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의 본심은 '친자본'? 현대 중국 금기를 깨다!
[프레시안 books] 원톄쥔의 <백년의 급진>
황희경 영산대학교 교수
기사입력 2013-11-01 오후 6:44:18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1101140016
2008년 월가 금융 위기 이후 서구의 패권적 지위가 쇠락하고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면서 중국의 사상계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른바 '신좌파'와 '자유주의'에 속하는 중국의 대표적 학자들이 학술회의에 자주 초청되기도 하고, 또 그들의 저작이 번역되는 것은 이런 관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적이고 이념적인 주장들은 중국의 진실된 경험과 현실, 그중에서도 농촌의 기층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원톄쥔(溫鐵軍)의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의 출간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의 농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저명한 중국의 이른바 '삼농(농민, 농촌, 농업)' 문제 전문가이자 "농민의 대변인"으로 불리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연구실에서 앉아서 이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실천을 통해 "발로 학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학자다.
그간 그의 글은 <녹색평론>이나 <역사비평> 등의 잡지를 통해 이미 우리 지성계에 간헐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었고, 또 최근에 출판된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대담집 <중국을 인터뷰하다>(이창휘·박민희 엮음, 창비 펴냄)라는 책에도 그와의 대화가 실렸는데, 이번에는 비로소 그의 문집이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중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에서 벗어나 한층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쑨거(孫歌)의 지적처럼,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에 은폐되고 오도되어 줄곧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기에" 한국과 같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적이고 이념적인 주장들은 중국의 진실된 경험과 현실, 그중에서도 농촌의 기층 현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원톄쥔(溫鐵軍)의 <백년의 급진>(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의 출간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의 농촌 문제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미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저명한 중국의 이른바 '삼농(농민, 농촌, 농업)' 문제 전문가이자 "농민의 대변인"으로 불리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연구실에서 앉아서 이론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과 실천을 통해 "발로 학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학자다.
그간 그의 글은 <녹색평론>이나 <역사비평> 등의 잡지를 통해 이미 우리 지성계에 간헐적으로 소개된 바가 있었고, 또 최근에 출판된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들의 대담집 <중국을 인터뷰하다>(이창휘·박민희 엮음, 창비 펴냄)라는 책에도 그와의 대화가 실렸는데, 이번에는 비로소 그의 문집이 번역된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중국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이데올로기적인 편향에서 벗어나 한층 깊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쑨거(孫歌)의 지적처럼,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냉전 이데올로기 때문에 은폐되고 오도되어 줄곧 풀기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었기에" 한국과 같은 외국인은 물론이고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도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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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의 급진>(원톄쥔 지음, 김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부친이 런민대학의 교수였던 베이징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원톄쥔이 삼농 문제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문혁 당시 중학교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상산하향(上山下鄕)의 운동을 따라 산시성 펀양현의 농촌 생산대에 편입되면서부터였다. 11년을 농촌에서 농민, 사병,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늦은 나이에 런민대학의 신문학과에 입학한다. 졸업 후 전공의 길을 걷지 않고 다시 11년 간 기층 사회를 조사 연구하는 활동에 종사한다. 이 기간 중에 그는 중국의 농촌 연구와 정책 자문의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리는 중앙서기처 중앙농촌연구실에서 일하기도 했는데, 여기서의 활동은 그의 일생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당시 그곳에는 부총리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자 당 서열 6위인 왕치산이나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낸 린이푸 베이징대학 경제학과 교수 등과 같이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개혁 개방 이후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 성장과 효율 우선의 서양화(西洋化)의 '4종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 세계화라는 정책 기조 속에서, 삼농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견해는 한동안 비주류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삼농 문제: 세기말의 반성'이라는 글(이 책 2부 마지막 글)이 <독서> 1999년 12월호의 첫머리에 실린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사상 문화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서>는 중국 지식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던 "책을 중심으로 한 사상문화 잡지"로 당시 왕후이(汪暉)가 주편을 맡고 있었다. 삼농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1990년대부터 사용한 용어로, 그는 이 용어의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농촌 경제의 쇠락 현상은 자본이 수익을 내는 쪽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적 조건 하에서 생산력의 3요소(토지, 노동력, 자본)가 농촌에서 도시로 유출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다. 