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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30일 토요일

실을 물들이는 사람 + 허유(許由) 고사

묵자가 실을 물들이는 사람을 보고 이렇게 탄식하였다.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래지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래진다. 그러므로 물들이는 일은 신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을 물들이는 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라의 군주에게도 물들이는 일이 있다." 군주에게 물들이는 일이란 어떤 신하를 가까이 두느냐는 뜻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말하자면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공약으로 내걸었을 때는 파란 물감이 들었다가, 시장원리를 핑계로 그것을 철회할 때는 노란 물감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한 번 공약을 내걸었다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맹자도 "소인은 신(信)을 지키고 군자는 의(義)를 지킨다"고 하였다. 

한 번 뱉은 공약이라고 잘못된 줄 알면서 고집하기보다는, 잘못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통령의 공약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토록 천대받아서야, 예전 정부든 지금 정부든 옳은 일이 아니다.

<사진설명: 청 나라 화가 예전(倪田)의 '고사세이도(高士洗耳圖)'. 요 임금이 왕위를 받아달라고 청하자, 허유(許由)가 귀를 씻었다는 고사를 그린 것이다.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순 임금은 허유와 백양에게 물들고, 우 임금은 고요와 백익에게 물들었다. 탕왕은 이은과 중훼에게 물들고 무왕은 태공과 주공에게 물들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성군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 나라의 걸왕은 간신과 추치에게 물들고, 은 나라의 주왕은 승후와 악래에게 물들었다. 그래서 나라는 패망하고 자신은 죽게 된 것이다.">

조준현 부산대 경제학부 교수·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2014년 8월 28일 목요일

단산 : 천명(天命) = 부성지명(賦性之命) + 득위지명(得位之命)

다산은 천명을 둘로 나누어서, 선천적으로 호덕치악(好德恥
惡)의 본성으로 품부된 부성지명(賦性之命)과, 후천적으로 생사⋅
화복 등 득실(得失)로 주어지는 득위지명(得位之命)으로 보았
다.88) 전자가 불후의 가치와 관련된 내적인 본성적 천명이라면,
후자는 유한한 가치와 관련된 외적인 결과적(結果的) 천명이다.
전자는 누구에게나 천부적으로 주어졌고 어떤 경우에도 상실될
수 없으므로 수기하여 성인(聖人)이 되느냐 않느냐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달려있는 반면에, 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나 원의와 상
관없이, 때로는 노력이나 선악과도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
다.89) 그런데 득위지명(得位之命)은 부성지명(賦性之命)을 실
현하기 위한 방편과 길로서 주어지기에, 천(天)은 수덕(修德)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지위의 고하에 의해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90) 이렇게 볼 때 세상의 빈부⋅귀천⋅
요수(夭壽)가 천차만별하고 불공평한 것 같으나 달관한 군자의
눈으로 볼 때는 모두 일치하니, 󰡔周易󰡕의 말대로 자아완성(自我
完成)이라는 목표는 동일하고 거기에 달하는 방도(方道)가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91) 그러므로 인간은 부성지명(賦性之命)을 경
건히 받들어 성실히 솔성(率性) 수덕(修德)함으로써 낙천지명
(樂天之命)의 성인 경지에 이르고, 득위지명(得位之命)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순수(順受)함으로써 안위(安位)하는 진인사대천
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보았다.92) 이렇게
사는 군자(君子)는 요수(夭壽)와 화복을 초탈하게 되어 그 마음
이 늘 넓고 즐거운 반면에, 소인(小人)은 득실에 관심을 두기에
그 마음이 항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93)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대한 이해

 다섯 이야기(2): 서전서문(1)-二帝三王=종맥5 (?>
대순진리회 회보(71호)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대한 이해  

글 연구위원 이승목


Ⅰ. 머리말

Ⅱ. 본론

1. 『서전(書傳)』의 성립

(1)『서경(書經)』의 출현

(2)『서전(書傳)』의 성립

2.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난 요지(要旨)의 이해

(1)정일집중(精一執中)

(2)건중건극(建中建極)

3.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의 실천

(1)정일집중(精一執中)

-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2)건중건극(建中建極)

-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의 확립

(3)‘서전서문’은 주문(呪文)이 아닌 수행(修行)의 훈전(訓典)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상제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서전(書傳)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에 통하고 대학상장(大學上章)을 되풀이 읽으면 활연관통한다.” 하셨느니라. 상제의 부친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끊임없이 읽었으므로 지혜가 밝아져서 마을 사람들의 화난을 덜어 준 일이 많았도다.(교법 2장 26절)


여러 성현들의 말씀 중 ‘대학상장(大學上章)’과 함께 상제님께서 중요시 하신 것이 바로 ‘서전서문(書傳序文)’이다.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한다.’는 상제님의 말씀은 도통(道通)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수도인들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전서문’은 『서전(書傳)』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것으로, 『서전』 각 편의 요지가 집약되어 있는 글이다. 여기서 『서전』이란 송(宋)대 주희(朱熹)의 제자였던 채침(蔡沈)이 기존의 『서경(書經)』에다 주석(註釋)을 단 것이다. 그런데 『서전』 본문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서전서문’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서전』이 어떤 경전(經典)인지 살펴본 후, 그 속에 담긴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서전서문’의 요지(要旨)인 ‘건중건극(建中建極)’과 ‘정일집중(精一執中)’을 『서경』 본문을 참고하여 살펴보고, 이것이 우리의 수도 법방에 어떻게 녹아 들어와 있는지를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서전(書傳)』의 성립


(1) 『서경(書經)』의 출현


『서경(書經)』은 고대(古代)의 성왕(聖王) 요(堯)로부터 주대(周代)까지 여러 제왕들의 정치와 법도(法道)에 관한 언행을 기록한 것으로, 한자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국가통치의 거울이 되어 온 중요한 서적이다. 또한 『시경(詩經)』과 함께 가장 일찍 경서(經書)로 정착된 문헌으로서, 여러 경서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문체로 쓰인 것으로 평가 받는다.

『서경』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나 공자(孔子, 기원전 552~479)가 최초로 수집하여 정리 및 편집했을 것이라는 설(說)과,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전국시대쯤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설(說), 두 가지가 있다.

『서경』은 선진(先秦)때까지 전래되었지만,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46~210)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진한(秦漢) 교체기의 전란(戰亂) 중에 대다수 분실되었다. 한대(漢代) 후기에 이르러 복생(伏生, ?~?)이란 사람이 사라진 『서경』을 다시 수집·정리하였는데, 이를 『금문상서(今文尙書)』라고 한다. 같은 시대에 또 하나의 ‘상서’가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고문상서(古文尙書)』였다. 공왕(共王)이 궁을 확장하기 위해 공자(孔子)의 저택을 허물다가 벽 가운데에서 『춘추(春秋)』·『논어(論語)』·『효경(孝經)』 등과 함께 발견한 것으로, 모두 과두문자(文字; 중국 옛 글자의 하나로 글자 모양이 올챙이 같음)로 씌어 있었다. 『금문상서』는 33편에 이르며 학자·사관·관료·왕실 등에서 많이 읽혔고, 『고문상서』는 25편으로 주로 민간에서 널리 읽혀졌다. 그러나 약 3백여 년 후인 서진(西晉) 회제(懷帝)때에 흉노(匈奴)가 일으킨 큰 반란으로 이 두 종류의 ‘상서’는 거의 소멸되다시피 하였다. 동진(東晋)시대에 이르자 『금문상서』와 『고문상서』를 취합한 형태인 『위고문상서』 58편이 발견되었다. 바로 이 『위고문상서』가 현재에 전해지는 『서경』이다.

『서경』이 지니고 있는 의의(意義)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중국역사의 시조(始祖)’이다. 『서경』이 후세에 나온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와 같은 정사(正史)는 아니지만, 중국 고대사의 기록은 『서경』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들이 발견되어 『서경』의 기록들이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관해 류승국(柳承國) 교수는 “…요순(堯舜)이 종래에 생각한 것과 같은 가상적 인물이 아니라 중국 상대(上代)에 실재한 역사적 인물로 추단(推斷)할 수 있다.… 그것은 최근 갑골문(甲骨文)에 근거하여 경전(經典)과 『사기(史記)』에 기록된 요순(堯舜)에 관한 사실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곧 고고학적 입장에서 정확한 연대는 말할 수는 없으나 요순(堯舜)은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이었으며, 당시 기록된 그 문화도 실존했다는 것이 갑골문을 통해 예단(豫斷)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경』은 중국문학사에서 ‘산문(散文)의 시조’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그것은 『서경』이 한문으로 쓰인 가장 오래된 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중국의 시가(詩歌)가 『시경(詩經)』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했던 것과 같다. 한(漢)대 뒤로 육조(六朝)시대에서는 형식의 아름다움에 치중하여 산문을 짓는 데 있어서도 꼭 대구(對句)를 따져 글을 쓰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당(唐)대에 이르러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한유(韓愈, 768~824), 유종원(柳宗元, 773~819) 같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고문운동이 일어나 글은 대구나 형식의 아름다움을 따지는 것보다도 자기의 뜻을 자유롭게 잘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이 주장한 고문이란 진(秦)나라 이전의 글들을 가리키며, 그 고문의 조종(祖宗)이라 칭한 것은 역시 『서경』이었다. 이처럼 『서경』은 ‘산문의 시조’로서 중국문학사에서 산문 발전의 밑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서경』은 정사(政事)의 표본이다. 『서경』은 곳곳에서 군주의 덕치(德治)를 강조한다. 그래서 본문 전반에 걸쳐 ‘명덕신벌(明德愼罰; 덕을 선양하고 형벌을 삼가 함)’과 ‘애민중민(愛民重民; 백성을 사랑하며 중하게 여김)’ 그리고 ‘왕도(王道)’의 정치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명덕신벌’은 군주 자신이 지켜야 할 계명(誡命)을 뜻하고, ‘애민중민’은 정치를 할 때 백성들을 근본으로 여기고 백성들의 삶을 질적으로 개선하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왕도정치(王道政治)’는 후대 유가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의 기초를 이루게 되며, 나라를 세우는 기본 이념으로 정착된다. 그래서 순자(荀子)는 이 책을 ‘정치의 기(紀; 규범)’라 했고, 공영달(孔穎達)은 ‘군주 사고(辭誥; 군주가 내린 명령이나 포고를 아우르는 말)의 법전’이라고 하였다.

『서경』이 이렇게 중요하게 인식되었지만 그 내용이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어 학자들은 여러 종류의 주해서(註解書)를 썼다. 복생의 제자들이 지은 『상서대전(尙書大傳)』을 시작으로, 『구양경』·『구양장구』·『대소하후장구』 등이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자구(字句)의 주석엔 힘쓰지 않고 경(經)을 빌어 정치를 논하고, 거기에 터무니없는 예언적·신비적인 이론까지 보탠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당(唐)나라 태종(太宗) 때에 이르러 공영달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쓴 『상서정의(尙書正義)』가 출판되었다. 당시에는 가장 볼만한 주석서로서 많은 학자들에게 읽혔지만, 이것 역시 오역(誤譯)이 많다는 이유로 경문 자체의 진위 문제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던 중 송(宋)대 주자(朱子)의 학설을 이어받아 채침(蔡沈)이 쓴 『서집전(書集傳)』이 선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때까지 나온 주석서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 받았다. 『서집전(書集傳)』을 줄여서 『서전(書傳)』이라고도 하는데, 상제님께서 읽기를 권하신 ‘서전서문(書傳序文)’은 다름 아닌 채침이 지은 『서경』의 주석서 『서전』의 머리말인 것이다.


(2) 『서전(書傳)』의 성립


『서전(書傳)』은 그동안 전해져 오던 『서경(書經)』을 채침(蔡沈, 1176∼1230)이 새로이 주석(註釋)한 서적이다. 그는 중국 남송(南宋)의 성리학자로, 주희(朱熹)의 친구이자 수제자인 채원정(蔡元定)의 아들이며, 스승인 주희의 사위이다. 아버지 채원정은 천문학과 수학·풍수에 정통해, 채침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성장하여서는 주희에게서 수업을 받아 그의 사상을 계승해 나갔다. 또한 그는 마음[心]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 연구에 매진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에게 있어 일생일대의 대작은 10년의 연구 끝에 완성한 『서전』이었다. 이 책은 본래 주희가 집필했던 것이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해 제자인 채침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채침은,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의 각 편은 주희의 교정을 거친 것이고, 그 이외 다른 편은 이전 학자들의 설(說)을 모아 절충하여 해석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편찬 과정에서 스승인 주희의 사상을 담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 결과 『서전』은 송(宋)대 이후 난해한 『서경』을 이해하는 데 가장 명쾌한 주석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채침의 『서전』이 나온 이후 많은 주석서들이 도태되고 학자들은 오직 채침의 주석서만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원나라 인종(仁宗)시절에 관리들의 공인서책으로도 지정되어 읽혀졌고, 과거법(科擧法)이 제정될 때에는 이 『서전』이 시험의 교본(敎本)이 되었다. 그 뒤에도 청(淸)말에 이르는 6백여 년간 『서전』은 대표적인 주석서로 읽혀 왔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인식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전』에 나타나는 여러 성인(聖人)의 치도(治道)를 덕치(德治)구현의 표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책에 나타난 사상, 제도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반영되기도 하였는데, 부모의 삼년상(喪)이라든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덕윤리 같은 것이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2.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난 요지(要旨)의 이해


채침은 『서전(書傳)』의 ‘서문(序文)’을 쓰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취지를 설명하고, 특히 각 편의 의의(意義)를 집약시켜서 여기 ‘서문’에다 함축된 요지(要旨)로 표현해 놓았다. 그 요지란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을 일컫는다. ‘서문’에 따르면, “정일집중은 요(堯)·순(舜)·우(禹)가 주고받은 심법이요, 건중건극은 상나라 탕(湯)왕과 주나라 무(武)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라 한다.

다음은 채침이 지은 『서전』의 ‘서문’이다.


慶元己未冬先生文公令沈作書集傳明年先生歿 又十年始克成編總若干萬言嗚呼書豈易言哉 二帝三王治天下之大經大法皆載此書而淺見薄識豈足以盡發蘊奧 且生於數千載之下而慾講明於數千載之前亦已難矣. 然二帝三王之治本於道二帝三王之道本於心得其心則道與治固可得而言矣 何者精一執中堯舜禹相授之心法也建中建極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曰仁曰敬曰誠言雖殊而理則一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 至於言天則嚴其心之所自出言民則謹其心之所由施禮樂敎化心之發也 典章文物心之著也家齊國治而天下平心之推也心之德其盛矣乎 二帝三王存此心者也夏桀商紂亡此心者也太甲成王困而存此心者也 存則治亡則亂治亂之分顧其心之存不存如何耳 後世人主有志於二帝三王之治不可不求其道 有志於二帝三王之道不可不求其心求心之要舍是書何以哉 沈自受讀以來 沈潛其義參考衆說融會貫通折敢折衷 微辭奧旨多述舊聞二典禹謨先生蓋嘗是正手澤尙新鳴呼惜哉 集傳本先生所命故凡引用師說不復識別 四代之書分爲六卷文以時異治爾同 聖人之心見於書猶化工之妙著於物非精深不能識也 是傳也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心雖未必能造其微於堯舜禹湯文武周公之書因是訓亦可得其指意之大略矣 嘉定己巳三月旣望武夷蔡沈序

경원(慶元) 기미(1199)년 겨울. 선생 문공(朱子를 가리킴)께서 나(채침)로 하여금 『서집전』을 짓게 하시고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그 후 10년이 지나 이렇게 편찬하니 그 분량이 약 일만 자에 이른다. 아아! 『서경』을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으랴. 두 황제(堯舜)와 세 왕(禹·湯·武)의 천하를 다스리던 경륜이 이 책에 실려 있으니, 나같이 식견이 짧고 지식이 얕은 사람이 어찌 그 심오한 진리를 다 캐낼 수 있으리오. 더구나 천년 뒤에 나서 천년 전(前)의 일을 강구하니,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도다. 그러나 두 황제와 세 왕의 정치는 도(道)에 근본하고 그들의 도는 마음에 근본을 둔 것이니, 그 마음만 바로 터득한다면 그 도(道)와 정치(政治)를 말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정일(精一)과 집중(執中)은 요·순·우가 주고받은 심법(心法)이요, 건중(建中)과 건극(建極)은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서로 전한 심법이니, 덕(德)과 인(仁)과 경(敬)과 성(誠)이 비록 그 말은 다르나 진리는 하나이며, 그 모두가 이 마음의 오묘한 원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말함에 이르러서는 곧 그 마음이 유래한 곳(하늘)을 스스로 경건히 밝히려는 것이요, 백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곧 그 마음이 베풀어지는 바를 삼가는 것이니, 예악(禮樂)으로 교화함은 그 마음의 드러남이다. 문물과 제도는 마음의 나타남이요,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으로써 천하를 바르게 함은 곧 그 마음을 미루어 확장한 것이니, 실로 마음의 덕이 성대(盛大)하다 할 수 있으리라.

두 황제와 세 왕은 이 마음을 간직한 이요, 하의 걸(桀)왕과 상의 주(紂)왕은 이 마음을 잃은 이요, 태갑(太甲)과 성왕(成王)은 겨우 이 마음을 지킨 이이니, 간직하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지는 것으로서, 치란(治亂)의 나뉨이 이 마음을 간직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후세의 임금으로서 두 황제와 세 왕과 같은 다스림에 뜻을 둔다면 그 도를 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그 마음을 터득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마음을 구하는 요체로서 이 책(書經)을 버리고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침이 이 글을 읽은 후로 그 심오한 뜻을 헤아리고 여러 설을 참고하여 저절로 이해되고 관통되는 대로 감히 절충하고자 애썼으나 은밀한 말씀과 심오한 뜻은 그 전날 선생께 듣던 바를 많이 이끌어 썼고, 더구나 이전(二典)과 우모(禹謨)는 선생께서 일찍이 바로 하여 그 손때가 새로우니 아! 슬프고 애달프다. 집전은 원래 선생께서 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두루 선생의 설을 인용하였으나 별도로 표시하지는 않았고, 4대의 서를 나누어 열 권으로 하였으니, 글은 때에 따라 다르다 해도 다스림은 같아, 성인의 마음이 글에 나타남이 마치 조화의 묘가 만물에 나타나는 듯하여, 정심(精深)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이 전(傳)이 요·순·우·탕·문·무·주공의 마음 속 세세한 움직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분들에 대한 글을 이 전으로 새겨 읽으면 가리키는 바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 기사(1209년) 3월 열엿새(16일)날 무이 채침(武夷蔡沈)이 머리말을 쓴다.


