(哲學史家)로서도 유명하며, 그 문제사적인 방법은 전임자 피셔의 서술 방식을 일보 전진시킨 것이다. 동시에 체계적인 사색에도 힘을 기울여 특히 논문·강연집 <서곡(序曲)>(1883)이 잘 읽히고, 또 <의지의 자유>(1905)는 영향력이 큰 책이다. 사실적인 것과 요구되는 것, 주어진 것과 부과된 것, 실재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 현실과 가치, 인과율과 목적성(目的性) 등의 대립을 인정하고, 전자는 설명과학(說明科學)의 원리, 후자는 로체가 말하는 바와 같이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으나 타당한 규범적인 가치라 하고 논리학·윤리학·미학을 규범과학이라고 불렀다.

철학개론[편집]

哲學槪論 (1914) 빈델반트의 체계적인 주저. '철학개론'이라는 명칭의 저서는 독일을 중심으로 19세기 이래 많거니와 파울젠(1846-1908), 퀼페(1862-1915), 윌리엄 예루살렘(1854-1924), 분트 등의 철학개론과 함께 널리 읽혀진 저작 중의 하나이다. 철학은 인간의 본성 중 형이상학적 요구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철학적인 세계관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인생과 여러 과학이 갖는 과학 이전의 개념이나 철학 이전의 개념을 추궁하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문제와 그 해답은 인식하는 정신과 인식되는 대상과의 필연적인 상호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철학의 역사에 나타나는 주요 문제와 해결의 방향을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기초를 부여하고,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적인 세계관의 가능한 여러 형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철학개론의 임무이다. 철학개론은 역사적인 지식을 주거나 저자의 사색에 끌어들이는 것을 임무로 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적인 사색 그 자체 안으로 독자를 이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개론은 철학의 역사와 체계에 내재적(內在的)인 비판을 하고 철학의 역사를 매개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본질인 이성적 의식에 눈뜨게 해야 한다. 그것은 지(知)와 생(生), 존재와 가치, 이론과 실천, 이론 문제와 가치론 문제라는 두 가지 분류를 통해 각각의 영역을 밝히고 쌍방을 종극적으로 결합하는 종교의 문제에 도달하는 것이다.

리케르트[편집]

(하인리히) Heinrich Rickert (1863-1936) 독일의 철학자로 빈델반트의 후계자. 단치히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하였다. 1888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학사가 되고, 1891년에 프라이부르크에서 교수 자격을 획득하였다. 1894년에 동교의 조교수, 1896년에 릴의 후임으로 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빈델반트의 후임으로 하이델베르크의 교수가 되었다. 프라이부르크 시대에는 하이데거가 그의 연습에 출석, 또 야스퍼스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1921년 이래 동료로 지냈으며, 1932년 퇴직 후에는 야스퍼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처음은 <인식의 대상>(1892)에서 인식하는 주관은 판단하는 주관으로서 인식론적인 주관이며 인식되는 대상은 초월적인 가치인 당위(當爲)라는 입장을 취했다. <자연과학적인 개념 구성의 한계>(1896-1902), <문화과학(文化科學)과 자연과학>(1899)에서 자연과학은 가치를 떠난 자연을 일반화(一般化)의 방법에 의해 기술하는 데 대해, 문화과학은 개성적이며 가치에 관계하는 문화재를 목표로 하는 개별화(個別化)의 방법에 의거한다고 하였다. 자연과학은 몰가치적(沒價値的)인 태도를 취하고, 문화과학은 가치관계적(價値關係的)이다. 이것은 빈델반트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며 서남독일 학파가 문화가치의 철학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화과학의 방법론은 막스 베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철학은 가치의 철학이며, 주저 <철학의 체계>(제1부, 1921)도 문화가치의 체계이다. 가치를 가치 이외의 것과 구별하고, 세 개의 세계, 곧 객관계(客關界)·가치계(價値界)·의미실현(意味實現)의 세계를 생각하고 제3의 세계는 실재적(實在的)인 것과 타당한 것이 결합된 세계로 이론적·예술적·도덕적·종교적인 생(生)의 세계라 하였다. 그것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로 형이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형이전학(形而前學)의 대상이다. 형이전학적 세계, 감성적 세계, 가치의 예지적인 세계가 구성하는 세계 전체를 학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는 형이전학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잉태하는 생을 인정하지만, 당시 유행하는 생철학(生哲學)은 반성을 결여하였다 하여 <생의 철학>(1920)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인식의 대상[편집]

認識-對象 (1892) 신칸트 학파는 인식론적인 칸트 해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세기 말에 나온 리케르트의 이 책은 칸트를 인식론적인 주관주의의 방향으로 철저화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순수화하고, 오히려 여기서부터 주관과 객관과의 논리적인 존재관계(存在關係)를 반성시켰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관주의를 논리적으로 추궁하여 역(逆)으로 논리적인 객관주의에 이르는 길을 여는 것이다. 주관도 객관도 실재성(實在性)을 상실한 의미적(意味的)인 존립(存立)이 된다. 인식에는 주관의 밖에 대상이 있다. 대상이란 인식이 참되고 객관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리케르트는 주관과 객관을 세 가지로 나눈다. ① 자기의 신체와 정신으로 구성되는 자아, 이 자아의 신체 이외의 공간적인 외계(外界), ② 일체의 내용을 포함하는 자기의 의식, 일체의 자존적(自尊的)인 세계, 곧 초월적인 객관, ③ 내용과 구별된 의식, 의식 내용, 곧 내재적(內在的)인 객관으로 나눈다. 제①의 객관은 제③의 객관과 마찬가지로 의식의 사실이라 하고 제②의 객관과 주관을 음미한다. 이 주관은 판단주관(判斷主觀) 또는 인식주관이며, 그 객관은 판단의 피안에 있는 초월적인 대상이다. 판단은 가치의 승인 또는 비가치의 거부이며, 판단이 규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 당위(當爲)이다. 주관은 무명(無名)이고 보편적이고 비인격적인 의식일반이며 일체의 내재적인 객관의 형식이다. 이러한 주관과 객관은 의식일반과 초월적인 규범이 되어 사실성(事實性)과는 전혀 소원(疏遠)한 것이 되고 말았다.

2014년 10월 1일 수요일

미국, 세대 간 계층이동율의 심각한 하락

바로 얼마 전에 출간 된 책의 일부.

숫자는 아버지 직업의 좋은 정도(여러가지 지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Duncan SEI 지수라는게 있다)와 자식 직업의 좋은 정도의 상관관계다. 숫자가 높을수록 아버지 직업이 아들 직업을 결정한다는 것.

미국에서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그와 더불어 세대간 계층이동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미국의 불평등 증가를 능력에 따른 소득의 증가, 메리토크라시의 결과로 보는 분들이 있는데, 무엇이되었든, 그 결과는 보다싶이 다음 세대의 기회평등의 박탈이다.



지나친 불평등은 능력있는 다음 세대가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막음으로써 실질적인 신분제 사회로 퇴화하는 효과가 있고, 이는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그 사회의 장기적 발전에 방해가 된다. 현시점의 지나친 불평등은, 설사 그것이 능력에 따른 성과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흥청망청 과소비를 하고 저축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Posted by 바이커 sovid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