다만 중국은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전통적 모순과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의 모순이라는 양대 모순의 제약 때문에 단순히 농업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농민, 농촌 그리고 농업을 포괄하는 삼농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삼농 문제의 원인이 있다.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란 중국의 사회주의 초기에 고용창출 능력이 극히 제한적인 중공업 위주의 발전 노선을 취하면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농촌과 도시의 서로 다른 호적과 자원 배치 제도를 말한다. 농민공이라는 중국 특유의 개념도 이런 제도적 배경에서 탄생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구는 팽창하고 자원이 부족한 농민국가가 공업화를 추구하는 발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중국의 환경 하에서 최대 문제는 삼농 문제이고, 이를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중국의 발전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농민혁명을 거쳐 탄생한 신중국이었지만 자립하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달성해야 했고, 공업화를 위해서는 자본의 원시축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소농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조건하에서는 이를 완수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중앙정부가 추구한 공업화는 결국 '자기착취'에 의해 원시적 축적을 달성한 과정인 셈이었다. 서구는 자국을 넘어 제국주의적 식민지 약탈을 통해 원시적 축적을 진행한데 반해, 중국은 내부적 '자기착취'를 통해 이를 달성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농민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불문가지다. 사회주의나 전민소유제라는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질적 내용은 급진적 공업화를 통한 자본의 원시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의 정책은 친농민이나 친노동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친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백년간의 급진"도 국내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그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금기를 건드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988년에 처음 사회주의 경제에도 위기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제기했을 때에도 그는 이런 식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경제적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계획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무슨 위기가 발생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비용전가론(成本轉嫁論)"이라는 분석틀로 네 차례의 외자 도입이 여덟 차례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면서 신중국 이후 60년간의 중국의 경험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그동안 중국에서 발생했던 많은 사건이나 정책들을 이데올로기적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농 문제의 역사적 연원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지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위기를 농촌으로 전가하면서 극복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원시적 축적에 따른 가혹한 박탈의 과정을 겪고 여러 차례를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중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방대한 버팀목인 소자산계급 농민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우리는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오바마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는 과도한 버블에 불과한 미국의 금융 자본 경제를 제조업 경제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데 있으며, 북한 경제가 어려움에 봉착한 원인도 농업의 현대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른바 "오바마-김정일 딜레마"이다. 따라서 현대화란 미명 하에 농촌을 급격히 도시화한다든지 농민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면서 토지를 사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결연히 반대한다.
2002년부터 중국 정부의 정책이 친자본주의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건설이나 과학적 발전관, 그리고 조화 사회 건설로 변화했으며 시진핑 정부도 삼농 정책을 농업정책의 중점 중의 중점으로 위치지운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일정한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하지만 개혁 개방 이후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 성장과 효율 우선의 서양화(西洋化)의 '4종 세트'라고 할 수 있는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 세계화라는 정책 기조 속에서, 삼농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견해는 한동안 비주류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 '삼농 문제: 세기말의 반성'이라는 글(이 책 2부 마지막 글)이 <독서> 1999년 12월호의 첫머리에 실린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사상 문화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서>는 중국 지식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던 "책을 중심으로 한 사상문화 잡지"로 당시 왕후이(汪暉)가 주편을 맡고 있었다. 삼농이라는 개념은 중국에서 1990년대부터 사용한 용어로, 그는 이 용어의 주창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농촌 경제의 쇠락 현상은 자본이 수익을 내는 쪽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적 조건 하에서 생산력의 3요소(토지, 노동력, 자본)가 농촌에서 도시로 유출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는 중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 현상이다. 다만 중국은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전통적 모순과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의 모순이라는 양대 모순의 제약 때문에 단순히 농업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농민, 농촌 그리고 농업을 포괄하는 삼농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삼농 문제의 원인이 있다. "도농 간의 대립적 이원구조"란 중국의 사회주의 초기에 고용창출 능력이 극히 제한적인 중공업 위주의 발전 노선을 취하면서 농촌 노동력이 도시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마련한 농촌과 도시의 서로 다른 호적과 자원 배치 제도를 말한다. 