(1) 정일집중(精一執中)

‘서문(序文)’의 요지(要旨)로 나타나고 있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내린 훈시인 ‘윤집궐중(允執厥中)’에서 유래되었다. 이 요지에 대해 주희(朱熹)는, ‘정(精)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인심(人心)인지 도심(道心)인지 자세하게 성찰하는 노력이요, 일(一)은 올바른 도심을 오롯이 지켜내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달리 말하면, ‘정(精)’은 사람들이 평소 어떤 일을 지각하고 또 처사할 때 자신의 마음이 과연 도덕적인지 아니면 감각적인지 그 낌새를 주의 깊게 살필 것을, ‘일(一)’은 이러한 내면 성찰 속에서 도덕심을 굳게 지켜 그로써 감각적인 마음을 올바르게 지도해 나갈 것을 요구하는 공부 방법론이다.

그리고 집중(執中; 중을 잡는다)은 정사(政事)의 처리를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중(中)’이란 정사처리 시에 지켜야 할 중도(中道)인 ‘중용(中庸)’을 뜻하는 것으로, 어떤 경우이건 또는 누구에게든 가장 알맞고 가장 적절한 도리(道理=理致)를 바르게 지켜 언제나 변함없이 일상에서 구현함을 가리킨다. 결국 ‘정일집중’이란 잡되지 않고 오직 하나인 순수한 마음(心)과 중(中)의 도(道)를 지키는 심법(心法)을 말한 것이다.

이 심법에 대한 좀더 쉬운 이해를 위해 조선시대 유학자 허목(許穆, 1595∼1682)은 이를 도해(圖解)화 시킨 바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인간성의 회복과 사회기강의 정립, 정도(政道)의 확립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시 이것은 덕(德)·치(治)·정(政)·업(業)을 강령(綱領)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철학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제자백가에 관한 서적과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여러 가지 옛 경서(經書)를 섭렵하면서도 채침의 『서전』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것은 『서전』이 인간세상의 강상(綱常) 윤리를 우주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자신이 생각했던 그만의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허목은 이 서적을 토대로 특수한 도해법을 만들어 심법(心法)을 설명하였으니,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가 그것이다.

이 ‘심학도’를 살펴보면, 허목은 인간의 선천적 마음상태를 욕심이 없고 텅 비어 신령스러우며 모든 이치를 갖춰 맑은 것으로 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일 때 변함없이 깨끗하고 곧게 유지되면 자연히 바른 판단에 따라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사소한 일에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사(萬事)와 상통(相通)하는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에 깨끗한 공적(公的)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이를 심학(心學)의 대요(大要)라고 하였다.

특히 ‘요순우전수심법도’는 채침의 ‘서전서문(書傳序文)’에 나타나고 있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을 도식화한 것으로, 인간이 천리(天理)에 부합될 수 있도록 선천적 본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수양의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인간이 이를 지키게 되면 모두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정치가 바로 서면서 곧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본 것이다.

이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요약하면, 사람은 누구나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 마음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겨내기 어려워 인심(人心)은 위태로워지고 도심(道心)은 은미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바른 마음을 지키는 데 정성을 다하고 일심(一心)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다. 순 임금은 우 임금이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집중(執中; 중을 잡음)’ 이전에 힘써야 할 공부로 ‘사람의 마음은 도를 지키려 해도 이기적이어서 자칫하면 도에 어긋나게 되므로 위태롭고[人心惟危],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사람의 마음이 약하기 때문에 희미해지기 쉽다[道心惟微], 그래서 정신을 모으고 통일하여야만 도를 따를 수 있다[惟精惟一]’는 것을 부연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심(道心; 본연의 양심)으로 하여금 항상 몸의 주인이 되게 하여 인심(人心)이 도심의 명령을 따르게 하면, 위태로운 인심은 안정되고 은미(隱微)한 도심은 뚜렷이 드러나 분명해져 행동거지에 저절로 과불급(過不及)의 차질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요(堯)·순(舜)·우(禹)가 전해 준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군주가 ‘정일집중’이 전제(前提)된다면, 정사(政事) 처리에 있어서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바른 예법이 세워진다는 것이다.

결국 허목은 ‘요순우전수심법도’의 심법을 바탕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회복함으로써 올바른 덕치(德治)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는 군주의 책무가 막중함을 군왕 스스로 각득(覺得)하여 ‘성인(聖人)의 도(道)’인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을 시행해야 함을 역설했던 것이다.


(2) 건중건극(建中建極)


‘정일집중(精一執中)’과 함께 ‘서문(序文)’의 요지(要旨)로 나타나는 것이 ‘건중건극(建中建極)’이다. ‘건중건극’은 『서전(書傳)』 「주서(周書)」‘홍범(洪範)’ 제 오(五)주 ‘임금이 중정(中正)의 도(道)로 표준을 세운다.(皇建其有極)’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홍범’은 『서전』 전체를 관통하는 정치 원리의 핵심을 담은 것으로, 그 내용이 아홉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홍범구주(洪範九疇;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대법)’라고도 한다. 『한지(漢志)』에 따르면,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이 큰 거북이의 등에 낙서(洛書)를 내려 주었는데, 거기에는 오행(五行)의 원리와 구주(九疇)의 대경(大經)이 담겨져 있었다고 한다.

‘홍범구주’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은 오(五)주 황극(皇極)이다. 황(皇)은 임금[君]이고, 극(極)은 북극(北極)의 극과 같은데 ‘지극지의(至極之義)’·‘표준지명(標準之名)’을 뜻한다. 따라서 건극(建極)은 극이 중앙에 세워져[中立] 사방이 그 올바름[正]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임금된 사람의 한 몸은 만(萬)가지 교화(敎化)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말하고 행동하는 바가 모름지기 크게 중도(中道)에 맞아야 되고 치우치지 않는 지극히 바른 표준(標準)을 세워 천하의 모범(模範)이 되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부부·형제의 경우도 일체의 언동(言動)과 일에 당연함을 다하는 것이라 한다. 결국 임금이 몸소 수신(修身)의 지극(至極)함에 도달하여 만민(萬民)의 표준이 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서전』 ‘홍범’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五皇極 皇建其有極. 時五福 用敷錫厥庶民. 惟時厥庶民 于汝極 錫汝保極. … 無偏無陂 遵王之義. 無有作好 遵王之道. 無有作惡 遵王之路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 曰皇極之敷言 是彛是訓 于帝其訓. 凡厥庶民 極之敷言 是訓是行. 以近天子之光 曰天子作民父母 以爲天下王.

다섯 번째는 임금의 법칙을 세우는 것인데, 다섯 가지의 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베풀면 백성들은 당신의 법칙을 따르게 될 것이며, 당신과 함께 이 법칙을 지켜나가려 할 것입니다. … 백성들은 치우치거나 그릇됨이 없이 임금이 정하고 인도하는 법을 따라야 하며, 자신만이 좋아하는 일에만 치우치지 말고 임금이 정한 도리를 받들고 지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싫어한다고 하여 멀리하지 말고 임금이 이끌어 주는 길을 따라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임금 역시 사사로운 정에 치우치거나 사사로운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돕거나 두둔하지 말아야 비로소 임금의 길은 평탄해지고 또한 평온해질 것입니다. 언행에 일관성이 있고 치우치거나 그릇됨이 없어야만 임금의 길이 바르고 곧을 것입니다. 임금이 제후와 신민(臣民)들을 모으고 거느리는 데는 법칙이 있어야 하며, 제후들과 신민들이 임금을 의지하고 받드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임금의 법칙에 관해 두루 올린 말을 널리 펴서 상도(常道)를 잃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따를 것이며, 하늘까지도 이에 호응할 것입니다. 비록 백성의 말이라도 법에 맞으면 거기에 따르고 그것을 실행하십시오. 그리하면 천자의 빛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임금이 덕(德)으로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하면, 자연 백성들은 임금의 법을 존중하여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신하와 백성을 거느리고 다스리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하고, 신하와 백성이 임금을 따르고 받드는 데도 법칙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임금은 임금답게 직분(職分)을 다하여 올바른 길로 백성을 다스리고 인도하여야 하며, 신하와 백성들 역시 본연의 직분을 다함으로써 사사로이 좋고 나쁨에 좌우되지 말고 올바른 길을 따른다면, 이를 바른 ‘건중건극’이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건중건극’이란 중용(中庸)의 도(道)를 잘 지켜서 인륜의 규범을 세우고 법칙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채침은 어쩌다 한번 ‘건중건극’을 실천했다고 해서 이상적인 덕치(德治)가 이루어졌다고 보지는 않았다. 한 마리의 제비가 날아온다고 해서 봄이 오는 것이 아니듯이,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올바른 도심(道心)을 굳게 지켜내고[精一], 그 가운데 마음의 중도(中道)를 꾸준히 지켜나가야[執中] 한다고 한다. 즉 ‘정일집중(精一執中)’이 전제(前提)되어야만 ‘건중건극’이 꾸준히 계속해서 바르게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3.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의 실천


『서경(書經)』의 전체적인 내용을 함축시켜 놓은 ‘서전서문(書傳序文)’의 내용은, ‘정일집중(精一執中)’과 ‘건중건극(建中建極)’으로 표현되는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경대법(大經大法)임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한다’라는 상제님 말씀은 무슨 뜻일까?

도통(道通)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수도를 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상제님의 말씀대로라면 ‘서전서문’의 요지(要旨), 즉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이 수도생활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수도를 하기 위해서는 수도 법방이 있어야 하는데, 상제님의 진리를 받들어 50년 공부종필(工夫終畢)의 법(法)으로써 수도 법방을 짜 놓으신 분은 도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수도 법방에 따라 수도를 하고 또한 도통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도 법방에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의 가르침이 이미 녹아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1) ‘정일집중(精一執中)’ -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편에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내린 ‘윤집궐중(允執厥中)’이나 허목의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토대로 해서 ‘정일집중’을 살펴보면, 사람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선(善)하나 도(道)를 지키려는 마음[道心]이 약하고 사심(私心)에 젖어 들기 쉬워 자칫하면 도에 어긋나게 되므로 위태롭고 희미해지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요(堯)·순(舜)·우(禹) 같은 성인(聖人)조차도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늘 사심을 경계하고 오직 한 마음으로 본연의 양심(良心)인 도심(道心)으로 귀일코자 했던 것이다.

성인들도 이러할진대, 도통(道通)을 수도의 최고목적으로 삼고 있는 수도인들에게 양심의 중요성과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바로 『대순진리회 요람』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마음을 속이지 말라.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言語)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과 사심(私心) 두 가지가 있다. 양심(良心)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私心)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發動)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元來) 인성(人性)의 본질(本質)은 양심(良心)인데 사심(私心)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敢行)하게 됨이니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인 천성(天性)을 되찾기에 전념(專念)하라.

곧 양심은 수도에 있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심성(心性)이며, 인간의 마음이 사심의 지배를 받기 쉽기에 양심을 되찾는 수도에 진심갈력(盡心竭力)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이 사심(私心)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겸손한 자세로 수도에 임해야 한다. 물론 상제님께서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우니라.”(교법 2장 6절)고 하신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양심(良心)을 지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가올 후천을 생각해 볼 때, 어렵고 힘들더라도 더욱 이를 실천코자 각골정려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건중건극(建中建極)’ -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의 확립


『서경(書經)』 ‘홍범(洪範)’에서 살펴보았듯이 ‘건중건극’은 임금이 모든 일에 가장 알맞고 적절한 표준(標準)을 세움, 즉 치우치거나 편벽됨이 없는 공명정대함으로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임금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 백성들은 이에 감화(感化)되어 임금이 제시한 표준을 더불어 보존코자 한다는 것이다.

포덕(布德)사업에 있어서도 각자 그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수도인 모두는 ‘건중건극’에서 말하는 임금의 위치, 즉 여러 사람을 통솔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그때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편벽되지 않으면서 공평한 기준을 세우고 항상 먼저 모범을 보인다면, 자신을 따라 오는 후각도 저절로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앞의 ‘정일집중’에서 살펴본 양심(良心)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 수도인 내부에서 벌어지는 노력이었다면, 이 ‘건중건극’의 표준을 세우는 일은 수도인 외부로 표출되는 노력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건중건극’은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수도법방 중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체계의 확립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체계의 확립은 무엇보다 서로 간의 신뢰(信賴)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 ‘건중건극’의 두 가지 요소인 ‘공명정대함’과 ‘솔선수범의 자세’야 말로 상하간의 신뢰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도전님의 말씀을 살펴보더라도,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사정(私情)에 치우쳐 편애를 한다면, 서로 간의 불신(不信)을 불러일으켜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서로를 헐뜯게 되고 결국 그 체계는 와해(瓦解)되고 만다. 국가를 세우기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통솔하는 자리에서 자신은 솔선수범하지 않고 언행(言行)만 내세워 아랫사람에게 강요만 한다면, 도리어 배신당하게 된다.

이와 같이 ‘건중건극’의 가르침, 즉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 확립은 수도인들이 후천 선경을 건설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하고도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서전서문’은 주문(呪文)이 아닌 수행(修行)의 훈전(訓典)


‘서전서문’을 이해함에 있어 끝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상제님께서 ‘서전서문’을 많이 읽기를 권하셨지만, 이것은 ‘서전서문’을 주문과 같이 반복하여 계속 읽어라는 뜻은 아니다. 『典經』에 “… 상제의 부친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많이 읽지는 못하였으나 끊임없이 읽었으므로 지혜가 밝아져서 마을 사람들의 화난을 덜어 준 일이 많았도다”(교법 2장 26절)라는 말씀을 미루어 볼 때, ‘서전서문’을 많이 읽음의 결과는 곧 지혜가 밝아진다는 것이며 이것의 의미는 뒤의 문맥과 연관시켜 볼 때, 사리(事理)나 이치(理致)에 밝아짐을 뜻하기에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하고 …”라는 말씀을 곡해(曲解)하여 반복 암송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 속에 담긴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이 주는 가르침을 깨달아 이를 수행의 훈전(訓典)으로 삼아 실천 수도해 나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임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Ⅲ. 맺음말


『서경(書經)』은 천명(天命)에 의해 왕위에 오른 임금이 하늘의 질서에 따라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고 관직을 두어 덕(德)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합심하여 이상적인 정치, 즉 덕치(德治)를 실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문(序文)’에서는 그 덕치의 실현에 관한 요지인 ‘성인(聖人)의 심법(心法)’을 말하고 있는데, 그 심법은 잡되지 않아 오직 하나인 순수한 마음(心)과 중(中)의 도(道)를 일컫는 것이다. 이는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한 심법(心法)인 ‘정일집중(精一執中)’과 중용(中庸)으로써 인륜(人倫)의 규범을 세웠던 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건중건극(建中建極)’으로 표현되어졌다. 상제님께서는 “옛적에 신성(神聖)이 입극(立極)하여 성·웅(聖雄)이 겸비해야 정치와 교화를 통제 관장(統制管掌)하였으되 중고 이래로 성과 웅이 바탕을 달리하여 정치와 교화가 갈렸으므로 마침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진법(眞法)을 보지 못하게 되었느니라. 이제 원시반본(原始返本)이 되어 군사위(君師位)가 한 갈래로 되리라.”(교법 3장 26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중고(中古) 이래로 군왕들에게 웅패(雄覇)의 술은 있었으나 ‘성인의 심법’이 부재(不在)했음을 지적하시고 이로 인해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지 못했음을 알려주신 것이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군사위가 한 갈래로 되고, “요·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교운 1장 46절)고 하셨으니 앞으로 오는 세상에서는 ‘성인의 심법’을 닦은 사람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이상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따라서 상제님의 뜻을 받드는 수도인들은 ‘서전서문’의 요지에서 나타난 ‘성인의 심법’이 주는 가르침, 즉 양심(良心)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는 것과 공명정대와 솔선수범에 의한 체계(體系) 확립임을 각성(覺醒)하고 이의 실천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도주님께서 짜 놓으신 수도법방에는 ‘서전서문’에서 말하는 ‘정일집중’과 ‘건중건극’의 가르침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들어 있을 것이나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道)에 통(通)하고”라고 상제님께서 굳이 이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것이 수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이를 무엇보다 우선으로 해서 실천 수행해야 함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

