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메뉴

2015년 9월 15일 화요일

사회에 관한 조립체 이론

사회에 관한 조립체 이론
The Assemblage Theory of Society                  http://blog.daum.net/nanomat/1035

"조립체 이론"은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가 자신이 가장 최근에 수행한 작업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것은 사회에 관한 이론인데, 인간 조립체들이라는 한정된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하나의 이음매 없는 전체로 용해되지 않는 일단의 더 작은 하위성분들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조립체 이론은 전면적인 존재론이며, 게다가 그것은 좋은 존재론이다. 데란다의 우주 모형의 다양한 요점들에 관해 성찰하면 단 몇 분만에 사변 철학의 수많은 핵심적 역설들이 떠오르며, 그리고 그것은 강한 철학적 이론의 최선의 징표이다. 오늘 나는 이 모형의 네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논의할 것이다. 그것들은 실재론과 조립체들의 이중 주창과 본질과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이중 비판이다. 이런 주제들 각각은 밀접하게 관련된 쌍둥이가 있다. 데란다의 실재론은 그로 하여금 잠재적인 것(the virtual)에 관한 이론으로 이끌게 된다. 그의 조립체 이론은 창발(emergence)이라는 신조를 수반한다. 본질에 대한 그의 비판은 완전히 형성된 개체들에게 역사적 생성(historical genesis)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그의 비판은 기계적 형식으로 상호작용들을 산출하기보다는 어떤 인자들이 상호작용들을 촉진한다고 진술한다. 이어지는 강연에서 나는 데란다가 이런 여덟 가지 주요 주제들 전부, 즉 실재론, 잠재적인 것, 조립체, 창발, 본질, 생성, 인과관계 그리고 촉매를 어떻게 다루는지 간략히 서술할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은 이 학술회의의 표명된 주제인 열린 우주의 문제와 관련된 직접적인 함의를 갖게 된다. "조립체 이론"은 데란다의 저작에서 이 모든 주제들을 함께 묶는 최고의 표현이고, 조립체들은 데란다와 다른 사람들이 씨름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런데 그의 책들은 내가 선호하는 최근의 철학서들에 속하기 때문에 내 발언의 정신은 대체로 긍정적일 것이다. 우선 네 가지 주요한 표지들을 간략히 개괄함으로써 시작하자.

첫째로, 데란다는 자신이 실재론자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그는 이것을 매우 무뚝뚝하게 그리고 매우 흔히 말하기 때문에, 실재론이 그의 팬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인기가 없더라도, 그것을 외면할 수가 전혀 없다. 지금까지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실재론이 항상 존중할 만한 선택지였던 반면에, 데란다는 실재론자라고 자처하는 매우 드문 대륙철학적 성향의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명백히 이렇게 하지 않고, 후설도 메를로-퐁티도 이렇게 하지 않는다. 푸코의 추정된 "유물론"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와 푸코는 실재론자라고 자칭하기보다는 죽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바디우는 결코 실재론자라고 자처하지 않고, 지젝도 그렇지 않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도 그렇지 않다. 브뤼노 라투르는 이따금(특히 <<판도라의 희망>>에서) 공개적으로 실재론을 요청하지만, 실재론이 의미하는 바를 과감하게 재규정하는 대가를 치러고서 그럴 뿐이다. 더 젊은 세대의 대륙철학자들을 제외하면, 데란다만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반어적인 수법도 없이 실재론자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실재론은 얼토당토 않은 형용사로 비방을 받으며 "소박한" 실재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표현은 실재론의 한 가지 유형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어구이지만 사실상 모든 실재론이 소박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데란다가 소박한 사람으로 판정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의 실재론은 근년의 무미건조한 상식 실재론과 유사하지 않다. 물리적 덩어리들에 대응하기라는 책무와 그것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지루한 인간의 코기토와 결합된 단단한 물리적 덩어리들의 무미건조한 풍경 대신에 데란다는 실재들이 우리 마음은 물론 물리적 영역에서도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는 않는 실재론을 제공한다. 그는 이 모형을 들뢰즈의 "잠재적"이라는 술어와 관련시키며 이 술어를 빈번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그것은 로이 바스카(Roy Bhaskar)의 "자동적(intransitive)" 영역과 훨씬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것인데, 데란다는 바스카의 영향을 자유롭게 인정한다.

둘째로, 데란다는 모든 종류의 존재자는 조립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떤 객체도 자체의 성분들을 완전히 흡수하는 이음새 없는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실재에 대한 반환원주의적 모형도 함축한다. 쿼크 또는 전자가 노르웨이, 나토 또는 국제 들뢰즈 학회보다 더 실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이유는 전혀 없다. 거시적 존재자들이 환원될 수 있는 매우 작은 미시적 입자들의 궁극적인 층도 전혀 없다. 우리 시선을 어디에 고정시키든 간에 그 지점에서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들로부터 조립된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것들은 통일된 것들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항상 자율적인 성분들의 방대한 부대로부터 결합된다. 또한 이것은 데란다가 진정한 창발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작은 물리적 부분들의 거동을 설명함으로써 더 큰 존재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로, 데란다는 모든 형태의 본질에 반대한다(그리고 여기서 그는 바스카와 갈라서게 된다). 그는 완전한 형상들의 피안적 영역에 반대할 뿐 아니라, 다수의 특정한 존재자들에 의해 표현되는 어떤 고정된 수의 자연종들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학적" 판본의 본질도 반대한다. 여기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일반적인 반박 증인이고, 예상대로 데란다는 그를 소환한다. 그런데 또한 데란다는 이것보다 조금 더 나아가며, 그리고 어떤 개체도 본질을 갖고 있지 않는 더 중추적인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한 가지 이유는 존재자들을 특정한 순간들에 포착될 수 없는 역사적-유전적 과정들로 간주하는 그의 궁극적인 베르그송주의적 관점이다. 수소라고 불리는 자연적 종은 전혀 없으며, 방대한 일군의 수소 원자들이 있을 뿐인데, 각 수소 원자는  다양한 항성들의 핵심들에서 시작하는 나름의 독특한 삶 이야기를 갖고 있다. 나머지 다른 한 이유는 실재들이(현실태와는 달리) 덩어리들로 양자화되기보다는 하나의 연속체에 속한다는, 그의 2002년 들뢰즈 책에서는 꽤 두드러지만 2006년 경에는 다소 희미한, 그의 견해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본질도 고정된 또렷한 윤곽을 갖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본질은 필연적으로 인접하는 가능태들로 번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이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거부할 것이고, 데란다의 조립체를 다른 방향으로 밀려고 시도할 것이다.

넷째로, 데란다는 놀랍게도 구식의 선형적 인과관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촉매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 왜소화된다고 생각한다. 담배는 모든 흡연자에서 암을 유발하지는 않으며, 모든 폐암 희생자도 삶의 어느 시점에서 흡연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담배는 그저 암에 대한 촉매로 간주되어야 한다. 데란다가 보기에, 이것은 이미 결정론적 인과관계에 관한 전통적 관념을 위협하기에 충분한데, 이런 논변은 결정론에 반대하는 바스카의 논변과 유사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메커니즘의 바로 그 요새를 타격하지 않는다면 선형적 원인들은 알기 어렵다는 점을 입증할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게다가 나는, 데란다의 반현실화 견해들은 반관계론적 견해들을 수반하고, 그래서 결국 이것은 인과관계를 강력한 수수께끼로 만들기 때문에 데란다는 인과적 관계들에 관한 훨씬 더 기묘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1. 실재론

모든 사상가는 필요할 때 수정하거나 희생시킬 수 있는 어떤 핵심 술어들을 사용하는 반면에, 다른 것들은 사활이 걸린 문제로 간주한다. 데란다의 사활이 걸린 술어들 가운데 하나는 "실재론"인데, 이것은 오늘날 대륙철학 학파들에서 인기가 거의 없는 낱말이다. 사실상 실재론/관념론 분리는 흔히 화석화된 옛 시대에 속하는 진부한 사이비 문제로 일축당한다. 그러나 이것은 데란다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 마음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율성을 실재에 부여하는 철학자들이 존재한다... 이런 철학자들은 실재론적 존재론을 갖고 있다고 한다. 들뢰즈는 여전히 기본적으로 비실재론적인 대부분의 탈근대적 철학자들과 구별해야 하는 그런 실재론적 철학자이다." 들뢰즈에 대한 한 가지 독법으로서 이것은 얼마든지 많은 이유들 때문에 거부당하거나 그저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특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데란다의 표현에 따르면, "여기서 전개되는 이론은 엄밀히 말해서 들뢰즈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고 느끼는 독자들은 그것을 '신조립체 이론', '조립체 이론 2.0' 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데란다가 독자적으로 솔직하게 실재론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탈근대적 철학을 "기본적으로 비실재론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적어도 "실재론"은 실재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어떤 자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를 애초에 분리한다. 실재에 대한 인간의 접근은 일종의 실재의 번역, 왜곡, 변형, 단순화 또는 절단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이것은 인간 현존을 필요로 하는 실재의 부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좋은 일례는 인간 사회 자체일 것인데, 왜냐하면 그가 적고 있듯이, "사회적 존재자들은 분명히 마음과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존재론에 대한 실재론적 접근 방식은 사회적 존재자들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관념들로부터 사회적 존재자들의 자율성을 단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의 심연까지 간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낳음으로써 그들을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우리 통제를 너머 그리고 흔히 우리 지식을 너머 야생 개처럼 세계에 놓아준다.

그런데 대부분 유형들의 실재론과 관련하여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는 실재론이 "소박하"다는 것이 아니다(어쨌든 냉소적 실재론은 더 좋을 것인가?). 오히려 문제는 실재론이 흔히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세계 상관물의 외부에 놓여 있는 물자체를 거부하든, 또는 그런 마음 밖의 실재들을 고집하든 간에, 이런 끝없는 논쟁은 인간과 세계라는 음울한 단일 쌍 주위를 공전한다. 그저 이 두 항 사이의 관계가 열린다면 존재론의 모든 비밀을 드러낼 마법의 열쇠인 것으로 간주된다. 데란다의 가장 중요한 미덕들 가운데 하나는 이런 폐쇄 공포증의 인간/세계 이중주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론은 그저 인간 마음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관찰할 인간들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여간 현실화로부터의 자율성을 의미한다. 시공간에서 특정한 점들을 관통하는 현실적인 것들의 현실적 궤적에 대조적인 것으로서 데란다는 특이성 또는 끌개에 관해 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존재자들의 현실적인 식별 가능한 거동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실재들에 의해 관장된다. 데란다의 표현에 따르면,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상태 공간에서] 궤적들은 항상 끌개를 향해 점근적으로 접근하는데, 즉 궤적들은 끌개에 무한히 가까이 접근하지만 결코 거기에 이르지 않는다. 이것은, 세계에서 객체들의 현실적 상태들을 나타내는 궤적들과 달리, 끌개들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데, 궤적의 어떤 점도 끌개 자체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특이성은 어떤 체계의 현실적 상태가 아니라, 장기적인 경향을 나타낼 뿐이다.

이런 "특이성들"은 세계의 인과적 역능에 관한 독점권을 부여받는 듯 보이는데, 데란다가 어떤 궤적의 현실적 거동은 "그것의 이전 상태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끌개 자체의 유형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데란다는 실재적 끌개들의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이런 지위를 서술하며,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들뢰즈를 인용한다.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적인 것에 대립할 뿐이다. 잠재적인 것은 잠재적인 한에서 어떤 충만한 실재성을 소유한다... 잠재적인 것은 심지어 실재적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마치 실재적 대상이 자신의 부분들 중의 하나를 잠재성 안에 갖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어떤 객관적 차원에 해당하는 그 잠재성 안에 잠겨 있는 것처럼 정의되어야 한다....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은 미분적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 안에, 또 이것들에 상응하는 독특한 점들 안에 있다. 구조는 잠재적인 것의 실재성이다. 구조를 형성하는 요소와 비율적 관계들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조심해야 한다. 먼저 그것들이 갖고 있지 않은 현실성을 부여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한편 그것들이 갖고 있는 실재성을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449-50]

데란다는 승인의 정신으로 이런 진술을 인용한다. 그런데 들뢰즈나 데란다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인기가 높은 존재론에 대한 다양한 신흥 접근 방식들과도 관련하여 어떤 긴장이 발생한다.