농민공이라는 중국 특유의 개념도 이런 제도적 배경에서 탄생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구는 팽창하고 자원이 부족한 농민국가가 공업화를 추구하는 발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인구에 비해 토지가 심각하게 부족한 중국의 환경 하에서 최대 문제는 삼농 문제이고, 이를 진정으로 이해해야만 중국의 발전 경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농민혁명을 거쳐 탄생한 신중국이었지만 자립하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달성해야 했고, 공업화를 위해서는 자본의 원시축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소농 중심의 자급자족 경제 조건하에서는 이를 완수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중앙정부가 추구한 공업화는 결국 '자기착취'에 의해 원시적 축적을 달성한 과정인 셈이었다. 서구는 자국을 넘어 제국주의적 식민지 약탈을 통해 원시적 축적을 진행한데 반해, 중국은 내부적 '자기착취'를 통해 이를 달성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노동자 농민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을 불문가지다. 사회주의나 전민소유제라는 고상한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질적 내용은 급진적 공업화를 통한 자본의 원시축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오의 정책은 친농민이나 친노동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친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백년간의 급진"도 국내 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그의 주장은, 사실 누구나 느끼고 있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금기를 건드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1988년에 처음 사회주의 경제에도 위기가 존재했다는 견해를 제기했을 때에도 그는 이런 식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경제적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계획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 무슨 위기가 발생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비용전가론(成本轉嫁論)"이라는 분석틀로 네 차례의 외자 도입이 여덟 차례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고 하면서 신중국 이후 60년간의 중국의 경험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그동안 중국에서 발생했던 많은 사건이나 정책들을 이데올로기적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농 문제의 역사적 연원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지를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위기를 농촌으로 전가하면서 극복해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공업화를 이루기 위한 원시적 축적에 따른 가혹한 박탈의 과정을 겪고 여러 차례를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중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방대한 버팀목인 소자산계급 농민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우리는 바꿀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던 오바마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던 이유는 과도한 버블에 불과한 미국의 금융 자본 경제를 제조업 경제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데 있으며, 북한 경제가 어려움에 봉착한 원인도 농업의 현대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른바 "오바마-김정일 딜레마"이다. 따라서 현대화란 미명 하에 농촌을 급격히 도시화한다든지 농민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하면서 토지를 사유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그는 결연히 반대한다.
2002년부터 중국 정부의 정책이 친자본주의적인 노선에서 벗어나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건설이나 과학적 발전관, 그리고 조화 사회 건설로 변화했으며 시진핑 정부도 삼농 정책을 농업정책의 중점 중의 중점으로 위치지운 것을 보면, 그의 주장의 타당성과 일정한 영향력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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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원톄쥔. ⓒ출처 : news.xinhuanet.com/fortune |
마지막으로 이 책은 원톄쥔의 많은 저작과 강연 가운데 대표적인 주장을 담은 글을 요령 있게 선별해 번역한 책이다. 번역은 물론이고 꼼꼼한 주석이 좋다. 가령 현 지도부의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인 성진화(城鎭化)를 우리 언론에서 대개 도시화로 번역하는데, 이 책은 주석을 통해 성진화는 도시화(城市化)가 아니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 친근하고 성의 있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 이정훈 교수의 심도 깊은 해제, 쑨거의 의외의 발문 모두 유익하고 좋다. 특히 개인적으로 쑨거의 발문을 보고 놀랍고도 반가웠다. 역시 쑨거다! 발문 덕에 저자에 대한 신뢰가 배가되는 느낌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의 글을 발표순으로 편집했다면 사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정말 오랜만에 읊조려 본다. 농자는 천하지대본야라고.
동방의 귀환, 일독 이독 다독을 권한다!
[동아시아를 묻다] 원톄쥔의 <백년의 급진>
이병한 동아시아 연구자 기사입력 2013-11-29 오후 7:10:43
고별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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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의 급진>(원톄쥔 지음, 깁진공 옮김, 돌베개 펴냄). ⓒ돌베개 |
따라서 '식민화'의 경로를 원천 봉쇄당한 제3세계 국가들은 근대화의 질곡에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다. 따라가려 해도, 닮아가려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이다. 근대화가 초래하는 제도적 비용과 모순을 전가할 수 있는 외부가 없기 때문이다. 즉, 후발 국가들이 서구식 근대화를 복제할 수 있는 길은 애초 가로막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선진국 또한 그 발전 모델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 천하를 삼분했던 미국, 유럽, 일본이 새천년과 함께 위기와 모순의 근원이 되고 있음이다. 탈식민 이후 반세기만에 밑천이 다 드러난 것이다. 즉 선진국과 후진국을 막론하고 근대 문명 자체가 임계에 달했다.
