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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7일 토요일

무엇이 한국사회학을 장기불황에 빠지게 만들었나

무엇이 한국사회학을 장기불황에 빠지게 만들었나
비판사회학회, '한국 사회학자들의 역할 정체성 혼란' 논문
2010년 08월 31일 (화) 10:59:50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한 젊은 사회학자가 국내 사회학계의 병폐를 조목조목 파헤쳐 화제다. 선내규 서강대 박사(사회학)의 이 과감한 논문은 지난 16일 비판사회학회(회장 정근식 서울대)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소장 류석진)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를 통해 발표됐다. 지난 40년간 한국 사회학자들이 수행해 온 자기성찰적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이런 논의들이 지닌 비사회학적 특성의 실체를 밝혔다. 뿐만 아니라 국내 사회학자 36명을 대상으로 자신의 역할 정체성과 학술문화에 대한 평가를 설문조사를 통해 정리했다. 사회학자들 스스로가 내리치는 국내 사회학계의 자기 비판은 뼈아팠다.
사회학자 36명 대상으로 정체성 분석
 선 박사는 196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학의 자기성찰적 논의들을 크게 ‘학술적 전문성과 학계의 자율성’, ‘사회학의 현실 적합성과 연구자의 현실참여’, ‘이론 및 방법론의 탈식민화’로 요약했다.
 특히 선 박사는 한국 사회학의 현실부적합성과 대외종속성에 주목했다. 특정 장에 속한 성원으로서 자신들이 속한 집단만을 객관화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학자들의 비성찰성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자기 순환적 논증의 폐쇄회로를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사회학의 어떤 이론이든 서구의 이론적 개념에 의해 ‘가공된’ 우리 역사 안에 정주하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서구 종속성에서 탈피하기 위한 관건은 ‘이론적 생산수단’의 개발이다. 선 박사는 “국제 사회학 공동체에서 소통이 가능하려면 사회학자들이 영어란 언어가 아닌 사회학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론적 생산 수단을 통한 번역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과연 ‘우리의 자생적 이론 만들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는다.
  
  
 한국의 사회학자들이 서구의 사회학자들을 자신의 직장동료보다 더 가까운 우리로 느끼는 것은 잘못인가. 선 박사는 이 어처구니없을지 모르는 질문을 구부려 학자들의 학술적 세계에서 규정된 ‘우리’의 개념을 전복한다. 우리의 자생적인 이론 만들기 문제는 ‘어떻게 지리적 제약을 극복하고 국내외를 가로지르는 상호작용-의례사슬을 구축할 것인가’, ‘상호작용-의례사슬이 분절되거나 화석화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정서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란 문제로 구체화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자들의 학술적 세계가 저널, 학술대회, 저서를 매개로 형성된 ‘인정투쟁의 연결망’에 의해 규정된다면 ‘우리’의 외연에 ‘민족’ 또는 ‘국민국가’란 족쇄는 자칫 창조적 업적의 원동력인 상호작용-의례사슬을 절단하는 패적으로 귀결될 수 있다.
공정한 경쟁, 엄격한 평가 필요
 1990년대 중반이후 지속된 한국 사회학의 장기 불황은 현저하게 낮은 자율성, 사회학자의 역할 정체성 혼란, 사회적 수요의 급격한 축소, 학문후속세대의 고갈이란 악순환의 반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국내 사회학계의 낮은 자율성과 이로 인한 역할 정체성은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국내 학술문화에 대한 불신과 자조만을 낳고 있다. 대부분의 사회학계 학문후속세대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학벌차별, 성차별, 대학문화의 비민주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역할 정체성과 학술문화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선 박사의 설문 결과에 따르면 상당수의 사회학자들은 한국 사회학이 독자적인 이론 및 방법론 구축해 실패한 채 지적 식민성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는 데 동의했다. 대중과의 소통   마저 실패했다는 데도 공감하는 바였다. 사회학자의 역할 정체성을 ‘고도로 전문적인 지식생산자’로 정의한 것과 현실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학은 서구에 비해 왜 열등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까. 사회학자들은 대학 연구자들의 과도한 행정업무를 첫 손에 꼽았다. 이어 연구자들 간 치열한 경쟁과 엄격한 평가, 정당한 보상의 부재가 원인으로 제기했다.
 선 박사는 사회학계 내에서 좀 더 치열한 장내 투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연구보다는 사회자본 축적에 몰두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세력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한국 사회학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서 사회학(자들)의 정체성 제고를 위해 용기 있는 비판을 던진 젊은 사회학자의 고민이 학계에서 어떻게 수용될 지 주목된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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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학, 탈미국화에 실패했다"…'사회학의 위기' 뼈아픈 自省
비판사회학회․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한국사회학의 사회학’ 공동 개최
2010년 08월 31일 (화) 10:54:02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1999년 이후 사회학과가 설립된 대학은 단 한 곳도 없다. 학부제 실시로 실질적인 학생 수는 감소했으며 심지어 일부 대학의 사회학과는 명칭 변경은 물론 폐과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 16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학술대회 ‘한국사회학의 사회학’은 1990년대 이후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 사회학의 그 원인과 대안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자리였다. 비판사회학회(회장 정근식 서울대)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소장 류석진)가 공동 주최한 이번 대회의 화두는 단연 미국이었다. 거대담론의 쇠퇴가 비판적 사회학을 주변화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사진)는 미국 중심의 주류 사회학이 한국 사회학을 지배하면서 사회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위축됐다고 꼬집었다. 사회학은 엄연한 기초과학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특징은 간과된 채 응용학문과 도구적 경쟁에 나서면서 사회학의 쇠퇴가 가속화됐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미국 출신 유학 박사들의 지적, 인적 지배가 확대되면서 사회학은 학문적 다양성과 주체성으로부터 더 멀어졌다. 윤 교수는 “미국사회학과 연관성이 높을수록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한미관계 혹은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어렵다”고 지적하며 “미국에 거리를 두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오히려 희한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비판사회학 역시 탈미국화에 실패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념주의로 편향돼 사회현실과 괴리되다보니 탈미국화는 유럽화로 대체되는 것에 머물렀다. 윤 교수는 “지금이라도 사회학이 비판사회학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비판사회학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기했다.
  
 정태석 전북대 교수 
정태석 전북대 교수(사회교육학,사진) 역시 사회학의 실용적 전환을 주장했다. 정 교수는 “사회학적 분석력이 없는 사회통계나 조사방법은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우선 대학에서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학은 다문화사회나 현대사회 노동 등 실용적 학문으로서 새로운 대안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교육부와 언론에 의해 강요되는 평가와 대학순위 경쟁은 양적 업적만을 가중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질적 연구 쇠퇴를 부추겼다. 정 교수는 “사회학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기 위해선 이론 연구의 과도한 아카데미화와 경험 연구의 과도한 정책화를 지양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날 국내 사회학의 위기에 대한 사회학자들 스스로의 뼈아픈 자기 비판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사회학의 위기 대처방법

사회학의 위기 대처방법
2010년 05월 31일 (월) 14:42:13전상진 서강대·사회학  editor@kyosu.net
  
 전상진 서강대·사회학 
 
사회학은 위기의 학문이다. 이를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사회학이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때는 엄청난 격변의 시기였다. 엄청난 변화에 대한 설명과 이해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사회학은 학문으로 제도화됐다. 동시에 학문의 세계에서 사회학은 상시적 위협에 노출됐다. 사회학은 기존의 학문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밥상’에 ‘수저’를 들이밀었다. 사회학은 이들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학이 사회 위기를 주된 탐구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스스로 상시적인 위기 상황에 있음을 반영하듯 ‘사회학의 위기’는 주기적으로 논의돼 왔다. 미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뷰라보이(Burawoy)는 그 바통을 가장 최근에 이어받은 주자다. 2004년 제출된 그의 위기 진단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사회학은 첫째, 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으며(invisibility) 둘째, 사회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 수단을 제공하지 못하며(irrelevance) 셋째, 사회에 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뷰라보이가 제안한 해결책은 -이것이 바로 사회학 위기에 대한 첫 번째 대처 방법인데-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사회학의 성과와 업적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홍보에 힘써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회과학의 분과학문이 그러하듯 특정한 사회 영역을 ‘대변’해야 한다. 마치 경제학이 시장의 확산을, 정치학이 정치적 안정을 위해 봉사하듯 사회학은 시민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복무해야 한다. 이 임무가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시민사회는 시장과 정치가 사회적인 것과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유일한 보루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수한 사명을 띤 사회학의 특수 영역을 ‘공공사회학(public sociology)’이라 칭했다. 공공사회학은 支柱이자 동료라 할 수 있는 학술적 사회학과 달리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으며 실제적인 사회문제에 知的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공공사회학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물론 격렬한 비판을 포함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강력한 비판은 공공사회학의 ‘개입 야망’을 겨냥한다. 시민사회를 대변하고 사회적 사안에 직접적인 개입을 표방하는 공공사회학은 과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을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실제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과학이라 할 수 있는 경제학은 현재적인 사회적 사안에 대한 실제적 개입을 포기하고 학문으로 남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동시에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게 됐다. 이들 비판자들의 결론은 -이것이 위기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인데- 사회학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사회학의 주장과 반대로 실천적 개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에 대처하는 두 번째 방법의 구체적인 전략은 경제학의 제도적인 기제들을 사회학에 ‘이식’, 온건하게 표현해 ‘모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제학이 정치적 행동과 단호히 결별한 것처럼 사회학도 개입 야망을 포기하고, 수학적 언어와 형식화된 이론으로 단결된 경제학의 분과적 통일성으로 사회학의 내적인 이질성을 극복하고, 경제학처럼 단일하며 응집력을 지닌 전문가 조직이나 학회를 확립해 사회학자들에게 결여된 공동체의식을 배양해야 한다.