 고조선답사 소고(小考):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 -- 양체제의 장점을 발전시켜 --
저자:  노태구조회: 821발행 일자: 11.22.2013카테고리: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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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민족의 혼을 깨우치며한민족의 구 강역의 원류를 찾아 민족의 혼을 깨우치기 위해 27차 고조선 유적답사를 이번에는 배달국(환국)의 배달겨레(한밭민족, 한겨레)의 터전이었던 흑룡강성 일대를 중심으로 고조선을 원류로 하는 (북)부여를 중심으로 북위, 실위, 선비족의 발자취를 따라 8박9일의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는 한여름의 긴 장마와 더불어 보기드믄 폭염이 계속되는데, 우리는 2013년 7월 31일 오후 7시에 탑승하여 할빈을 향해 출발하였다.
2시간 여에 걸려 당도한 옛 고조선의 강역인 동북 3성의 하나인 흑룡강성의 성도 할빈의 날씨는 한국의 여름날씨와 같았다. 그런대로 여행을 시작함에 견딜만한 날씨였다. 또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의 여정이 계속되는 동안은 여기서도 장마기간인지 비교적 날씨도 흐리고 비도 자주 와 여행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여행을 끝내고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 며칠 있다가 아무르강을 비롯 송화강 유역 일대가 큰 홍수가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Ⅱ.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
우리는 8월 1일에는 오대련지(五大連池, 세계지질공원), 2일에는 흑하시 애휘현(黑河市 愛輝縣)을 둘러보았다. 이 지역의 행정기구인 을룬춘 협령공서(卾倫春 協領公署)와 청대의 애휘세관을 둘러보았다. 이 지역은 애휘 불평등조약으로 유명하다. 1858년 5월 28일 하오 청․러 간에 애휘조약(일명 아이훈(愛暉)조약)을 맺어 청은 60여 평방km의 토지를 상실하게 된다. 애휘조약 기념비는 1945년 8월 15일 소련 홍군이 흑하시를 해방하였을 때 비문에 새겨 있는 반소(反蘇)와 일만협정(日滿協定) 등의 내용을 훼손하였다.
아이휘박물관에는 양상곤(楊尙困)이 1996년 7월에 써놓은 글이 있었다. “爲愛輝古城題: 牢記歷史 開創未來(위애휘고성제: 뇌기역사 개창미래, 아이휘 고성을 위한 글: 역사를 굳게 기억하여 미래를 열어가자). 호마(呼瑪)현을 통과하면서 호마천이 범람하여 가교(架橋)로 도강(渡江)하기까지 1시간 이상을 기다려 밤중에 호마시내 신달여관(鍂達賓館)에서 여장을 풀었다. 3일에는 백은납(白銀納)에 도착하여 얼운춘족 풍정(風情)을 구경하였다. 탑하현(塔河縣)을 거쳐 막하(漠河)시내에 있는 애국빈관(愛國賓館)에서 투숙하였다. 4일은 짙은 안개로 그러나 청명한 아침을 맞으며 중국 최북단 북극촌(北極村)에 도착하였다. 막하현 백야, 오로라, 타이거 기후대를 체험하며 막하시내 조선 구육관(狗肉館)에서 점심을 하고 호중진(呼中鎭)시에 도착하였다. 6일은 월료일로 여전히 짙은 안개와 청명한 아침으로 하루 여정을 시작한다. 가거다치(加格達奇)시(市) 녹엽화과(綠葉火鍋)에서 점심을 하고 오룬춘족(鄂倫春族)의 오룬춘기(鄂倫春旗)(아리하진(阿里河鎭))광장을 둘러보고 가거다치 시내의 연사빈관(燕莎賓館)에서 힘들게 또 하룻밤을 보냈다.
6일에는 아침에 가거다치 상점에서 블루베리를 구입하여 10시경 늦게 출발하였다. 가거다치 구역의 여진족 박물관, 시장구경, 알선동굴(嘎仙洞), 아리하(阿里河, 한강), 눈강(嫩江, 송화강으로 흐름, 결국은 아리수이고), 치치하얼을 거쳐 대경(大慶)시에 도착하여 러브호텔인 희룡빈관(禧龍賓館)에서 여장을 풀었다.
오늘 낮에는 별다른 체험을 하였다. 부여족의 발원지인 알선동굴 앞을 흐르는 아리하에서 잠시 온몸을 담그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지난해 림프종을 치유하고 난 후 아직도 면역력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조금만 과로하면 신체에 가려운 반점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몇 개월 전에는 대상포진도 앓은 적이 있다. 그래서 고조선의 발원지를 떠올리면서, 한편 원기를 회복하여 그 호연지기로 오늘 여정을 함께 하는 동지들과 뜻을 규합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고 한민족의 통일된 역량으로 나아가서 다시금 고조선의 강역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이 신선한 개천에서 멱을 감았던 것이다.
7일에는 탁트인 광활한 시가지와 대경시 내외에 쉴 새 없이 작동하고 있는 유전 채취기계들을 보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유전지대인 대경의 규모가 과연 얼마만한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중국의 G2로 비약하는 에너지의 원천이 북만주의 대평원의 곡창지대와 더불어 바로 여기 대경유전이 아닌가 싶었다.
정오경 할빈의 태양도(太陽島) 선착장(船着場)에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왔다. 흑룡강성 박물관 앞에 서있는 ‘흑룡강성혈액중심’의 헌혈 버스에는 “學習雷鋒, 奉獻他人, 提升自己(학습뢰봉, 봉헌타인, 제승자기: 뇌봉을 학습하여 타인에 봉사하며 자긍심을 올리자)”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서라벌(薩拉伯爾) 정통(正宗) 한국요리점에서 모처럼 불고기로 점심을 하였다. 오후에는 할빈역에 도착하여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한 장소를 둘러보았다. 안의사기념관도 들렀으나 보수중이었다. 러시아 성당(정교)을 둘러보고 이비스(Ibis, 宜必思)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 숙소는 첫날 머문 곳이기도 하다.
8일은 출국날이라 새벽부터 서둘러 일어나 7시 6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9시에 탑승을 시작하여 2시간여에 걸려 오전 11시 16분에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함으로써 우리들의 긴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Ⅲ.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1)
참으로 이번 여행은 12명의 동지들이 모두 호흡이 잘 맞았지만 그 중에서도 옆자리에 앉아 긴 여정을 함께 한 전 전주문화원장을 지낸 서승(徐昇) 선생님과의 ‘조선상고사’에 대한 대화가 막연했던 고조선 역사에 대한 답사를 구체적으로 그 이론, 논리까지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해주어 이번 여행은 더없는 값진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서원장님은 저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미국의 볼티모어에 거주하시는 김영식 선생님과는 고교동창이기도 하여 더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우선 서원장님의 이렇게 호한한 조선상고사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배경부터 들어보도록 하였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우리나라 고대사역사를 두고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는 신화로 보거나, 심지어 사대주의(慕華史觀)로 인하여 단군을 신화로 보고 부여나 발해의 역사를 제대로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제 신채호(丹齊 申采浩)의 「조선상고사」를 접하면서 우리 역사가 반도사관에 머물지 않고 웅혼한 대륙사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병화(李秉華)선생은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와 만주에 국한하는 것이 반도사관이고, 감숙성, 청해성에까지 나아갈 때 한국사의 대륙사관이 된다고 하였다.2) 그래서 그는 중원을 지배할 수 있는 대륙사관을 갖기 위해서는 단재의「조선상고사」와「환단고기」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재는 김부식의「삼국사기」를 버렸는데, 왜냐하면「삼국사기」에는 단군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여는 어떤 나라인가? 부여는 불여, 불무리로, 즉 아침(火)의 나라라는 뜻이다. 졸본부여는 줄기부여, 뿌리의 부여로 황제 고두막한(汗)(칸, 황제)(=동명성왕)에 의해 한 무제의 군대가 쫓겨나오니 이들 중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고 나중에 동명성왕(고주몽)으로 고구려를 건국했다. 한구(한나라의 도둑들)를 쫓아내니 인민들이 고두막한을 동명성왕으로 추대했다. 삼국사기는 고주몽이 동명성왕이라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광개토왕 비문에 보면 확인된다.
남부여는 백제말기 성왕이 공주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여 남부여라고 했다. 온조가 열다라(십제)를 세웠다. 백제는 고두막한의 후예인 구태(仇台)가 세운 것이 온다라(백제)이다. 온조는 후대 백제의 담로국(제후국)이 되었다(고이왕 AD. 239) 북부여의 5대 단군으로 즉위하려던 해부루가 고두막한(동명성왕)에 밀려서 동쪽으로 간 것이 동부여이다. 동부여의 초대 천대(1대 임금)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일연은 단군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러나 환인, 환웅, 단군을 1代로 다룬 것이 한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가 여기에 근거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1935)의 주 집필자인 이마니시류(今西龍)가 단군세기를 신화로 부르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마니시류는 이병도의 스승이다. 「삼국사기」는 단군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없다.
「동국통감」이나 「삼국사기」에는 신화라는 말이 없는데 1935년에 조선총독부의 이미니시류가 AD 369년 이전의 삼국사기 초기의 역사를 신화, 설화라는 말을 지어내어 ‘조선사’를 왜곡시켰던 것이다.
조선상고사 설명을 두고 김정배, 김원룡 류의 역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대로만 얘기한다고 했다.

* 환국(桓國)은 환인(桓因)의 시대로 7代로 3301년을 지배함(연대는 확실하지 않고)
* 배달은 환웅(桓雄)의 시대로 18代로 1563년간 지배함.
* 아사달3)은 단군시대로 47代로 2096년간 지배(44대~47대, 이 년간(심양근방)을 ‘대부여’, ‘전부여’라고 한다).4) 다시말해 부여의 자손인 구물이 아사달의 44대 단군으로 즉위하면서 부여라고 국호를 바꾸었다. 이것이 대부여다.
* 부여는 오래된 역사로 2세 단군(임금의 호칭)의 이름이 부여이다. 오랜 시일이 지나 43대 단군 때 아사달의 수도가 심양으로 가서(지금의 혜성지방) 마지막 아사달의 수도가 된다. 44대 단군이 부여의 자손이다.
아사달이 패권, 패도로 국운이 기울어지니까, 즉 47대 고열가 단군 때 나라의 기강이 조금 흐트려져(천부경정신이 흐려지자), 또 춘추전국시대를 거친 중국이 밀려나오자 대부여가 해체되면서, 이 때 북쪽에서 왕족 중의 하나인 해모수가 떨어져나와 해모수의 북부여시대(BC 239-39)가 열리게 된다.
해모수단군의 동생 해부루가 BC 108년에 한무제가 번한인 위만조선을 침략하자 이를 무찌른 고두막한이 북부여를 대신한 졸본부여(줄기부여, 뿌리부여)의 단군이 되자 동으로 옮겨 동부여를 세우게 된다. 동부여의 땅을 가섭원이라 하여 가섭원부여라고도 한다. 온조의 후예로 무열왕의 아들인 성왕 때 공주부근으로 천도한다. 천도할 때 부여는 사비였다. 이 때 남부여(온조후대)로 국호를 바꾼다. 이것이 오늘의 부여이다.
또 동부여의 3대왕 대소가 유리왕에게 토벌이 되어 대소의 동생이 서쪽으로 이동해서 서부여 또는 갈사부여를 세웠다. 그래서 6부여가 성립된다. 이러한 부여를 두고 삼국사기에는 하나의 부여만 말하고 있으니 역사공부에 혼선이 오는 것이다.
여기서 3조선 관경(管境)을 관찰해보자. 단군이 단군조선이 되고, 기자의 후손들이 조선땅에 살면서 기자조선으로 나오듯이, 3한을 3조선으로 BC 2333년에 바꾼 것이다. 이 때는 연방제이며 한반도에서 일본 영토에까지 세력이 뻗어 있었다. 부여 이전의 고조선이야기이다. 즉 대부여 이야기이다. 부여를 시작한 구물 단군이 3한관경을 3조선 관경으로 했다. 진한, 마한, 번한을 진조선, 마조선, 번조선으로 바꾸었다. 부여시대의 고열가 단군이 정치를 포기하여 새로운 단군이 추대되지 못하고 5가가 공화정(단군 없이 6년)으로 있다가 해모수에 넘겨주면서 아사달이 없어지니까 북부여가 나오자 해모수가 다 흡수하지 못하니까 연방제가 흩어지면서(열국) 여러 낙랑(나라)이 100여개 출현하게 된다. 한사군의 낙랑도 여기에 속한다. 삼국사기의 낙랑의 낙랑공주5)의 아버지는 낙랑의 최숭왕(最崇王)이다.
* 삼국시대는 다음과 같다.
BC 59년 해모수의 고손자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운다. 북부여를 차지한 졸본부여의 초대단군 고두막한에 이어 2대 단군 때 아들이 없자, 고무루 단군이 고주몽을 사위로 삼아 단군을 삼자, 졸본부여사람들이 고주몽을 쫓아내자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나중에 소서노(小西奴)를 만나 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고구려가 힘이 강성해지자 졸본부여는 적봉 지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백제는 부여의 고두막한(BC 108년)의 손자, 구태가 AD 204년에 백제를 세운다. 소서노(온조의 어머니, BC 42년)가 고주몽을 떠나서 오늘의 요동반도의 뿌리인 영구지방에 반천리의 장원을 가꾸고 고주몽에 편지를 보내자 소서노를 어하라(백제의 임금)로 책봉했다. 그후 13년(BC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큰아들 비류(온조의 형)가 계승했다. 그러나 1년 후인(BC 18년) 온조가 형님 비류를 떠나 동쪽으로 가서 열다라(10제)를 세웠다. 그 십제가 동쪽의 낙랑과 북쪽의 말갈의 괴롭힘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마한땅을 얻어 수도를 옮긴 곳이 한성이다. 그 후 동쪽으로 내려오는 박씨 신라, 서쪽으로 내려오는 석씨 신라가 마한을 습격하여 수멸(마침내 멸망)시켰다(AD 8년). 그래서 지금의 대동강(마한의 수도, 박아강)을 차지했다. 그리고나서 구태의 온다라를 이은 고이왕이 AD 238년에 웅진강(금강)에서 고이왕이 다루, 기루, 개루, 초고, 구수, 사반에 이르러는 10다라를 담로(擔魯)(식민지)로 즉 백제의 일부분으로 흡수했다. 이들 십제와 합쳐 AD 238년에 오늘의 백제로 건국하게 된다.
신라는6) 설명이 복잡하다. 먼저 박혁거세는 할빈 아래의 길림성의 진한 6촌을 아울러 신라방을 세우고 두만강을 넘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함경도, 강원도로 내려오면서 대동강지역의 10다라와 부딪치면서 동해안으로 내려왔다.
석탈해는 BC~AD년간에 요서지역에서 한반도의 서해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다가 AD 369년에 근초고왕에게 흡수된다. 백제왕이 망하니까 AD 22년에 중국(漢나라)에 있던 김씨(김일제 후손)가 한반도로 건너와 함께 서라벌로 갔다.
김윤의(김일제의 동생)후손들은 남해안으로 가서 김수로왕의 남해안에 금관가야를 세웠다. 김일제의 큰 집은 서해안에서 석씨 신라와 만나서 왕비 집안이 된다. 석씨 신라가 망하자 경주로 가서 김씨 신라가 되어 강원도에서 내려온 박씨 신라와 합쳤다. 석씨신라는 AD 369년에 백제가 망하자 석씨 신라 유민을 데리고 낙동강을 건너 경주로 가다가 낙동강 지역의 임나가야(백제의 근초고왕이 흡수하여 세움)와 충돌하였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AD 400년에 공격하자 임나가야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경주지역으로 들어가서, 김일제 후손의 김씨 신라가 강원도지역에서 내려온 박씨 신라와 세력을 합쳐서 오늘의 신라가 되었다. 박․석․김의 신라가 아닌 것이다. AD 502년 김씨가 눌지왕 때 신라 국호를 세운다. 이외에 참고로 서승원장으로부터 들은 조선상고사연구와 관련한 얘기들을 서술해 본다.7)
여기서 ‘동아세계백과대사전’에 나와 있는 ‘부여’에 대해 소개해 보도록 하자. 부여(夫餘): ‘동아세계백과대사전’에는 고조선 시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지금의 북만주 일대에 웅거하였던 부족국가라고 한다. BC 1세기 경부터 300년 동안 퉁구스계(系)의 부여족이 세운 나라다. 부여는 토지가 광활한 농업을 하기에 적합한 북만주 농안(農安), 창춘(長春) 일대에서 농업을 주로 하여 진보된 조직과 대오를 가졌다고 한다(궁실<宮室>, 성책<城柵>, 창고, 감옥 등).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관직이 있었으니 전국을 사출도(四出道) 또는 사가도(四街道)로 나누어 큰 지역은 수천호, 작은 것은 수백호가 되었다. 풍속 중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대회(祭天大會)가 있었고, 법률이 매우 엄중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다. 부여의 주위에는 서쪽으로 선비(鮮卑), 오환(五桓), 동쪽에는 읍루(挹婁),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한(漢)나라의 현토군(玄菟郡)과 인접해 있었다. 해부루왕(解夫婁王)때 아란불(阿蘭弗)의 권고로 가엽원(迦葉原)으로 서울을 옮긴 뒤부터는 동부여라고 칭한다. 가엽원은 지금의 강원도 명주군(溟州郡) 일대다. 후에 동부여의 땅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에 발해에 대해서도 소개해보기로 하자.8) 발해(渤海): 「발해고(渤海考)」는 류득공(柳得恭)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의 사서(史書) 24종을 참고하여 1784(정조 8)년에 완성하였다. 발해사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특히 자주적인 입장에서 발해사를 체계화시키고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여들여 발해 고토(故土)가 우리 영토라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10(융희 4년)년 조선고서간행위원회에서 영인․간행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은 1937년 만주 요동(遼東) 사람 김육불(金毓黻)이 완성하여 발간했다. 이 책에서 발해를 건국한 사람을 논하면서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하고, 발해문화를 고구려 문화의 계승으로 설명하였다. 「삼국사기」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발해에 대해 무관심해왔는데, 실학자들이 나와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발해사에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류득공은 「발해고」에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하는 남북국설(南北國說)을 제창하고 삼국사(三國史) 다음에 남북국사를 엮을 것을 역설했다.
한치윤(韓致奫)은 그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발해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 책은 중국 본위로 엮어졌기 때문에 발해관(觀)이나 이론(理論)에 모순이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발해사 연구에 크게 기여한다.
발해 왕국은 9C에서 10C 초에 걸쳐 중국의 동부(만주)지방 동반부에서 소련의 연해주(沿海州)와 한반도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름(699-926)이다. 건국시조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함께 말갈족을 끌여들여 발해를 세웠다. 왕실과 지배층은 고구려계이고 피지배측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복합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대외정책은 영토의 개척에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당과 신라를 멀리하여 항쟁하는 한편 바다 건너의 일본을 가까이 하는 근공원교책(近攻遠交策)으로 일관된 감이 있었다. 또 옛 폐단을 극복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하는 동시에 지방행정의 기구를 정비하여 그 번영은 당에서도 ‘해동의 성국’이라고 칭하기에 이르렀다.
제14인 애왕(대인선)(哀王<大諲譔>)에 이르러 중앙정부의 내분과 지방의 혼란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빠져 중신(重臣)들로서 고려로 난을 피하는 사람도 많았다. 마침 이때 서쪽인 요하(遼河) 상류에 흘러내리는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에는 거란족의 국가 요(遼)가 세워졌다. 발해 국내의 정치혼란을 틈타 요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926년에 발해로 홀한성(忽汗城: 상경현덕부(上京顯德府))을 포위하게 되자, 230년 가까이 이어내려 오던 이 왕국은 1개월을 지키지 못하고 멸망의 비운을 겪게 되었다.
특히 금제국을 세운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맹공격을 받아 제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1115년에 요제국 심장부 요주(饒州)에서 고욕(古欲)이 중심이 된 발해유민의 광복운동이라든지, 1116년에 고영창(高永昌)을 영도자로 하여 요양에서 ‘대발해국’을 세웠던 발해 유민의 광복운동은 비롯 그것이 좌절되었지만 그 끈질긴 저항정신은 동양사에 드물었던 일이다. 즉 나라를 잃고도 197년 간이나 그 유민은 지배자인 요에 집단 항거를 하였던 것이다. 유적에 발굴되는 건축물의 부속에는 와당에 새겨진 연화문(蓮花文)을 비롯 고구려의 영향이 매우 짙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해왕국의 문화는 고구려 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거기에 다시 당의 문화까지 섭취하여 그 생활에 맞는 알맞은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던 자취가 뚜렷이 보이고 있다.
「송사고려전(宋史高麗傳)」에 고려 왕국의 총인구를 210만으로 계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투한 발해의 호수는 결코 적지 않은 비율로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 출신이 발해인 것이 뚜렷이 알려지고 있는 태씨(太氏)를 제외한 나머지 발해유민의 후예도 한반도 전역에 흩어져 한국민족에 혼융(混融)되어 한국민족으로서의 문화와 역사를 더불어 누리고 있다.
<다음호 계속>
---------------------------------------------------- 1) 부여사는 『신단실기』와 『북부여기』참고. 동부여, 북부여, 갈사부여, 서부여, 임나, 가라 가 소개되어 있음. 『환단고기』「고구려본기」도 참고할 필요가 있음. 2) 한국정신과학학회 제40회 추계학술대회(2013. 10. 26. 토), 대주제; “양자과학과 정신과학 시대 통합심신치유와 영성적 삶”. 3) 아사달: 아사는 아침, 달은 다라(나라), 따라서 아사달은 ‘아침의 나라’를 뜻함. 4) 北崖子(북애노인), 신학균 역『규원사화(揆園史話)』명지대학교 출판부(1986). 5) 낙랑공주는 고구려의 호동왕자를 만나기 위해 북이 울리지 못하도록 북을 찟는 비련의 공주이기도 하다. 6) 신라사는 『부도지』, 『삼국사기』 참고. 『부도지』는 신라사 자체로 이 두권의 저술로 완벽하게 설명이 됨. 7) * 조선의 3대악은 ① 평양 기생 ② 충청도 양반 ③ 전라도 아전 * 선비족의 어원과 관련하여 조선의 선비는 학자, 양반이라면, 중국의 선비(士)는 장기판에서 볼 수 있듯 유방과 항우의 초, 한 양장군의 입장에서 보면 졸에 불과하다. *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에서 사기를 쓸 때에는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이 망한 자리(지금의 하북성)에 조선5군(朝鮮五郡)(획청(획淸), 축저(축狙), 평주(平州), 기(畿), 날양(날陽))이 설치되었는데, 그 사기열전을 그대로 베낀 반고의 한서의 조선열전에는 임둔(任屯), 진번(辰番), 낙랑(樂浪), 현토(玄菟) 8글자를 삽입하여 한4군(漢四郡)이라 했다. 후한서부터는 한4군으로 변한 것이다. * 최치원이 당나라 사신으로 가 왕에게 상소를 올릴 때, 옛날에 3국이 있었는데 고구려, 백제가 각각 100만 대군이 있었고, 백제는 양자강까지 차지하고 북으로는 유, 연, 제를 차지하고, 남으로는 오, 월나라를 차지했다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 공자는 구이(구려)(산동반도)에는 병도 없고 장수하는 불사국(不死國)이 있어서 이를 찾아 가고 싶다고 했다. 이를 읽은 진시황은 성인군자가 많은 이 지역에 불로초를 찾아 사람을 보냈다고 한다. * 송시열이 숙청당할 때 사문난적(斯文亂賊)(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말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조선후기 노론의 맹주로 우암은 명나라를 사대하지 않으면 거꾸로 사문난적으로 몰았다. 그래서 명이 망하자 우리가 소중화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 노나라 역사책이 춘추다. 춘추필법은 존주양이(尊周攘夷)로 周를 높이고 오랑캐를 낮춘다는 역사서술로 공자책에는 춘추가 없다. 정론직필이 아닌 것이다. 8) 발해사는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구당서』, 『신당서』 참고. 당나라가 발해의 속국으로 되어있음.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에도 「진역유기」에서 발해를 언급하고 있으나 단재의 경우처럼 문인의 수준에 머물고 있음.