그 긴장은, 데란다가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이라는 2002년 책의 핵심 술어로 제시한 "다양체"라는 술어를 사용하는 데서 가장 잘 보인다. 대체로 기초를 놓은 후에 데란다는 다양체를 "자체의 묻어 들어가 있는 각 층위들을 규정하는 끌개들의 분포와 더불어 대칭을 깨는 이분화들에 의해 서로 관련된 벡터 장들의 중첩된 집합"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우리가 모든 어려운 술어를 명료하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양체에 관한 정의에서 나타나는 양가성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다양체는 묻어 들어가 있는 층위들의 끌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묻어 들어가 있는" 끌개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전체로서의 다양체는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양체가 그저 그것에 관한 우리의 인간적 자각을 넘어선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여간 어떤 현실화도 넘어선다. 다양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양체와 접촉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다양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브뤼노 라투르는 어떤 존재자는 그것이 "수정하거나, 변형하거나, 교란하거나 또는 만들어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데란다의 경우에 그런 결과들은 현실화에 불과할 것이다. 라투르가 궁극적인 관계들의 철학자―그에게 사물은 어떤 "우연적" 표현도 갖지 않으며 그것이 여기서 그리고 지금 나타내는 모든 특정한 특징들과 철저히 결부되어 있다―라면, 데란다는 거꾸로 선 라투르인데, 다양체는 비관계적인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어떤 관계들을 맺든 간에 여전히 굳세게 그대로 남게 된다. 이것은 이미 황량한 인간/세계 간극 또는 비간극(어느 것이든 거의 중요하지 않지만) 진보를 보여주는데, 데란다의 끌개들은 그것들을 목격하는 인간들이 주위에 전혀 없더라도 그것들의 현실화보다도 더 깊기 때문이다. 실재와 실재에 관한 지식 사이의 일반적인 구별짓기는 실재와 어느 형태의 현실태 사이의 더 흥미로운 간극으로 대체된다. 데란다는 이런 움직임을 보인 것에 대한 대부분의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들뢰즈에 관한 그의 2002년 책에서, 어느 정도 그것은 여전히 두 세계 이론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현실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은 두 개의 전적으로 상이한 규칙들의 집합에 의거하여 작동하는 두 가지 고정된 영역이다. 우리가 이미 그의 말을 들은 대로, 어떤 궤적의 현실적 거동은 "그것의 이전 상태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끌개 자체의 유형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사태는 모든 인과적 영향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명백하고 측정 가능한 현실적인 것들이 아니라 불가해한 특이성들의 영향을 받는다. 숨은 끌개들이 모든 인과적 작업을 수행한다. 명확한 사태들은 후속 사태들이나 서로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당연히 현실적 세계는 전적으로 이산적인 구역들로 쪼개지는데, 각 구역은 실재 자체가 전개되는 다양체, 벡터 장 그리고 끌개들의 더 깊은 층위를 덮는 하찮은 장식이다. 그런데 현실태의 다양한 부분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하는 반면에, 실재적 평면 또는 잠재적 평면의 경우에는 기묘하게도 정반대의 상황이 참이다. 데란다의 다양체, 즉 그가 부르는 대로 "구체적 보편자"는 명료하고 또렷하기보다는 "모호하고 또렷할"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자체의 모든 상이한 현실화로부터 그저 물러서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들은 함께 융합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 설명도 없이 지나가는 말로 데란다가 서술하듯이, "구체적 보편자들은 하나의 연속체로 함께 엮여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다양체들의 정체성을 흐릿하게 만들고, 다양체들이 영원한 원형들의 저장고와 매우 상이한 연속적인 내재적 공간을 형성하는 식별 불가능한 영역들을 만들어낸다."

그 다음에 우리는, 데란다의 현실적 세계는 어떤 식으로도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불모의 작은 덩어리들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에, 실재의 비현실적 영역은 관계들을 형성하는 데 아무 어려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하나의 연속체로 함께 스며든다. 충분히 참이게도, 데란다는 "다양체들은 서로 능동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역량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들의 "중립성 또는 불모성"을 언급한다. 그는 "매우 특별한 독립성을 [다양체들에게 보증하]"고 "어떤 독자적인 인과적 역능도 [보유하고 있지] 않는" 특이성들 사이에서 "공명과 반향들"을 만들어내는 준인과적 조작들에 호소한다. 그래도 데란다는 여전히 그것들이 하나의 연속체에 속한다고 말하며, 그리고 그것이 애초의 이질성으로부터 함께 엮여진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단일한 연속체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의 다양체들은 아무튼 수많은 상이한 끌개와 벡터 장들을 관련시키는 거대한 고안물이다. 게다가, 데란다는 "미분적 요소와 관계들"의 구조로서의 잠재태에 관한 들뢰즈의 정의를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데란다의 경우에, 다양체들은 인간의 모든 접속을 넘어서며, 그리고 사실상 인간의 자각과는 별개로 모든 현실화도 넘어선다. 어떤 의미에서 실재는 철저히 비관계적인데, 아무것도전적으로 현실화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또한 다양체들 자체는 끌개와 벡터 장 같은 상이한 실재적 성분들의 묻어 들어가 있는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게 된다. 제기되는 한 가지 명백한 의문은 왜 다양체를 구성하는 실재적 끌개들 사이의 관계들이 실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관계 또는 두 개의 현실적인 것들 사이의 관계보다 도대체 덜 문제적인가하는 것이다. 어떤 현실적 궤적도 기저에 놓여 있는 자체의 끌개들을 결코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어떤 실재적 다양체도 자체의 실재적 성분들을 결코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점도 옳아야 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은 관계들의 문제이며, 그리고 관계들은 자체의 항들을 소진할 수 없을 뿐이다.

달리 서술하면,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은 어떤 현실적 사태에서도 전적으로 전개되거나 고갈될 수 없다는 "수직적" 의미에서 관계들이 더 문제적이다. 준원인들에 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다양체들의 상정된 연속체는 잠재적 영역이 아니라 현실적 영역에서의 "수평적" 문제를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2002년의 데란다는 모든 것이 꼭대기에서는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지만, 바닥에서는 ("이질적"이지만) 비단처럼 매끈한 혼합물이 되는 세계를 제시한다. 그런데 2002년 책에서도 두 개의 상이한 규칙들의 집합을 갖춘 이런 두 층위 우주 모형은 세계는 자율적이고 창발적인 층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란다의 생생한 감각과 어긋난다. 그가 진술하듯이,

특히 개별적인 세포들과 그것들이 구성하는 개별적인 유기체들 사이에 두 층위를 이어주는 여러 중간 구조들(조직들, 기관들, 기관들의 계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금의 개별적 원자들과 견고한 재료의 덩어리 사이에도 미시 차원과 거시 차원을 이어 주는 중간 차원의 구조들이 존재한다(개별 원자들이 결정체들을 형성하고, 개별 결정체들이 작은 덩어리들을 형성하고, 개별적인 작은 덩어리들이 보다 더 큰 덩어리들을 형성하는 등). 서로 다른 크기를 가진 결정체들과 덩어리들은 특정한 인과적 과정들에 따라 개별화되며, 개별 표본 덩어리의 성질들은 이 중간 구조들 사이의 인과적 상호 작용에 의해 창발된다.[93]

이것은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A New Philosophy of Society)>>이라는 2006년 책에서 후속적으로 전개되는 데란다 사유의 측면이다.

잠재태와 현실태로 이루어진 이층 집에서 상이한 규모의 조립체들로 이루어진 다층 구조로의 암묵적인 움직임은 데란다의 영감에 있어서 들뢰즈에서 로이 바스카로의 이동을 시사하는데, 바스카는 인기 있는 비판적 실재론의 정초자이며, 데란다가 그의 영향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다. 바스카와 관련하여 데란다가 싫어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본질"이라는 관념에 대한 바스카의 신봉이다. 곧 논의될 이유들 때문에 데란다는 본질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그런데 다른 점들에서 데란다는 바스카에 특별히 가까운 듯 보인다. 특히 실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이층 구조를 상호연결된 형태들―각 형태는 자체 환경에서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다―의 끝없는 연쇄로 대체하려는 데란다의 경향은 철저히 바스카적인 듯 보인다.

<<과학에 관한 실재론적 이론(A Realist Theory of Science)>>이라는 바스카의 책은 지금은 먼 시기인 1975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의 많은 구절들은 여전히 놀랍도록 최근의 것인 듯 느껴진다. 예를 들면, "실재적 구조들은 사건들의 현실적 패턴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리고 흔히 그것들과 어긋난다"는 바스카의 주장에는 이미 들뢰즈적인 풍미가 있다. 데란다는 "현실적인 것(경험의 확정된 대상으로 식별되는)만이 실재적이라는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현실주의(actualism)"에 대한 바스카의 비판에 공개적으로 편을 드는데, 현실주의에 대한 가장 재능 있는 최근의 옹호자는 확실히 브뤼노 라투르이다. 더 일반적으로 데란다는, "객체가 [인간들] 및 [인간들에게] 그것에 대한 접근권을 부여하는 조건과 전적으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실재적 구조 또는 메커니즘이 되는 [실재의] 자동적 차원"이라는 바스카의 개념을 승인할 것이다. 또한 바스카와 데란다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접근을 특별히 중요한 존재론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견해가 일치한다. 바스카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은 현실적 사건들과 독립적이지만, 이런 현실적 사건들도 그것들이 인간들에 의해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것과 별개로 현실적이다. 실재적 사물들이 모든 현실화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경험 없는 사건들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평탄한 존재론(flat ontology)"이라는 술어를 둘러싸고 그들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듯 보일지도 모르는데, 바스카는 평탄성을 비난하고 데란다는 그것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자세히 검토하면, 그들은 그 술어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가치 평가를 완전히 설명하는 대립적인 의미들로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바스카의 경우에 평탄한 존재론은 실재 전부를 인간 지각에 주어지는 경험적 소여의 단일한 평면으로 압축하는 것이고, 그래서 경멸할 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데란다의 경우에 평탄한 존재론은 셀 수 없이 많은 더 크고 더 작은 구조들의 층위들이 동등한 존재론적 존엄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지지할 만하다. 결국, 이 두 저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보다 더 깊은 실재적 차원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실재적인 것들"이 창발 과정을 통해서 창조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바스카는 데란다에 못지 않게 환원주의를 우호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바스카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중간 차원들의 영역으로 [윌프리드 셀라스에 의해] 생생하게 서술된 것에서 일상적 객체들의 특성들이 매우 작은(또는 매우 큰) 것들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일상적 객체들을 그것들을 설명하는 존재자들보다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가 원자 구조에 의거하여 아연과 황산의 반응을 설명할 때 아연과 황산이 더 이상 어떤 식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지는 않는다.

이 구절은 존재자들을 그것들의 더 작은 성분들로 환원시키거나 아니면 그것들의 더 넓은 사회적 맥락으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미시적 환원주의와 거시적 환원주의 둘 다에 대한 데란다의 공격의 전조이다. 그런 시도들에 맞서서 바스카는 이렇게 역설한다. "흑체들이 실재적이라면 물리학자들도 실재적이고, 하전 입자들이 실재적이라면 뇌우도 실재적이다. 요약하면, 창발은 우리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특징이고, 그래서 환원 불가능한 존재론적 특질을 갖는다." 더 작은 층위들을 더 큰 층위들로 구성하는 과정은 "대응 규칙들이 아니라 인과적 연결 관계들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아연"은 사실상 쿼크와 전자들 또는 미소한 끈들의 작은 집단인 것을 가리키는 느슨한 인간의 별칭이 아니라, 아연이라고 불리는 새롭게 창발된 존엄한 자율적 실재를 가리킨다. 나아가서 바스카는 우리는 부분이 없는 가장 작은 가능한 것들의 어떤 종점에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하는데, 그는 "세계의 층서가 정말로 궁극적인 존재자들을.... 갖는다"는 것을 "뒷받침할 아무 이유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데란다의 대부분의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스카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상승하고 하강하는 화합물들의 연쇄로서의 세계에 관한 전망인데, 여기서 각 화합물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조각들로부터 자율적이고 그것이 얽혀 있는 더 넓은 맥락과도 독립적이다. 연필은 원자들로 환원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생산하는 사회  그것이 생성하는 광범위한 연필-효과들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기능주의(functionalism)도 환원주의만큼이나 창발에 크게 위험한 것으로 판명된다. 철학은 "중간 차원들의 생생한 영역"을 무시할 수 없는데, 그것이 객체 또는 다양체들의 정체이기 때문이다. 2006년의 데란다와 바스카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세계에 대한 이층 모형이라기보다는 다층 모형이다. 바스카의 우주는 전적으로 양자화되어 있다. 그것은 띠엄띠엄한 덩어리들로 쪼개져 있는데, 각 덩어리는 아래로부터의 실재적인 인과적 작업에 의해 생성된다. 달리 서술하면, 2002년에 데란다는 다양체들의 연속체, 즉 실재적인 모든 것이 똑같이 공유하는 단일한 "실재적" 층위를 단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스카의 경우에 그리고 2006년 데란다의 경우에 각각의 창발적 존재자는 독자적인 규모에서 새로운 "실재적"인 것을 만들어내고, 이런 실재적인 것들 각각은 한 연속체에서 여타의 것들과 부분적으로 공유되기보다는 해당되는 존재자에만 속하게 된다. 바스카의 "자동적" 실재는 그의 "타동적(transitive)" 현실태와 꼭 마찬가지로 덩어리 형태이거나 양자화되어 있다. 끌개들은 현실적 막대 및 돌과 꼭 마찬가지로 서로로부터 해석학적으로 밀봉되어 있다. "신은 스펙트럼을 만들고 인간은 칸막이를 만든다"는 앤터니 플루(Antony Flew)의 개탄스러운 주장을 비난하면서 바스카가 화려하게 서술하듯이,

나는 그런 주장에 대한 가능한 보증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 문자 그대로 간주하면, 그것은 염색체 집계는 어떤 개체의 생물학적 성을 결정하는 것과 무관하고, 살아 있는 것들의 집합은 죽은 것들의 집합으로부터 관행적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고, 화학적 원소들은 자체 특성들에 있어서 연속적인 점층화를 드러내며, 튤립은 진달래속 관목에 융합되고 단단한 객체들은 텅빈 공간으로 기체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2006년에 데란다가 다양체라기보다는 조립체에 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이것은 사소한 용어 변화에 불과한 듯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서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다양체들의 연속체는 모든 모양과 크기의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적 덩어리들의 바스카적 세계를 위해 사라진다. 이것은 수많은 철학적 보상을 낳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도 초래한다.