서로 대립하는 위기 대처 두 가지 방법은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 즉 성공한 분과학문인 경제학의 족적을 쫓는다. 공공사회학은 경제학이 시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사회학이 시민사회를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은 경제학의 제도적 기제를 모방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다음의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른 분과학문의 ‘성공원칙’을 사회학이 따를 수 있는가. 아니, 따라야 하는가.

사회학은 그 원칙을 따를 수도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사회학의 독특한, 물론 ‘특별한’은 아닌 위상 때문이다. 사회학은 다른 분과학문과 달리 그것의 근거라 할 수 있는 사회 영역이 없다. 예컨대 경제학은 시장의, 정치학은 정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의미 지평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 사회학의 ‘근거 없음’, 더 정확히 대변해야 하는 기능체계의 부재는 -물론 그 대가는 명확한 직업 제시가 어렵다는 점이다- 혁신적 지식 생산에 기여한다. 그 어떤 사회 영역이나 기능 체계의 안정적 재생산을 고려치 않는 혁신적 지식의 생산 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2003년 경제학의 ‘놀라운 발견’을 소개했다. 미국의 최고 경제학자 중 한 명인 로버트 배로(Barro)는 ‘종교가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미 100년 전에 그것을 발견했다. 합리적 시장의 의미 지평을 벗어나기 힘든 경제학자들은 종교적 신념이 시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100년이 걸렸다. 사회학의 독특한 위상을 인정치 않고 다른 학문의 성공원칙을 추종하는 두 가지 방법이 당면 위기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혁신성을 포기하는 것에서 비롯된 사회학의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전상진 서강대·사회학필자는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한국과 독일의 교육불평등 구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논문으로는 「한국은 지금 다원주의로 간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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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사회학, 탈미국화에 실패했다"…'사회학의 위기' 뼈아픈 自省
비판사회학회․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한국사회학의 사회학’ 공동 개최
2010년 08월 31일 (화) 10:54:02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1999년 이후 사회학과가 설립된 대학은 단 한 곳도 없다. 학부제 실시로 실질적인 학생 수는 감소했으며 심지어 일부 대학의 사회학과는 명칭 변경은 물론 폐과 위기에 처해있다.
지난 16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 학술대회 ‘한국사회학의 사회학’은 1990년대 이후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한 사회학의 그 원인과 대안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자리였다. 비판사회학회(회장 정근식 서울대)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소장 류석진)가 공동 주최한 이번 대회의 화두는 단연 미국이었다. 거대담론의 쇠퇴가 비판적 사회학을 주변화시켰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사진)는 미국 중심의 주류 사회학이 한국 사회학을 지배하면서 사회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위축됐다고 꼬집었다. 사회학은 엄연한 기초과학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특징은 간과된 채 응용학문과 도구적 경쟁에 나서면서 사회학의 쇠퇴가 가속화됐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미국 출신 유학 박사들의 지적, 인적 지배가 확대되면서 사회학은 학문적 다양성과 주체성으로부터 더 멀어졌다. 윤 교수는 “미국사회학과 연관성이 높을수록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한미관계 혹은 한국사회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어렵다”고 지적하며 “미국에 거리를 두고 있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등이 오히려 희한한 사례”라고 덧붙였다.
비판사회학 역시 탈미국화에 실패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념주의로 편향돼 사회현실과 괴리되다보니 탈미국화는 유럽화로 대체되는 것에 머물렀다. 윤 교수는 “지금이라도 사회학이 비판사회학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대중’을 비판사회학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기했다.
  
 정태석 전북대 교수 
정태석 전북대 교수(사회교육학,사진) 역시 사회학의 실용적 전환을 주장했다. 정 교수는 “사회학적 분석력이 없는 사회통계나 조사방법은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우선 대학에서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확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학은 다문화사회나 현대사회 노동 등 실용적 학문으로서 새로운 대안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교육부와 언론에 의해 강요되는 평가와 대학순위 경쟁은 양적 업적만을 가중시킴으로써 사회학의 질적 연구 쇠퇴를 부추겼다. 정 교수는 “사회학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하기 위해선 이론 연구의 과도한 아카데미화와 경험 연구의 과도한 정책화를 지양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날 국내 사회학의 위기에 대한 사회학자들 스스로의 뼈아픈 자기 비판은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됐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외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외 지음 |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5년 01월 10일 출간

책소개

이 책은 거장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와 그의 제자 존 스콧슨이 런던 근교의 윈스턴 파르바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권력관계,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파헤친 사회학 분야 연구의 문제작이다. 독일계 유태인으로서, 영국에서 망명자로 생애의 대부분을 말 그대로 기존사회로부터 소외된 아웃사이더로 보냈던 저자 엘리아스는 철저한 사회과학자였다. '연구 대상으로부터 거리두기'는 그가 추구하는 최고의 학문적 원칙이며, 이 책에서도 변함없이 '가치중립'의 정신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

전투적 구호, 도전적 논쟁을 통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어떤 기제를 통해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가 생겨나고 고착되는지 차분하고 꼼꼼하게 추적하는 엘리아스의 서술방식에서 사회학자로서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연구는 계급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또 인종적 측면에서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조그만 지역 공동체 '소우주'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그 안에서 발생한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의 관계를 미시 사회학적으로 고찰한다. 하지만 이 책이 1960년대 영국의 노동자 마을의 특수한 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엘리아스는 윈스턴 파르바를 통해 축약된 형태의 보편적인 인간 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목차

권력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l 옮긴이의 말
 
Ⅰ. 기득권자 - 아웃사이더 - 관계의 이론
집단카리스마를 가진 인간들
권력차이의 근원
집단 사이의 낙인찍기와 편견
집단 카리스마와 집단 치욕
불결한 아웃사이더
인종편견에 숨은 사회적 역학
비경제적 차원에서 본 집단달등
집단환상의 면죄부
'오래 된 집안'의 특별한 친밀감
집단의 의견이 구성원에게 미치는 영향
우리 - 이상은 집단적 질병의 징후
기득권 집단의 낙인찍기
카스트 질서의 근본구조
아웃사이더의 반격
 
Ⅱ. 윈스턴 파르바 마을의 권력관계
 
서론
 
1. 연구방식에 관한 고찰
불평등한 서열
가설적 모델의 결합태와 집단 이미지
결합태 연구의 발전성
 
2. 이웃관계의 형성과정
윈스턴 파르바 마을의 생성과 변화
이방인과 토박이의 마찰
공동체의 구조를 밝히는 이론적 모델
 
3. 1구역과 2구역의 전체 인상
마을의 명망가 구의원 드류 씨
1구역과 2구역 사람들의 생활방식
'마을'의 서열 매김
 
4. 2구역의 모친 중심적 가정
이웃간의 유대와 강한 가족적 결속
여성들의 가족 내 역할
마을의 높은 협동심은 전통
 
5. 지역단체들과 '오래 된 집안'의 네트워크
여가활동의 참여기회
에버그린 노인 클럽
'마을'의 자랑스러운 전통 클럽
지역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다
'마을'의 권력 엘리트
 
6. 3구역의 전체 인상
의지할 곳 없는 '집단거주지' 사람들
'이글'에서의 냉대
자기 구역의 부정
전체를 왜곡하는 소수의 문제가정
조용한 삶을 택한 3구역 주민들
 
7. 수다에 관해
소문의 오락성
소문과 집단의 의사소통
수다의 통합기능과 배척기능
집단 카리스마와 개인의 정체성
 
8. 윈스턴 파르바의 청소년
지역사회의 사회적 통제
공허한 여가 시간의 고통
정체성 형성의 상이한 조건
사회학적 유전과 분열의 재상산
최고 악역을 담당한 '보이즈'
'문제가정'의 이주와 범죄율의 하락
사회적 서열의 재생산 메커니즘
 
9. 결론: 개인은 항상 결합태 속에 있다
지역공동체 연구
'오래된'집단의 특징과 의미
근본적인 유형의 결합태
아노미 개념과 문제
개인과 사회의 관계
 
부록1 동일시의 사회학적 측면
부록2 사회구조와 아노미 개념에 관한 메모
부록3 가족과 지역공동체의 관계
 
Ⅲ. 메이컴 모델: '앵무새 죽이기'에 담긴 흑백갈등
마르트스의 권력차이
'앵무새 죽이기'에 담긴 흑백갈등
메이컴의 백인 사회
자기 집단의 가치를 높이려는 욕망
 
참고문헌
찾아보기

궁정사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궁정사회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박여성 옮김 | 한길사 | 2003년 03월 10일 출간

책소개

궁정의 사회문화적 질서가 서구의 문화적 뿌리라는 테제를 제시한 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이 책에서 프랑스를 위시한 근대 유럽의 궁정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조직한 결합태인 궁정사회의 형성으로부터 절대주의 중앙집권 매커니즘이 창출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목차


.결합태: 궁정사회를 움직이는 매커니즘/ 박여성 ... 21

1.사회학과 역사학 ... 55
2.문제제기를 위한 일러두기 ... 105
3.사회구조의 지표로서의 주거구조 ... 115
4.궁정과 귀족의 결탁 ... 153
5.궁정예법과 의식: 사회적인 권력구조의 기능으로서 인간의 행동과 성향 ... 171
6.궁정예법과 특권기회를 통한 왕위 계승 ... 233
7.사회 전체의 권력을 누적하는 기능체인 프랑스 궁정사회의 형성과 발전 ... 281
8.궁정화 과정에서 배태된 귀족적 낭만주의의 사회적 기원 ... 383
9.혁명의 사회적 기원 ... 459

.부록1 구조적 갈등이 없는 국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하여 ... 471
.부록2 궁정-귀족주의 경제윤리의 이해: 궁정귀족사회 대규모 가계의 집자장의 지위에 대하여 ... 483

문명화과정. 1, 2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과정 1(한길그레이트 00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1999년 02월 20일 출간