-- 양체제의 장점을 발전시켜 --
Ⅳ. 홍범구주(洪範九鑄)에 대해9)
고조선의 정치사상이었던 홍범구주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여 필자 나름으로 자료를 찾아 보았다. 홍범구주와 이와 관련된 개념들을 옮겨보았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서승원장은 고조선의 천부경(天符經10)), 환력(桓曆)이 화하(華夏)족에 건너가 오늘의 주역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기자가 주(周)의 문왕(文王)에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또 환역이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사상으로 3원론인데 반해 주역은 음양의 이원론임으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1)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 적혀있는 심오한 글로 65자 9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은(殷)나라 임금의 숙부인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전했다고 하나, 홍범구주는 ‘5행치수법’과 함께 단군왕검의 태자인 부루가 하우(夏禹)에게 전한 것이다. 중국은 이것을 자기들 문화라고 하여 『서전』, 『사기』, 『죽서기년』 등에 기록하였으나 실은 그 뿌리가 『삼황내문경』에까지 연결된다. 홍범구주는 고조선 이전부터 있었으며 임금들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밝은 정치를 펴서 사람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이병화선생은 홍범구주는 숙신(肅愼)12)의 왕수긍(王壽兢)에 의해 창안되어, 은의 기자가 주의 문왕에 전해주었고, 그 뒤 홍범구주는 중국의 유교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경희교수의 논문을 중심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13)
홍범구주의 뜻을 한국선도를 대표하는 경전인 『천부경(天符經)』,『3•1신고(三一神誥)』,『부도지(符都誌)』를 통해 고찰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선도의 존재론의 핵심인 1•3•9론(一․三․九論)과 3원조화론(三元造化論)이 『천부경』과 『삼일신고』에서 제시되고 『부도지』에 담긴 1․3․9론과 기․화․수․토‐․천부론(氣․火․水․土․天符論)을 통해 홍범구주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또 주역(周易)의 음양오행론(1․2․4․8론)도 환역(桓易)의 3원오행론(1․3․9론)에 포괄되어 있으며 따라서 한국의 선도인 환역(桓易)의 삼원오행론을 두고 삼원조화론 또는 천부조화론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잘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부도지』에서 목․화․토․금․수 오행론 중 중앙의 토가 ‘통제적’으로 이해되어온 것을 비판하고 이 자리가 ‘조화점’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복본(復本)하여 마고성(麻姑城)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14) 九州의 땅에 세운 당도(唐都)를 부도(符都)로 대신하는 것이다.
부도지의 복본은 마고성 출성(出城)이후 감각에 오염된 사람들을 마고성 당시의 인조(人祖)들의 모습(本)으로 회복하는(復) 것이다. 다시말해 천․지‐․인(天․地․人) 3재(才) 가운데 인(人, 氣에너지)으로서 조화점을 찾아, 즉 천부의 조화점을 찾아 홍범구주의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러한 경전들은 고조선이래 선도의 전통이 약화되는 추세 속에서 오랜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현대사회에서도 존재(론)의 본질에 대한 빛나는 통찰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 선도 으뜸 경전인 『천부경』에서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명쾌한 통찰로서 3원조화론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3원조화론은 종래의 3가지 차원으로서 천․지․인 3원, 곧 현상의 차원(地, 질료), 현상을 존재하게 한 본질의 차원(天, 정보), 주인된 자리에서 본질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연결시키고 주재하는 주체의 차원(人, 氣에너지)을 제시, 이 3가지가 어울려 돌아가는 작용을 이해하게 하며, 그 셋이 본래 나뉠 수 없는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삼원조화론은 특히 人의 차원이 天의 차원 및 地의 차원을 조화시키는 조화력을 중시, 존재를 통일된 전체로 파악하는 조화와 통합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人차원의 확고한 중심을 갖고 天차원을 地차원 속에 정확하게 구현하는 삶의 모델로서 弘益人間, 在世理化의 방식을 제시한다. 이는 현대인들의 전도된 흑백논리와 같은 2원적 사유체계가 갖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조화․평화․통일사상으로서 통시대적인 의의와 가치를 제시해주고 있다.
한국선도에서는 존재의 궁극처인 ‘一’과 ‘三’은 대체로 體•用의 관계로 이해되며, 天은 정보(또는 無․空), 地는 질료, 人은 氣에너지로 해석된다.
『천부경』에서는 존재의 세 차원인 천지인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十元論(一積十鉅 無匱化三)15) 또는 九元論(天二三, 地二三, 人二三)으로16) 설명하고 있다.17) 『삼일신고』에서는『천부경』과 마찬가지로 천․인․지 3원이 2차에 걸쳐 분화된다고 설명한다. 곧 신(檀, 하느님)이 1차로 천․인․지 3원으로 분화되는데, 그 천․인․지 3원은 다시 각각 3眞(性․命․精), 3妄(心․氣․身), 3途(感․息․觸)로 나뉜다고 보았다.18)
『삼일신고』에서는 9元의 의미에 대해서도 주목할만한 해석을 하고 있다. 곧 3眞을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3妄을 有善惡, 有淸濁, 有厚薄, 3途를 無善惡, 無淸濁, 無厚薄 단계와 有善惡, 有淸濁, 有厚薄 단계가 어우러진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또 현대의 선도인 「단학」계열에서는 ‘존재의 근본상태에서 ① 존재의 형상화 이전의 상태 ② 존재의 형상화된 상태 ③ 존재의 형상화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로 해석하고 있다.
『부도지』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1부는 ‘존재론 및 사관(史觀)’의 부분으로 사서(史書)로서의 기본이론이 실려 있다. 시기적으로는 先天, 朕世(짐세), 그리고 後天 중에서도 인간의 시조(人祖)가 원거주지인 마고성(麻姑城)에서 분거(分居)하기 이전까지의 시기에 해당한다. 제2부는 인류사 및 한국사의 시원부분으로 제1부에서 제시한 존재론 및 사관을 직접적으로 역사에 대입해서 얻어낸 부분이다.
따라서『부도지』전반부에는 특유의 세계관이 신화의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골간은 일․삼․구론이다. 신화의 간략한 내용으로는 先天과 朕世(과도기)를 거친 후 후천이 시작될 때에 마고성의 마고가 二姬(穹姬, 巢姬)를 낳고 二姬는 四天人(黃穹氏, 靑穹氏, 白巢氏, 黑巢氏)과 四天女를 낳았는데 그 4천인, 4천녀의 결합에 의해 존재계가 생겨났으며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인간의 시조(人祖)까지 생겨났다. 또 人祖들은 마고성에서 생활하면서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修證)을 담당하였는데 ‘五味의 禍’19) 를 계기로 인조들이 존재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존재계의 질서가 와해, 인조들이 마고성에서 출성하게 된다.
이 신화 속에서 ‘1․3․9론’은 ‘주기론(週期論)’, ‘허달성(虛達城), 마고성(麻姑城), 실달성(實達城) 3원론’, ‘마고→(天符)․二姬(궁희, 소희)→(천부)․四天女 四天人(황궁씨, 청궁씨, 백소씨, 흑소씨)論’, ‘여율론(呂律論), 음향론(音響論)’, ‘기․화․수․토․천부론(氣․火․水․土․天符論)’등 여러 이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
부도지에서는 한국선도의 존재(계) 자체인 一신에서 존재의 세 차원으로 천, 인, 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해 부도지에서는 이를 허달성, 마고성, 실달성으로 무수한 주기의 만물 중에서도 후천의 주기에 역점을 두어 표현하고 있다. 天(정보)이 갖고 있는 無性, 空性을 범주화하여 ‘허달성’으로, 地(질료)가 갖고 있는 물질성,
구체성을 범주화하여 ‘실달성’으로, 人(氣에너지)이 갖고 있는 3원조화의 중심으로서의 운동성, 창조성을 ‘마고’라는 여신으로 의인화하고 또 이를 마고성으로 범주화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3원 중에도 마고성차원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한국선도의 천․인․지 3원론에서 특히 人(氣에너지) 차원에 3원조화의 중심역할을 부여하는 특징에 다름 아니다. 마고성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으로 천부를 받들어 先天을 계승하였다.
한편 이러한 창조과정의 ‘중심점’이자 ‘조화점’으로서 ‘천부’가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천부는 궁희, 소희나 4천녀, 4천인처럼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창조의 조화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특히 다음에 소개할 ‘기․화․수․토․천부론’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음은 ‘기․화․수․토․천부론’이다. 부도지에서는 4대 원소를 조화시키는 중심점으로 ‘천부’를 설정하고 있다. 이는 人祖들이 거주하였다고 하는 마고성 또는 마고성 출성이후 마고성을 본따 만든 ‘부도(符都)’를 상징적 구조 속에 제시하고 있다.
부도지에서는 마고성 및 부도의 구조에 대해 중앙의 天符壇을 중심으로 사방에 기․화․수․토의 4개의 보단(保壇)이 배치된 형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 중에 화․수와 기․토가 맞불리는 구조로 설명되는 구절을 통하여 이것이 존재계의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또 1․3․9론의 원리를 상징화하여 김시습은 金尺20)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火․水가 수직이며, 氣․土는 수평의 방향임을 알 수 있다.

위의 그림이 4대 원소의 조화점으로 ‘천부’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삼일신고」에서는 나타나지 않은「부도지」만의 고유이론으로 한국선도의 더욱 다채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에서「부도지」의 설명내용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부도지는 ‘1․3․9론’의 구조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화․수․토․천부론’까지도 담아내고 있다. 「천부경」, 「삼일신고」와 더불어 「부도지」도 ‘1․3․9론’과 유사한 3원론적 구조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위의 두 경전에서 다루지 않는 ‘기․화․수․토․천부론’의 5원론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천부경 ‘1․3․9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부도지의 3원인 허달성(天, 정보), 마고성(人, 에너지), 실달성(地, 질료)에서는 특히 마고성의 차원이 3원을 묶는 조화의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九원인 天符, 四天人, 四天女에서는 특히 ‘天符’가 구원을 묶는 중심점이자 조화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9원론’도 ‘天符’로 조화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으니 한국선도 핵심사상인 ‘3원조화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부연하여 부도지의 ‘1․3․9론’은 주역의 2․4․8론과 음양오행론을22)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재자역할을 하고 간접적인 ‘천부’의 역할을 빼면 주역의 원리도 내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139론은 248론에 비하여 존재의 다중 차원의 중심을 잡아주는 중심의 조화점에 대한 기준이 분명하다. 따라서 3원론의 측면에서 보면 ‘人(氣에너지)’차원의 역할을 강조하는 ‘3원조화론’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며, 9원론의 측면에서 보면 ‘天符’차원의 역할을 강조하는 ‘천부조화론’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역의 음양오행의 오행론에서 중앙의 ‘토’를 지배와 복종의 통제점으로 권위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극력 비판하고 이를 천부조화론의 방식으로 되돌려 놓고자 한 것이『부도지』이다.
이렇게 볼 때 홍범구주의 논리인 한국의 환역(桓易)은 주역의 양태극적 화합을 한국선도의 전통인 3태극으로23) 대신한 것이다. 3재론은 우리문화의 정수로 천리(天理)(하늘의 돌아가는 이치)를 두고 1년 사시사철을 따라 시공(時空)을 따라 나타나는 것이다. 이 것이 수로 나타난 것이 역(易)이고, 글로 나타난 것이 경(經)이다. 또 이를 형상화 한것이 삼족오(三足烏)이다. 이 3재론의 상생의 동이사상을 상극의 음양론의 중화사상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환역(桓易)을 기자가 주공에게 가리켜주어 홍범구주의 주역이 된다. 홍범구주를 정리한 것이 「서경(書經)」이다.
환역의 3원5행을 통해 주역의 2원5행론의 지배적 일방적 소통을 지양(止揚)하여 쌍방소통을 통한 원환(圓環)론적 상생의 우주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또한「천부경」, 「삼일신고」, 「부도지」를 통해 볼 수 있는 한국선도의 1․3․9론이 3원5행론으로 「주역」의 2․4․8론의 2원적인 음양5행론을 실상 같은 논리로 포용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하여 1․2․4․8론의 음양의 2원5행론보다는 1․39론의 3원5행론이 존재의 중심조화점으로서 3원주의인(氣에너지) 차원, 9원 중의 ‘천부’차원을 명백하게 드러내어 평화통일의 교훈으로 3원조화론과 천부조화론의 이념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더욱이 「부도지」에서는 오행의 ‘토’가 통제점으로 이해되어온 점을 비판하고 이 자리가 ‘통제점’이 아닌 ‘조화점’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한국선도의 1․3․9론이 3원5행론으로 천부조화론적 복선,복본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부도지에서 복본(復本)은 마고성 출성(出城)이후 감각에 오염된 사람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마고성 당시 인조(人祖)들의 원래의 모습(本)을 회복한다(復)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1․3․9론의 입장에서 ‘복본’의 의미를 추적해보면 사람들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으면서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人(기에너지)의 조화점, 또 천부의 조화점을 다시 가동시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도지 속의 1․3․9론은 그 천부조화론적 속성으로 인하여 단순히 이론적•학술적 空論으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실천론으로 귀결될 수 있겠다.
한국선도의 전통에서는 ‘깨달음(性通)’과 함께 ‘깨달음의 실천(功完)’을 꼭같이 중시하는 ‘性通功完論’이 선도수행론의 전형으로 제시되어 왔다. ‘성통’과 ‘공완’ 양 측면 중에서도 특히 ‘공완’에 대한 강조는 동서고금의 어느 사상, 종교 전통보다도 강한 편인데24) 부도지 역시 그러하다.
한국선도의 대표적 존재론인 1․3․9론에서조차도 이것이 단순히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복본’이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 방향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주역의 5행의 ‘토’의 통제점을 천부조화론적 시각에서 이해하여 포용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洪範九鑄의 홍범이 弘益人間의 정신을 넓게 펴고자 하는 규범이라면 9주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도지에 따르면 “도요(陶堯)가 일찍이 祭市의 모임에 왕래하고 서쪽 堡의 간(干)에게서 道를 배웠으나 원래 敎에 부지런하지 못하였다. 九數五中(1․3․9론 및 기․화․수․토․천부의 5행론)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中五 이외의 여덟을 하나로서 여덟을 제어하며 안(內)으로써 밖(外)을 제어하는 이치라 하여 음양5행의 2원론적 법을 만들어 帝王의 도를 주창하므로 소부(巢夫)와 허유(許由) 등이 심히 꾸짖고 그것을 거절하였다. …… 堯가 九州의 땅을 그어 나라를 만들고 스스로 5中에 제왕이라 칭하여 당도(唐都)를 세워 부도(符都)와 대립하였다.”25)
우리는 여기서 부도는 당도와는 달리 음양오행의 ‘土’를 당도의 통제에서 부도의 造化로 정치의 패턴이 바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정전제(井田制)에서 사방 1리(里)의 땅을 ‘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여덟 농가에게 나누어 맡기고, 그 중앙의 땅은 여덟 집에서 공동으로 부치어 그 수확을 나라에 바치게 하였듯이 조화의 9의 의미는 한국선도의 1․3․9론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한국사상사에서는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고조선의 웅혼한 통치철학이었던 ‘홍범구주’를 두고 한국선도의 주요저서를 통해 고찰해 보았다시피, 3원5행론의 논리를 특징으로 하는 3원조화론과 천부조화론이 바로 후대의 홍범구주의 정치사상(논리)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하고 사료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자료의 발굴과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홍범구주사상의 진면목이 드러나길 바란다.