2. 조립체

우리는 데란다가 설명의 "거시적" 층위와 "미시적" 층위 사이의 어떤 절대적인 구별짓기도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존재자는 자체의 더 작은 성분들과 비교하면 항상 "거시적"이지만, 그것이 참여할 더 큰 조립체와 비교하면 항상 "미시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생생한 중간 영역들인데,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는 상승하고 하강하는 조립체들의 연쇄 속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 조립체는 "이음새가 없는 전체도....아니"고, "자체의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특성들이 없는.... 단순한 집합체"도 아니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데란다의 존재론이 "평탄하"다면, 이것은 모든 것이 연속체를 이루는 단일한 내재적 평면의 평탄성이 아니다. 몇 가지 점에서 그것은 모든 작은 조립체와 거대한 조립체들을 동일한 발판 위에 놓는 것을 통해서 라투르(그 외에 데란다가 거의 공유하는 것이 없는 사상가)의 평탄한 존재론과 더 유사하다. 데란다가 어떤 피안의 차원을 위해 내재성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다. 데란다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세속적인 사상가이다. 그러나 바스카와 꼭 마찬가지로 데란다는 대체로 유해한 "심층의 숨어 있는" 것의 철학자이다. 조립체는 초사실적인 것이거나, 또는 새로운 술어를 사용하면, 조립체는 초현실적인 것이다. 조립체는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다. 멈추어 있는 객체도 끌개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기보다는 여전히 끌개 주변에서 미약하게 요동친다는 데란다의 견해를 감안하면, 사실상 조립체는 부분적으로도 현실화될 수 없다. 데란다와 바스카의 경우에 심층의 숨어 있는 것은 우리 우주의 모든 층위에 걸쳐서 점재되어 있고, 그래서 세계의 바닥에 있는 어떤 축축한 하이데거적 샘에서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전적으로 현실화되어 있고 다른 현실태들에 대해서 완전히 무력한 세계의 접근 가능한 층위와 현실화되지 않은 연속체의 더 심층적인 층위 대신에 우리는 세계의 어느 층위에서나 이중성을 찾아낸다. 우리는 여타의 존재자들로부터 단절된, 완전히 확정된 "현실적" 개를 더 이상 갖지 못하는데, 그것에게는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개체화될 뿐인 전(前)개체적인 전(前)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것은 개별적 객체들은 항상 현실적인 것이고, 실재계는 전(前)개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존재자들은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를 가지며, 그리고 그것은 모든 자율적 존재자들에 선행하는 연속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자에만 속한다.

"조립체"라는 술어의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일방적인지 기억해야 한다. 조립체라는 개념은 구식의 자연적인 통일된 실체들을 다룰 때 유용한 논쟁적 가치를 갖는다. 존재자들은 통일된 자연적 종류로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작은 하위성분들의 강력한 부대들로 구성된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화석화된 고대의 단위체들에 반대할 수 있다. 이것은 이야기의 한 면이며, 그리고 좋은 면이다. 그런데 조립체는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자. 기계나 인간 사회는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을 넘어설 뿐 아니라, 그것의 어떤 현실화도 넘어서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 전체 속에서 그것이 미칠 수도 있는 어떤 특수한 영향들과의 독립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자체가 세계의 다른 부분들에 미치는 어떤 관계적 영향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 서술한 양가성이다. 조립체는 관계를 맺는 성분들로부터 형성될지라도, 그것은 그런 성분들을 넘어서는 창발적인 것이다. 그리고 자체의 부분들의 실재를 넘어서는 것과 더불어, 또한 그것은 자체가 미칠 수도 있는 어떤 외부 영향들보다도 더 심층적인 것이며, 자체의 실재를 여전히 유지하면서 도대체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선거 연합이 그것들의 조작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분명하지 않다. 무능한 전략가들이 그저 이용하지 않았던 다수의 실재적인 "메케인 승리 연합"이 존재했었을 것이다. 비슷한 형식으로, 세계사적인 천재의 어떤 새로운 음악 양식을 오늘밤 스타방에르(Stavanger) 해변에서 들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레코드 회사, 저널리스트 또는 심지어 음악가들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데란다의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데, 조립체가 되는 것과 더불어 존재자는 창발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조립체"라는 낱말의 다원주의적 음조들에 흡족해 할 뿐이라면, 실재적 통일체들의 존재를 소박하게 믿고 있는 반동적인 멍청이들을 조소하면서 모든 통일체들을 무리, 집합체 또는 다발들로 분해함으로써 우리의 첨단의 자격을 입증한다면, 우리는 데란다의 요점의 절반을 놓치게 된다. 존재자는 창발하기 때문이다. 존재자는 모든 무리와 집합체들을 넘어서는 것이고, 관습적인 결합의 습관을 통해서 접착된 특성들의 다발이 전혀 아니다. 존재자 또는 객체(나는 이런 술어들을 창발적 조립체를 가리키는 데 사용할 것이다)는 조립체들에 의해 생성되어 새로운 조립체로 진입하는 사회적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또한 존재자는 이런 사회들로부터 단절되어 있다. 존재자는 그것이 결코 전적으로 현실화되지 않는 한에 있어서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고, 그런 부분들을 넘어서 새로운 실재를 구성함으로써 자체의 조각들로부터 물러서 있다. 존재자는 자율적이다. 컴퓨터 과학의 용어를 사용하면, 존재자는 "캡슐화되어(encapsulated)" 있다. 전자의 사례에서는 존재자가 기능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후자의 사례에서는 존재자가 조각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점을 더 밀고 가려면, 우리는 창발에 대한 데란다 자신의 기준을 살펴보아야 한다. 데란다는 그 기준의 주창자인 척 하지 않지만, 그는 일상적인 것보다 더 흥미로운 목록을 제시한다. 그는 이런 특징들을 실제 도표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대충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의 34-40쪽에 걸쳐 전개된다.

*기준 1: 조립체는 자체 부분들에 소급적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이 점에 대한 영예를 바스카에게 귀속시킨다. 데란다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전체는 자체 부분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에서 창발하게 되지만, 일단 그것이 생성되면 그것은 그런 부분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가 자체의 구성 부분들에게 제약과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한정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수행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시적-미시적 메커니즘들을.... 밝힐 필요가 있다."

*기준 2: 조립체는 "환원적 인과관계"에 의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 조립체들의 이 두 번째 특징은, 간략히 살펴볼 것처럼, 데란다의 사유에 어떤 긴장들을 초래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기본 착상은, 동일한 창발적 조립체가 꽤 많은 상이한 과정들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의 역사의 정확한 세부는 무관하게 만들어 버린다. 예를 들면, 데란다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의 미시적 원인들이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었을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논의들의] 미시적 세부에 대한 설명이 불필요하다면 전체 [대규모의] 공동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창발적 연합을 설명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기준 3: 인과적 역능. 명백히 창발적 조립체는 자체의 부분들 외의 다른 존재자들에게도 인과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데란다가 말하듯이, "개인들보다 더 거대한 사회적 조립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독자적인 규모에서 다른 조립체들에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신체적 부분들 가운데 일부를 사용해야 하는 사실이.... 그것의 해부학적 성분들로부터의 독자적인 상대적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적으로도 그리고 외부적으로도 자체의 인과적 역량들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런 [더 거대한] 조립체가 사람들을 상호작용의 매체로서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기준 4: 새로운 부분들을 생성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 데란다는 이렇게 강조한다. "어떤 부분들은 전체에 앞서 존재해야 하지만, 다른 부분들은 이미 현존하는 전체의 유지 과정들에 의해 생성될 수도 있다. 도시는 인간들 사이의 연결망과 조직들의 개체군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편으로, 이런 개체군들이 도시의 창발에 앞서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사실상 대부분의 연결망과 조직들은 이미 현존하는 도시의 부분들로서 생성된다."

우리는 다른 기준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현존하는 목록은 조립체와 더 거대한 세계 사이라기보다는 조립체와 그것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에 너무 집중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목록이 조립체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조립체가 행하는 것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조립체가 "수정하거나, 변형하거나, 교란하거나 또는 만들어내는" 것, 즉 엄밀히 데란다적인 실재론적 기준이라기보다는 실재에 대한 실용주의적 기준을 위한 라투르의 공식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우리가 이미 이해했듯이, 어떤 존재자도 결코 자체의 끌림 영역으로 진입하지 않게 되는 끌개들의 경우에서처럼, 존재자들의 현실화되지 않은 자율성은 결코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 실재적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앞에 나열된 네 가지 항목들 가운데 세 가지는 모두 조립체 자체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조립체의 환경적 증상이다. 존재자는 자체의 부분들에 미치는 소급적 영향들, 새로운 부분들의 생산, 또는 같은 규모의 존재자들에 미치는 인과적 영향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효과들의 다발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택은 기저에 놓여 있는 주택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일종의 "만성 주택 증후군"으로 변환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화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데란다의 애호를 감안하면, 이것은 데란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라투르적인 것이다. 존재자의 증상들이라기보다는 존재자 자체에 관여하는, 네 가지 기준들 가운데 유일한 한 가지는 환원적 인과관계이다. 어떤 주어진 조립체가 다양한 상이한 원인들을 가졌었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자체의 유전적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립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그것은 뱀-조립체를 의자-특이체보다 더 위험하게 만들거나, 또는 쓰여지지 않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상업인들의 실패한 기획들보다 더 파괴적인 손실로 만드는 어떤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사물의 성질들은 그것들을 초래하는 부분을 넘어선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중요하게도, 그것들은 그것들의 어떤 현실화보다 더 심층적이다. 사물이 성질들을 갖는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환경에 의해 어떤 식으로 감지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채비를 갖추고 있을 때에만 환경이 그것들을 감지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사물이 자체이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듯 보이는 고유한 성질들을 갖추고 있다면, 이것은 본질 같은 놀라운 운명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데란다는 아무튼 이 술어를 회피한다. 왜?

3. 본질

데란다는 플라톤적 판본의 본질을 논의하는 데 거의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데, 그는 명백히 그것을 진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상황이 다른데, 유, 종 그리고 개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륜 모형은 일치단결된 공격을 받는다. 2002년 책에서 데란다가 잠재적인 것들은 전(前)개체적 끌개와 특이성들에 유보하면서 개별적 존재자들을 오로지 현실적 권역에만 할당하는 듯 보이는 순간들이 있더라도, 사 년 후에 이것은 분명히 맞지 않다. 데란다가 결론을 내리듯이, "유, 종 그리고 개체가 별개의 존재론적 범주들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학적 본질주의와 달리 조립체들의 존재론은 평탄한데, 그것은 상이한 규모의 별개의 특이체(또는 개별체)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사회적 과정들에 관여하는 유일한 개별적 존재자들이 아니라, 개별적 공동체, 개별적 조직, 개별적 도시 그리고 개별덕 국민국가들도 관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별적 존재자들은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규모의 어떤 조립체도 실재적 특이체이고,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들의 어떤 집합에서의 과대결정보다 더 심층적이다. 이집트인들만이 사회적 행위자들인 것이 아니라, 자말렉(Zamalek) 지역, 아메리카 대학, 카이로 자체 그리고 이집트로서 이집트도 사회적 행위자들이다. 모두가 개별체들이다.

평탄한 존재론에 이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술어(개체, 종 그리고 유) 모두가 별개의 특이체들로 붕괴되어야 한다. 개별체들의 경우에 데란다는 개별체들을 특이체들로 만듦으로서 이것을 쉽게 행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명백히 자체의 개체성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종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종을 제거하고 다윈풍으로 고립된 재생산 풀을 우연히 점유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개체들로 대체함으로서 그것을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유의 경우에는 어떤가?

여기서 상황은 달라진다. 종은 수많은 개체들로 이루어진 환영적 구성물로 다소간 일축되는 반면에, 데란다의 경우에 유는 순전히 추상적이거나 위상학적인 술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종이 별개의 특이체들로 교체될 수 있다면, 의문은 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이다. 대답은, 생물학적 분류의 최상위 층위들, 즉 계(kingdom)라는 층위.... 또는 심지어 문(phylum)들―인간들이 척추 동물로서 포함되는 '원삭 동물' 문도 비롯한―도 다르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은 모든 척추 동물에 공통적인 추상적 체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런 것으로서.... 체제(body-plan)의 각 현실화는 완전히 상이한 메트릭(metric) 관계들의 집합을 나타낼 것이다.

달리 서술하면, "체제는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규정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위상학적 구조를 갖는다." 더 친숙한 영토로 복귀하면서 데란다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가능성 공간들에 관한 형식적 연구는 가능성 공간을 "위상 공간(phase space)"으로 부르는 물리학과 화학에서 더 선진적이다. 그것들의 구조는 구체적인 물리적 또는 화학적 동역학 체계들의 '자유도' 또는 관련된 변화 방식들을 나타내는 차원들과....더불어 "끌개"라고 불리는 위상학적 불변자들에 의해 주어진다. 들뢰즈적 술어를 채용하면서 데란다는 "[어떤] 체제와 동등하거나....조립체들과 관련된 가능한 것들의 공간을 구성할 보편적 특이체들의 집합, 즉 다이아그램"도 언급한다. 생물학을 벗어나서, 데란다는 사회적 조직의 정당성의 이상적 유형들에 관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도식에서 그런 다이아그램들의 일례를 찾아낸다. 척추 동물이 다양한 상이한 형태들―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전적으로 기괴하다―로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당화의 신성한 유형, 카리스마적 유형 그리고 합리적/관료제적 유형이 수많은 상이한 문화적 및 역사적 환경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2002년에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제시된 그런 종류의 이층 체계로 다시 이끌게 된다. 여기서 데란다는 개와 같은 개별적 특이체들과 척추 동물 같은 보편적 특이체들 사이의 절대적 대립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술하듯이, "우리는.... 위상학적 불변자들을 보편적 특이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많은 상이한 체계들이 공유하는 특이하거나 특별한 위상학적 특징들이기 떄문이다." 그리고 게다가, "개별적 특이체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을 대체하는 한편으로, 이런 보편적 특이체들의 분포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를 대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연결은 논리적 분화 과정이 아니라, 역사적 분화 과정, 즉 추상적 체제를 실현하는 모든 상이한 척추 동물 종들의 발산적 진화을 포함하는 과정일 것이다. 문 층위를 종 층위와 연결하는 분류학적 범주들은 역사적으로 분화된 체제의 연쇄적인 발산점들을 나타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란다의 전망의 핵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나는 세 가지 별개의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첫째, 개별적 특이체와 보편적 특이체 사이의 어떤 구별도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 구별짓기가 전혀 필요없다면, 대단히 상이한 두 개의 유형이 아니라, 상이한 규모들의 특이체들이 남게 될 뿐일 것이다. 둘째, 개별적 특이체들의 "본질"을 역동적인 역사적-유전적 과정들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조립체 이론 자체의 원리들 떄문에 실패해야 한다. 그리고 셋째, 보편적 특이체들을 한 연속체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도 실패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란다의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어떤 핵심적인 점들에서 꽤 다른 철학, 즉 자체의 역사로부터 단절되고 그와 마찬가지로 서로로부터 단절된 개체들의 존재론이다.