목차

001. <'문명'과 '문화' 개념의 사회적 발생>
002. 독일에서 '문화'와 '문명'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기원
003. 프랑스에서 문명개념의 사회적 발생근거
004. <인간 행동의 특수한 변화로서 '문명'에 관하여>
005. '시빌리테' 개념의 역사
006. 중세의 일상 의례
007. 르세상스 시대의 행동변화 문제
008. 식사 중의 행동
009. 생리적 욕구에 대한 태도의 변화
010. 코를 푸는 행위에 관하여
011. 침을 뱉는 행위에 관하여
012. 침실에서의 행동에 관하여
013. 이성관계에 대한 사고의 변화
014. 공격욕의 변화
015. 기사의 생활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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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과정. 2 

한길그레이트북스 34 | 양장본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12년 08월 10일 출간 (1쇄 1999년 04월 10일)

목차

근대국가의 사회발생사적 기원과 문명화과정

제3부 서양문명의 사회 발생

머리말

제1장 봉건화 메커니즘
제2장 국가의 사회발생사
제3장 문명화이론의 초안

옮긴이의 말
연보
참고문헌
찾아보기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중국연구 사이트 -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중국정치연구실 | 2005·06·07 23:07 | HIT : 1,735 | VOTE : 122 |
  
Internet Guide for Research

Institutes

    * 다음은 Internet을 통해 접근 가능한 주요 연구기관 및 전문 잡지들 중에서 특히 중국 및 동아시아 연구 활동으로 유명한 해외 연구기관 및 잡지들을 선별, (I) 미국과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II) 일본 연구기관 및 잡지; (III) 중국 및 중국어권의 연구기관 및 잡지; (IV) 대만 관련 연구기관 및 잡지등으로 분류 소개한다.

    * 2004년 3월 5일 현재 정리 작업 ; 필요하면 추후에 계속 수정 보완 할 것
(I) 미국 및 영어권 연구기관 및 잡지 



  • AAS- The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1941년 당시 <계간 극동> (the Far Eastern Quarterly) 창간 기관으로 출발하여 현재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아시아 전문가들의 학회로 발전

    -현재에도 매년 4번씩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을 발간하면서 아시아의 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학술활동을 장려

  • AEI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미국 기업가 집단의 공공정책에 대한 관점을 대변하는 연구원; 1943년에 미국 와싱턴에 설립, 약 50여명의 상주 연구원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와 저술 활동 전개

    -대체로 정부의 규제철폐와 사기업 활동 장려, 그리고 강력한 대외정책과 국방정책을 주장하는 보수 지향적 연구와 정책 제안으로 유명;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기업가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여 정책 로비 활동오?주도하기도 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기도 한다.

  • AFPC-The American Foreign Policy Council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자문하는 비영리 민간 연구단제로서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탈 사회주의 과정에 관심이 많고, 중국에 대해서도 개혁과 중미관계에 대해 관심 표명.

    -1997년 클린턴과 장쩌민의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개혁과정을 모니터하기 위해 China Reform Monitor 를 운영하고 있는데, 1997년부터 2003년까지의 주요 사건 개요가 정리되어 있다.

  • Asia Society 

    -아시아 연구의 확산과 미국과 아시아 제국의 문화 및 지식인 교류로 유명한 비영리 단체; 1956년 록커펠러 3세가 주도하여 뉴욕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는 단체

    -이 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AsiaSource 는 아시아 각국의 현황은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 정치 및 경제 사회와 교육등 각 분야의 최근 연구업적과 각종 자료에 대해 안내 하고 있다.

  • Asian Studies WWW Virtual Library 

    -호주 국립대학 (The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이 1994년에 설립,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아시아 관련 On Line 도서관.

    -현재는 Dr T.Matthew Ciolek와 51명의 Co-editors가 활동하고 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각국 및 각 지역 연구 관련 자료에 On Line 접근이 가능함.

  • Asian Survey 

    -미국 버클리의 칼리포니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가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는 아시아 문제 전문 연구지

  • BCAS/CAS -The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 Critical Asian Studies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1967년에 젊고 진보적인 아시아 전공자들의 집단을 결성하고, 1968년부터 기존의 아시아 연구를 비판하는 내용의 연구잡지인<아시아에 관심있는 학자들의 잡지 (Bulletin of Concerned Asian Scholars)>를 발간

    -2001년 1월 이후 그 명칭을 <비판적 아시아 연구 (Critical Asian Studies)>로 변경, 현재까지 활발하게 아시아 연구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Brookings : The Brookings Institution 

    -1927년에 현재 이름으로 통합 발족한 미국 최초의 민간 연구기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문제에 대한 중요한 연구논문이나 저술, 자료 등 발표

  • The Carnegie Endowment 

    -1910년에 창설된 개인 재단으로 미국의 민주주의와 대외정책, 법치의 원칙과 정부의 투명성 제고등과 관련된 개혁, 환경과 무역 질서등에 관심;

    -그러나 또 한편 최근 사회주의권의 대변혁과 더불어 러시아와 동구 프로그램, 그리고 중국 프로그램을 확장; 특히 중국프로그램은 중국의 중앙 당교와 상해 사회과학원과 협동으로 연구사업을 추진

  • CECC -Congressional-Executive Commission on China 

    -2000년 10월 중국의 인권과 법치를 감시하기 위해 조직된 미국 의회-행정부 공동 위원회로서 매년 대통령과 의회에 중국 인권과 민주화 상황에 대해 보고할 의무가 있음

    -따라서 수시로 중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포함, 중국의 WTO가입등 관련 주요 쟁점에 대한 청문회 등을 운영하면서 연중 보고서와 청문회 자료등을 수집 공표

  • CEFC- The French Centre for Research on Contemporary China 

    -불란서 정부가 지원하는 홍콩 주재 연구기관으로 중국, 대만, 홍콩과 마카오의 정치, 경제등에 대한 자료수집과 연구활동을 지원 -1992년부터 영문으로 된 China Perspective 발간

  • CFP Net-Chinese Foreign Policy Net 

    -스텐포드 대학 Taylor Fravel교수가 운영하는 중국 외교정책 관련 홈페이지이고, 중국외교 개괄-안보-교역-인권-쌍무적 관계 (미국-일본-한반도-러시아-대만-인도등)-WTO 가입문제등에 대한 영문 자료 제공

  • CHGIS-The China Historical 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미국의 Luce 재단의 지원으로 2000년 12월이후 활동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 지도 관련 인터넷 연구기관

  • The China Business Review 

    -미국과 중국의 기업가들의 친목 및 협력관계를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설립된 중미기업협회 (US-China Business Council)가 1974년이후 발간하고 있는 잡지

  • China Leadership Monitor 

    -미국 스텐포드 대학 후버 연구소가 지원하는 인터넷 사이트로서 2002년 겨울호를 창간호로 낸 이후 현재 매년 4번 중국 국내외 정치, 경제, 군사 안보등에 대한 논평을 발표

  • China WWW Virtual Library -Internet Guide for China Studies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 중국연구소 (the Institute of Chinese Studies at Heidelberg University)가 운영하고 있는 중국 관련 On Line 도서관, 1995년에 설립

    -현재는 네델란드 Leiden 대학의 Hanno Lecher박사를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각종 자료와 문헌들을 정리, 소개

  • The Chinese Military Power Page 

    -미국의 국방정책의 대안을 모색하는 시민단체 성격의 민간 국방연구단체인 Project on Defense Alternatives 가 운영하는 중국 군사문제 관련 웹사이트

    -중국 군사 및 국방 문제 전문가들의 명단, 이들의 연구활동과 관련 자료등을 찾아 볼 수 있다.

  • CPS -Communist and Post-Communist Studies 

    -중국의 개혁개방과 변화 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특히 사회주의 몰락이후 구 사회주의국가들의 개혁개방과 변화에 대한 비교 연구 논문을 수록

  • CQ--The China Quarterly 

    -영국의 동양 및 아프리카 연구원의 현대중국연구소 ( Contemporary China Institut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가 계간으로 발간하고 있는 영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현대중국 전문 학술지

  • CR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미국 의회조사연구소에서도 중국 관련 연구 자료와 논문, 그리고 보고서등을 정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관점에서 중미관계에 중요한 경제적, 군사-안보적 이슈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층적인 조사 연구 결과를 제공

  • CSIS-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190여명의 연구자와 직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전략 안보 연구기관 -1994년부터 Bates Gill 박사를 중국 전문 의장으로 임명하고, 중국 관련 홈페이지 Freeman Chair in China Studies 를 운영

  • FA/CFR -Foreign Affairs/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1921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민간 자문 기구로 출발한 외교관계 위원회 (CFR)는 전직 대통령이나 국무장관, 국방장관등 고위 관료들과 학자 및 전문가를 비롯한 민간단체의 대표자들로 구성

    - 현재 약 34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외교관계 위원회가 1922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Foreign Affairs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전문 잡지

  • FAS-The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1945년 핵물리학자들의 반핵 운동단체로 출발, 현재로는 약 5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하는 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

    -과학자들의 전문적 지식과 공공정책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는 과학자 중심의 시민운동 단체로서 핵과 미사일등 대량파괴 무기의 세계적 확산 방지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

  • FEER-Far Eastern Economic Review 

    -아시아지역의 경제 및 기업 관련 기사 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적 이슈에 대한 기사도 주목되는 홍콩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 Hoover Institution 

    -1919년 미국 31대 대통령 후버가 창설한 연구소로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 보관, 활용, 스텐포드대학이 전쟁과 혁명, 평화 연구 의 구심역할을 하게 했고,

    -특히 2002년부터 앞에서 소개한 China Leadership Monitor를 운영하고 , 또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 이를 테면, The End of Communism / Transition to Democratic Capitalism / The End of Communism / The National Security Forum/ International Rivalries and Global Cooperation 등을 추진