이를 '오바마와 김정일의 딜레마'로 포착한 지점은 탁견이 아닐 수 없다.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국가가 실은 동일한 덫에 빠져 있다. 기생적인 금융 자본 위주의 경제를 영위하는 미국이 다시금 제조업 경제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막다른 곳에서 군사력에 의존하여 통화 패권을 유지하는데 사활을 걸 뿐이다.
북조선의 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조선 또한 근대화의 결여가 아니라 근대화의 소산으로 파국을 맞이한 것이다. 북조선은 산지가 많은 조건임에도 일찌감치 기계화 위주의 농업 근대화를 실현했다. 그래서 노동 생산성을 높이고, 70%가 넘는 도시화를 조기에 달성했다. 이 또한 화석 자원에 기생하는 산업 구조가 아닐 수 없다. 1990년대 초 석유 공급이 중단되자 농업이 완전히 붕괴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숱한 탈북자의 실상 또한 탈농자였다. 농업 근대화와 도시화에 따른 비용을 감당치 못하고 좌초한 것이다. 근대 문명의 파국을 앞서 경험한 '선진국'이라고도 하겠다.
즉, 미국과 북조선조차 당면 과업은 이념과 체제의 문제가 아니다. 따옴표를 친 '근대'의 종언을 서로 다른 형태로 노정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기존의 사회과학 이론과 역사관은 몽땅 '사이비(似而非)'이다. 그럼직하고, 그럴 듯하지만, 실은 아닌 것이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좌우 신학이자 주술이었을 따름이다. 근대에 안녕을 고한 원톄쥔은 '현장파'를 선언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제창이다. 실학자의 안목으로 터득한 중국 100년사의 독법은 가히 독보적인 독창으로 눈이 부시다.
백년의 급진
원테쥔은 중국의 지난 100년을 '우파' 일색으로 독해한다. 파격이다. 파천황적 파격으로 통렬하다. 정부와 정권의 차별성보다는 일관성에 주목한 것이다. 청조 말기도,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또 마오쩌둥과 덩샤오핑도 모두 '우파'다.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라는 신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생존이 관건이었고, 그래서 양무 운동 이래 줄곧 공업화에 매진했다. 군사력의 배후에는 공업화, 특히 중공업이 있었다. 공업화란 끊임없이 자본과 자원을 추가 투입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민생 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군(先軍) 정치가 우선되는 시대였던 탓이다. 그리하여 지난 정부의 정책은 모두 본질적으로 친자본적인 특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로 지난 100년 또한 급진적으로 우경화된 세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디부터 좌경적 오류나 계획 경제의 오류 또한 발생할 수가 없었다. 오류가 있었다면 대저 극우적 오류이다. 그래서 '반우파 투쟁' 또한 그릇된 명명이다. 그들이야말로 관료주의에 맞선 '좌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약진과 개혁 개방도 좌우로 따질 일이 아니다. 대약진은 지방의 공업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사회 운동이었다. 개혁 개방도 소련의 자본을 서방의 자본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차이라면 비로소 전국시대가 이완되면서 중공업 위주의 산업을 민생 쪽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근대 국가 건설 과정에 중국의 누천년 전통이 제도와 문화 차원에서 다대한 기여를 했다는 시각이다. 수천 년 전통의 관개 농업으로 형성된 집단 문화를 통하여 동방의 특색을 갖춘 중앙 집권적 체제 내부에서 사회적 자원을 통합할 수 있는 효과적 메커니즘을 고안할 수 있었다.
소련의 해체나 인도의 부진과는 대비되는 '비교 우위'의 실체이다. 이 과정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논리가 혁명 이데올로기였을 따름이다. 이를 통해 동원된 대중은 노동으로 생겨난 잉여의 대부분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들의 헌신 덕분에 신중국은 아주 짧은 기간에 적은 비용(=식민지 없이)으로 국가 공업화를 위한 원시적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100년의 우경화는 필연적으로 주기적 경제 위기 등 자본주의의 모순을 야기했다. 그런데 이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 또한 누천년의 유산에 기대는 것이었다. '하방'이 바로 그것이다. 도시의 과잉 노동력을 농촌으로 전가함으로써 위기를 해소해 갈 수 있었다. 즉, '하방'의 실제 또한 좌경화 운운과는 거리가 멀다. 향촌 사회의 완충제에 기대어 경제 위기를 타개하는 방책이었다.