첫째, 보편적 특이체와 개별적 특이체 사이의 상정된 차이를 고찰하자. 거듭해서 이해했듯이, 두 특이체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을 결코 완전히 소진할 수 없는 다른 것들과의 모든 관계 및  모든 구체적 현실화를 넘어서는 풍요성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언제나 개는 뛰고 있거나 먹고 있는 개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활동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 개를 완전히 소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투르 같은 저자의 경우에 언제나 개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 이루어지는 그것의 활동들로 완전히 규정되고, 그래서 그것의 덧없는 각각의 화신들 사이에 단단한 연결을 만들어내는 어떤 외부 관찰자에 의해 상정되는 "동일한" 개로 확립되어야 한다. 그런데, "척추 동물"이 개보다 더 보편적인 것으로 상정되는 까닭은 오로지 그것이 토끼, 인간 그리고 멸종된 안킬로사우루스에 공통적인 추상적 체제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문제는, 이것이 "거시"와 "미시" 사이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고, 이 두 술어는 "두 개의 고정된 규모의 층위들과 연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어진 공간적 규모에서 구체적인 부분들과 결과적인 창발적 전체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데란다의 단언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보편적 특이체들은 비공간적인 것이고, 그래서 데란다의 미시/거시 교환 가능성의 공리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빠져 나갈 수는 없다.

요점은 이렇다. 개는 "척추 동물"보다 덜 보편적이고 더 구체적일 수 있지만, "척추 동물" 역시 "동물"보다 덜 보편적이고 더 구체적이다. 더 일반적으로, 데란다의 존재론은 개별적 개들을 위한 여지와 보편적 척추 동물을 위한 여지도 허용하지만, 자체의 모든 개별적 구성원들과 별개로 개라는 실재적 종 같은 것을 위한 여지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다. "개"가 셀 수 없이 많은 개별적 개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척추 동물이 개별적 척추 동물들로 구성되지 말아야 하는 명백한 이유는 전혀 없다. 요약하면, 개별자들로 간주되는 실재의 특정한 영역들과 보편자들로 간주되는 다른 특정한 영역들을 찾아내는 것은 나쁜 착상이다. 조립체 이론 자체가 시사하듯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은 개별적 존재자들뿐이다. 달리고 있는 개의 배후에는 명백히 특정한 달리기 행위보다 더 심층적인 과잉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그 개 자체가 존재한다. 그 개의 배후에는 척추 동물  속이 아니라 그 개의 성분들이 존재하는데, 성분들 각각은 그 개를 구성하는 자체의 현실화보다 더 심층적이고 더 풍요롭다. 그리고 현대 물리학의 미시적 성분들로 알려져 있는 가장 작은 것에서도 명백한 종점을 갖지 않는, 현실화되지 않은 개별자들의 하강하는 연쇄 속에서, 이런 성분들은 결국 그것들 나름의 성분들의 과잉으로 가득차 있다. "미시적" 층위와 "거시적" 층위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둘째, 개별자의 본질을 그것의 역동적인 유전적 역사로 대체하려는 데란다의 시도는 환원적 인과관계의 원리에 의해 논박당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 이제는 유명한 일례에서 데란다는 우리가 "그것의 자연종들을 물화하기를 거부하면서" 원소들의 주기율표를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주어진 종의 원자들은 개별적 항성들 내부에서 일어나는 [핵합성의] 되풀이되는 과정들에 의해 산출되는 개별적 존재자들로 간주될 것이다. 유기체와 달리 이런 원자들은 훨씬 작은 변이를 나타낼지라도, 그것들이 구체적인 과정으로 생성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들 각각에 역사를 부여한다." 그런데 개별적 원자들의 전기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어떤 전기도 그것의 주체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지 못하는데, 그저 출판사의 예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데란다 자신이 강조하듯이, 대체로 정보는 전적으로 환원적인 것이다. 어떤 선거에서 인구학적 인자들에 관해 말할 때, 대부분의 개인적 일화들은 무관한데, 상이한 일화적 사고들이 동일한 결과를 낳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 기어와 레버들이 교체되더라도 기계는 여전히 동일하며, 그리고 인간 육체와 그것의 구성 원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환원적 인과관계는, 조립체는 어느 정도 자율적이고, 그것을 생성시킨 역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역사적 세부 사항들만이 여전히 그 원자와 관련이 있으며, 그리고 이것들도 역사로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진정한 궤적을 원자 속에 남겨 놓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수소가 저런 종류의 항성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항성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의 현재 구성과 무관할 것인데, 대부분의 역사는 환원적이며, 그리고 실재는 그것이 오늘의 위치에 이르게 된 대부분의 길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방해받는다. 그러므로 존재자는 항상 그것의 역동적인 역사적 창세기로부터 단절되어 어떤 특수한 현재에 결정화하는데,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완전한 현실화로부터 물러서 있을지라도 말이다.

말이 난 김에, 나는 베르그송이나 데란다 같은 인물들을 라투르와 화이트헤드 같은 전적으로 다른 인물들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는 주장을 개진하고 싶다. 때때로 "과정 철학"이라는 술어는 거의 구식의 실체를 거부하는 것으로써만 결합되는 모든 인물들을 포함하기 위해 느슨하게 사용된다. 이 두 가지 전통에서 실체는 정반대의 이유 때문에 거부당한다는 점을 인식하자. 역동적 생성 학파의 경우에 실체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의 과도한 견고성과 고정성이다. 데란다 같은 사람의 경우에 실체는 항상 너무 특정적이다. 그런데 라투르 같은 관계론적 철학자의 경우에 실체와 관련된 문제는 그것의 불충분한 견고성이다. 실체는 모든 특정한 결정들 배후에 숨어서 변화하는 사태들에 걸쳐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데, 사실상 그것은 그것들에 의해 철저히 규정되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베르그송이 어떤 별개의 순간도 거부한다면, 라투르와 화이트헤드의 철저히 관계론적인 사유는 비록 이 기회가 즉시 사라져야 하더라도 존재자들이 한 순간에 전적으로 표명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연속체 속에서 어떤 종류의 특이체들도 존재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야 한다. 명백한 이유들 때문에 데란다는 고정된 이산적인 본질의 덩어리들보다 연속성이 더 호소력이 있다고 깨닫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추상적인 일반적 존재자들이 서로 날카롭게 구별된 채로 나란히 공존하게 되는 본질들과 달리, 구체적인 보편자들은 한 연속체 속에서 함께 엮여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실재적인 것은 결코 완전히 현실화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수용하면, 어떤 실재적 연속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어떤 현실화가 없는 실재적인 것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더라도(그리고 나는 이것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데란다의 경우에 실재적인 것들의 요점은 실재론, 즉 어떤 현실화나 심지어 현실화들의 총합도 넘어서는 것의 과잉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적 세계뿐 아니라 실재적 세계도 바스카가 상상한 바로 그 방식으로 양자화되어 있다. 우리가 "신은 칸막이를 창조했고, 인간들은 스펙트럼을 발명했다"고 말한다면, 이런 전도된 상투적 표현은 엄밀히 참인 것은 아니지만, 플루가 표명한 애초의 진부한 말보다 진리에 훨씬 더 가깝다. 베르그송이 우주 자체는 역동적인 운동이며 인간들이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쪼갠다는 모형으로 유명하다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데란다는 뒤집혀진 베르그송의 역할을 향해 경사된다. 실재적 세계는 자체적으로 덩어리들로 가득차 있어야 하며, 그리고 현실화된 사태들의 영역은 연속체가 발견되는 곳이어야 한다. 조립체들은 각각 본질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자체의 역동적-유전적 역사뿐 아니라 인근의 존재자들로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한 가지 명백한 문제를 초래한다. 실재적 개별자들이 자체의 철처히 비관계적인 또는 초관계적인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면, 그것들은 도대체 무언가 다른 것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인과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두 개의 상이한 종류의 철학들에 의해 일찌기 제기되었다. 첫째, 그 문제는 신에게 창조의 권능뿐 아니라 인과적 관계의 권능도 유보하는 이슬람 및 프랑스 기회원인론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둘째, 그 문제는 위대한 프랑스 기회원인론자 말브랑슈(Malebranche)의 대단한 찬양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흄에 의해 제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기회원인론에 대한 흄의 접근 방식은 전도된 것에 불과한데, 오직 마음만이 습관을 통해서 사물들을 연결하도록 인간의 마음이 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두 경우에 모두 특권을 부여받은 한 존재자는 급진적 실재론이 관계성에 가하는 금제를 넘어서는 마법적인 초월이 가능하게 된다. 기회원인론은 자율적인 실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래서 그것들을 관련짓는 데 문제가 있는 반면에, 흄은 그것들의 관계들로 시작하고, 그래서 마음 속에서 맺어지는 마음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들을 넘어서는 그것들의 자율적인 삶을 확립할 길을 전혀 찾아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흄도 기회원인론자들도 다른 어느 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떤 마법적인 초존재자(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든 멘스 엑스 마키나이든 간에)에 대한 약간의 위선적인 호소를 통해서 관계의 문제를 해결한다. 데란다적인 종류의 실재론에서는 두 선택지 모두 작동할 수 없는데, 데란다의 경우에 마음은 상호작용에 있어서 필요한 성분이 결코 아니며, 그의 철학에서 신은 결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란다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자체의 비관계적 특질에도 불구하고 존재자들이 아무튼 상호작용할 채비를 갖추고 있는 일종의 "국소적 기회원인론(local occasionalism)"이다.

4. 인과관계

<<사회에 관한 새로운 철학>>이라는 2006년 책에서 데란다는 한편으로 선형적 인과관계와 다른 한편으로 촉매를 구별짓는다. 선형적 인과관계는 그것이 시사하는 바로 그것을 의미하는데, 동일한 원인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촉매는 어떤 작용들을 자동적으로 수반하기보다는 그것들을 고무할 뿐이다. 예를 들면, 담배는 폐암을 촉진할 뿐인데, 모든 흡연자들이 암 환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모든 암 환자들이 흡연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데란다는, 촉매는 일반적으로 표현적인 것인 반면에 선형적 인과관계는 일반적으로물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조는 흥미롭다. 데란다의 경우에 "물질적" 영역은 일반적으로 도시에 대한 가스선 및 하수로와 같은 사물의 기능적 하부구조를 가리킨다. 세계의 "표현적" 영역은 사물의 비기능적인 과잉의 표면을 가리키는데, 예를 들면,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있다. 얼굴이 기질을 표명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스카이라인은 도시를 자랑스럽게 표명하는데, 둘 다 상처받은 사람 또는 도시의 근본적인 기능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채 변경되거나 훼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데란다의 경우에 존재자들이 원인이라기보다는 촉매라면, 이것은 모든 상황에서 다수의 인과적 인자들을 고려하는 바스카의 견해(궁극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에서 비롯된)와 비슷하다. 예를 들면, 폭발은 불꽃을 직접적인 원인으로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인과적 인자들은 그것이 점화시키는 화약, 창고를 화재에 취약하게 만든 이례적으로 건조한 10월 그리고 방화범이 잠입하게 내버려 둔 야간 경비원의 만취 상태를 포함한다. 무엇이든 어떤 사건의 원인에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관여하는데, 이것은 그것들을 데란다적인 촉매와 유사하게 만든다. 바스카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론을 전복시키기에 충분한데,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한 가지 원인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데란다는 촉매가 선형적 인과관계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원인들의 다수성은 인과적 조건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결코 그것은 각 개별적 원인의 상대적 무능이 더해져서 결국 비결정성 또는 자유 의지가 된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담배가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실제 문제를 교묘히 피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동일한 담배 더하기 동일한 유전학 더하기 동일한 섭생 더하기 동일한 환경 등이 언제나 동일한 결과를 낳을 것인지 여부이다. 이런 의미에서 데란다의 촉매는 선형적 인과관계의 기계적 본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한 의미에서 데란다는 선형적 인과관계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데, 그는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이 조립체의 외부적 표현 효과와 별개로 조립체의 고유한 실재를 가리킨다고 간주하면, 어떤 의미에서 물질적인 것은 어떤 현실화로부터도, 그리고 사실상 어떤 관계로부터도 물러서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과적 관계는 표현적 층위, 말하자면, 조립체의 특성들이 은폐되고 현실화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고 완전히 현실화되는 비본질적 층위에서 일어나야 하는 듯 보인다. 이것은 인과적 관계들에 관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 지지물을 찾아낸다. 즉, 사물의 본질적 특징들은 그것의 우연적 특징들에 의해 파괴된다. 링컨의 위대함은 그 사람의 피부를 관통하는 작은 납 조각에 의해 파괴된다. 피카소가 그린 도라 마르의 초상화는 언젠가 깨진 한 잔의 오렌지 쥬스에 의해 훼손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미학의 뒷받침도 받는데, 여기서 비유들은 그것들이 비본질적 특징들을 통해서 두 존재자를 연결할 때 가장 잘 작동한다. "펜은 연필 같다"라는 표현은 어떤 비유적 효과도 없는 반면에 "펜은 독사 같다"라는 표현은 그것들의 모호하게 유사한 물리적 형태의 순전히 주변적인 연결에도 불구하고 비유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윤리학에서, 폭력은 자신들 속의 약한 것을 통해서 누군가의 강한 것을 소유하려는 시도이다(또 다시 링컨 암살)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발언 속에서 지지물을 찾아낸다.