  • IISS-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1958년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로 군사전략, 군비통제, 지역안보 및 갈등해소등에 대한 연구활동으로 유명

    -이 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세계 각국의 군비확장 및 축소에 대한 보고서 The Military Balance 를 비롯하여 역시 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정치 군사동향에 대한 Strategic Survey; 전략문제와 지역안보등에 대한 논문집 Adelphi Paper 시리스; 그리고 계간지 Survival등은 모두 유용한 자료원

  • Nautilus Institute-The Northeast Asia Peace and Security Network (NAPSNet)

    -동북아의 평화와 안보, 비핵화와 관련된 각 국의 동향과 뉴스자료를 제공;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남북한의 관련 뉴스도 영문으로 제공

  • NBR-The National Bureau of Asian Research 

    -미국 시애틀 소재 와싱턴 주립대학이 주도하는 아시아 관련 연구기관으로 중국, 일본, 한국등에 대한 연구가 주목

  • NED-Journal of Democracy 

    -1983년 비영리 민간 단체로 설립된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기금 ( The 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이 1990년부터 발간하고 있는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학술적 전문지

  • Rand 

    -미국 국방과 안보 관련 연구에 집중하였지만, 점차로 관심 영역이 다각화되면서 넓은 의미에서 미국의 안보적 이익의 차원에서 중국의 군사 안보전략을 포함?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등에 대한 연구프로젝트도 진행

  • UCLA Center for East Asian Studies

    -중국 및 아시아 관련 자료는 크게 (1) Asia via the Web-동아시아 연구와 관련된 on-line 참고자료들; (2) Today in Asian History-동아시아의 역사 및 현재에 대한 자료들; (3) Asian Studies Documents-주요 역사적 사건과 문건 자료? (5) Statistical Information on Asia- 도표와 통계자료; (6) Asian Language Study Programs; (7) Asian Studies Journals등으로 분류 관리

  • University of Michigan-China Data Center 

    -미국 미시간 대학이 소장하고 중국 관련 각종 자료; 특히, 최근 발표된 중국의 통계자료를 비롯해서 중국 지도와 환경 관련 자료 제공

  • USCC: United States-China Economic and Security Review Commission Charter

    -2000년 10월, 미국 의회 결의로 조직; 미국과 중국간의 경제와 안보 문제에 대해 폭넓은 연구, 조사, 매년 연차보고서도 제출하고, 미-중간 주요 경제-안보 문제에 대한 연구와 청문회도 운영

  • USIP- The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1984년이후 미국 의회의 기금 지원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민간 연구기관으로 국제적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촉진하기 위한 연구활동 전개

  •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 Asia Program 

    -1968년 민간 학술 교류기관으로 설립된 윌슨 센터의 아시아 프로그램은 저명한 아시아 문제 학자와 전문가들의 다양한 세미나와 논문 발표 및 저술등을 소개하는 이벤트와 사업 전개

  • World Politics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이 출판하는 국제정치 분야의 저명한 계간지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30 | HIT : 2,002 | VOTE : 351 |
  
세계화에 대한 중국 내 연구 동향1.들어가며.
 
1990년대 초부터 서방에서 핫 이슈가 된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중국에서도 1990년 초 일부 학자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되다가 90년대 중반부터 학계의 핫 이슈가 되고있다.
1990년대 초 세계화에 관한 논의가 서방 학계의 핫 이슈로 등장하자,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에 대한 서방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세계화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중국내 학자들에게 제기하였다. 이처럼 세계화에 대한 논의가 중국에 등장하게 된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1993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編譯局)이 초청한 미국의 듀크대학의 드리크 교수가 서방의 세계화에 대한 이론을 소개한 강연이었다. 이 강연에서 드리크 교수는 세계는 이미 세계경제시대로 접어들었고,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은 반드시 경제의 세계화에 기반하여 분석되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같은 전제 하에서 그는 세계화의 특징으로 자본과 생산과정의 세계화, 생산의 무국적화, 다국적 기업이 일국 시장을 대체하여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 세계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통합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 자본주의 생산방식이 보편적인 생산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연설 내용은 얼마 후 {戰略與管理} 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중국 내 학자들의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 후 1994년 원래 중국의 사회과학원 부원장이었던 리선즈(李愼之)교수가 {東方}과 {太平洋學報} 잡지에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중국 내에서 가장 일찍 세계화에 관한 연구를 주창한 학자로 인식되었다.

특히, 중국 내 학자들로 하여금 세계화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켜 세계화에 대한 연구가 학계의 핫 이슈가 되도록 한 사건은 1997년에 폭발한 동아시아 금융위기이다.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도 중국은 어렵게 위기를 피할 수는 있었지만, 경제의 세계화로 인한 국내 금융부문의 취약성은 중국의 지도자들과 학자들에게 높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리하여 1998년 3월 9일 장쩌민 국가 주석은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홍콩대표단 토론회에서 "경제의 세계화에 대한 문제를 반드시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세계경제발전의 객관적인 추세로 그 어느 나라도 피할 수 없으며, 모두 참여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같은 세계화의 추세를 변증법적으로 대처하여 세계화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이익과 문제점을 동시에 보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과 같은 개발도상에 처해 있는 국가들에게는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동아시아 금융위기와 최고지도자인 장쩌민의 지적으로 인해 세계화에 대한 연구는 중국 학계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편역국 당대연구소는 세계화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각종 논쟁을 종합하여 총 7권으로 이루어진 세계화에 대한 논집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全球化的悖論], [全球化時代的馬克思主義], [全球化時代的社會主義], [全球化時代的資本主義], [全球化與中國] ,[全球化與世界], [全球化與后殖民批評])

그 후 1999년 말 중국의 WTO가입을 위한 미국과의 쌍무적 협상이 완료된 이후 WTO가입을 위한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중국내의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 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인민일보는 바로 이같은 추세를 반영하여 2000년부터 세계 각 국의 학자와 관료 및 기업인을 초청하여 '세계화 포럼'을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이 포럼은 2001년 1월 15일에 두 번째로 개최되어 세계 10여 개 국에서 온 관료, 학자, 기업인들이 WTO 가입을 앞두고 있는 중국의 발전전략을 모색하고 세계경제 속에서 중국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한 각종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처럼 중국 학계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다음 4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이루어지고 있다. 1. 세계화의 개념. 즉, 세계화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2. 세계화의 유형. 즉, 경제의 세계화 외에 민족국가의 정치, 문화 역시 경제의 세계화에 영향을 받고 있는가? 문화의 세계화와 정치의 세계화라는 추세가 존재하는가? 3. 중국에서 세계화가 가지는 의의는 무엇인가? 즉, 중국은 세계화의 영향과 도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에 대응하여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인가? 4. 세계화는 중국의 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인가? 아래에서 이같은 쟁점을 둘러싼 논쟁의 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2. 세계화란 무엇인가?
 
중국 내 학자들이 내리고 있는 세계화에 대한 정의는 대략 다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화란 인류 생활의 통합과정이고, 지역 특히 민족국가의 주권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전 세계의 정체성(整體性)의 발전 추세, 혹은 인류 사회 생활이 국가와 지역의 경계를 뛰어 넘어 전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는 전방위적 교류 및 상호영향이라는 객관적인 역사적 추세로 간주하는 시각이다(蔡拓,"全球化與當代國際關系", 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더 나아가 혹자는 세계 통합의 실질적인 의의는 인류가 공간의 장애와, 제도와 문화의 장애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 범위에서 더욱 더 많은 공통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교통과 통신이 발전함에 따라 전 세계가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국가와 지역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 되어 간다. 동시에 세계 각 국은 갈수록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다시 말하면 인류가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협조와 협력의 정신을 통하여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세계화를 자본주의화, 자본주의의 일종의 새로운 형식 혹은 발전단계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세계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보편화이다. 오늘날 경제의 세계화는 실제로 자본주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로, 세계화의 문제 역시 현대 자본주의 특히 선진 자본주의의 문제"이다(紀玉祥,"全球化與當代資本主義的新變化",『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세계화의 과정이 비록 사회 생활의 모든 주요한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지만, 그 동력의 메카니즘과 현실적인 기초를 볼 때, 세계화 진행 과정의 역사적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찾아야 하고, 시장경제의 비밀로부터 찾아야 한다."(楊朝仁, 韓志偉, "全球化,制度開放與民族復興",『馬克思主義與現實』,1998年 第4期) ). 따라서 이 시각에 근거하면 세계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식이고, 자본주의의 일종의 별칭이다. 그것은 또한 후기 자본주의, 발달된 자본주의, 비조직적 자본주의, 다국적 자본주의, 세계적 자본주의 등등으로 칭해질 수 있다(王逢振, "全球化, 文化認同和民族主義", 王寧 等 主編,『全球化與后殖民批評』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셋째, 세계화를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세계화는 인류 가치의 동질화와 보편화로 표현되고, 서방국가 특히 미국의 가치가 인류의 공통가치로 대변되고 있다. 그리하여 세계화 또한 바로 서방화 혹은 미국화"라고 주장한다.(『環球時報』(2000年9月22日) "全球化背景下的國家利益改變了 ?"). 그리하여 어떤 학자들은 "중국어권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이 세계사조, 보편가치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세계화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서방 혹은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인류의 궁극적인 공통 가치로 변화시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서방화 혹은 미국화로 한정되어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張 武, "全球化:亞洲危機中的反思",『全球化與后殖民批評』,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상술한 3가지 시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세계화를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하는 시각이다. 즉 이 시각은 상술한 3가지 관점은 단지 세계화의 본질적 속성 가운데 특정 특성만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화 과정을 내재적으로 모순이 충만한 과정이고, 모순의 통일체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이 시각은 다음 3가지 점을 통하여 세계화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첫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이러한 모순은 합리적인 것이다. 즉, 세계화는 통합과 분열의 추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으며, 단일화와 다양화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또한 세계화는 집중화이고 분산화이며, 국제화이고 본토화이다. 따라서 세계화는 하나의 모순의 통일체이고,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보완적인 과정이며, 하나의 상충되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합리적 충돌이다. 둘째, 세계화의 내재적 모순은 필연적이다. 세계화의 배경 하에서 개방의 정도가 가장 높은 국가 역시 자기 민족의 민족적 뿌리와 색채가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반대로 가장 보수적인(혹은 폐쇄적인) 민족도 세계화의 흔적이 완전히 없을 수가 없다. 셋째, 세계화의 모순은 인류 사회의 진보에 유리하며, 사회는 원래 다양성의 통일이고, 다원적인 것의 통합화 과정이든, 일원적인 것의 다원화 과정이든, 이들 모두는 인류 발전의 진리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 『戰略與管理』, 1999年3期).