애초 신중국 건국부터가 그러한 성격이 다분했다. 중화민국 정부의 산업화 정책이 초래한 모순을 '경자유전(耕者有田)'이라는 전통적인 구호로 해소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신중국은 그 출발부터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세계 최대의 소농 국가, 소자산 계급 국가였다. 세계 경제와의 접촉을 끊고 농민들을 광범하게 동원하는 전통적인 복고 혁명에 가까웠던 것이다. 독창적일뿐더러 매우 합리적인 해석이다.
동방의 귀환
과거를 독해하는 눈이 번뜩이는 만큼이나 미래를 향하는 전망 또한 날카롭다. 중국은 이미 세기의 전환기에 공업화를 완성하고 산업과 금융의 과잉 상태에 진입했다. 와중에 3억의 중산층이 형성되었음이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들은 분권적 엘리트 민주주의를 요구할 공산이 매우 크다. 이미 외부의 힘과 말을 빌려 서구의 보편적 가치(자유, 민주 등)가 중국에도 필요한 것처럼 여론을 조성해가고 있다.
그러나 원톄쥔은 이 자유-민주 노선에 결연하게 반대 한다. 중산층의 정치적인 요구가 반세기 이상 신중국을 구제해 주었던 소자산 계급, 즉 소농이 주축이 되는 대중 민주주의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자체가 이미 체제의 위기를 집합적으로 경험하며 보편적 가치의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난 마당이다. 이제서 위기가 빈발하는 정치 체제를 중국의 개혁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여전히 소농 국가, 소자산 계급 국가라는 단순한 자각이 신통하고 방통하다. 그만큼 우리는 좌우의 허울에서 오래 헤매었다. 그렇다면 향후 중국 정치의 행보 또한 세계 최대의 소자산 계급(7억 농민)과 세계 최대의 중산 계급(3억 중산층)의 길항이라는 전대미문의 과업으로 관전해 볼 수도 있겠다.
원톄쥔이 주목하는 장소는 다시 농촌이다. 향촌 건설 운동에 몸소 매진하고 있다. 동서구의 계급 투쟁을 독려하지도 않을뿐더러, 북구의 차가운 복지 국가를 맹종하지도 않는다. 오래된 소농 사회의 유산을 재활용하고 농민 스스로의 교섭 능력을 배양하여 민간 사회의 활력을 다시 지피는 것이 관건이다. 즉, 과대한 국가 개입에도 반대하고, 토지 사유화 및 시장화도 거부한다. '조화사회' 구현이 요체이다.
얼핏 '작은 정부와 큰 사회'로 작동했던 중화제국의 현대적 전환인 듯도 하다. 모름지기 '큰 사회'의 거점은 향촌 자치에 있었다. 자그만치 7억 농민은 중국의 절반이자 인류의 10분의 1이다. 이들의 촌락 공동체야말로 중국 안정의 기틀이자 세계 체제의 보루이다.
따라서 그가 도모하는 향촌 건설 운동은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옛 마을을 부수고 농촌을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옛 마을을 회복하고 갱신하여 자생력을 키우는 '신문화 운동'이다. 즉, 중국의 미래는 동구와 서구, 또는 북구에 있지 않다. 중국의 과거에, 동방의 유산에 자리한다. 자기 문명의 복원, 자력갱생이 희망이다.
물론 그의 기투가 현실화될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체제 이행기에 복병은 도처이며, 파국도 드물지 않다. 중국 정부의 정책이 이미 생태 문명으로 전환했다는 진단도 성급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백년의 급진>을 읽으며 중원에서 '동방지사(東方之士)'가 귀환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동서구식 이론 신앙에 작별을 고하며, 사상 대국의 저력을 회복해 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중국은 파란만장한 20세기를 통과하면서도 전면적 식민화를 겪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상적 토양의 산성화가 그나마 덜했던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지적 종속화를 거치며 동방지사의 맥이 희미해진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하겠다. 부럽고도 또 부러운 지점이다.
그리하여 역자 김진공의 노고에 지극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말끔한 번역으로 새천년 새 동방(학)의 여명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후속작으로 추이즈위안의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 선언>도 예고되어 있음이다. 때를 꿰뚫는(時中) 역작들을 연이어 한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미더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기대가 한껏이다. 역자에게는 박수를, 독자에게는 일독, 이독, 다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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