요약하면, 세계의 표현적 표면 또는 우연한 사건들의 영역이 관계들이 맺어질 수 있는 유일한 현장이다. 들뢰즈는 표현이 인과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강조했었고, 데란다는 이미 이 점을 찬양했었지만, 표현적 영역만이 인과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감지하지는 못한 채 그랬었다. 그럼에도 표현은 표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표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화되지 않은 실재적인 세계-심층이 현실화된 세계-표면으로 뒤덮이는 낡은 이층 모형을 신봉하는 것이다. 이것 대신에 데란다의 모형은 상승하고 하강하는 연쇄로 연결된 일련의 조립체들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두 개의 조립체 사이의 어떤 관계도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더 큰 조립체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조립체들은 한 연속체로 스며들기보다는 덩어리들로 양자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내부들은 자동적으로 다른 조립체들의 내부들로부터 단절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처음에 느껴질 것보다 덜 기묘하다. 유사한 주장이 <<논리적 탐구>>에서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지향성은 하나이자 둘이라고 주장했을 때 이미 제기되었다. 누군가가 나무를 지각하면, 인식자와 나무 사이의 관계는 사실상 새로운 조립체이다. 그것들은 새로운 존재자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접촉하게 되고, 이 존재자의 내부가 실재적 인식자가 지각되는 은폐된 실재적 객체의 현실화된 유령 또는 환영을 대면하는 장소이다. 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을 인식하자. 객체가 나를 대면하면, 그 실재적 객체는 유사하지만 반전된 객체의 내부에서 일종의 유령 같은 나의 영상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범심론이 명백한 결과이다.

그런데 또한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관계들이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새로운 조립체의 생성을 항상 수반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다. 두 대의 제트기가 공중에서 충돌하여 불타면서 멀어진다면, 일반적으로 우리는 두 개의 독립적인 존재자들에 미치는 정성적인 상호 영향들에 의거하여 이 상황에 관해 생각한다. 데란다의 견지에서 더 나은 분석은, 두 대의 제트기가 잠깐 동안 새로운 존재자를 형성했다는 것일 것인데, 그 새로운 존재자는 "자체의 부분들에 미치는 소급적 영향"으로서 우리가 이미 만난 조립체의 역능을 통해서 두 대의 제트기를 파괴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그 제트기들은 다시 별개의 존재자들로 분해되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화염에 휩싸였다. 다시 말해서, 인과관계는 선재하는 객체들에 미치는 새로운 영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객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 종말을 향해 선회하는 두 대의 불타는 제트기는 인과관계의 육화들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증상들이다.

그런데 이 학술회의의 주제는 어떤가? 개방성? 나는 미래의 개방성에 의거하여 이 주제를 해석하기로 결정한다. 미래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 예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은 열린 채로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조립체들의 창조는 항상 가능할 것이라고, 그래서 참신성이 출현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인과관계가 표현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사물의 우연적 특징들이 전개되는 영역 내에서 일어난다. 그렇지만, 바스카도 데란다도 촉매와 다수의 인과적 인자들의 화려한 안개로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 인자들의 복잡성은 우리 자신의 오성을 넘어설 것이지만, 신 또는 사악한 슈퍼컴퓨터의 오성은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선형적 인과관계의 소동 속에서 개방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사변적 실재론을 향하여(Towards Speculative Realism)>>(2010), pp. 170-98.

2015년 6월 11일 목요일

라투르 - 근대인 서평모음



사회문제와 갈등 풀어나갈 학문적 전략 단초 제공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2009년 11월 09일 (월) 15:14:05김종영 경희대·사회학  editor@kyosu.net
푸코를 넘어 라투르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라투르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주목 받고 있다. 푸코가 사회과학지식과 훈육적 권력(disciplinary power)의 연계를 통한 근대 주체의 형성을 보여 주었다면 라투르는 근대적 주체가 사회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기술을 이용해 어떻게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푸코가 자연과학과 기술을 자신의 분석범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면 라투르는 이를 근대사회의 구성에 있어 핵심적인 분석대상으로 다룬다.

이번에 번역된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는 라투르 사상의 여정에서 이제까지 지배돼온 사회과학의 지배적 분석 방식에 대해 본격적인 반기를 드는 책이다.
사회과학의 지배적 분석 방식에 반기를 든 책
‘근대’는 사회과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자 끊임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개념이다. 위대한 사회과학자 중 근대를 다루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근대는 ‘사회변화’에 대한 메타담론이다. 사회변화는 객관적인 과정이자 주관적인 인식이다. 근대의 주요변화들은 사회과학자들이 동의하는 객관적인 변화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과정, 방식, 정치적 효과는 주관적인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대는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을 낳았으며 최근에는 글로벌하게 나타나는 근대의 다양한 방식들에 대한 ‘다양한 근대 (multiple modernities)’ 논쟁이 일어났다. 근대는 또한 사회적 주체들이 사회를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기획(project)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획을 계획하고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여러 사회주체들은 논쟁하고 투쟁한다. 위의 말들을 종합한다면 근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언제나 논쟁적이며 정치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근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라투르의 근대 개념의 핵심을 이해하기 전에 이 책 이전의 그의 사상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투르는 그의 첫 책인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에서 참여관찰을 통해 과학적 사실의 구성이 특정한 실험실 물질문화에 기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이렇게 문을 연 ‘과학인류학’이라는 것은 기존의 인류학자의 시선을 정반대로 돌려놓는 혁명적인 실험이었다. 고전적인 인류학이 ‘전근대’를 그 분석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면 라투르는 ‘근대의 첨단’인 실험실을 그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라투르는 후속적인 연구(대표적으로 『프랑스의 파스퇴르화』와 『움직이는 과학』)에서 근대의 실험실이 사회와 물질(자연)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분석함으로써 과학기술, 사회, 자연의 공동생산(co-production)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라투르는 왜 우리가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근대는 기존의 사회과학이 만들어 놓은 근대담론의 핵심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기존의 근대이론가들은 ‘사회세계’의 변화를 사회주체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이해관계로 분석한다. 즉 사회와 물질(자연)세계는 항상 분리돼 있고(대분할: Great Divide), ‘사회변화’의 중심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파악된다. 사회과학에서 물질(자연)세계는 고작해야 이미 주어져 있든지 어떤 식으로 결정돼 있는 상수이지 변수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라투르는 기존의 근대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근대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즉 ‘사회변화’는 항상 ‘물질(자연)세계의 변화’와 함께 해 왔으며 사회과학자들은 사회/물질(자연)세계의 ‘공동변화’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예를 드는 오존층 파괴, 컴퓨터, 냉동배아, 미사일, 박테리아 등의 무수한 잡종들(하이브리드)의 연결망의 증식이 곧 라투르가 말하고자 하는 근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투르는 사회/물질/자연이 서로 잡종적으로 얽히면서 ‘변화’된 새로운 세계를 근대로서 재정의한다.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 혁신 주장

이 책에서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세가지 학문방식과 달리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라투르의 이러한 주장이 한국사회분석에 있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광우병 촛불사태에서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촛불주체들의 위험담론형성과 정치적 동원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연과학자들은 광우병 발생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 실험에 대해서만 관여했다. 과학기술학 전공자들 몇몇을 제외한 인문사회과학자 중 누구도 자연과학적 사실과 정치적 현상과의 연결지점을 보지 못했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여전히 자연과학에 자신감 없어하고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과학에 대한 권위의 부정을 가져 왔지만 여전히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은 과학기술을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킴으로서 과학의 권위를 지켜준다. 광우병 촛불사태가 보여 주었듯이 과학기술은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논쟁과 투쟁의 대상이다. 어디 광우병 촛불 사태뿐인가. 신종 인플루엔자 사태, 황우석 사태, 새만금 사태, 천성산 사태 등 지금 한국 사회의 주요 갈등과 논쟁점들은 라투르가 말하는 사회세계/물질(자연)세계의 하이브리드를 둘러싼 것들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은 ‘잡종의 정치’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구조적인 압박에 직면해 있다. 인문사회과학/자연과학/공학의 경계를 넘어서 물질(자연)세계를 인문사회과학의 분석의 대상에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된다는 라투르의 주장은 단지 학문적 통찰이 아니라 우리 시대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사회문제와 갈등을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한 학문적 전략과 실천론적 단초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김종영 경희대·사회학
일리노이주립대에서 박사를 했다. 질적방법론, 근대성과 세계화 등에 관심있다. 『잡종적 근대와권력지형』(창비)을 집필하고 있다. <Social Studies of Science>, <한국사회학>등에 논문이 있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9169

"근대주의를 전복하라, 비근대주의 세계를 상상하라!"
[화제의 책]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김환석 국민대 교수2009.08.01 09:39:00
인생을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 세상을 전혀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사상을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린다. 필자가 약 10여 년 전부터 접하게 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ANT)'이 그런 기쁨을 선사했는데, 브뤼노 라투르는 바로 이 이론을 만들어낸 대표자 중 한 사람이다. '행위자-연결망 이론'은 원래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는 과학기술학 분야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그것은 사회학, 인류학, 문화연구, 지리학, 환경학, 정치철학, 기술경제학, 경영학, 정보학 등에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히면서 매우 유력한 사회이론으로 부상하고 있다.

라투르가 1991년에 불어로 발표한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영어 번역판은 1993년 출간, 이하 <근대인>)는 그가 과학기술학에서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근대성에 관한 정치철학적 분석으로 과감하게 확장시킨 책이다.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인데도 현재까지 20여 개 국가에서 번역된 것으로 보면 라투르의 저서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그 동안 라투르가 쓴 논문이 번역되거나 '행위자-연결망 이론'을 소개하는 글들이 몇 편 발표된 적은 있지만, 그가 저술한 책이 번역 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 의미가 크다.

▲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프레시안
이번에 국내에 번역 출간된 <근대인>의 서두에서 라투르는 1989년에 세계가 두 가지의 위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사회주의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해 처음 유럽 여러 도시에서 열렸던 지구적 환경회의들이 상징하는 자연주의의 위기이다. 전자는 얼핏 자본주의의 승리를 나타내는 듯 보였지만, 후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이 실패하였음을 드러내며 자본주의 역시 위기에 빠졌음을 보여 주었다. 이 동시적 위기의 원인과 처방을 찾는 것이 <근대인>의 전체 내용을 이루고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라투르는 그 위기의 원인은 '근대적 헌법'이 지닌 이중적 모순에서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그가 말하는 '근대적 헌법'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근대인의 인식과 실천을 지배하는 원칙을 일종의 권력분립 제도로 비유한 것인데, 첫째는 인간 대 비인간의 이분법이고 둘째는 정화의 실천과 번역(=매개)의 실천 사이의 이분법이다. 근대인은 인간 존재와 비인간 존재를 철저히 구분하고 분리하면서 순수하게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사회, 순수하게 비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자연이라는 이원적 존재론을 신봉한다. 이것이 바로 '정화'의 실천이다. 반면에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과 비인간을 끊임없이 결합시켜 하이브리드들을 창조해내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번역'의 실천이다. 이는 전근대인들도 항상 해왔던 일이며 오늘날은 이것이 주로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인의 모순은 정화의 실천과 번역의 실천이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라고 라투르는 강조한다. 근대인들은 정화의 실천을 통해 자신은 비인간과 인간, 자연과 사회를 구분 못했던 전근대인들의 비합리성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났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합리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과학과 기술을 통해 하이브리드들을 지속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사실은 전근대인들과 연장선 상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근대인이 정화의 실천 때문에 이 하이브리드들에게 적절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무시해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하이브리드들은 오히려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무한정으로 증식되어 왔으며, 이것이 결국 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초래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정화의 실천이 없었던 전근대인에게는 그런 위기가 있지 않았음에 반하여. 