 
3. 세계화의 다양한 유형
중국 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계화의 주요 지표를 경제의 세계화 및 정보 통신의 세계화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정치와 문화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동시에 거론하고 있다. 즉 "경제 생활이 통합되어 가면서 각 국의 정치와 문화 역시 그 속도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지만 통합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경제적 함의와 정치 문화적 함의를 동시에 가진 일종의 문화적 현상이고 정치적 현상이며, 경제적인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다.(李林,"全球化背景下的中國立法發展",『學習與探索』1998年 第1期;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1998年). 이같은 시각에 대하여 중국 내의 학자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세계화를 엄격하게 경제적 영역에 한정시키고, 세계화를 경제의 통합 혹은 국제화로 한정시키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일반적인 세계화 개념, 특히 정치와 문화적 세계화 개념을 중국의 현재의 기본적인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를 방치하는 것으로 인식하여 반대하기도 한다. 중국 내의 세계화의 유형에 관한 논의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성장요소, 특히 자본과 기술 및 인력자원이 시장 법칙의 작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적 이동과 조합으로, 개별 국가경제와 지역경제가 갈수록 세계경제체제로 통합되어 인류의 사회경제발전의 상호 보완성, 관련성 및 의존성 역시 이로 인해서 증대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각 국의 상품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경쟁을 통하여 판매되고, 인류에 의해서 공통으로 향유되는 것을 말한다"(穆光宗,"經濟全球化與中國人口",『當代世界與社會主義』1998年 第3期). 어떤 학자들은 이를 더욱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분화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생산활동의 전 세계적 차원의 통합으로, 전통적인 국제적 분업이 세계적인 분업으로 변화하고 있다. 2. 세계의 다변적인 무역체계가 형성되고 국제무역이 통합되어 가고 있다. 3. 각 국의 금융이 갈수록 통합되고 금융의 국제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다. 4. 투자활동이 전 세계에 걸쳐서 진행되고, 세계적인 투자 규범이 형성되고 있다. 5. 다국적 기업의 역할이 강화되고, 갈수록 국제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민족국가의 국제시장에서의 전통적인 역할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6. 국제 무역 전문가와 고급 경영자들인 이른바 '세계인'이 갈수록 늘어나 각 국 정부와 회사가 이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고 있다(薛榮久,"經濟全球化的影響與挑戰",『管理經濟』1998年 第4期).

또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같은 경제의 세계화 추세는 어느 국가도 피할 수 없는 추세로, 중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중국이 피동적으로 경제의 세계화 흐름에 합류하기보다 능동적으로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며, 동시에 중국경제의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경제의 세계화가 세계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를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세계화는 중국이 선진국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한다( 劉力, "經濟全球化:發展中國家后來居上的必由之路', 『國際經濟評論』1997年 第11-12期).

둘째, 정치의 세계화이다. 중국내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의 세계화를 각 국의 정치적 가치와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의 동질화 추세로 간주하고, 이것은 우선 자유와 평등을 핵심으로 한 민주적 가치의 일치와 자유, 평등, 인권이 충분히 실현되는 민주제도의 보편화로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따라서 일부학자들은 정치의 세계화를 정치의 민주화로 간주하고, 민주화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정치의 세계화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냉전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같은 이해에 기초하여 이들은 "세계화의 유형적인 동력은 경제의 세계화이고, 세계화의 무형적인 동력은 가치의 통합이고, 민주정치와 세계적 가치의 통합"으로 주장한다(劉軍寧,"全球化與民主政治", 『當代世界與社會主義』 (季刊) 1998年 第3期). 더 나아가 일부 학자는 세계화 시대의 민주정치를 '善治'로 그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선치'란 공공이익을 최대화하는 통치과정으로, 이는 정부와 시민들(혹은 공민)이 협력하여 공공 생활을 관리하고, 국가와 시민사회간의 일종의 새로운 관계로써 양자간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간주한다. 이들은 '선치'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다음 6가지를 들고 있다. 1.정당성으로, 사회 질서와 권위가 최대한도로 시민들의 자발적 복종과 인정을 통하여 유지되어야 한다. 2. 투명성, 정치정보의 공개성으로, 모든 주민이 자기의 권리와 관련된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획득할 권리를 가진다. 3. 책임성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4. 법치로, 법률이 정치적 통제의 최고의 준칙이고, 정부의 관료와 시민들이 모두 법에 의거하여 행동해야 하며 법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5. 행위에 대한 보상과 효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兪可平,"從善政到善治", 『方法』1999年 第1期)

셋째, 법률의 세계화이다. 각 국이 공통적으로 준수해야 할 국제 관례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면서, 법률의 세계화의 문제가 중국 법률학자들의 중요한 관심 주제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 내 일부 학자들은 법률적인 관점에서 즉 세계 경제와 국가 이익의 충돌, 전통문화와 근대화와의 괴리 및 국가주권과 세계화와의 관계, 법률 다원주의, 국가의 입법자와 법률 연원으로서의 지위 등의 정치 법률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법률의 세계화를 법률 발전의 새로운 단계로 간주하고, 법률의 세계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세계적 법률 의식을 확립하고, 세계의 문제해결을 입법의 중요한 근거로 삼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국가주권개념을 개혁하고, 국가의식을 완화하며, 입법의 비국가화를 주창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朱景文,"善于法律與全球化的  問題",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넷째, 문화의 세계화이다. 개혁개방 이후 서방의 유행가나 의상, 새로운 사상이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문화의 세계화는 중국 내에서 사실상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중국 내의 학자들이 말하는 문화의 세계화는 주요하게 일국의 문화와 가치를 초월한 세계적 차원의 공통된 문화와 가치의 형성 혹은 소위 말하는 '세계 문화'의 형성이다.  어떤 학자들은 세계화 과정 중 '세계 가치'의 확립의 필연성과 현실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의 사회적 과정은 일정한 문화적 환경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오늘날 인간들이 근거하고 있는 문화적 환경은 이미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였다. 한사람의 세계인은 출생부터 세계의 문화와 정보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으며, 세계의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을 받아들이고 누린다. 이러한 세계적 사회화 과정은 개인으로 하여금 우선 세계인이 되도록 하고, 그 다음으로 중국인 혹은 미국인 등 한 국가의 국민이 되도록 한다. 비록 모든 국가와 민족의 문화가 여전히 상당정도 각자의 특성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들 문화 또한 부분적인 융합이 이루어졌고, 세계문화는 바로 이러한 융합의 산물이다. 세계문화의 형성은 국경과 사회제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가 이미 일종의 현실로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譚君久, " 關于全球化的思考與討論",兪可平 主編,『全球化的悖論』,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

4. 세계화가 중국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
이 문제는 중국 내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중의 하나이다. 대다수의 중국 내 학자들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들이 지적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세계화가 세계적 차원에서의 자원의 효과적인 배치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국제 협력의 질을 제고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며, 과학 기술과 정보의 전 세계적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고, 대기오염, 마약의 남용, 불법 이민 등의 세계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도 유리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한편,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패권적인 지위의 강화, 국내경제에 외자와 국제금융이 끼치는 위협요소 증가, 남북 차이의 확대 등으로 인해 후진국가의 경제가 더욱 쉽게 국제자본의 종속과 영향하에 놓이는 점 등이다(兪可平, "全球化硏究的中國視角",『戰略與管理』,1999年3期).

중국내 학자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영향은 중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다. 즉, 세계화는 중국으로 하여금 외자의 유치, 선진 국가의 선진적인 과학 기술과 관리 경험 및 제도적인 배치를 배우고, 중국의 상품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유리한 영향을 미치며, 각종 형식의 국제적인 협력에 참여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화가 중국 발전에 끼치는 부정적인 측면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중국 내 많은 학자들은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폭발과 함께 세계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중국의 경제 안전의 위협이다. 외자의 국내 경제에 대한 통제 강화와 기술 독점이 중국의 산업구조조정과 고도화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또한 외채가 일정 한도를 초월했을 때 큰 위험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고, 무역과 자본의 대외 의존도가 증가됨으로써 중국경제가 세계경제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대규모의 금융시장의 개방이 금융 위기를 증가시킬 수 있다. 2. 국가 주권의 약화이다. 세계화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국제적인 관례, 국제적인 공약, 관련 협정을 반드시 준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부분의 국제적인 계약은 선진국가의 이익과 기준에 근거하여 제정된 것으로, 서방 선진 국가의 제도적 배치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따라서 개발도상국가는 경제의 세계화가 가져온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부득이 하게 일부 통제 권한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국가의 주권은 일정 정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5. 중국은 어떻게 세계화 과정에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은 현재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중국 내 학자들은 이같은 참여에 동의한다. 이는 세계화 과정에의 참여는 중국과 같은 개발 도상국가에겐 스스로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 시기와 방식을 어떻게 선택하는가의 문제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중국 내 학자들은 선진국가가 주도하고 있는 세계화 과정이 중국에게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세계화 과정이 개발도상국가가 자본과 기술을 흡수하고 무역을 발전시키고 경제의 시장화를 추진하면서 점진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입하는 데 역사적인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들은 중국이 개혁 개방을 통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한 것은 바로 주동적으로 이같은 기회를 움켜진 전형적인 모범 사례로 간주한다. 반면에, 이들은 세계화 과정은 개발도상국가의 전통적인 주권을 침해하고, 개발도상국가의 경제적 패권을 위협한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개발도상국가의 세계화 과정은 고통스럽게 피를 흘리는 과정이다. 이같은 인식은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통하여 중국내 학자들에게 더욱 더 각인되었으며, 동아시아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중국 내 학자는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더욱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참여해 가야 한다고 느끼도록 하였다. 중국이 세계화 과정에 어떻게 참여해 갈 것인가에 대한 중국 내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사회, 경제적 수준이 아직 낙후되어 있다는 점과 현재의 세계화 과정이 소수 선진국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점에 비추어서, 중국은 선진국가와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중국은 이미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 진입하였기 때문에,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들과 같은 보폭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장경제체제가 발전된 국가와 같은 속도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해 갈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같은 주장이 세계화 및 그 조건을 개혁과 발전의 전제로써 간주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중국의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李克穆,"關于經濟全球化進程的 点認識",胡元梓 主編,『全球化與中國』 中共編澤出版社, 1998年).