동학․천도교에서는 21자 주문에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천․지․인 3재(三才)에 성․경․신, 수심정기(誠․敬․信 修心正氣) 7자를 천․지․인에 각각 곱하여 21수가 되고, 또 5행에 21수를 곱해 105수가 된다고 하였다. 21염주와 105염주가 이 천수(天數)에 기인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해월은 수운과의 한울을 통한 대화를 통해 “갑자기 찬 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로우니라”라는 말을 듣고 시천주(侍天主)가 인시천(人是天)임을 깨달아, 즉 “사람이 곧 한울임”을 깨우쳐 득도하였는데, 그는 득도후 성․경․신과 수심정기의 실천을 위해 21자 주문외우기에 증진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홍범(구주)와 관련된 기록들을 소개해보기로 한다.
홍범(洪範)은 구주(九鑄)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의 고전(古典)인 서경(書經)의 한 편(篇). 유가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술한 정치철학서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친 후 은나라의 유신 기자(箕子)에게 도(道)를 물었을 때, 기자는 우(禹)가 천제의 계시(啓示)로 얻은 홍범을 주었다. 홍범은 그 내용이 9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오행(五行) ②오사(五事) ③ 팔정(八政) ④ 오기(五紀) ⑤ 황극(皇極) ⑥ 삼덕(三德) ⑦계의(稽疑) ⑧ 서징(庶徵) ⑨ 오복육국(五福六極). 참고로 ④의 5기를 살펴보고 ⑤의 황극에 대해서는 황극경세서와, 황극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26)
먼저 『서경(書經)』에 나와있는 홍범구주의 내용을 소개해보도록 하자.
겸손한 무왕에게 박식한 기자는 아홉 가지의 원칙과 육십 가지 세부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들려준다.


① 첫째는 5행
② 둘째는 경건한 태도에 필요한 5가지 삼갈 바
③ 셋째는 농사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8가지 정책
④ 넷째는 협력에 필요한 5가지 기강
⑤ 다섯째는 임금과 백성에게 행할 5가지 법도
⑥ 여섯째는 3가지 덕목
⑦ 일곱째는 밝혀 아는 데 필요한 점치는 법
⑧ 여덟째는 8가지 자연현상의 관찰
⑨ 아홉째는 5복을 누림과 동시에 6가지 화를 잘 피하는 비결

初一曰五行, 次二曰敬用五事, 車三曰農用八政(초일왈오행, 차이왈경용오사, 차삼왈농용팔정) 次四曰協用五紀, 次五曰建用皇極, 次六曰乂用三德(차사왈협용오기, 차오왈건용황극, 차육왈예용삼덕) 次七曰明用稽疑, 次八曰念用庶徵, 次九曰嚮用五福(차칠왈명용계의, 차팔왈념용서징, 차구왈향용오덕) 威用六極(위용육극)


우선 5행(五行)을 보자.

오행은 水, 火, 木, 金, 土의 다섯 가지 물질이다.
수는 물로 윤택하게 흘러내리는 것이다. 화는 불로 위로 타오른다. 목은 나무로 굽은 것과 곧은 것이 있다. 금은 청동으로 틀을 따라 변모시킬 수 있다. 토는 흙으로 심고 거두는데 필요한 것이다. 맛으로 치면 수는 짠맛, 화는 쓴맛, 목은 신맛, 금은 매운 맛, 토는 단맛에 해당된다.
一, 五行: 一曰水, 二曰火, 三曰木, 四曰金, 五曰土(일, 오행, 일왈수, 이왈화, 삼왈목, 사왈금, 오왈토), 水曰潤下, 火曰炎上, 木曰曲直, 金曰從革, 土爰稼穡(수왈윤하, 화왈염상, 목왈곡직, 금왈종혁, 토원가색), 潤下作鹹, 炎上作苦, 曲直作酸, 從革作辛, 稼穡作甘(윤하작함, 염상작고, 곡직작산, 종혁작신, 가색작감)


흔히 동양철학에서 언급하는 5행의 기본은 바로 이 「홍범」의 5행에서 나온 것이다. 최초의 5행은 철학적 순환이나 변환의 법칙으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은 소박한 것이었다. 단지 원시사회의 경제활동에 꼭 필요한 다섯 가지 자연소재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5행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들 다섯 가지 자연 소재를 적절히 고르고 활용할 줄 알아야 백성들의 생활을 효과적으로 보살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맛과 5행과의 연관도 마찬가지다. 물과 짠맛은 물이 많으면 싱겁고 적으면 짜지는 화학적 상관관계를 언급한 것이다. 불과 쓴맛은 음식물이 불에 그을리고 탔을 때 나는 맛이고, 나무와 신맛은 나무의 진액 맛을 뜻하는 것이다.
청동의 매움은 맛의 매움이 아닌 신체적 고통의 매움을 뜻한다. 매울 ‘辛’은 청동으로 만든 문신용 칼의 상형문자로 노예나 첩의 이마에 문신을 새기는 도구다. 그래서 매운 맛이라는 의미가 파생한 것이다. 마지막의 흙과 단맛은, 흙이 생산해낸 곡물로 달콤한 술을 빚을 수 있기 때문에 연관지은 것이다.

이번에는 사람이 보기 좋은 태도를 만드는데 필요한 다섯 가지 사항(五事)을 보자.

5사는 태도, 말, 보기, 듣기, 생각을 말한다. 태도는 겸손해야 하며 말은 이치에 맞아 순해야 한다. 보는 것은 분별 있게 보아야 하고, 듣는 것은 사리 있게 들어야 하며 생각은 깊이 있게 해야 한다. 태도가 겸손하면 엄숙함이 생겨나고 말이 순해지면 화기애애해진다. 분별 있게 볼 줄 알면 일의 진상을 밝힐 수 있고 사리 있게 들을 줄 알면 선견지명이 생긴다. 깊이 있게 생각할 줄 알면 커다란 지혜자가 될 수 있다.


二, 五事: 一曰帽, 二曰言, 三曰視, 四曰聽, 五曰思(이, 오사 일왈모, 이왈언, 삼왈시, 사왈청, 오왈사), 貌曰恭, 言曰從, 視曰明, 聽曰聰, 思曰睿, 恭作肅(모왈공, 언왈종, 시왈명, 청왈총, 사왈예, 공작숙), 從作乂, 明作哲, 聰作謀, 睿作聖(종작예, 명작철, 총작모, 예작성)


이번에는 농업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여덟 가지 정책(八政:)을 보자.


여덟 가지 정책은 음식, 돈, 제사, 관리, 교육자, 치안 경찰, 제후 접대, 군대 관리다. 八政: 一曰食, 二曰貨, 三曰祀, 四曰司空, 五曰司徒, 六曰司寇, 七曰賓, 八曰師(팔정 일왈식, 이왈화, 삼왈사, 사왈사공, 오왈사도, 육왈사구, 칠왈빈, 팔왈사)

먹는 일에서 군대까지 소박하긴 하지만 현대사회의 흐름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국가 운영 체계다. 특히 음식과 돈, 경제의 실체가 처음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이번에는 관찰해야 할 다섯 가지 자연 현상들을 알아보자.

다섯 가지 현상은 비, 별, 더위, 추위, 바람, 절기다. 이것들이 잘 갖추어져서 순서 있게 진행되면 뭇 풀들이 무성할 것이다. 하나라도 지나치면 흉하게 되고 하나라도 모자라면 역시 흉하게 된다.

曰雨, 曰陽, 曰燠, 曰寒, 曰風, 曰時, 五者來備(왈우, 왈양, 왈욱, 왈한, 왈풍, 왈시, 오자래비) 各以其敍, 庶草蕃廡, 一極備凶, 一極無凶(각이기서, 서초번무, 일극비흉, 일극무흉)

이러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뒤에도 개인에게는 다음의 다섯 가지 복(五福)이 따라야 한다. 5복은 장수, 부, 건강, 선행, 행복한 임종이다.

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오복 일왈수, 이왈부, 삼왈강녕, 사왈유호덕, 오왈고종명)

여기의 5복은 동양 문화 속에 놀아들어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실체들이다. 특히 장수, 건강, 행복한 임종 등 신체와 관계된 것이 세 가지나 되는 사실은 동양인들의 처세술이 유달리 음식관리, 몸 관리에 치중되어 있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이번에는 여섯 가지 피해야 할 일들(六極)을 보자. 여섯 가지 피해야 할 일은 재난을 만나 죽는 것, 질병, 근심, 가난함, 악한 태도, 허약함이다.

六極: 一曰凶短折, 二曰疾, 三曰憂, 四曰貧, 五曰惡, 六曰弱(육극: 일왈흉단절,이왈질, 삼왈우, 사왈빈, 오왈악, 육왈약)

곰곰이 살펴보면 기자가 만든 최초의 법 정신은 결국 오랜 기간의 인간 관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조직관리, 사람 경영, 자기 처신, 이 모든 교훈은 세월이 흘렀어도 설득력을 잃지 않고 있다.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던가?

이상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서경(書經)」에서27) 나오는 홍범구주에 관한 글을 옮겨보았으나 9가지 원칙과 60가지 세부사항이 「서경」에 수록되어 있다고 했으나 자세하지가 않다. 지금부터는 국내에서 편찬된 주요백과사전을 중심으로 관련 개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오기(五紀): 오기력(五紀曆)은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등의 5가지를 기록한 달력이다. 신라는 오기력에 이어 8세기 말엽에서 9세기 초엽에 걸쳐 선명력(宣明曆)으로 개혁하고 그것이 고려에 계승되었다. 또 오기력은 중국의 당(唐)나라 때의 달력이다.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중국의 북송(北宋)의 학자 소옹(邵雍)의 저서. 역리(易理)를 응용하여 수리(數理)로서 천지만물의 생성변화를 관찰 설명한 것이다. 모두 12권으로 되어 있다. 12진(辰)을 하루, 30일을 한 달, 12개월을 1년, 30년의 1세(世), 12세를 1운(運), 30운을 1회(會), 12회를 1원(元)으로 한다. 그러므로 12만9천600년이 1원이며, 天地는 1원마다 한 번 변천하고 만물은 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진보한다는 것이다. 6권까지는 역(易)의 64괘(卦)를 원․회․운․세에 배당하여 요제(堯帝)의 갑신년(甲申年)에서 후주(後周)의 현덕(顯德) 6년(959)까지의 치란(治亂)의 자취를 적시하고, 7~10권에는 율려성음(律呂聲音)을 논하고, 11~12권은 동식물에 관해 논하고 있다.

* 황극편(皇極編): 조선시대의 당쟁(黨爭)사실을 엮은 책. 12권 6책. 정조어제서(正祖御製序)가 붙어 있는데, 곧 당쟁을 초월한 객관적 입장에서 공정히 사실대로 서술한 것이라 하여, 탕평책(蕩平策)의 극치로 황극의 중정성(中正性)을 도달케 한다는 의미로 황극을 이 책의 이름으로 하였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없는데 ⑤의 삼덕은 참고로 천주교의 기도문에 삼덕송(三德頌)이 있어서 소개해본다. 신덕송(信德頌): 믿음에 대한 기도문), 망덕송(亡德頌: 희망에 대한 기도문), 애덕송(愛德頌: 사랑에 대한 기도문)이 있다. 향주삼덕(向主三德)이라 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는 덕행의 기도문이다.

홍범구주는 그 내용이 9부분으로 나누어져 불리우는 이름이다. 실제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만들어졌는데 오행사상을 토대로 정치․도덕의 9대 법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한 대(漢代)에서는 이 사상을 도리어 재이설(災異說)에 결부시키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갑오경장(甲午更張)후 제정된 이조의 기본법인 홍범14조(弘範十四조)를 소개해보도록 하자. 홍범은 「서경」의 편명(篇名)으로서 대법(大法)을 뜻한다. 새로 제정된 14조가 정치제도의 근대화와 자주독립국가의 대법이라는 뜻에서 홍범구주의 정신과 같다는 의미에서 불려진 이름이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확립한다.
② 왕실규범을 제정하여 왕위계승은 왕족만이 하고 왕족과 친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③ 왕은 대신들과 의논하여 정사를 처리하고 종택이나 외척의 내정간섭을 허용치 않는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議政府) 및 아문(衙門)(내각, 행정부, 기무아문)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⑥ 납세는 납세법에 규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못한다.
⑦ 조세의 징수와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기획재정부)의 관할에 속한다.
⑧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간의 비용을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리의 권한을 제한한다.
⑪ 우수한 젊은이들을 파견시켜 외국의 학술, 기예를 받아들인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형법을 제정하여 인명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문벌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이로써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짐(朕), 폐하(陛下), 조(詔), 태자(太子) 등 왕실용어를 되찾고 청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했으며 왕권의 전제를 제한한 점 등 자주독립과 민주적인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이것이 제정된 배경이 보수적인 민비 일파의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세력을 업고 성립한 김홍집 내각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일본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홍범14조는 용두사미로 되어 민족의 민주화를 도리어 저해하게 되었다.28)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서양이론인 갈등이론의 2분법을 두고 우리는 그 한계를 경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지구촌의 말세를 두고 현재의 세계문화를 홍익인간으로 회복할 수있는 대안이 한민족(알타이족)의 3재론에 기초한 3원조화론, 천부조화론의 홍범구주사상이다. 우리가 상고사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다.
3재(才)(천․지․인)사상, 3신(神)(환인, 환웅, 환단)문화를 다시 살려야한다.