이러한 모순을 지니는 '근대적 헌법'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과학기술학자인 스티븐 셰이핀과 사이먼 샤퍼가 공저하여 1985년 출간한 책 <리바이어던과 공기펌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라투르는 지적한다. 이 책에서 셰이핀과 샤퍼는 17세기 중반 영국이 시민혁명과 왕정복고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토마스 홉스와 로버트 보일 사이에 있었던 과학논쟁의 복합적 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홉스와 보일은 모두 군주, 의회, 순종적이고 통일된 교회를 원했고, 기계론 철학을 신봉한 합리주의자였지만, 지식 또는 진리가 어떻게 산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의견이 대립하였다. 홉스는 수학적 합리성만이 진리를 산출한다고 믿었던 반면에, 보일은 실험을 통해 진공이라는 자연적 사실이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홉스는 시민들의 계산에 의해 도달되는 사회계약과 그것을 근거로 성립되는 주권자 리바이어던을 제외하고서 사회의 어디에서도 진리가 산출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즉 권력과 지식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진공(자연)을 인정하게 되면 이는 신처럼 주권자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존재를 다시 한번 인정하는 셈이 되고, 결국 이는 사회의 분열과 저항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보일은 실험에서 인간의 편견이 없는 비인간 사물의 증언을 기록함으로써 정치와 확고히 구분되는 자연적 사실의 세계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견이 허용되는 사회적 공간의 확립이 오히려 질서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을 설득함으로써 과학자들의 활동 공간인 왕립학회를 인정받고자 하였다. 이 논쟁에서 보일이 승리함으로써 과학과 정치는 확고히 분리되었는데, 더 중요한 점은 이 두 사람에 의해 자연(비인간)에 대한 과학적 재현과 사회(인간)에 대한 정치적 재현이라는 근대적 헌법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라투르는 홉스와 보일에 의해 생겨난 자연/사회의 구분이 칸트에 와서는 객체/주체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이후 헤겔과 현상학 그리고 하버마스와 탈근대주의자들에 의해 점점 더 그 간극이 넓혀져 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화 작업이 심화될수록 그 밑에서 하이브리드들의 증식 즉 매개 작업은 촉진되며, 역으로 하이브리드들이 증식될수록 자연/사회의 양극은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근대의 역설이다. 근대인은 초월적인 자연과 자유로운 사회라는 관념으로 인해 인간과 비인간의 아무런 결합도 유보하거나 배제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하이브리드들의 대규모 팽창을 이루었다. 반면에 전근대인은 항상 자연과 사회의 결합을 조심스레 숙고함으로써 하이브리드들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처음에는 근대인이 전근대인에 비해 성공한 자처럼 보였으나 생태적 위기는 이에 깊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을 너무 광범위하게 동원한 결과 확대 재생산되는 수많은 하이브리드들이 생겨남으로써,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대적 헌법이 통제권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근대적 헌법은 하이브리드들을 과학기술의 실험재료로는 허용하면서도 이들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은폐한 결과로 침몰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를 올바로 이해하고 수용하기 위한 존재론적 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라투르는 주장한다. 그것은 근대적 차원(즉 정화 작업을 나타내는 수평축)이 아닌 새로운 공간으로서, 근대적 차원의 중간지대에서 수직축(즉 매개 작업을 나타내는 축)을 이루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라투르는 '비근대적' 차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근대인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라투르의 처방은 무엇인가? 그는 근대인이 저지른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이를 자본주의, 제국주의, 과학, 기술, 지배 등 총체적 체계로 간주하여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리하면 그 체계를 종식시키려는 총체적 혁명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혁명을 수행하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하자 총체적인 탈근대적 절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은 난공불락의 총체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하고 수정가능한 하이브리드들과 이를 만들어낸 매개 작업들에 있었다고 보면, 이를 재구성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훨씬 낫고 현실적이라고 라투르는 진단한다. 이를 위해 그는 근대적 헌법과 대조되는 원리를 지닌 비근대적 헌법을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비근대적 헌법은 총체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인과 전근대인 그리고 탈근대인 각각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림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그는 본다. 예컨대 근대인으로부터 자연/사회의 분리는 버리되 행위의 대규모성은 취하고, 전근대인으로부터 규모 한계와 자문화중심주의는 버리되 비인간들에 대한 명시적 인식과 증식은 취하며, 탈근대인으로부터 근대주의에 대한 믿음과 비판적 해체는 버리되 구성주의와 성찰성은 취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비근대적 헌법은 단일한 대자연과 대사회의 분리가 아니라 인간-비인간 연결망들로서의 작은 자연들과 사회들이 매개 작업에 의해 공동 생산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이러한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은 명시적이고 집합적이 됨으로써 그 생산의 속도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투르는 '사물의 의회'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조되는 사물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를 인정하여 민주주의를 사물에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하이브리드 사물들의 생산은 조절되고 재지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라투르가 주장하는 바는 물론 서구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오늘날 서구가 근대주의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상실하고 앞으로 나아가길 주저하고 있는 데 반해 아직도 근대주의를 철저하게 신봉하며 극단적으로 밀고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에 주는 시사점이 더 크다는 생각도 든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는 물론이고 대운하, 원자력 발전소, 유전자 조작 식품, 광우병, 줄기세포, 나노기술 등 사회기술적 논쟁들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빈번한 것이 현실인데, 국내의 근대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객관적 합리성의 산물로서 경제 성장의 도구임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은 단지 자연의 반영이 아니며 불확실성과 인간적 성격을 반드시 내포하고 있음을 전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산물을 정치와 무관한 객체로 보면서 아무 민주적 토론이 없이 무제한 생산할 때 이른바 '위험사회'가 심화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또 라투르의 책은 사물과 과학기술을 사회의 외적 요인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는 기존의 사회과학에 대하여서도 경종을 울린다. 사회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통해) 비인간 사물들을 내부 요소로 끌어들여 그 내구성과 규모를 지속적으로 증대시켜 왔음을 라투르는 강조한다. 단적인 예로 원숭이 사회와 인간 사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는 비인간 사물이 없이는 거의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비인간들과 분리된 인간들만의 사회가 있는 것처럼 상정하고 이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기존의 사회과학은 자연/사회의 이분법에 안주하는 근대주의의 또 다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집합체 또는 공동세계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비근대적 차원의 사회과학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번역에 대하여서도 한마디를 덧붙이고자 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라투르의 책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하여 소개한 노고에 대해서 우선 감사한다. 라투르의 사상과 어휘를 소화하여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전체적으로 비교적 큰 오역이 없는 것으로 보여서 필자도 안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여기 저기 있어서 책의 원문을 보고서야 뜻을 알게 된다든가, 단어의 번역이 의아스럽거나 일관성이 없는 것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예컨대 'imbroglio'를 혼합체가 아닌 '난맥상'으로 번역한다거나, 'reality'를 실재가 아닌 '실제' 또는 '현실'로, 인명인 'Callon'을 '깔롱'과 '칼론' 또는 '칼롱'으로, 그리고 정화 작업과 매개 작업을 각각 '정화 작용'과 '매개 작용'으로 번역한 것 등은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아쉬움은 라투르의 책을 우리말로 처음 읽게 된 반가움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할 것이다. 

[프레시안 09.08.01] "근대주의를 전복하라, 비근대주의 세계를 상상하라!" 
"라투르가 1991년에 불어로 발표한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영어 번역판은 1993년 출간, 이하 <근대인>)는 그가 과학기술학에서 축적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근대성에 관한 정치철학적 분석으로 과감하게 확장시킨 책이다."

"그러면 근대인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라투르의 처방은 무엇인가? ..(중략)..그는 근대적 헌법과 대조되는 원리를 지닌 비근대적 헌법을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근대인으로부터 자연/사회의 분리는 버리되 행위의 대규모성은 취하고, 전근대인으로부터 규모 한계와 자문화중심주의는 버리되 비인간들에 대한 명시적 인식과 증식은 취하며, 탈근대인으로부터 근대주의에 대한 믿음과 비판적 해체는 버리되 구성주의와 성찰성은 취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비근대적 헌법은 단일한 대자연과 대사회의 분리가 아니라 인간-비인간 연결망들로서의 작은 자연들과 사회들이 매개 작업에 의해 공동 생산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이러한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은 명시적이고 집합적이 됨으로써 그 생산의 속도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투르는 '사물의 의회'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인간들과 비인간들이 역동적으로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집합체 또는 공동세계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비근대적 차원의 사회과학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점이다."


프레시안
2009년 8월 1일
김환석 국민대 교수

전체 기사 보기: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01092438&Section=04
 
[한겨레 21 09.07.24 제770호]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은 없다.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다.” 이보다 더 과격할 수 있을까.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역사적 시기 구분이 ‘근대인’으로서 우리의 ‘상식’이라면, 라투르의 책은 그 상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하지만 라투르가 보기에 근대의 분과적 인식론이 가정하는 ‘자연/문화’ ‘사실/가치’ ‘문명/야만’의 이분법은 유지되기 어려우며 모든 현상은 혼종적이다. 가령 남극 오존층의 구멍은 완전히 ‘자연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사회적’이며 또 너무나도 ‘담론적’이다. 현실은 모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연결망’인 것이다."

"연결망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에서의 혁신은 급진적인 단절과 비가역적인 운명을 초래한 ‘영웅담’이 더 이상 아니다. 지식순환에서 약간의 가속과 행위자 수의 미미한 증가, 과거의 믿음에 대한 약간의 변경 정도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평가다. 그가 근대의 경기장 대신에 발견하려는 것은, 훨씬 더 넓은 비근대적 세계의 장이다. 이 장을 그는 어원적 의미에서의 ‘중국’(中國·Middle Kingdom)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대인’인 줄 착각한 ‘중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한겨레21
2009년 7월 24일 제 770호
로쟈 인터넷 서평꾼 blog.aladin.co.kr/mramor


전체 기사 보기: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410.html  
[세계일보 09.07.07] "근대성의 큰 문제는 비대칭성 '우리는 근대인' 관념을 버려야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낸 브뤼노 라투르(62)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교수는 ‘인류의 근대성’에 대한 자부심에 의문을 품은 대표적인 학자다. 반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모두를 극복해 근대 세계와 비근대 세계의 입장 절충을 시도해 왔다. 그의 이론은 일명 ‘근대성 없는 계몽주의’나 ‘사물로 확장된 민주주의’라고 할 만하다."

"근대성의 문제는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잘 드러난다. 근대성의 문제는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근대 문명 외부의 ‘그들’과 ‘우리 현대인’을 나누는 데서도 확인된다. 인류학은 이런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학문분과이다.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구할 때, 인류학자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근대와 비근대의 절충인 하이브리드 방식. 하이브리드 방식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단절도 배격한다. 하이브리드 방식은 비대칭성 극복도 가능하게 한다. 하이브리드를 자유롭게 증식시킬 수 있는 근대인의 실천과 하이브리드의 연결망을 이용하는 비근대인의 실천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라투르 교수는 선언한다.

“근대성의 가장 큰 문제인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근대인이었다는 관념을 폐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세계일보
2009년 7월 7일
박종현 기자

전체 기사 보기 :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090707003430&subctg1=&subctg2=  
 [서울신문 09.07.11] 과학기술학 관점으로 근대 세계 재해석
 "프랑스 석학 브뤼노 라투르 파리정치대학교수는 가장 독창적인 과학기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과학기술자’가 아닌 ‘과학기술학자’라는 것. 과학 이론이나 기술 자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이 어떻게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한다."

"라투르는 그러나 실제로 근대인들은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지식과 이익이 구분될 수 없게 뒤얽힌 비인간적 사물인 하이브리드를 엄청난 규모로 증식했다고 주장한다."

"라투르는 이같은 이분법을 근대성의 비대칭성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론과 실제가 달랐던 ‘언행의 불일치’를 근대인의 딜레마로 꼽았다. 라투르는 이런 이유로 “근대성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고, 근대 세계는 존재한 적도 없으며, 누구도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핵심에는 근대인의 본질인 하이브리드에 대한 이해가 있다. 하이브리드를 이해해야만 사회와 자연, 정치와 과학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정치사회적 위기와 환경기술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고 라투르는 강조한다."


서울신문
2009년 7월 11일
이순녀 기자

전체 기사 보기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090711017008&keyword=라투르
  
라투르 책 번역 얘긴 이미 20세기말부터^^ 있었는데 마침내  첫 번역서가 나왔다. 국내에선 STS쪽에서만 알아주는 스타급 학자였는데 이번 번역서 출간을 계기로 인지도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STSer들 서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개를 연결시켜 놓는다: 김환석의 서평 (프레시안), 김종영의 서평 (교수신문). 아무래도 지면 제약이 없다시피한 프레시안에 실린 서평에선 책 내용이 좀 더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고, 교수신문 서평은 그보다는 간략하지만 '촛불시위'에 대한 라투르적 해석가능성을 소개하는 등 책 바깥의 맥락까지 짚어주고 있다. 
서평을 읽으면서 새삼 든 생각이지만 라투르만큼 창의적인 사회이론가도 드물다. 
"라투르는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공학을 넘나드는 탈경계적 분석방식과 사회/물질(자연)세계를 동시에 관계론적으로 분석하는 지식인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 책의 부제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의 대칭적 인류학(상징적인 의미.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와 역동성을 동시에 탐구하는 학문)이란 인문사회과학이 자연과학/공학과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학문적 체계를 의미한다." (김종영)

같은 서평을 또 일부 인용하자면... 
"라투르의 야심은 근대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인문사회과학의 전면적인 혁신을 주장한다. 그가 비판하는 세 가지 학문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학자는 다음과 같다. 윌슨(자연화), 부르디외(사회화), 데리다(해체)이다. 윌슨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윌슨의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오직 한국에서만 ‘통섭’이라는 기괴한 괴물로 진화했다. 한국학계의 수준이 얼마나 얕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르디외는 사회론적 환원주의, 데리다는 담론 환원주의(기존의 재현방식을 해체시키지만 여전히 세계의 물질성과 잡종의 정치를 보지 못하고 재현과 담론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방식. representational perspective (데리다) vs. performative perspective (라투르))로 비판받는다".