둘째, 중국은 전방위적으로 세계화 과정에 참여할 수 없으며, 선택적이고 유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하여 중국의 구체적인 상황에서부터 출발하여, 독립적인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국제경제와 국제무역에 대한 관리와 감독을 강화하며, 서방 선진국가의 경제와 정치에서의 패권을 시종 경계하고, 자본시장과 상품시장, 금융시장을 일정한도로 개방하며, 중국의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경제의 세계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이다.

셋째, 경제의 세계화는 경제의 민족화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우선적으로 민족 공업을 발전시키고, 민족경제의 우세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현재 민족국가의 전통적인 장벽을 깨고 있으며, 세계경제의 통합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경제의 민족화 추세 역시 세계화에 따라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지역경제의 신속한 발전에 따라 선진국가의 보호무역주의는 강화되고 있으며, 모든 국가는 모두 자기의 민족 공업을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면서, 각 국 간의 각종 형태의 치열한 무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의 세계화와 민족화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즉 경제 발전의 중점을 세계경제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의 민족화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각 국이 경제의 세계화에 참여하는 주요한 목적은 본국의 민족경제 발전을 가속화시키기 위한 것이고, 본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는 각 국 경제가 독립적인 의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반되게 각 국이 모두 자국의 경제적인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세계 경제는 갈수록 세계화되어 가고 있으며, 동시에 민족경제의 이익도 두드러져 가고 있다. 따라서 개방만을 강조하는 것은 민족경제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상과 노력을 무시하는 것으로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高德步,"全球化還是民族化?",『中國黨政干部論壇』 1997年 第期).
 
상술한 바와 같이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세계화란 무엇인가, 세계화는 어떠한 다양한 유형이 있는가, 세계화가 세계정치경제체제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세계화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근대화 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중국은 세계화라는 불가피한 역사적인 추세에 어떻게 대응해 갈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글은 바로 이들 논쟁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비운의 지도자 趙紫陽
 중국정치연구실 | 2005·05·06 11:24 | HIT : 4,429 | VOTE : 5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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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趙紫陽)
사망하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총서기였지만,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축출된 후 지금까지 근 16년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 (趙紫陽)이 마침내 지난 1월 17일 사망했다.
 
 
    (1) 85세의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자오쯔양 사망하다
지난 2005년 1월 17일, 중국의 관영 신화사통신은 짤막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인민일보가 전재한 신화통신의 자오쯔양 사망 고지 기사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자오쯔양 동지는 장기간 호흡기 계통과 심혈관 계통의 질병으로 여러 차례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최근에 병세가 악화, 응급조치를 하였지만 효과가 없어 1월 17일 베이징에서 서거. 향년 85” (赵紫阳同志长期患呼吸系统和心血管系统的多种疾病,多次住院治疗,近日病情恶化,经抢救无效,于1月17日在北京逝世,终年85岁)。
이처럼 중국 정부 당국은 신화통신과 인민일보를 통해 가능한 간략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보도하게 하고,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간단하게 자오쯔양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자오쯔양와 1989년 천안문 사태에 대한 당시 당과 정부의 판단과 결정에 착오가 없다고 재확인함으로써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와 같이 1989년 천안문 사태와 직접 관계가 없는, 그래서 그 당시의 역사적 결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현재의 지도부까지도 자오쯔양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천안문사태의 재평가 요구에 대해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대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같이 정치적으로 미묘한 잇슈를 만들어 낸 자오쯔양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오쯔양은 지난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로 한 덩샤오핑을 비롯한 당 원로들의 결정에 반대한 탓으로 당 총서기직을 비롯하여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고, 지금까지 근 16년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살아온 그야말로 비운의 개혁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 당시 당 총서기이었던 후야오방은 정치 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 분야를 책임지는 업무 분담체제하에서 이들 두 사람은 덩샤오핑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개혁 지도부를 구성하였으며, 국내외에서 사실상 덩샤오핑 후계세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6년말 합비 학생시위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세로 1987년 1월 후야오방 총서기가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후야오방-자오쯔양 양두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비록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격으로 퇴진했지만, 덩샤오핑은 여전히 개혁 개방노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덩샤오핑의 지원을 받아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등장, 명실 공히 개혁 지도부의 핵심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9년 후야오방 사망으로 촉발된 대규모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결 방법을 둘러싼 당 내부의 논쟁이 다시 폭발했을 때, 덩샤오핑이 보수파의 견해를 수용, 무력 진압을 결정하자,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의 이런 결정에 반발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운명은 비극적인 종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자오쯔양은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실세를 장악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비롯한 8명의 당원로들에게 일시에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무기한의 가택 연금 상태로 유폐되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이들 원로들은 자오쯔양을 제거하고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유혈진압을 강행한 다음,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을 발탁 새로운 지도부를 형성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자오쯔양의 정치적 운명은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논쟁과 결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정치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서 자오쯔양의 명예와 권리 회복이 실현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개방의 기수로 시작하여 마오쩌둥 이후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앞장을 섰다가 하루아침에 당 총서기에서 몰락, 모든 권리와 직위를 박달당하고 가택에 유폐되어 16년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보내야했던 불운의 개혁파 지도자 자오쯔양에 대한 중국 내외의 관심과 연민은 아직도 상당히 깊게 남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이징의 번화가 왕푸징 부근 푸창후퉁(富强胡同)의 자오쯔양 자택앞
 따라서 일부 외신에 의하면 자오쯔양의 입원과 사망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베이징 시내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에 위치한 그의 자택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그의 옛 부하들이거나 친구들, 그와 이런 저런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겠지만, 일반 대중들과 대학생들도 자오쯔양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에서 그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그러나 자오쯔양 자택 주변에는 평소에도 공안요원들이 배치되어 일반인들의 통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려웠고, 일부 방문객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공개하고, 공안의 허락을 받아야 자오쯔양 자택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국의 통제가 엄격하기 때문에 그의 근황을 정확하게 외부세계에 전달해 주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든 형편이었다. 그동안 일부 홍콩 언론들은 전화나 또는 인편을 통해 자오쯔양의 근황을 탐색해 보려고 노력했었지만, 단편적인 소식이외에는 자오쯔양의 동향이 외부세계에 노출되는 일이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
1989년 5월 19일 오전 4시 45분 캄캄한 새벽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중인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면서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단식투쟁을 중단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진 자오쯔양은 이처럼 지난 16년간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채 감시와 억류상태로 지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가택 연금이 항상 엄격하게만 집행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부 언론 보도에 의하면 1990년대에 자오쯔양은 베이징 근교 골프장에서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골프 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였으며, 또 일부 지방 여행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언행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일부에서 그의 건강 이상 문제가 제기되면서 사망설이 나돌기도 하였다. 금년 2월에 일부 소식통은 자오쯔양이 폐렴으로 3주일간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전하였고, 2004년 4월에는 CNN이 자오쯔양 사망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2) 자오쯔양 연금 해제와 명예회복 청원이 있었지만...
     물론 천안문 사태의 상처가 점차로 아물어지면서 국내외에서 자오쯔양의 연금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축출과 숙청을 직접 지시한 덩샤오핑이 사망한 이후에도, 천안문사태로 자오쯔양 총서기 후임으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이 발탁한 장쩌민 총서기가 물러난 이후에도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 인권단체들이나 국내외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천안문사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바로 잡고, 자오쯔양에 대한 연금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맞는 지난 10월 18일에도 자오쯔양 총서기의 최측근이었고, 천안문사태 당시 자오쯔양을 ‘잘못’ 보좌했으며,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동정적이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7년간 복역한 후 석방,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고 있는 바오퉁 (Bao Tong)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저명한 민주파 지식인들 69명이 공동 발기인이 되어 ‘자오쯔양 선생 석방과 자유 회복을 위한 인터넷 상의 공개 서명운동’을 착수하기도 하였다. (공개 서명 운동의 인터넷 주소= http://chinaway.org/zzy2004101785/ )
이들은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공식적으로 기소도 되지 않았고,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당과 국가의 원로 지도자인 자오쯔양을 연금하고 그의 인신자유를 구속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이런 불법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윤리적인 사태를 바로 잡지 않고 어떻게 후진타오 정권이 ‘헌법에 의한 통치’와 ‘공민의 권리 존중’을 주장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인민대중을 위한 새로운 정치’를 펼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느냐면서 자오쯔양의 연금 해제와 자유 회복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은 누구이고, 자오쯔양 노선이란 무엇인가.
 