Ⅴ. 대륙사관으로 통일을

마르크 위르겐스마이어(Mark Juergensmeyer)교수는 그의 저서29)에서 문명충돌론에 대해 말하면서 서구문명의 제1천년(millenium)은 희랍반도에서 희랍민족주의 (Hellenism = Hellas+Nationalism)로 소크라테스의 희생, 즉 그의 삶과 사상을 그의 제자들(Plato, Aristoteles)이 인도주의 정치사상으로 표방하여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고 했다. 또 제2천년은 예수의 순교로 초인적인 천본주의(天本主義)이념이 이태리반도에서 헤브라이즘(Hebraism=Hebrew+Nationalism)으로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집대성되어 로마제국 멸망후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21C부터 시작하는 제3천년시대를 맞이하여 세속국가(secular state)의 종교민족주의가 출현하여야 한다고 한다, 20C말로 하여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가 종교민족주의로서 그 역할을 끝냈으므로, 이제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지양(止揚)한 새로운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종교(문화, 정신)민족주의가 나와야 하는데 마르크는 그것이 친미적인 팔레비 왕 퇴위 이후 아야톨라 호메이니에 의해 세워진 이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하고 있다시피 오늘날 중동의 현실은 회교민족주의가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어가지 못하고 폭력과 테러, 전쟁이 난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실정을 두고 새로운 냉전이 또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저서명에서 의문부호를 찍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마르크교수는 「동방주의(Orientalism)」을 쓴 사이드(Edward Said)교수와 마찬가지로, 윌버(Ken Wilberry) 교수가 지적한 21C 신종교의 범재신관(汎在神觀, pan - en - theism)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신관(一神論, monotheism)의 수준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범재신관에 대해서는 김상일교수가 일찍이 화이트헤드(White head) 교수의 신철학, 신사상의 신서학을 수운(水雲, 최제우)의 동학사상과 비교하여 범재신관에 기초한 미래종교로서 동학사상에 기초한 민족종교(천도교)에서 21C 새천년의 미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동학․천도교의 세계사적 의의를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제3천년의 문명은 한반도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통섭(consilience)한 신인합일의 인내천주의(人乃天主義)에서 새천년(new millenium)의 문명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내천이념을 한국민족주의(Koreanism=Korean+Nationalism)로 하여 21C로부터 시작하는 세속국가의 정치이념으로 내걸어 통일과 평화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반도가 동․서문명이 부딪치는 질곡과 시련의 지역이기도 하지만 그 모진 인고의 세월을 극복할 때는 희랍문명과 로마문명이 반도에서 발전하여 꽃을 피웠듯이 천년의 정신문명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민족인 한반도에서 남북이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그 여력으로 동북아시대를 열어 고조선의 강역을 수복해가면서 세계일가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는 혜가(惠可)에게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두고, 인과는 불락(不落)에 잊지 않고 불매(不昧)를 깨닫는데 있다고 하였다. 인과는 불락이 아니라 불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대각(大覺)하여 더욱 지행일치(知行一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삶에 노력하여 선종의 초대 교조 달마를 이어 역사에 길이 남는 2대 교조가 된 것이다.
우리도 고조선연구회의 연구의 열정으로 홍범구주의 대륙사관을 정립하여 민족 평화통일에 더욱 증진해가야 하겠다. 인과불매(因果不昧)의 자세로 진력해가다 보면 남북통일은 어느 날 큰바위의 얼굴처럼 우리들 앞에 성큼 다가설 것으로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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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자가 문왕의 동생인 주공에게 가르켜준 것이 홍범구주인데, 이 안에 오행이 다 들어 있다. 동•서•남•북•중 이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듯 문화•사상 등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것이 홍범구주이다. 「상서(尙書)」를 연구하다보면 주역의 뿌리가 환역(桓易)인 것을 알 수 있다. 원저의 뿌리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홍범구주는 삶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치•경제•사회•정신문화 등 너무나 방대한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을 정리한 것으로 상수학(象數學)으로 설명한 것이 주역이다. 64괘(卦)를 3효(爻)로 해석한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다. 하늘과 땅이 얼마나 넓은가?
10) 천부경은 천부3인(거울, 방울, 칼)을 원•방•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개천할 때 하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해야겠는데 환웅(천황, 하늘)에 이어 2세 환웅이 신지혁득에게 명령하여 사슴발자국을 보고 녹도문을 만들었다. 문자세계의 처음이다. 최정음으로 가림토정음, 훈민정음 등 41자 녹도문 천부경을 두고 81자 천부경을 다시 썼다. 우주의 진리가 다 들어 있다.
11) 계연수 엮음, 고도영 옮김 『환단고기』(뿌리, 2006). p. 162.
12) 숙신은 뒤에 읍루(挹婁), 물길(勿吉: 끝없이 길한 것)이 되었다.
13)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교수), “한국선도의 ‘3원5행론’”, 한국동•서철학회논문집『동서철학연구⑧』제48호, 2008. 6.
14) 朴堤上 저, 金殷洙 편, 『符都誌(金時習의 澄心錄追記)』(가나출판사: 1986) 참고.
15) 하나(一)가 쌓여 十으로 커지지만 三(천•지•인)차원으로 환원될 뿐이다.
16) 하늘이 둘을 얻어 셋이 되고, 땅이 둘을 얻어 셋이 되며, 사람이 둘을 얻어 셋이 된다. 하늘도 천•지•인 세차원을 가지고 있고, 땅도 사람도 모두 그러하여 전체 존재계는 모두 9개 차원을 갖는다.
17) 정경희, 상게서,(표1) 『천부경』의 一•三•九論.
18) 정경희, 전게서,(표2) 『삼일신고』의 一•三•九論.
19) 마고성의 人祖들은 地乳를 섭취함으로써 스스로 天(정보•無•空)•人(氣에너지)•地(질료) 3원의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는데, 그중 일부가 지유가 아닌 포도의 5味를 맛보면서 3원의 조화상태가 깨어지게 되었고(‛오미의 화’), 이에 마고성에서 출성(出城)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박제상 편, 김은수 역 『부도지』(문화, 2000). p.33.
20)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에서 金尺을 곧 한국선도의‘삼원오행론’적 원리를 상징화하여 만든 것이라 했다. 또 금척의 형상이 머리에는 불구슬을 물고 四節五寸의 형상이라는 설명을 통하여 불구슬(火)이 五寸중에서도 머리마디(寸)가 되어 수직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水•火가 火를 머리로 한 수직의 방향이라면 나머지 氣•土는 자연스럽게 수평방향이 된다.
21) 공자는 율려에 의해 예를 가르쳤다. 원래는 율려에 의한 태극이 3원태극이다. 송나라이후 율려가 음양의 양태극이 된다.
22) 여기서 음양오행설과 주역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음양 5행설: 우주가 인간의 모든 현상을 음•양 두 원리의 소장(消長)으로 설명하는 음양설과 이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木, 火, 土, 金, 水의 변전(變轉)으로 설명하는 오행설을 함께 묶어 이르는 말.
五行은 「尙書」의 홍범구주편(洪範九疇篇)에 나오는 것으로 이용후생을 위해 그 성질과 규율을 나타내는 것이다.
오행상생(五行相生):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 오행상극(五行相剋):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
오행표를 참고하길 바란다. (동아출판사, 세계대백과사전 제21권, p.400) 음양가들은 남녀가 상생으로 화합하면 행복하고, 상극으로 만나면 재화(災禍)가 있다고 한다.
*주역: 왕필(王弼)은 복희씨(伏羲氏)가 황하강(黃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있는 도형(圖形)을 보고 계시(啓示)를 얻어 천문지리를 살피고 만물의 변화를 고찰하여 처음 팔괘를 만들고, 이것을 더 발전시켜 64괘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복희씨가 8괘를 만들고 이것을 더 발전시켜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또 십익(十翼)은 공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역(易)은 양과 음의 이원론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과 현상들(천지만물)을 하늘과 땅, 해와 달, 강과 약, 고 저 등을 음양으로 구분하고 그 위치나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 주역의 원리다. 이 원칙을 인간사에 적용하여 비교•연구하면서 풀이한 것이 주역이다. 한편 공자는 주역을 깊이 연구하여 그 원 글을 해석하고 이치를 밝힌 10익을 저술하였다. 십익이란 새의 날개처럼 돕는 열가지라는 뜻이니, 즉 단전(彖傳) 상•하편, 상전(象傳) 상•하편, 계사전(繫辭傳) 상•하편,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이 그것이다. 이 주역을 우리의 전통적인 역으로 나온 것이 김일부의 정역(正易)이다. 주역을 규범적 연구에서 상수학의 과학이론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주역은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우주철학을 논하고 있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베트남 등의 유가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복술의 원전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다.
23) 여기서 환력의 삼태극(三元太極) 설명을 위해 삼재론에 대해서도 소개해보도록 하자.
*삼재(三才): 조선 고대의 사상에서 天•地•人을 가리키는 우주의 근원을 뜻하는 말. 역(易)의 계사전(繫辭傳)에 괘(卦)에 6개의 효(爻)가 있는 이유를 설명하여 天道가 있고, 地道가 있고, 人道가 있으며 三才를 겸하여 이를 둘로 한다. 그래서 6이라 하고 있다. 동양사상의 특징으로서 인간은 천지자연과 대립해서 이를 정복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 또한 스스로 만물을 기르는 천지의 작용에 참가해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의 움직임은 무한한 조화와 목적이 있는 법칙성을 포함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인간의 세계에도 공통되는 것이다. 삼재는 이와 같은 철학을 언외(言外)에 품고 있는 개념이다. 삼재를 삼극(三極), 삼태극(三太極), 삼원태극(三元太極))이라고도 한다.
天•地•人 삼재에 걸쳐 사물을 설명하고 있다. 천문, 지리, 인물, 시령(時令), 궁실(宮室), 기용(器用), 진보(珍寶), 문사(文史), 조수(鳥獸), 초목(草木)의 14부분으로 분류하였으며 그 중에는 황당무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어떤 것은 석경(釋經)에 주력하여 의리(義理)에서 앞섰으며, 어떤 것은 기사(記事)에 주력하여 사학(史學)적 가치가 높다. 동아출판사, 『동아세계대백과사전』제16권, p.274.
25) 朴堤上 저, 金殷洙 편, 「符都誌」 (附 金時習의 澄心錄追記)(가나출판사, 1986), p.57.
26) 동아출판사, 『동아세계대백과사전』
27) 김경일 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서경(書經)」(바다출판사: 2006), pp. 350~354.
28) Wilkinson, The Corean Government Constitutional July 1894 to October, 1895. 천관우, “갑오경장과 근대화” (사상계, 1954)
29) Mark Juergensmeyer, The New Cold War?: Religious Nationalism Confronts the Secular Stat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 pp. 292.

사마천의 사기에 나타나는 리더십

5000년 중국사에서 리더십을 캔다

25호(2009.01.15) / 김영수필자 소개  


 
역사 속에서 참된 리더십을 통찰한다
 
새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통치자의 리더십이 크게 손상됐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최고경영자(CEO) 리더십과 정치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느니,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리더십을 바란 결과라느니 이런저런 진단이 나오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시원스러운 답은 없다. 다만 리더의 자질과 리더십에 대해 본질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씁쓸한 결론을 건졌을 뿐이다.
 
그렇다. 리더십을 둘러싼 숱한 논의와 진단에 해답과 정답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리더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체 가운데 가장 복합적이고 복잡한 동물인 인간의 행위를 말이나 글로 딱히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다분히 가식적인 리더의 행위의 결과라 할 수 있는 리더십의 정답을 찾는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지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리더와 리더십을 찾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정답은 없지만 모범 답안은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모범이 될 만한 답안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당연히 지나온 인간의 삶의 자취, 즉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범 답안이라는 것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찾으려는 사람의 인문적 소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이른바 ‘인문 경영’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동서양 수천 년 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은 물론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직관력을 갖추어야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참된 리더와 리더십을 발견하고 그 본질을 통찰할 수 있다.
 
어쩌면 모범 답안을 충실하게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가 리더십을 기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행위가 곧 성찰의 행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성찰할 수 있는 리더야말로 자신의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다. 역사는 ‘지난 일(과거)을 돌아봄으로써(현재) 다가 올 일(미래)을 생각하는’ 가장 고차원의 인간 행위이기 때문이다.



가장 못난 리더는 백성과 다툰다
26호(2009.02.01) / 김영수필자 소개  
 
요순(堯舜) 시대
사마천의 ‘사기’는 첫 페이지부터 리더와 리더십에 관한 논의로 시작된다. ‘사기’의 첫 권은 <오제본기>다. 오제(五帝)는 전설 속의 다섯 제왕을 말한다. 전설 속 제왕들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사실 여부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첫 권 ‘오제본기’의 요점은 “백성들이 바라는 이상적 리더상은 어떤 모습인가”로 귀착된다. 사마천은 힘 없고 가진 것 없는 백성들의 간절한 염원을 ‘사기’ 첫 권에 고스란히 반영했다. ‘사기’를 감히 리더와 리더십의 보물 창고라 부를 수 있는 이유도 사마천이 제시하는 리더의 모습과 리더십이 지금 우리의 문제와 절박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제본기>는 이른바 ‘요·순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요·순 시대는 흔히 태평성세를 대변하는 용어이며, 요·순은 가장 바람직한 리더의 대명사로 쓰인다. 요·순으로 대표되는 <오제본기> 다섯 리더들의 모습과 리더십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 사회 리더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좋은 리더와 나쁜 리더
오제본기’에 등장하는 다섯 리더는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이다. 이들은 약 7대에 걸친 혈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사마천은 이들 다섯 리더들의 특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리더십을 표로 만들어 보았다.(표 참조)

오제의 리더십에서 일단 주목한 것은 기록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전욱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제왕들에게 공통적으로 ‘덕(德)’이라는 리더십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 밖의 항목들은 추상적인 개념부터 상당히 구체적인 것까지 다양하다. 이 리더십 항목들은 오늘날 리더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사마천은 이런 리더십을 갖춘 리더나 이를 실천하려는 리더를 좋은 리더, 이상적인 리더로 봤다.



4000년 전 펼쳐진 리더십 대토론

27호(2009.02.15) / 김영수필자 소개  


중국 전설시대의 이상적 통치자로 꼽히는 순(舜) 임금은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닌 덕과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준다”는 ‘선양(禪讓)’을 통해 요(堯) 임금으로부터 천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홀아비이자 민간에서 발탁된 순 임금은 오랜 시간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훈련을 거친 끝에 추대되었다.
 
제위에 오른 순은 요 임금 때 기용됐지만 적당한 업무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던 기라성 같은 인재들에게 각자의 특기에 맞는 업무를 분배했다. 또 자신의 집무실 문을 모두 개방해 민심과 여론을 수렴하는 열린 통치를 실천에 옮겼다. ‘사기’의 첫 권 ‘오제본기’에 따르면 당시 순 임금이 업무를 분장한 인재가 22명이었다. 특히 용(龍)이란 인재를 여론을 수렴하는 ‘납언(納言)’에 임명하면서 “용! 나는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말과 세상 이치를 파괴하는 행위를 싫어하오. 그런 언행은 내 백성들을 동요시키기 때문이오. 내 그대를 납언에 임명하니 밤낮으로 나의 명령을 전달하고 백성의 의견을 수렴하여 내가 오로지 신의(信義)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오”라고 했다. 소통의 리더십과 민심을 수렴하는 행위는 곧 리더의 신의와 직결된다는 점을 강조한 대목이다.
 
그런데 통치 후반기에 접어든 순 임금은 후계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순을 보좌하면서 큰 실적을 낸 인재로는 아버지 곤의 뒤를 이어 치수사업을 맡아 전국적으로 명성을 쌓은 우(禹)를 비롯해 법을 담당한 고요(皐陶), 제사를 담당한 백이(伯夷) 등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이 잠재적 후계자였다. 순 역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리더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순은 몇 차례 조정 회의를 열어 리더십과 후계 문제에 대한 대토론을 시도했다. 사기 권2 ‘하본기’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4000년前 고요(皐陶), 리더를 논하다

28호(2009.03.01) / 김영수필자 소개  


세계 최초의 리더십 이론가
4000년 전 순(舜) 임금이 치수사업을 성공시킨 우(禹)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자리에서 리더십과 팔로어십(followership)에 대해 날카로운 지적을 서슴지 않았던 고요(皐陶)는 세계 최초의 리더십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순 임금이 신하의 팔로어십을 전제로 한 리더십을 거론하자 고요는 ‘진실한 리더십 없이는 팔로어십도 없다’는 말로 맞받아쳤다. 그러면서 그는 법도(法度)를 준수하고 현명한 판단력으로 비전과 이상을 제시하는 바람직한 리더상을 주문했다. 이는 오늘날 리더십 이론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참신하다. (DBR 27호 참조)
 
고요는 요·순 시대 인물로 구요(咎繇)라고도 전해진다. 순 임금 때 형정(刑政)을 주관하는 사(士, 사법부의 수장과 같은 자리)에 임명됐으며, 순을 계승한 우를 보좌하면서 큰 치적을 남겼다. 우는 고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고요가 먼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다. 오늘날 중국의 고(皐) 씨들은 모두 자신의 조상을 고요로 여기고 있다.
 
고요에 관한 기록은 중국 역사서의 시초로 불리는 ‘서(書)’(상서 또는 서경)의 첫 편 ‘우서(虞書)’ 제4 ‘고요모(皐陶謨)’가 원전이다. 사기(史記)의 ‘하본기’는 고요모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고요의 구덕(九德)론
고요는 리더가 갖춰야 할 자질로 ‘구덕(九德)’론을 제시한다. 구덕은 리더의 자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의 리더십을 정의할 정도로 논리가 정교하다.
 
먼저 구덕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숫자 ‘9’는 동양 사회에서 더 이상 갈 데 없는 ‘극수(極數)’로, 완벽한 수를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인 천자를 상징하는 숫자이기도 하다. 고대의 천자들이 아홉 개의 큰 세발솥, 즉 ‘구정(九鼎)’을 주조해 천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폭정의 대명사 주 임금의 ‘남 탓’

32호(2009.05.01) / 김영수필자 소개  



‘사기’에는 실패한 리더의 대명사로 이른바 ‘걸주(桀紂)’로 알려진 폭군들이 기록돼 있다. ‘걸’은 중국사 최초의 왕조로 기록돼 있는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백성들을 힘으로 억압하다 탕(湯) 임금에게 추방돼 죽은 폭군이다. ‘주’는 은(殷) 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두 사람은 각각 한 왕조의 제왕으로서 지고무상한 권력을 누렸지만, 그 권력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을 괴롭히는 도구로만 사용해 결국 나라를 망쳤다. 특히 주 임금의 사례는 리더십의 변질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주 임금
주 임금은 ‘폭정’의 대명사다. 백성들에게 지나친 세금을 부과하고 그 세금을 온갖 사치스러운 생활로 낭비했다.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은 바로 그의 방탕한 생활을 대변하는 성어다. 또 자신에 대해 비판하거나 등을 돌리는 백성과 제후들을 탄압하기 위해 불에 달군 쇠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烙)’이라는 잔혹한 형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구후의 딸인 아내가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화가 나서 그녀를 죽이고, 구후도 죽인 다음 그 시체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일 정도였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권3 ‘은본기’)에 따르면, 주 임금의 자질은 누구 못지않게 뛰어났다.
 
“주 임금은 타고난 바탕이 총명하고 말재주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남달라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또한 지혜는 신하의 충고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였고,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해 천하에 그 명성을 높이려 했으며, 다른 사람은 모두 자기만 못하다고 여겼다.”
 
주 임금의 자질은 사실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리더의 능력과 닮은 점이 많다. 총명하고, 일 잘하고, 사소한 실수 정도는 지식과 말로 얼마든지 감출 수 있으며, 자신의 능력을 주위에 알리는 데 능숙한 리더…. 전형적인 한국형 리더의 모습 아닌가? 리더의 이 같은 자질은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자질을 어떤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발휘해나갈 것인가에 있다.