이 책 독일어 번역서를 사 두고 일부 읽어보긴 했지만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다 (뭘 읽은 거지 ... ).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구분이다. 이에 따르면 루만은 부르디외와 데리다 중간 정도로 위치시킬 수 있겠다. 커뮤니케이션에서 출발하지만 (데리다) '사회적인 것'으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이론이니까 (부르디외). 이 블로그 어디 쯤에 있을텐데, 루만과 라투르를 비교하는 논문들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있다. 라투르를 들어 루만을 치기는 쉬운 편이다. 루만을 전형적인 '사회학주의자'로 보면 되니까. 루만을 들어서 라투르를 칠 수 있을까? 체계이론의 관점에서 라투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지? 음. 이 부분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을 듯. 한국 STS 맥락에서 루만을 소개하려면... 루만 이론의 출발은 Sinn인데 철저하게 인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비인간 행위자를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봉쇄되는 건데, 'Protosinn'이란 개념을 도입하자는 주장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좀 군색해 보이는 제안이다. 여하튼 라투르 이론을 좀 더 진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고, 루만과 비교하는 일도 앞으로 본격적으로 해 봐야 할 듯 싶다. 어짜피 사회이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을 상태에서 연대해야 필요성이 커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http://teutosworld.blogspot.kr/2009/11/2009.html

2015년 1월 20일 화요일

윌버포스: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가트 린

윌버포스: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영국의 양심


가트 린 지음 | 송준인 옮김 | 두란노 | 2001년 04월 25일 출간

목차

1. 노예 무역의 중심지 영국 ...29
2. 헐 소년, 하원의원에 당선되다 ...39
3. 윌버포스와 친구들 ...49
4. 요크셔에서의 승리 ...59
5. 회심 ...67
6. 하나님이 주신 두가지 소명 ...83
7. 노예 무역 폐지 운동 ...93
8. 마침내 얻은 승리 ...111
9. 영국 사회의 상황 ...125
10. 또하나의 소명, 관습개혁 ...139
11. 포화 속의 평온 ...153
12. 클래펌 공동체 ...165
13. 행동하는 공동체 ...183
14. 사람을 낚는 어부 ...193
15. 실제적 견해 ...213
16. 개혁자의 가정생활 ...223
17. 노예가 먼저냐, 동포가 먼저냐? ...243
18. 노예해방 ...263
19. 정치가를 잃었는가, 찾았는가? ...281

출판사 서평

50여 년 동안 영국의 "노예 무역 폐지"와 "관습 개혁"을 위해 헌신했던 위대한 신앙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일생을 다룬 책이다. 20대 초반에 의회로 진출한 윌버포스는 회심을 경험한 이후 아무리 바쁜 정치 일정 속에서도 매일 아침 하나님과 교제하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께 받은 소명, 즉 "노예 무역 폐지"와 "관습 개혁"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다. 또한 19세기 전후 부패한 영국 사회의 많은 제도를 개혁하고 제거하는 데 힘썼다. 암살 위협, 온갖 중상 모략과 비방을 받으면서도 외롭고 기나긴 의의 싸움 끝에 "영국의 양심"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윌버포스의 일대기는 헌신된 하나님의 사람, 깊은 영성과 예리한 실력을 겸비한 평신도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다.-본문에서

윌리엄 윌버포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
윌리엄 윌버포스(1759. 8. 24-1833. 7. 29)는 세계사에서 대영 제국이 막 태동할 때인 1759년 영국의 부유한 항구 도시 헐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막강한 상권을 쥐고 있었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유복하게 자랐고,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의회에 진출한 윌버포스는 다방면에서 재능이 뛰어났고 사교술도 풍부했으며 언변도 탁월해서 사교계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친구인 밀너를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다. 지금껏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들이 조롱했던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당시 상류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품위 있게 향유해야 할 교양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로 결심했고 그날 이후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모두 떨쳐 버렸다. 그러나 당대 사회에서는 정직하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정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의원직과 행정 관직의 매매와 부정 부패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윌버포스는, 그곳 의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 기도하던 중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관습 개혁"과 극악 무도한 "노예 무역 폐지"였다.

당시 영국은 노예 무역을 통해 국가 수입의 3분의 1을 얻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가지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고 많은 이익을 남기고 무작위로 팔아 넘겼다. 뿐만 아니라 혹독한 처우로 인해서 노예 수송을 하던 중 10% 가량이 죽었고 수많은 노예들이 인간 이하의 참담한 대우를 받았다. 윌버포스는 이 노예 무역 폐지야말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확신했고 폐지를 위해서 헌신을 다했다. 그러나 영국 사회는 이미 국익이라는 이름 하에 노예 무역 폐지를 '매국'으로 치부했다. 그는 암살 위협과 갖은 중상 모략과 비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매진했고, 결국 의회에서 싸워 온 지 56년 만에 노예 무역 폐지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시점에서 노예 무역이 폐지되지 않았다면, 아마 아프리카는 19세기 후반에 밀려든 서구 자본가에 의해 끔찍한 노예 농장의 각축장으로 변했을 것이다.

윌버포스는 또한 당시 여러 악습의 폐지를 위해서 일했다. 불경스러움과 부도덕한 악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이런 총체적 개혁을 위해 그는 조지 3세를 독려해서 "관습 개혁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도록 했고 몸소 개혁을 위해 힘썼다. 또한 가난과 빈곤에 냉담한 영국인들을 일깨워 자선 활동을 하게 하여 사회 전반적으로 자발적인 자선 활동이 영국 내에서 정착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저자 소개
가트 린(Garth Lean)은 영국의 저널리스트로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법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학 분야의 평생 연구원인 그는 현재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개신교와 카톨릭을 통틀어 용기 있는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Brave Men Choose, 존 웨슬리에 관한 책 Strangely Warmed, 논쟁을 불러일으킨 크리스천 정치인 프랭크 부흐만에 관한 최초의 전기 On the Tail of a Comet : The Life of Frank Buchman 등이 있다.

역자 송준인 서울 대학교 영어학과(B.A.)와 총신대학 신학대학원(M.Div., Th.M.)을 졸업하고 남아공화국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신학 박사(Th.D. 기독교 윤리 전공) 학위를 받았다. 현재 총회 개혁 신학 연구원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는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 「리처드 포스터가 묵상한 신앙 고전 52선」(이상 두란노), 「은사와 은혜」, 「성서대백과」(이상 기독지혜사), 「최후의 시간」(미래사)외 다수가 있다.

2015년 1월 4일 일요일

Moisés Naím on power



Quick study: Moisés Naím on power

It ain’t what it used to be


MOSES NAIM is a scholar at the Carnegie Endowment of International Peace. His columns about international economics and politics are published in Spain, Italy and across Latin America. He was editor-in-chief of Foreign Policy for 14 years and has served as Venezuela’s trade minister and as executive director of the World Bank. His new book, “The End of Power: From Boardrooms to Battlefields and Churches to States, Why Being In Charge Isn’t What It Used to Be”, is published this month.
You say power has changed. How?
Advertisement
Power has become perishable, transient, evanescent. Those in power today are likely to have shorter periods in power than their predecessors. I’m talking about military power and power in business, politics, religion. One of the most perplexing arenas in which this is happening is in the world of business where the conversation centres on the concentration of wealth in a few large companies. Of course there are large, powerful companies but a study by NYU professors shows that the probability of a company in the top 20% of the business sector remaining in that category five years hence has halved. The turnover rate of business executives is also increasing significantly. It is far more slippery at the top.
Why?
There is more competition and business models are changing. You no longer know where the company that is going to dislodge you will come from. Recently Kodak—almost a monopoly in photography in the 1970s—went bankrupt. At the same time an app called Instagram with 13 employees was sold for a billion dollars. Kodak could never have imagined that a competitor would come in this form. Challenges and rivals are coming from improbable places. Also, the probability that a company will have a brand-damaging catastrophe has gone from 20% to 82% in two decades.
Suggested Reading: “Essence of Decision: Explaining the Cuban Missile Crisis” by Graham Allison and Philip Zelikow (1999)
Because of information technology?
No. The fact that power is easier to get, harder to use and easier to lose is driven by tectonic changes in the nature of humanity today, in terms of demography, where and how we live.  Micro-powers are challenging and constraining the mega-players. I’m not saying that a bunch of guerrillas in the mountains are going to win against the Pentagon, but I am saying that they might deny the Pentagon victory. A study by former Harvard scholar Ivan Arreguin-Toft on asymmetric conflicts shows that between 1800 and 1949 the weaker side won 12% of the time, but between 1950 and 1998 the weaker side won 55% of the time. Pirates in the Gulf of Aden in rickety boats with old Kalashnikovs are successfully hijacking incredibly sophisticated ships from the most modern fleets. The Taliban is another example of how the weaker army is able to deny the behemoth victory.
Suggested Reading: “The March of Folly: From Troy to Vietnam” by Barbara Tuchman (1985)
What has changed? Why couldn’t they do this before 1949?
There have been three revolutions. The powerful are shielded by barriers of money, technology, sheer size or whatever. Those barriers are less protective now as a result of three revolutions: the more revolution, the mobility revolution and the mentality revolution.
The more revolution describes a world of abundance. There are more people—2 billion more in the last two decades. There are more young people and they live in cities—65m people a year move to cities and more than half of the human population now lives in urban settings. There are more weapons, more medicines, more political parties, more companies, more NGOs, more religions, more communications. There is also more money—global GDP has increased five-fold and per capita GDP by three and a half times.
People also move more. This is the mobility revolution. The number of people living outside their country of origin has increased 37% according to the United Nations. Therefore, people are becoming harder to govern. As Zbigniew Brzezinski says, it’s easier to kill a million people than to control a million people.
All this change has an impact on people’s mindset. This is the mentality revolution. The number of divorces of senior citizens in India is soaring, mostly initiated by women. They are more affluent, better informed and no longer willing to put up with authoritarianism. This change in cultural norms is corroborated by the World Values Survey which shows a clear movement towards openness, gender equality and increased tolerance of difference.
Suggested Reading: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by Thomas Kuhn (1962)
This is generally a good thing?
I celebrate what’s happening. Dictators, monopolies and authoritarian governments are weaker and less able to impose their will. My only point of caution is that there are arenas in which this creates paralysis. Look at the Italian elections; Italy was always an example of the weakening of centralised power, but now the recent elections has taken that to an extreme. There is such a fractured mandate that nobody can form a real government. And the massacres in Syria; the world understands that it needs to stop but nobody has the power to intervene. For 30 of the 34 members of the OECD, the head of state is opposed by a parliament controlled by the opposition.
So what if you have power and want to hang on to it?
In business you need to be obsessive about what you do but you have to be careful not to let your peripheral vision be dimmed. The New York Times and Washington Post could never have imagined that their main competitors would be Craigslist and Google. Beware of situations where everyone has a little bit of power; where everyone can constrain and veto but nobody has the power to get things done. Also, beware of assuming you’re secure. Barclays under Bob Diamond was one of the few banks that thrived in the financial crisis but he lost his job anyway. The world had 89 dictators in 1977, now we only have 23. The world has become a less secure place for authoritarian regimes.
Suggested Reading: “The General in his Labyrinth” by Gabriel Garcia Marquez (1990)


Book Review: The End of Power: From Boardrooms to Battlefields and Churches to States, Why Being In Charge Isn’t What It Used to Be by Moisés Naím