    (3) 자오쯔양 (趙紫陽)은 누구이고 趙紫陽 路線은 무엇인가
이처럼 천안문사태이후 16년간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게 살다간 노 정객 자오쯔양은 누구인가. 우선 이 홈페이지 < 중국인물정보-당정간부>에 소개된 간략한 자오쯔양 약력을 여기에 다시 게재하면 아래와 같다

    Zhao Ziyang: 趙紫陽 (1919-2005 ): 천안문 사태 당시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강경진압책을 반대하다 실각 당한 중공당 총서기였던 대표적 개혁파 지도자; 河南省 출신; 하남 제1 중학 중퇴; 32년 공청단 가입; 38년 공산당 가입; 하남성 滑縣 당위 서기; 지구 당위 서기; 건국 후에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 광동성 성당위 부서기, 서기; 문혁 당시 일시적으로 숙청되었다 71년 이후 내몽고자치구 서기, 혁명위 부주임; 광동성위 제1서기; 광동성 혁명위 주임; 73년 10기 중앙위원; 75년 사천성 제1서기, 혁명위 주임; 77년 11기 정치국 후보위원; 78년 5기 全人大 부주석;
79-80년 11기 중앙정치국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80년 9월 국무원총리; 81년 11기 중앙위 부주석; 82년 12기 정치국 상임위원; 87년 총서기, 군사위 제1 부주석을 역임; 그러나 천안문사태 직후인 89년 6월 당원 자격을 제외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가택 연금; 96년부터 광동성과 사천성 시찰이 허용, 가택연금이 부분적으로 완화되었지만 2004 년초 폐염등 건강 이상설 제기되고 사망설도 유포; 2005년 1월 17일 베이징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 향년 85세

위의 간략한 소개 글을 보충하면 자오쯔양은 1919년 10월 18일에 河南省 滑현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가담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이 13세이었던 1932년에 그는 공청단에 가입했고, 19세인 1938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의 본명은 趙修業이었지만, 중학교 시절에 오늘의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의 소학교, 중학교에서 학습을 하였고, 그가 소속한 지역당 (하남-하북-산동성)위가 운영하는 당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젊은 시절 이처럼 그의 고향마을이 있는 지역에서 지방 당 활동을 하였고, 1947년 가을에는 지방 군 부대와 더불어 남부 지방으로 이동, 활동하였다.
1949년 10월 건국 후 자오쯔양은 중공당 華南分局 상무위원, 비서장, 농촌공작부 부장등을 역임하였으며, 1965년에는 45세의 젊은 나이에 남부 중국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광동성의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의 순탄했던 정치적 성장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좌절과 시련을 겪게 되었다. 당시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다오주(陶鑄)를 공격하면서 자오쯔양도 '다오주의 주구'라고 공개 비판하였고, 자오쯔양은 이런 좌파의 공격을 받고 1967년에 실각하였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수습단계에 들어가면서 자오쯔양은 복권되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1971년 내몽고 자치구 서기로 재기한 직후, 1972년에 광동성에 복귀, 마침내 1974년에 광동성 제1서기로 재취임하였고, 1975년에는 사천성 제1서기등을 역임하면서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다시 언급하겠지만, 덩샤오핑의 고향인 사천성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농촌경제를 크게 발전시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지방 당과 정부 지도자로 입신한 자오쯔양은 1977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77년에 중앙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고, 78년에는 전인대 부주석, 그리고 79년에는 중앙 정치국 정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 이어 1980년에는 중공당의 최고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자오쯔양이 중앙정계에서 이처럼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덩샤오핑의 개혁 정권이 등장하면서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적 관료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시되었고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당과 국가 기구를 재정비하고 인민대중들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적이고 경험이 있는 실무관료들이 필요했는데, 자오쯔양은 바로 덩샤오핑이 찾고 있는 그런 실무적 개혁 지도자이었다.
따라서 1980년에 당과 정부기구를 개편하고, 마오시대의 유산인 華國鋒體制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당 총서기로 후야오방을, 그리고 국무원 총리로 자오쯔양을 선임, 후야오방-자오쯔양의 양두 개혁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따라서 1987년초 후야오방이 낙마하기 전까지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후야오방 총서기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자오쯔양 총리가 책임지고 추진하였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이처럼 자오쯔양과 후야오방은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지도자로 내외에 알려졌으며, 실질적으로도 거의 모든 주요 개혁 정책은 이들의 책임하에입안되고 집행되었다. 특히, 후야오방이 실각한 이후에는 자오쯔양은 개혁세력의 유일한 대표자로서 보수파와 맞서 더 대담한 개혁 개방을 추진하려고 하였다.사실,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이 실천한 개혁개방정치는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대부분 자오쯔양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테면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혁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개혁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추진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함으로서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관계에 대한 논쟁에서 보수파와 민주파의 의견을 절충하여 나름대로 점진적 개혁노선인 <자오쯔양 노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자오쯔양 노선이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고 천안문 사태로 자오쯔양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자오쯔양 노선은 어떤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인가에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오쯔양 노선은 아마도 오늘날의 중국 당국의 노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장쩌민과 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덩샤오핑 후계 정권의 개혁 노선이 기본적으로 자오찌양의 13차 당대회 정치보고,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을 따라 전진하자 (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에서 밝힌 사회주의 초급 단계론의 이론과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오쯔양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에 대한 이론과 정책이 집약된 1987년 10월, 13차 당대회에서의 자오쯔양 총서기 정치보고 전문은 지금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다.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1)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9.html)
-沿着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路線前進 (2) --在中國共産黨第十三次全國代表大會上的報告 (一九八七年十月二十五日) ( http://www.people.com.cn/GB/shizheng/252/5089/5105/20010430/456401.html)

결국 자오쯔양 노선이란 국가의 주도하에서 대담한 경제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동시에 정치적 안정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인 정치개혁도 실천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에 접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체제전환을 모색하는 자오쯔양의 정책노선은 1989년 천안문사태로 역사적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 중국 경제의 비약적 발전을 실현하려면 더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이 필요하고, 경제개혁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제의 개혁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다는 민주파의 논리와, 중국 경제 발전을 위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용인할 수 있지만, 당국가체제의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보수파의 논리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자오쯔양과 자오쯔양 노선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내몰린 것이다. 여기서 자오쯔양은 민주파의 논리와 명분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결정에 저항함으로써 마침내 비극적 개혁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4) 중국의 개혁 정치와 정책 논쟁, 그리고 자오쯔양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85세 생일을 기념하여 민주파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자오쯔양 연금 해제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미국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자오쯔양의 업적에 대해 검토하기도 하였다.

* 콜럼비아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서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중문으로 쓰여진 것들이며, 이런 논문의 개괄적 내용은 뉴욕에서 발행되는 중국어 신문 <多維新聞 (2004년 10월 17일자)>의 기사, ‘컬럼비아 대학, 자오쯔양과 중국 개혁에 대한 연구토론회 개최’를 참고할 수 있다.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SinoNews/Oversea/2004_10_17_13_22_10_808.html )

* 또한 위의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논문들도 원문 그대로 <多維新聞>에 게재되었다