禹임금, 아버지의 실패 딛고 소통의 날개 달다

33호(2009.05.15) / 김영수필자 소개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우(禹) 임금이다. 당시 우 임금은 해마다 홍수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황하(黃河)의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그 결과 순(舜) 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하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우는 아버지인 곤(이 하던 치수 사업을 물려받았다. 곤은 치수에 실패한 죄로 우산(羽山)으로 추방됐다가 그곳에서 처형당했다. 곤의 죽음은 당시 요 임금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던 순의 정치적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말하자면 순이 잠재적 대권 경쟁자였던 곤을 치수 사업의 실패를 구실로 제거한 것이다. 게다가 순은 치수 사업의 다음 책임자로 다른 사람도 아닌 곤의 아들 우를 지명하고, 그에게 치수 사업을 계속 맡겨 자신의 감시 아래 두는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이렇듯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과 순의 정치적 견제 속에서 우는 장장 13년 넘게 집을 떠나 치수 사업에만 전념했다. 그는 13년 동안 3번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결혼 4일 만에 집을 떠나는 바람에, 나중에 태어난 아들 계(啓)의 얼굴도 못 봤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우는 치수 사업을 성공시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과 순의 극심한 정치적 견제 속에서도 리더로서의 자질을 키웠다. 마침내 순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아 하 왕조를 건국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단련했다.
 
소통의 리더십을 체득하다
우는 아버지의 치수 사업을 재점검하면서 실패 원인을 찾았다. 아버지 곤은 물길을 제방으로 막아 넘치지 못하게 하는 ‘봉쇄’를 사업의 기조로 삼았다. 이것이 실패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제방을 제아무리 높고 튼튼하게 쌓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양을 예측하지 못하면 언제까지고 홍수를 막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우는 봉쇄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택했다. 즉 큰 물줄기 사이로 작은 물줄기를 여러 갈래 만들어 물이 고루 흘러 나가도록 함으로써 황하의 홍수를 다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德의 그물로 백성을 감싸 안다

34호(2009.06.01) / 김영수필자 소개  


사마천이 <사기>에서 일관되게 제시하는 이상적인 리더는 ‘덕(德)’을 갖춘 리더다. 사마천은 덕을 갖춘 리더의 자질로 다음 3가지를 추구했다.
 
①자현(自賢): 리더 자신의 유능한 자질과 능력
 
②구현(求賢): 유능한 인재를 갈망함
 
③포현(布賢): 리더와 리더가 발탁한 인재의 자질과 능력을 실천함
 
특히 세 번째 ‘포현’의 핵심은 백성들에게 널리 이익이 미치도록 하는 자질이다. ‘자현’과 ‘구현’은 별개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포현’을 이끌어낸다. 이 3가지 리더의 자질은 리더십의 단계이고, 포현은 리더십의 완성 단계라 할 수 있다.
 
사실 리더십에 대한 모든 논의의 핵심은 유능한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用人)’의 문제다. 인재를 발탁하는 리더의 자세가 곧 백성들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에서 하(夏)나라에 이어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왕조를 건립한 상탕(商湯)은 인재 기용에 대한 교훈을 주는 인물이다.
 
폭정의 왕조에 혁명을 일으키다
상탕은 하 왕조에서 상(또는 은[殷]) 종족을 이끌던 제후로, 하 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桀)을 내쫓고 혁명에 성공했다. 그는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천자(天子)는 하늘의 명을 받아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므로 절대 바꿀 수 없다’는 개념인 ‘천명(天命)’을 바꿔 최초의 변혁을 이뤘다.
 
당시 이윤(伊尹)이 걸 임금의 폭정을 걱정하며 “지금 잘못을 바로잡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자, 걸 임금은 “백성에게 군주는 하늘의 태양과 같다. 태양이 없어져야 나도 없어진다”며 일축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일제히 “태양아, 빨리 없어져라. 우리도 너와 함께 망하련다” 하고 노래를 부르며 걸 임금의 오만함을 비꼬았다. 민심은 이미 걸에게서 떠나 있었다.
 
걸 임금은 갖가지 가혹한 형벌을 만들어 반항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하루는 혹형을 지켜보던 걸이 대신 관용봉(關龍逢)에게 즐겁고 통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관용봉이 “이 형벌은 마치 봄날에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위험스럽기 짝이 없습니다”라하고 에둘러 비판하자, 걸은 “다른 사람의 위험만 눈에 보이고 네 자신의 위기는 안 보이지?”라며 즉각 그를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 속으로 처넣어 죽였다. 관용봉은 중국 역사상 바른말을 하다 죽임을 당한 최초의 충직한 신하로 기록돼 있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알라

35호(2009.06.15) / 김영수필자 소개  


요리로 정치를 논한 이윤
성공한 리더의 뒤에는 특출한 참모가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춘추시대 환공(桓公)을 도와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고, 환공을 최초의 패자(覇者)로 만들었던 관중(管仲)이다.
 
흥미롭게도 환공과 관중은 원래 원수지간이었다. 관중은 정쟁(政爭)의 와중에 활을 쏘아 환공을 암살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환공은 포숙(鮑叔)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관중을 용서했으며, 그를 재상으로 발탁하기까지 했다. 제나라는 포숙의 사심 없는 양보와 환공의 통 큰 포용력, 관중의 재능이 합쳐짐으로써 제후국들을 호령하는 최강국이 될 수 있었다.
 
상(商)나라를 건국한 탕(湯) 임금은 역대 명군 반열에 오른 지도자다. 탕에게는 이윤(伊尹)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지난 호에서 잠깐 소개했듯이 탕이 무려 다섯 차례나 이윤을 찾아가 그를 발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유명한 ‘오청이윤(五請伊尹)’이라는 고사다.
 
탕 임금과 이윤에 관한 설화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이윤부정(伊尹負鼎)’이다.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이윤이 솥을 짊어졌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다리가 3개 달린 세발솥을 ‘정(鼎)’이라 했는데, 이것은 고기 같은 음식을 삶는 조리 기구다. 솥을 짊어졌다는 말에서 이윤이 요리사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윤의 초상화는 대부분 그가 세발솥을 들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설화에 따르면 이윤은 자신의 큰 뜻을 펼치게 해줄 지도자로 탕을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좀처럼 탕을 만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탕에게 접근하기 위해 요리 기구를 전부 싸 들고 탕의 아내가 될 유신씨(有莘氏)의 혼수품에 딸려가는 노예가 됐다(이윤은 유신 부락 출신이다).
 
이렇게 탕에게로 온 이윤은 일단 훌륭한 요리 솜씨로 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고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탕에게 요리법에 비유한 ‘치국의 도(治國之道)’를 이야기했다. 당시 이윤이 탕에게 들려준 나라 다스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후덕한 유방, 7년만에 건달에서 황제로…

36호(2009.07.01) / 김영수필자 소개  


최근 우리 사회는 ‘제대로 된 리더 및 리더십의 부재’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덕(德)’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할 수 있다. 필자는 올해 초에도 이 코너에서 리더의 자질로 덕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동아비즈니스리뷰 26호 참조). 그때 덕이란 결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각박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 가장 부족한 자질이 바로 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각박하지 않음’이란, 나와 내 편은 물론 너와 상대편을 받아들일 줄 아는 ‘포용’을 전제로 한다. 특별한 인격상의 하자가 없고 특정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능력 있는 인재라면, ‘내 사람’이 아니더라도 과감히 기용해 우대할 줄 알아야 ‘덕이 있는 리더’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포용의 리더십이다. 포용의 리더십은 이념, 정파, 계층을 초월해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차원 높은 인간 행위이며,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기도 하다.
 
역사를 보면 각박하게 행동하고도 성공한 리더는 거의 없다. 반면 포용력을 가진 리더치고 실패한 리더 또한 거의 없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이치지만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드문 편이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다음, 한때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맞섰던 정적에게 포용력을 발휘한 리더는 더욱 드물다.
 
바로 이 대목에서 리더의 자질론이 대두된다. 타고난 리더는 없다. 포용력은 리더가 자기 수양을 통해 기를 수 있는 후천적 자질이다. 역사상 성공한 리더로 꼽히는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포용력이 리더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자.
 
한 고조의 논공행상
주색을 밝히며 건달 생활을 하다 얼떨결에 농민 봉기군의 우두머리가 되고, 그 후 불과 7년 만에 황제가 된 인물이 있다. 바로 한나라를 개국한 고조(高祖) 유방(劉邦)이다. 그는 역사상 리더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날건달’이 어떤 과정을 밟아 황제가 됐는지에 대한 연구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방은 5년에 걸친 항우(項羽)와의 초한쟁패에서 승리해 천하를 재통일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좌했던 공신들을 대상으로 논공행상을 하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딪혔다. 공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자기가 더 높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유방은 1년이 지나도록 논공행상을 하지 못했다. 유방에게 소극적으로 협조했거나, 한때 그를 반대하거나 배신한 경력을 가진 자들은 행여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차라리 반역을 일으키는 쪽이 낫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武 임금도 쇼를 했다, 인재를 얻으려고…

37호(2009.07.15) / 김영수필자 소개  


3년을 기다리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사기에는 은[殷]으로 기록돼 있음)은 약 550년 동안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약 30명의 제왕들이 부침을 거듭했다. 상 왕조는 제20대 제왕인 반경(盤庚) 때 은(殷)으로 도읍을 옮기는 등 국정 전반에 변화를 줘 쇠약해가던 나라의 기운을 되살리고, 중흥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반경의 뒤를 이은 소신(小辛)과 소을(小乙)의 재위 시절에는 다시 국력이 쇠퇴했다. 그래서 죽은 반경을 그리워하는 노래까지 지어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침체된 분위기에서 소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임금이 무정(武丁)이었다. 무정은 왕조의 부흥에 강력한 의욕을 보였다. 국정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무정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몰락한 왕족 출신이라, 즉위하자마자 전권을 휘두르며 개혁에 나설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무정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궁정이 아닌 민간에서 생활했다. 소을이 죽은 뒤 마땅한 왕위 계승자가 없어 신하들이 수소문한 끝에 몰락한 왕족이었던 그를 찾아내 즉위시켰다. 그러니 무정에게는 왕실 내 정치적 기반은 물론, 궁중 일을 믿고 맡길 만한 측근도 전무했다. 무정은 무려 3년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존 총재(재상)에게 정치를 맡기고,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국정 전반을 유심히 관찰했다.



주(周) 문왕의 ‘무서운 기다림’

38호(2009.08.01) / 김영수필자 소개  


주 임금의 폭정을 지켜보며 탄식하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왕조인 상(商, 사기에는 은[殷]으로 기록돼 있음)의 마지막 임금 주(紂)는 포악한 통치자의 대명사로 불린다(동아비즈니스리뷰 32호 참조). 주 임금은 술과 놀이, 여자를 탐해 자제할 줄 몰랐다. 그는 자질이 뛰어난 통치자였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고 자만에 빠져 타인의 충고에 귀를 닫았다. 백성에게는 과중한 세금을 매겨 자신의 사욕을 채웠다. 사구(沙丘)라는 곳으로 엄청난 규모의 악단을 부르고, 술로 연못을 채웠으며, 고기를 나무에 매달아 숲처럼 만들어놓고는 나체의 남녀들이 숨바꼭질 놀이를 하게 하면서 밤새 마시고 놀 정도였다. 폭정을 대변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성어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높아갔고 제후들은 등을 돌렸다. 그러자 주 임금은 ‘포락(烙)’이라는 혹형을 창안해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잡아다가 불에 달군 시뻘건 쇠기둥 위를 걷게 했다. 쇠기둥 아래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에 달궈진 쇠기둥 위를 어떻게 걷겠는가?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불속으로 떨어져 타 죽을 수밖에….





周 무왕, 넘치는 인재를 컨트롤하다

39호(2009.08.15) / 김영수필자 소개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창업의 터전
 
지난 호(동아비즈니스리뷰 38호)에서 살펴봤던 무왕(武王)은 아버지 서백 창(문왕(文王)의 유업을 받아 상(사기에는 은[]으로 기록돼 있음)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건했다. 무왕의 아버지 문왕은 유리성(里城)에 7년이나 구금되는 등 견딜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해내는 인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문왕은 안으로는 자신을 수양하고, 밖으로는 덕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
 
그는 인재를 제대로 대우할 줄 아는 리더였다. <사기> 제4 ‘주본기’에 따르면, ‘정오가 될 때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선비들을 만났다’고 한다. 이른바 ‘일중불가식이대사(日中不暇食以待士)’라는 유명한 고사다. 문왕은 조용히 선행을 실천했고, 제후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부탁했다. 다음 일화는 그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와 예(지역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두 지역의 우두머리들은 문왕을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기로 했다. 두 사람이 주나라 경계에 들어서서 처음 본 것은 농사짓는 주나라 사람들이 하나같이 밭과 밭 사이에 난 경계 지점의 땅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모습이었다. 백성들은 또 연장자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풍속도 갖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문왕을 만나봤자 자신들만 부끄러워진다며 서로 양보하고 되돌아갔다.”
 
문왕의 덕을 칭송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훗날 주나라 창건의 주역이 되는 강태공을 비롯해 태전, 굉요, 산의생, 육자, 신갑 대부 등이 문왕을 추종했다. 고죽국의 왕자들인 백이와 숙제는 왕 자리도 버린 채 그에게로 왔다.
 
무왕은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훌륭한 창업의 터전 위에서 유업을 잇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타고났다.
 

아버지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다
 아버지 문왕이 닦아놓은 기반은 무왕에게 더없이 훌륭한 밑천이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밑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은 무왕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대단했다.
 
강태공(姜太公)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천하의 3분의 2가 주나라에 복종하게 만든’ 계책의 대부분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60세가 넘는 고령이 될 때까지 자신을 알아줄 리더를 기다린 내공 깊은 인재였다.
 
신갑 대부(辛甲大夫)는 상나라의 주 임금을 섬기면서 무려 75차례나 직간(直諫)을 올렸던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소공(召公)이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필요한 인재라고 판단해 문왕에게 소개했고, 문왕은 직접 뛰어나가 그를 맞아들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문왕이 장자를 우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라까지 팽개치고 달려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훗날 무왕이 상나라의 주 임금을 정벌하러 나서자 “아버지 문왕의 상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신하가 임금을 치는 것은 도에 어긋난다”며 무왕의 말고삐를 잡았다. 주위에서 이들을 죽이려 하자 강태공이 말려 돌려보냈다.
 
이렇듯 문왕의 주변에는 무왕이 부담감을 느낄 정도로 특출한 인재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왕은 이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고 우대하는 절제된 리더십을 발휘해 결국 상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건국했다.
 
  
 
균형과 견제의 리더십을 발휘하다
 무왕의 리더십에서 우선 주목할 점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식견’이다. 이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으로 보인다. 아버지 문왕의 위패를 앞세우고 군대를 동원해 상나라 정벌에 나선 그의 출정식에는 사전 통보도, 별다른 약속도 없었다. 그런데도 무려 800명의 제후가 맹진(盟津)에 몰려들어 상나라 토벌을 외쳤다. 그런데 돌연 무왕은 한발 물러서 “아직 천명(天命)을 알 수 없다”며 군대를 철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앞세워 여론을 탐색하면서 동시에 상나라 정벌에 따른 대의명분을 확보했고, 그로부터 2년을 더 기다린 끝에 드디어 상나라를 정벌했다.
 
무왕의 리더십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더 빛나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망한 상나라의 유민들을 안심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민심이 새로운 정권에 마음을 주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이전 왕조가 아무리 포악한 정권이었다 하더라도 다수의 민심에는 관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은 민심의 움직임에 작용하는 ‘관성의 법칙’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주 임금의 아들 무경(武庚녹보(祿父)를 죽이지 않고 남은 유민들을 관리하는 자리에 앉혔다. 이와 함께 상나라 왕족이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하고, 어질고 유능한 인재였지만 주 임금에게 박해받고 죽었던 상용(商容)의 마을을 표창했다. 또 주 임금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비간(比干)의 무덤을 돌보게 하여 남은 상나라 유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권력보다 봉사를 택한 周公의 리더십

40호(2009.09.01) / 김영수필자 소개  


형보다 뛰어난 아우
기원전 11세기에 상(商)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은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함과 더불어 적절히 견제함으로써 주나라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무왕을 보좌한 인재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무왕의 친동생 주공(周公)이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 임금을 토벌해 주나라 건립에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뒤를 잇자 주공은 조카를 도와 국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공은 상나라의 후예인 무경(武庚)이 일으킨 반란과 자신의 섭정에 불만을 품은 삼감(三監)의 반발 등을 진압해 위기에 처한 주나라를 살리고 권력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데 막강한 역할을 해냈다.
 