ainsley
Power is shifting from large, stable armies to loose bands of insurgents, from corporate leviathans to nimble start-ups, and from presidential palaces to public squares. As a result, writes Moisés Naím, all leaders have less power than their predecessors, and the potential for upheaval is unprecedented. The author’s insights into the halls of power from China to Sweden make this a fascinating read, finds Ainsley Elbra.
The End of Power: From Boardrooms to Battlefields and Churches to States, Why Being In Charge Isn’t What It Used to Be. Moisés Naím. Basic Books. March 2013.
Find this book: kindle-edition amazon-logo
Moisés Naím is well placed to discuss global power, having served as Editor-in-Chief of Foreign Policy, an Executive Director of the World Bank, and currently at the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In his latest contribution,The End of Power, he asserts that “being in charge isn’t what it used to be”, principally due to the “decay of power”. While dispersion of power might be a more accurate reflection, his point is clear: power is no longer located in traditional settings. The aim of the book is to ask readers to question the way we think about, talk about, and ultimately understand, power. His work is timely, and parallels the emergence of powerful fringe parties throughout the Western world and the increasingly powerful role being played by non-traditional military actors as recently seen in North Africa.
Naím makes use of his vast experience, guiding the reader through a nuanced understanding of power and how power “got big”, before outlining his main thesis: that revolutions he categorises as More, Mobility, and Mentality have led to the decay of power. He argues that power is now easier to obtain but harder to keep and to use. Governments, large corporations and established religious organisations are finding that they wield far less power due to the emergence of what Naím defines as micropowers: fringe political parties, activists, hackers and leaderless young people in city squares. Competition between mega-powers is being sidelined by external threats from these micropowers that are increasingly able to “undermine, fence in or thwart megaplayers”.
Before you mistake this for another polemic on the rise of China or the internet’s fundamental ability force change, Naím is careful to ascertain that neither of these oft-quoted shifts are central to his thesis. In fact he suggests that the recent Arab Spring was the result of underlying issues only hastened through communication tools such as Twitter and Facebook, while he also suggests geopolitics is far more nuanced than the oft-quoted rise of China, the emergence of the BRICS or waning European influence.
Following his introduction to power and its recent evolution, Naím grounds his theory in several relevant examples, including the threat of micropowers to established political institutions, traditional defence forces, large corporations, and The Church and philanthropic organisations. The aim of these chapters is to illustrate the author’s theory through familiar examples.
In Naím’s chapter on the decay of political power he effectively argues that traditional political parties, and their leaders, are being threatened by the decay of power. Not only are fringe parties such as the Tea Party in the United States wielding far greater influence over the election strategies of major parties than their vote count would suggest, but an increasing number of individuals are actively participating in the political process. Highlighting the power of primaries, Naím points out that in preparation for the 2012 election, French Socialists embraced participation so wholeheartedly that all eligible voters (not only party members) were entitled to their say over the party’s candidate. For Naím, increased participation is evidence that the status quo is fading, power is decaying and established political institutions such as long-standing parties are being forced to bend to meet the threat of micropowers.
Naim begins his chapter on military power by suggesting that traditional readings on war (thinkSun Tzu) are rendering themselves less useful to today’s leaders. Rather than fighting traditional enemies, or states, weaker powers such as pirates in the Gulf of Aden, Hezbollah or Al Qaeda have been able to inflict significant blows on larger powers. While the author argues that armed militants and guerrillas are nothing new, he notes the unwillingness of large powers to unleash their full military capabilities on these groups. Putting this down to the desire to avoid the political ramifications, the reader is reminded of the author’s earlier argument highlighting the ability of single issue activists (another micropower) to garner significant public opinion on topics such as military abuses or even the birth of new nations such as South Sudan.
The author goes on to point out that not only are traditional armed forces threatened by weaker opponents, they are willingly imparting with their own power by engaging the services of private contractors to fill roles from procurement to prisoner interrogation. Again, Naím comes back to his central argument, while national armies are not about to disappear, their power is being eroded by micropowers. The ability of micropowers to reach more followers through improved communication methods is matched only by their access to remote warfare technology, from the crudest IED to the more recent emergence of drone technology – all of which supports to Naím’s argument that, inevitably, the power of large military establishments is decaying.
While The End of Power is a compelling and thoughtful read, there remain some contradictions in the author’s main arguments. Firstly, Naím observes that while the internet and the proliferation of social media tools that have emerged are undeniably transforming politics, activism and business, he argues they are not behind the decay of power. Instead he suggests their importance is exaggerated and misunderstood. In using the Arab Spring uprisings as an example, Naím is correct in suggesting that demography was behind the sudden surge in educated, unemployed young people rising up against authoritarian regim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deny that their success was not in some part due to social media. While the author offers studies which show most social media support for these causes came from outside affected countries, it can be argued that mounting international pressure (and the withdrawal of international support in some cases) contributed to ongoing revolutions, garnered external support and put the necessary pressure on soon to depart leaders.
In addition, given the examples provided it may be more accurate to argue power is dispersing or diffusing, rather than decaying. In almost all the examples included in the book, power being sacrificed by traditional sources is being acquired by someone else, usually a micropower. This is most evident in the transfer of political power from major parties to fringe groups, from state militaries to terrorist organisations, and from established mainstream religions to smaller, more dynamic denominations.
Overall, however, this contribution is a timely reminder of the changing face of power across many facets of society. The author’s insights into the halls of power, from China to Sweden, make this a fascinating read. While the recent financial crisis may have left us confused over whether companies are too big to fail, or whether we are returning to an era of big government, Naím is clear in his assertions that the powers of governments and corporations will continue to decay, largely due to the influence of a new generation of micropowers.
———————————————————————-
Ainsley Elbra is completing her PhD in International Relations at the University of Sydney. Her research focuses on the role of private governance in Africa’s extractive industries. More specifically, her work examines whether private governance initiatives, such as the EITI, assist in alleviating outcomes commonly associated with the resource curse. Prior to commencing her PhD she worked as a corporate banker responsible for a portfolio of Pacific-Island based clients and mining firms. She tweets at @ainsleyelbraRead more reviews by Ainsley.

The End of Power: Review

* Book: THE END OF POWER. By Moises Naim.
From a review by Tom Atlee:
“Moises Naim’s new book THE END OF POWER should properly be called “The Decay of Power”. His thesis is that while it is becoming easier to get power, it is also becoming harder to use it to control others and harder to keep it once you have it.
Naim suggests that globalization, economic growth, a growing global middle class, the spread of democracy, and rapidly expanding telecommunications technologies have changed our world. Together these developments have created a fluid and unpredictable environment which has unsettled the traditional dominions of power.
Three revolutions, he says, “make it more difficult to set up and defend the barriers to power that keep rivals at bay.” He details these revolutions as follows:
* “the More revolution, which is characterized by increases in everything from the number of countries to population size, standards of living, literacy rates, and quantity of products on the market”;
* “the Mobility revolution, which has set people, goods, money, ideas, and values moving at hitherto unimagined rates toward every corner of the planet”; and
* “the Mentality revolution, which reflects the major changes in mindsets, expectations, and aspirations that have accompanied these shifts.”
In other words, says Naim, there is too much going on, too much moving around, too many changing demands and perspectives – and at any time someone new can show up and effectively challenge or undermine your power. In addition, “when people are more numerous and living fuller lives, they become more difficult to regiment and control.” Among other things, such people value transparency, human rights, and fairness to women and minorities – and they share a sense that “things do not need to be as they have always been – that there is always…a better way” and that they need not “take any distribution of power for granted.”
All this is happening at the very time when large hierarchical institutions are losing their “economies of scale” and becoming increasingly difficult to manage, while smaller, more flexible organizations and networks are proving increasingly successful.
Naim provides compelling evidence that power is decaying in all these ways in all fields – from business, governance, geopolitics, and military affairs to religion, philanthropy, labor, and journalism.
Of course, decay is not the whole picture of what’s happening with power. Naim admits that centers of concentrated power are consolidating in every field. He notes that “the wealthy are accumulating enormous riches, and some are using money to gain political power…[a] trend as alarming as it is unacceptable”. He reminds us that “the same information technologies that empower average citizens have ushered in new avenues for surveillance, repression, and corporate control.” While he celebrates both the new limits on the powerful – “after all, power corrupts, doesn’t it?” – and the blessings of broader access to power, that’s not his focus.
THE DANGERS OF BOTH POWER AND ITS DECAY
The purpose of Naim’s book is to highlight the problems associated with instability of power. He sees power as the primary organizing force in society. He believes that the loss of stable social power portends loss of social order and functional governance. “The more slippery power becomes, the more our lives become governed by short-term incentives and fears,” he claims, “and the less we can chart our actions and plan for the future.”
However, his analysis is unreasonably biased against the small powers (the “micropowers”) and towards the larger powers (the “megaplayers”). Here are some vivid examples:
While noting that as more competing power centers emerge, it becomes harder to coherently address our collective problems and crises at every level – especially global issues like nuclear proliferation, terrorism, and climate change – he barely mentions the roles that concentrated economic, political and media power have played in generating those very problems.
He bewails how “more and more ‘small’ countries veto, foot-drag, demand special consideration, or generally undermine the efforts of the ‘big’ nations in one area after another” but does not talk about how much the ‘big’ nations block viable solutions being pushed by the ‘small’ nations.
He deplores the loss of skill and knowledge that so often accompanies the demise of major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institutions, but doesn’t note the destruction of cultural, biological and physical resources caused by the exploitative activities of corporations and governments (including the firing of experienced employees in profit-taking mergers and downsizing initiatives). Nor does he celebrate the mind-boggling new knowledge and capacity being created everyday by independent entrepreneurs and grassroots initiatives.
He calls fringe demagogues and extremists “terrible simplifiers” who “seek power by exploiting the ire and frustration of the population and making appealing but ‘terribly simplified’ and, ultimately, deceitful promises” – without acknowledging that this is the stock and trade of many mainstream governments, politicians, corporations, and other major political agents and economic actors as well.
He warns of chaos and potential disaster as more destructive forms of power become increasingly available to smaller and smaller groups of people,* without noting that most of those destructive forms of power were created and have been used by dominant countries, militaries, and corporations.
Naim also warns that the emerging micropowers “are not committed to the general good”. But he doesn’t balance that concern with concern about the megaplayers who are just as likely to harm the general welfare. Governments, corporations, and other established powers have a long history of selfishness, exploitation, and destruction generating widespread suffering and disaster.
NAIM’S BIGGEST BLIND SPOT
But I think the biggest shortcoming of Naim’s otherwise excellent book lies not so much in its elite bias, but in its very foundation – his definition of power. He defines power in three related ways – “the capacity to get others to do, or stop doing, something”; “the ability to direct or prevent the current or future actions of other groups and individuals”; and “what we exercise over others that leads them to behave in ways they would not otherwise have behaved.” Within these definitions he sees four ways to get people to do what we want – coercion, moral codes, persuasion, and rewards.
These definitions lead him to some statements that seem odd to those of us who don’t share his assumptions – for example, “the whole point of branding is to deter competition”. To me, it seems that the whole point of branding is to help consumers know what to expect from what they buy.
In my view Naim’s definitions of power have two fundamental shortcomings that make his thesis gravely incomplete:
First, his power worldview is confined to what many of us would call “power-over” – the capacity to control, manage or dominate. It ignores other forms of power that become visible when we define power simply as “the ability to create effects”. These other forms of power include power-with (the power of cooperation), power-from-within (the power of spirit, belief and motivation), and power-from-among (the power of synergy and collective intelligence).
Second, Naim’s power worldview is confined to the human realm – to social power. It does not acknowledge that there are other sources of and targets for power, notably nature. The power of nature – and our power relationships with nature – are central factors in our sustainability as a species.
Combined, these two defining limitations blind him and his readers to the role of power-over in generating the very problems he frets we won’t be able to solve, like climate change. Self-interested and ideological efforts to dominate nature and people – largely through technologically enhanced economic, political, military and media power (power-over) that is now global – have produced most of our 21st century crises, from climate change and terrorism to resource depletion and economic meltdowns. Furthermore, these emerging crises may well disrupt the conditions – notably the rising global middle class, its mobility and aspirations – that have produced the power-limiting shifts he describes. On the other hand, those crises may also empower the “micropowers” because traditional power centers will lack resources (especially oil) that they need to maintain their global control, resulting in power devolving necessarily (if sometimes painfully) to more local levels where alternative economic and political forms have been evolving, often in more participatory directions.
His two defining limitations – blindness to the full varieties and sources of power – also blind him and his readers to the the role that the other forms of power have played, can play and are playing in creating a more functional and sustainable society. To the extent we practice and develop all these forms of power with people and in human systems – as well as in our interactions with nature and natural systems – we can nurture a self-organized social and natural order that has fewer toxic side effects than those associated with domination and control. Competent partnership skills in a partnership culture can make all the difference in the world.
BUILDING MORE FUNCTIONAL POWER-OVER?
It seems to me that Naim’s solutions are designed primarily to help dominant powers function more benignly. He seems to believe that proper political participation needs to manifest “through more competitive political parties”. He sees participation as happening IN THE PARTIES rather than in society as a whole. He apparently considers the partisan battle for domination as the inevitable and proper form for participation in a democracy. This causes him to offer little insight into our immense and emerging potential for collaboration, common ground, co-creativity, and functional, “leaderful” self-organization, even across the traditional rifts that competitive power dynamics and institutions have bequeathed to us. Such dynamics are, to me, the most promising blessings of the decay of domination. But they are blessings we must work to earn.
In contrast, Naim says we need to develop more trust in our leaders and help political parties “regain the ability to inspire, energize and mobilize people – especially the young.” He suggests making political parties “more flat, less hierarchical” – but primarily to make them more able to “reach new members, become more agile, advance their agendas, and hopefully become better at fighting the terrible simplifiers that seek power inside and outside the party.” He frames leadership accountability, transparency and freedom from “dark or unknown interests” as issues of perception rather than substance. He suggests that political parties “need to elicit” in their followers “the feeling” that their party has integrity without describing how TRUE accountability should and could be established.
Naim tells us that “The exercise of power in any realm involves, fundamentally, the ability to impose and retain control over a country, a marketplace, a constituency, a population of adherents, a network of trade routes, and so on.” From that power-over perspective, the challenge of power is clear: “The task of governing, organizing, mobilizing, influencing, persuading, disciplining or repressing a large number of people with generally good standards of living requires different methods than those that worked for a smaller and less developed community.” That may be true enough for power elites, but is that where most of us want to go?
“INTERNAL CONTRADICTIONS”
Ironically, many of the attempts to consolidate power are creating conditions for the decay of that power. Creating educated middle classes in developing countries to staff Western-style governments and corporations generates indigenous aspirations and capacities that lead to upstart challengers and revolutions. Vested interests’ efforts to undermine national governments – from campaign contributions to trade agreements to war – generate populist protests and demands for greater local control. Tools created to enhance corporate collective intelligence get used by groups and communities to enhance their own collective capacities or to undermine centralized authorities. Weapons and civil rights designed to uphold elite privileges get claimed, adopted and used by marginalized populations.
I do not want to suggest that there is no role for power-over. There is much in life that requires control in order to be functional. However, power-over has greater potential for harm than the other forms of power. Much of its seeming efficiencies derive from its tendency to displace or “externalize” those harms and their costs onto other people or systems or into the future. For example, polluting companies externalize the harmful effects and expenses of their pollution onto communities, taxpayers, nature, and future generations, rather than paying the price to be clean.
For this reason, power-over should be practiced within – and constrained by – these more holistic forms of human potency, rather than the other way around. The answer is not simply, as Naim would have it, “to give more power to those who govern us,” but rather to expand and strengthen our ability to govern ourselves and to responsibly oversee those to whom we delegate some of our power.”
What do you think? Leave a comment below.
Sign up for regular Resilience bulletins direct to your email.
Take action!  
Make connections via our GROUPS page.
Start your own projects. See our RESOURCES page.
Help build resilience. DONATE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