(i) 鲍彤 : “检验中国宪法的有效性的试金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2_30_788.html )
(ii) 陈一谘:再谈 “我不入地狱,谁入地狱”的赵紫阳精神---“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5_54_661.html)
(iii)汤本:新升的太阳是紫红的---“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8_5_335.html )
(iv) 吴国光:走‘赵紫阳道路’----“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9_31_427.html )
(v) 吴仁华:80年代的精神境界与赵紫阳的政治实践----“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 (http://www1.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7_9_11_45_493.html )
여기서 발표된 논문들에서 자오쯔양은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개혁의 기수로 기술되고 있다. 그는 당과 국가가 문화대혁명 좌파들의 정치투쟁, 사상투쟁으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중국이 부강한 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도 모택동과 좌파의 영향이 깊이 남아 있었던 1970년대 후반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가장 많은 지방 중의 하나인 四川省 성장으로 있으면서 농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감한 농업생산책임제를 도입,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성공하여, 농민들 사이에서 ‘쌀이 필요하면 완리 (万里)를 찾고, 식량이 필요하면 쯔량 (紫陽)을 찾으라 (要吃米,拔万里;要吃粮,拔紫陽)’는 말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인구가 많은 四川省과 빈곤한 지방으로 알려진 安徽省에서 자오쯔양과 완리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경제활동의 자율권을 과감하게 보장하는 당시로서는 대담한 농촌 경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농촌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이들의 성공에 힘입어 덩샤오핑 정권은 이들이 시험적으로 운행했던 농업생산책임제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마침내 중국 경제의 활로를 찾게 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1984년 와싱턴에서 부시 당시 부통령과 함께
이처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의 초기부터 실질적인 경제 개혁의 지도자로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과감한 경제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자오쯔양은 1980년에 국무원 총리로 발탁되어 1980년대 중국의 경제개혁 전반을 총괄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중국이 도입했던 과감한 경제체제 개혁은 거의 모두가 그의 책임 하에 입안, 집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자오쯔양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제기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했으며, 국제대순환론을 제창하면서 대담한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의 중국의 경제개혁은 모두 자오쯔양을 통해 이론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정당화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오쯔양의 업적은 경제개혁 분야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1987년 1월,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가 보수파의 공세로 물러나게 되자, 개혁파를 대표하여 후야오방의 후임 총서기로 취임, 개혁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게 되었다. 1987년과 1988년은 덩샤오핑의 개혁정치가 중대한 시련에 봉착한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산출했지만,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충돌하면서 여러 가지 모순과 혼란이 발생하였고, 시장경제의 부작용도 노출되면서 개혁 정책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협공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보수파는 시장경제의 부작용을 과장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유지해야 한다고 압박하였고, 민주파들은 계획경제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 던지려면 더 대담한 시장경제가 필요 하고, 정치개혁도 동시에 진행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 국가체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라고 주장하는 보수파, 시장경제에로의 이행을 제대로 진행시키고 시장경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경제개혁에 발맞추어 대담한 정치개혁도 추진해야 한다는 민주파의 압박에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양두체제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야오방 총서기가 좀 더 민주파 지식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보적 세력의 의견을 반영하였다면, 그렇기 때문에 보수파들의 총공세의 표적이 되어 1987년 1월에 실각하였다면, 자오쯔양은 좀 더 실무관료형 개혁 지도자로서 정치-이념 문제보다는 경제문제에 집중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1987년을 전후로 한 미묘한 시기에 민주파 지식인들보다는 정치안정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이른바 신권위주의론자들과 연대하면서 민주파와 보수파의 협공에서 벗어나려고 하였다. 사실 논리적으로 신권위주의론자들은 보수파와 민주파의 논쟁에서 제3의 중국적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987년 10월의 13차 당대회에서 자오쯔양 총서기가 한 정치보고의 제목,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길을 따라 전진하자>는 것은 바로 보수파와 민주파의 주장을 절충하면서도 국가 중심의 단계적 정치-경제의 상호 보완적 발전노선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자오쯔양은 이 보고서에서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입각한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기존의 당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개혁도 강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오쯔양은 차액선거제도를 전국적이고 전면적으로 확산 적용시킬 것을 선언하였고, 당정 분리, 당기 분리의 원칙을 관철시켜 정부와 사회단체의 분리, 그리고 기업의 자율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려고 하였으며, 다양한 이익집단들과의 상호 협력과 협상을 통해 당의 이익 대표성을 넓히려는 제도 개혁도 강조하였다. 특히, 자오쯔양은 당 지배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법과 제도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중국 당국이 추구하는 정치개혁의 기본 방향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오쯔양은 지금 당장 당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서구적인 민주제도를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도 경제개혁과 더불어 점진적인 정치개혁이 필요하고,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당 국가제도의 골격은 유지하면서도 대담한 시장 경제 개혁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도록 기존의 당국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천안문 사태로 양극화되기 이전에 중국 사회와 중국 지도부 내부에서 진행되었던 정책 논쟁은 보수파와 민주파, 그리고 신권위주의론자들간의 미묘한 시각 차이를 보이면서 권력투쟁과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면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정국을 산출하였다.
특히, 1986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와 경제적 위기가 복합적으로 사회적 긴장을 높이고, 이에 따라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두개의 기둥으로 형성된 개혁 세력에 대한 보수파들의 대공세가 집중되는 시점에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미묘한 균열이 나타나고, 후야오방의 퇴진으로 이어지면서 천안문 사태 이전에 이미 개혁지도부는 내상을 입게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갈등이 언제 어떤 계기로 발생했고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이었는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고, 1986년의 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관대한 입장을 취했던 후야오방에 대해 자오쯔양이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1986년 12월 말, 후야오방 총서기가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보수파의 공세에 대해 덩샤오핑이 동조하고, 자오쯔양마저 당 내부 회의에서 후야오방을 비판하자 후야오방 총서기는 자신이 사면초가에 빠진 것을 알고 크게 낙담, 대성통곡한 후 사임을 결심했다고 한다. (가미무라 고지 지음, 송현웅 옮김, [중국 권력 핵심] (청어람미디어: 2002), pp. 56-63 참조)
물론 자오쯔양 측은 지금도 당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간의 갈등과 차이는 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배신했다’는 비난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을 사임하는 과정에서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을 옹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오쯔양은 이런 점에서 후야오방에 대해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 이런 점은 자오쯔양의 측근이었던 张钢이 최근 콜럼비아 대학 학술회의에서 당시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 张钢:“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赵紫阳与中国改革”研讨会(10)“ <多維新聞 (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5) 천안문 사태와 자오쯔양-- 자오쯔양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오쯔양의 정책 노선은 경제 분야에서는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도입등 대담한 개혁 개방을 주장하면서도 정치 분야에서는 당의 지배 원칙에 도전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1986년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한 후야오방에 대해서 보수파들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 자오쯔양이 후야오방의 후임으로 총서기로 취임한 이후 후야오방 사망을 계기로 촉발된 학생운동에 대해서 후야오방과 마찬가지로 유화적인 태도를 견지하다가 마침내 덩샤오핑과 당 원로의 분노를 사, 정치적 몰락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역사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 천안문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자료가 공개되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지난 2001년초 장 리앙(張良)이라는 가명의 중국 공산당 간부 출신에 의하여 편찬 출판된 [천안문 페이퍼]가 발표된 이후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응책에 대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부에서의 논의과정이 드러나면서 주요 정책결정자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 [천안문 페이퍼] 에 대해서는 이 홈페이지에서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으니 참고
(http://www.suh-china.com/bbs/zboard.php?id=situatio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 무력 진압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부 자료를 폭로한 [천안문 페이퍼]와 기타 자료들을 종합하면, 당시 총리였던 리펑등은 처음부터 강경노선을 주장했지만, 자오쯔양은 ‘민주와 법제에 의한 해결책’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시 말해 평화적 대화와 협상을 통해 민주화운동에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온건한 노선을 주장했던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 일정 때문에 4월 23일 북경을 떠나고, 자오쯔양 총서기가 부재중에 리펑 총리는 양상쿤 (楊尙昆) 국가주석등의 동의를 받아 덩샤오핑을 설득, 학생운동을 ‘동란’으로 규정하는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나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학생운동을 정치동란으로 규정하고, ‘기치 선명하게 동란에 반대한다’는 당의 방침을 천명한 4월 26일자 <인민일보> 사설이 발표되자 학생들의 반발이 오히려 확대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4월 30일 북한에서 귀국한 자오쯔양은 그의 정치참모인 바오퉁으로 부터 이런 전후 사정을 보고 받고, 5월 초에 정치국 상위 등을 통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을 주장했으며, 대체로 ‘민주와 법제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 는 기본 방향에 대해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의 사태는 해결되기는 커녕 오히려 단식투쟁 등으로 더욱 격렬해 지고 악화되면서 보수파들의 반발도 심화되는 과정에 5월 16일 고르바초프의 중국 방문, 그리고 고르바초프와 자오쯔양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역사적인 중소 화해가 선언되는 정상회담이 천안문 사태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게 된 것도 문제이었지만, 자오쯔양과 고르바초프 회담에서 자오쯔양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그날 오후 5시 40분, 댜오위타이 (釣魚臺) 영빈관에서 열린 양국 정상회담 모두에 자오쯔양은 ‘중대한 문제의 최종 결정권은 덩샤오핑이 가지고 있으며, 그런 결정은 덩샤오핑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지난 13기 1중전회에서 내려졌다’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자오쯔양의 이같은 발언의 진의가 무엇이든, 이런 발언이 국내외에 공개되면서 덩샤오핑은 민주적 절차를 밟지 않고 중국 정치를 독단하고 있다는 비판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오쯔양의 이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 덩샤오핑의 딸 鄧楠이 전화로 자오쯔양을 격렬히 비판했다고 한다.
자오쯔양의 폭로는 덩샤오핑에게 모든 비난을 뒤집어 씨우려는 것이라면서 자오쯔양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직후 5월 17일 천안문 광장은 100만의 인파들로 가득 메워졌고,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슬로간 에서부터 덩샤오핑과 당 원로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까지 등장하면서 천안문 사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 이런 사태의 전말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천안문 페이퍼];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핵심]이외에도 최근 자오쯔양의 85세를 기념해서 콜롬비아 대학에서 개최된 ‘중국 개혁과 자오쯔양’이란 회의에서 발표된 아래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张钢, “ 南巡前后,邓小平曾三次派人找过赵紫阳,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19_13_52_0_178.html)
-沈昆, “赵紫阳在89学运期间的两件大事” <多維新聞> (2004년 10월 20일) (http://www5.chinesenewsnet.com/gb/MainNews/Opinion/2004_10_20_9_29_30_656.html)

이런 가운데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원로들의 회의가 개최되고, 이 회의에서 계엄령 선포와 무력 진압 방침이 결정되었으며, 자오쯔양의 유화책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물론 덩샤오핑은 더 이상 자오쯔양을 지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오쯔양에게 당의 결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자오쯔양은 일단 수궁했지만, 곧 이어 개최된 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앙 정치국 상무위워회도 계엄령 시행을 결정하자 건강을 이유로 총서기직 사임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5월 19일 새벽에 마지막으로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한 학생들 앞에 나타나 ‘학생제국,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대중앞에서 살아진 이후 오늘까지 오랜 연금 상태로 들어갔던 것이다.
 

     (6)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각과 정치-경제의 동시적 발전론 좌절 

자오쯔양이 1989년 5월 19일 새벽에 학생들 앞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들어 내 고별인사를 하던 그 순간, 자오쯔양 총서기를 수행, 자오쯔양의 바로 뒤에서 굳은 얼굴로 자오쯔양의 연설을 지켜보았던 당시 당 판공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 (溫家寶)가 오늘의 국무원 총리가 되어 자오쯔양의 복권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 질문에 대해 직답을 피하고, 대신 천안문 사태이후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역설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정치의 변화 무쌍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원자바오나 후진타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오쯔양이나 후야오방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천안문 사태에 대해서도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내심 인정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장쩌민이나 리펑 등과는 달리, 이들은 천안문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고, 또 당시의 권력 투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국 지도부의 정통성은 천안문 사태를 ‘동란’으로 규정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수호했고, 동시에 대담한 경제개혁으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장쩌민 노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현 지도부의 입장에서 천안문사태에 대해 재평가하기 어렵고, 또한 자오쯔양 문제에 대해서도 달리 처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결국,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개혁파의 지도자로 출발해서 오늘날 중국의 발전을 견인해 내는 역사적 공헌을 했으면서도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불균등 발전과정에서 발생되는 갈등과 모순에 직면, 이를 나름대로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의 희생은 결국 중국 현대화과정에서 정치-경제의 동시 발전론의 좌절과 신권위주의와 경제발전 우선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