주공은 ‘주나라의 예’ 또는 ‘주공의 예’라고 불리는 주례(周禮)로 대변되는 예악(禮樂)을 제정해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으로 삼았다. 그는 또 역사상 가장 중국적인 제도로 평가받는 ‘봉건제’라는 통치 질서를 창안한 주인공이었다. 예악과 봉건은 이후 중국의 모든 왕조를 지탱하는 기본 질서로서 수천 년 동안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자(孔子)는 이런 주공을 꿈속에서조차 사모할 정도였고, 유가에서는 주공을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주공은 형님인 무왕이 일찍 세상을 뜬 탓에 자신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책임을 떠안게 됐다. 동시에 이 때문에 평생 주변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주변의 의심과 반발에 강온책으로 대응
어린 조카인 성왕이 즉위하자 주공은 선왕들에게 고하는 의식도 생략한 채 즉각 섭정(攝政)이 되어 대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어린 왕의 즉위로 민심이 흩어지고 이민족이 침입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공의 친형인 관숙(管叔)과 친동생인 채숙(蔡叔)이 멸망한 상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있던 무경과 결탁해 ‘주공이 장차 성왕을 해치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주공의 섭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충고를 외면한 周 여왕의 몰락
42호(2009.10.01) / 김영수필자 소개  


입에 쓴 좋은 약
 
“좋은 약은 흔히 입에 쓰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그것을 먹으라고 권한다. 그래야 병에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 <한비자> ‘외저설’ 좌상
 
충고는 좋은 약과 같아 듣기에는 거슬리나 행동에는 유익하다. 충고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게 해주므로 허심탄회하게 경청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리더라면 특히 그렇다. 타인의 충고를 수용하는지 여부는 리더의 포용력과 리더십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역사상 충언, 직언, 충고를 듣지 않거나 무시하다 낭패를 본 리더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반면 마음을 열고 충고를 흔쾌히 받아들인 리더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 귀에 거슬리는 충고를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충고를 잘 받아들인 리더만이 성공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는 충신 비간(比干)이 나라의 멸망을 걱정하며 목숨을 걸고 직언하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7개나 있다고 들었다”면서 진짜인지 보겠다며 비간의 심장을 도려냈다. 결국 주는 주()나라 무왕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불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상나라는 망국의 운명을 맞이했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는 오 왕 부차(夫差)에게 여러 차례 월()나라의 야심을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이전의 승리에 도취돼 있던 부차는 간신 백비의 이간질과 주색에 빠져 오자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은 물론 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그 결과 20년 동안 절치부심 재기한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오나라는 망하고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왕도, 부차도 모두 지략을 겸비한 대단한 리더들이었다. 이들은 출중한 능력으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끝내는 망국의 화를 면치 못했다. 위기의 조짐을 간파한 충직한 신하들의 충고와 백성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다. 리더십에서 충고를 받아들이는 열린 가슴과 포용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충고를 외면하고 언론을 탄압한 여왕
서주(西周왕조의 제10대 왕이었던 여왕()은 기원전 9세기 무렵 30년 동안 왕위를 지키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자신이 총애하는 소인배를 기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몰두하다 결국은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대부 예량부(芮良夫)는 일찌감치 이런 위기 상황을 예견하고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왕실이 쇠약해지고 있습니다. 영이공은 이익을 독점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닥쳐올 큰 재앙은 모릅니다. 무릇 이익이란 만물과 천지자연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독점하면 그 피해가 커집니다. 천지만물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 나누어 써야 하거늘 어찌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초래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큰 재앙에 대비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왕을 이끌면 왕이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무릇 왕이라는 사람은 이익을 개발해 위아래로 공평하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신과 인간, 그리고 만물이 모두 알맞게 이익을 얻게 하고, 행여 원망이 있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중략) 지금 왕께서 이익을 혼자 독차지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차지해도 도적이라 부르거늘, 왕이 그렇게 하면 왕을 따르는 사람이 적어집니다. 영이공을 기용하시면 틀림없이 낭패를 볼 것입니다.”
 
예량부의 충고는 간곡하고 현실을 직시한 말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왕은 듣지 않고 끝내 영이공(榮夷公)을 경사(卿士)로 중용해 정권을 장악하게 했다. 영이공이라는 소인배를 최측근으로 앉힌 여왕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포악해지고 교만해졌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왕을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소공(召公)은 “백성들이 그런 통치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여왕은 버럭 화를 내며 이웃 위()나라 무당을 불러다 비방하는 자들을 감시하게 하여 보고가 올라오면 죽였다. 비방하는 사람은 줄어들었고, 제후들은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고무된 여왕이 더욱 엄하게 단속하자, 사람들은 감히 말은 못하고 길에서 만나면 눈으로 서로의 마음과 뜻을 나눴다. 여기서 저 유명한 ‘도로이목(道路以目)’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여왕은 소공을 불러다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완전히 막았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그러자 소공은 다시 간곡히 충고했다. 이 대목은 역사상 신하가 통치자에게 올린 가장 유명한 충언의 하나로 기록될 만한 명문이다.
 
“그것은 말을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심각합니다. 막힌 물이 터지면 피해가 엄청난 것처럼 백성들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길을 터주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말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자가 정무를 처리하면서 공경과 일반 관원들에게 시를 써서 내게 하고, 악관에게는 노래를 지어 올리게 하고, 사관에게는 앞 시대의 정치를 기록한 사서를 바치게 하고, 악사에게는 잠언을 올리게 하며, 장님에게는 낭송하게 하고, 눈먼 자에게는 음악 없는 시를 읊게 하는 것입니다. 백관들은 솔직하게 충고하고, 백성들은 간접적으로 여론을 전달하고, 가까이 있는 시종들은 간언을 살피는 데 힘을 다하고, 종친은 왕의 잘못을 살펴 보완해주고, 악사와 사관은 음악과 역사로 천자를 바르게 이끌며, 원로대신들은 이런 것들을 가려내 종합합니다. 그런 다음 왕이 이를 참작하면 정치는 어긋나지 않고 잘 실행되는 것입니다.



혁신파 周 선왕도 자만심엔 졌다

44호(2009.11.01) / 김영수필자 소개  


밤새 집무실 앞을 밝히는 화톳불
<시경> ‘소아’ 편에 ‘정료(庭燎)’라는 제목의 시가 나온다.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한밤중인데
뜰에서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아직 날이 새려면 멀었는데
뜰에는 화톳불이 여전히 타고 있네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말방울 소리 달랑달랑
 
벌써 날이 샜는가,
이제 막 날이 새려고 하는데
뜰의 화톳불은 깜박깜박
제후들 조정에 드는지 깃발이 보이네
 
이 시는 천신만고 끝에 왕으로 옹립돼 주(周)나라 왕실을 재건한 선왕(宣王)을 칭송한 노래다. 백성의 언론을 통제하고 충직한 신하들의 충고를 외면하다 결국 반란군에게 쫓겨나 외지를 전전하다 쓸쓸하게 죽은 주나라 여왕(동아비즈니스리뷰 42호 참조)의 아들이 바로 선왕이다.
 
시인은 밤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잠 못 이루는 선왕의 고뇌에 찬 모습을 뜰 앞에 밝혀놓은 화톳불이 점점 꺼져가는 모습에 투영했다. 선왕은 나라 안팎의 일 때문에 신하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도 집무실에 남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행여 무슨 소리라도 들리면 혹시 제후들이 조정에 드는 것은 아닌지 정신을 가다듬길 몇 차례. 결국은 제후들이 나올 때까지 꼬박 밤을 새우곤 했다.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1 : 역사 문화 아이콘이 된 ‘단 하나의 제왕’

45호(2009.11.15) / 김영수필자 소개  


 
천고일제(千古一帝)
최근 건국 60주년 기념행사를 요란하게 치른 중국에서는 새삼 마오쩌둥(毛澤東)이 ‘문화 아이콘’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마오쩌둥은 2000년 넘게 지속돼온 제왕 중심의 전제주의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평등 정신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 주인공이다. 반편 ‘마지막 황제’라는 조롱조의 평가까지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그가 역사상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을 물리치고 오늘날 광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역사적 인물이 문화적 아이콘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지속적으로 이뤄지면서도 극명하게 상반되어야 한다. 중국 역사상 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두 사람이 바로 마오쩌둥과 이 글에서 언급하는 진시황(秦始皇)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50년을 넘기도 전에 선명하게 양립되기 시작하더니 끝을 알 수 없는 논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있다. 진시황에 대해서는 죽음과 거의 동시에 부정적 평가가 주류를 이뤘고, 그 후 2000년 가까이 그 기조가 유지됐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오면서 신(사학의 태동과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역사 인식에 힘입어 진시황에 대한 ‘철옹성’ 같은 기존 평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보다 앞서 진시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이 없진 않았다. 중국 역사상 최악의 사상 탄압기였던 16세기 명나라 말기에 온몸으로 체제 이데올로기에 저항했던 이단아 이탁오(李卓吾)는 주저 없이 진시황을 ‘천고일제(千古一帝)’라 불렀다. 진시황에게 ‘역사상 단 하나의 제왕’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진시황에 대한 평가는 오랜 ‘단조로움’에서 벗어났으며, 이후 흥미진진한 논쟁의 드라마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았기에…”

46호(2009.12.01)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 전의 진나라
중국사를 크게 구분할 때 흔히 쓰는 용어로 ‘선진(先秦)’이라는 말이 있다. ‘진(秦)나라 이전’이라는 뜻이다.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를 기점으로 중국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크게 나누는 말이다. 그만큼 중국사에서 진나라의 통일이 갖는 의미는 크다.
 
통일제국 이전의 진은 당초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던 보잘것없는 부족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기원전 771년 주(周)나라 유왕(幽王)이 자신이 아끼는 애첩 포사를 웃기려고 봉화 놀이를 즐기며 정실을 내쫓고 태자를 폐위시키려다 견융(犬戎)과 신후(申侯)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유왕의 아들 평왕은 동쪽 낙양으로 도망치듯 도읍을 옮겼다. 이때 진의 양공(襄公)은 군대를 파견해 평왕을 호위토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진은 중원의 다른 제후국들과 같은 제후 반열에 끼게 됐다. 이로써 진은 주(周) 중원(中原)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즉위한 목공(穆公)은 획기적인 인재 기용 정책으로 일약 강자로 급부상했다. 목공은 춘추시대를 대변하는 이른바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서 국제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켰다. 목공 때를 전후로 진은 서방의 융족을 평정하고 강역을 크게 넓히는 등 의욕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천하통일의 전주곡, 상앙의 ‘변법 개혁’

47호(2009.12.15)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의 전주곡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진시황은 영토통일과 정치통일 외에도 화폐통일, 도량형통일, 문자통일로 대변되는 이른바 ‘삼통(三統)’을 단행했다. 또 진시황은 전국을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개편했다. 이 4가지 사항은 마치 진시황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져 진시황을 언급한 책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실린다.
 
하지만 사실 진시황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 4가지를 좀 더 완벽하게 다듬고 강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창안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6호에 잠깐 언급했던 효공(孝公)과 상앙(商鞅)이 그 주인공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 중반 효공과 상앙의 개혁 정치에 힘입은 바 크다. 말하자면 통일의 전주곡으로서 상앙이 작곡하고 효공이 연주한 ‘변법(變法)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개혁은 전면적이고 철두철미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개혁을 ‘기적’이니 ‘마술’이니 하는 말로 과장하기도 한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목공(穆公) 때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여 위세를 떨친 후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내부에 난이 많았고,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대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최고 통치자인 군주를 교체하는 일도 빈번했다. 헌공(獻公) 때 도읍을 역양(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臨潼])으로 옮기고 서하 지역을 되찾는 등 중흥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이어받은 군주가 바로 효공이었다. 효공은 즉위한 이듬해인 기원전 361년 적극적인 ‘구현령’을 통해 세계 개혁사의 기린아로 일컬어지는 상앙과 조우했다.
 
 




불안에 빠진 워커홀릭, 不死를 꿈꾸다

48호(2010. 01. 01) / 김영수필자 소개  


진시황의 생애
진시황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진시황의 생애는 크게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출생∼즉위 전(1∼13세, 기원전 259년∼기원전 247년, 13년)
제2단계:즉위 후∼친정 전(13∼22세, 기원전 247년∼기원전 238년, 10년)
제3단계:친정 후∼천하통일(22∼39세, 기원전 238년∼기원전 221년, 18년)
제4단계:천하통일 이후∼사망(39∼50세, 기원전 221년∼기원전 210년, 12년)
 
이 네 단계를 염두에 두고 진시황의 간략한 생애와 그의 삶에 영향을 준 주요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제시한다. 즉위 이전의 진시황은 ‘영정’, 즉위 이후의 진시황은 ‘진왕 정’, 황제 즉위 후에는 ‘진시황’으로 부르기로 한다.
 
 
생애로 본 진시황의 성격과 심리
진시황은 외국에서 태어났다. 인질로 와 있던 아버지 이인(異人)이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사람 행세를 하게 되고, 이어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아들여 진시황을 낳았다. 그런데 이인에게 시집 올 당시 조희는 이미 임신을 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진시황의 생부는 여불위였던 것이다. 진시황의 출생에 얽힌 미스터리는 지금도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여불위가 그의 생부라는 설이 우세하다.
 
여불위의 보살핌 덕분에 어린 영정은 생활고에 시달리진 않았다. 하지만 인질의 아들이었기에 신변의 불안은 컸다. 게다가 아버지 이인은 영정이 세 살 되던 해에 여불위의 도움을 받아 고국인 진으로 귀국하고, 영정은 어머니와 타국에 남게 되었다. 그렇게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훗날 영정이 진왕으로 즉위한 뒤 여불위와 어머니 조희가 지난 정을 못 잊어 불륜에 빠진 사실로 미루어볼 때, 아버지 이인이 귀국하고서 영정이 귀국할 때까지 6년 동안 어머니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는 심상치 않았을 것이다. 요컨대 세 살 이후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영정은 타국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불우한 처지였다. 여기에 절대적인 후원자 여불위의 위세에 눌려 조용히 숨죽인 채 모든 불만을 속으로 삭이면서 울적한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홉 살에 아버지 이인이 태자로 책봉되면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온 영정은 비로소 가정다운 가정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 한 나라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6>톱니바퀴 같은 시스템, 제국을 이끌다
52호(2010. 03.01) / 김영수필자 소개  


 
통일 과정에서 보여준 진시황의 리더십이야말로 그의 전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인재 기용책에서부터 알 수 있다. 진왕 정(즉위 후부터 황제 즉위 전까지의 진시황의 호칭)은 춘추시대 진 목공 때부터 이어져온 국적, 신분, 민족을 따지지 않는 완전 개방된 인재 기용책을 실행했고, 이것은 거의 불문율의 전통이 됐다. 이는 진왕 정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인 몽오, 환기, 양단화, 왕전, 왕분, 여불위, 이사, 몽염 등의 면면을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들 중 절반이 외국 출신이었다. 여불위는 위(衛)나라, 이사는 초(楚)나라 출신이었다. 군사 방면에서 큰 공을 세운 몽오와 그 손자 몽염은 제(齊)나라 출신이다.
 
통일 과정에서 진왕 정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인재라면 자존심마저 버리고 데려오기도 했다. 이는 불세출의 전략가이자 진왕 정의 생부인 여불위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한다. 진왕 정의 인재 기용과 관련한 두 가지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먼저, 위나라 출신의 전략가 위료의 기용이다. 위료는 진왕 정에게 재물로 제후국들의 신료들을 매수하라고 건의해 이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위료는 진왕 정의 성품이 각박하고 잔인해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사람을 해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경멸했다. 하지만 진왕 정은 자신을 경멸하는 위료를 책망하기는커녕 간곡하게 그를 설득해 붙잡아두고는 전폭적인 신임을 보냈다.



진시황의 죽음과 제국의 몰락 - 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7(끝)
54호(2010.04.01) / 김영수필자 소개 



천하 통일, 콤플렉스의 결정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치열하게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결함. 즉 콤플렉스는 장애가 아닌 적극적인 자극제로 작용할 수 있다. 역사상 사소한 콤플렉스는 물론 심지어 치명적인 결함을 가졌음에도 궁극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적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진시황 역시 그랬다. 그는 콤플렉스가 많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강인한 의지와 자기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극복했고, 천하 통일이라는 위대한 과업을 완수했다.
 
천하 통일을 이루기까지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치밀한 준비와 시기를 놓치지 않는 냉혹한 결단, 필요에 따라 자신을 굽힐 줄 아는 유연한 전략적 두뇌, 상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물리력이 아닌 심리적으로 파고드는 독수, 확실한 마무리까지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이 없었다. 통일에 따른 제국의 재편성 과정에서는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시스템에 의한 국정 운영, 이를 위한 문물제도의 정비와 통일, 정치·경제·군사·문화를 한꺼번에 염두에 둔 기반 시설의 확충(도로)과 정책(인구 이주책) 등은 오늘날 보아도 여간 참신하지 않다.
 
특히 통일 이전의 진시황은 대단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위료나 왕전에 대해 한껏 자신을 낮춘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韓)나라가 진나라의 재정을 파탄 낼 요량으로 수리 전문가 정국(鄭國)을 간첩으로 파견한 사건에 대한 진시황의 대처 방식에서도 그의 유연함이 잘 드러난다. 정국이 간첩이란 사실이 탄로 나자 진나라 조정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펄펄 끓는 물 같았다. 정국을 잡아 죽이자는 의견은 물론 당시 진나라에서 활약하던 외국 출신들을 모조리 내쫓아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를 역이용했다. 정국에게 수리 공사를 맡겨 경제적으로 큰 득을 보았다. 수리에 관한 한 정국은 발군의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유연성은 군사 방면에서도 발휘되었다. 천하 통일을 위한 본격적인 전쟁은 진시황 나이 30세를 전후로 시작되었다. 첫 대상은 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른바 삼진(三晋)으로 불리는 한(韓), 조(趙), 위(魏)나라였다. 한은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다. 그러나 명장 이목(李牧)이 버티고 있는 조나라는 만만치 않았다. 진시황은 27세(즉위 14년) 무렵 이목에게 크게 패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조나라에 대한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진시황은 32세를 전후로 강경 대응 전략에서 반간계(反間計)로 전략을 수정해 조나라 군과 정계를 흔들었고, 결국 기원전 228년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인사 방면에서도 진시황은 확실히 고수였다. 무엇보다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특정인을 승진시킬 때마다 그 권한을 억제하는 조치를 함께 취했다. 그는 생전에 특정인을 남다르게 총애한 일도 없었다. 측근인 환관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철저하게 통제했다. 심지어 그는 황후조차 두지 않았다. 이는 음탕한 어머니에 실망해 여성에 대해 환멸감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외척의 발호를 근원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요컨대 진시황은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부리되,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자기만의 용인(用人)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는 통일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진시황이 보여준 리더십은 ‘세상에 쓸모없는 인재는 없다. 사람을 쓸 줄 모르는 군주가 있을 뿐’이라는 속설을 정확하게 입증하고 있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 글쓴이 : 정중규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