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록일 2013/11/22 | 글쓴이 하영권 기자
0김기협 강연, “근교원공(近交遠攻)의 시대가 오고 있다”

역사평론가 김기협은 동양사를 전공하고 학자를 거쳐, 언론인 생활을 하면서 많은 책을 썼다. 《해방일기》, 《밖에서 본 한국사》,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뉴라이트 비판》 등. 특히 아버지인 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를 묶어낸 책 《역사 앞에서》는 해방 후부터 6.25전쟁 초기까지의 꼼꼼한 체험담으로 주목받았다. 2009년 《뉴라이트 비판》을 출판하면서 ‘좌파’로 공격받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부르고 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강연회였다.
그의 강연 논지를 요약해 본다.
“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를 우선 편안하게 풀어내는 것이 잘 살아가는 비결이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런 관점을 잘 표현한 말이 근교원공(近交遠攻)이다. 정상상태에서는 그것이 정답이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되면서 ‘근대’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는 ‘서양화’를 의미했다. 중국에서는 양무운동, 변법운동, 신문화운동의 단계를 거치면서 근대에 대응했다.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도 수구세력과 개화세력이 충돌했다. 내용을 따져보면 그 충돌은 일본의 급진적 개화 모델과 청나라의 점진적 개화 모델의 갈등이었다.
근대화가 곧 서양화라는 관점에 대한 수정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Edward Said의 ‘Orientalism’이 중요한 출발점이다. 이어진 연구에서 동양의 ‘자본주의 맹아론’들이 탄생한다.
중국은 11C 남송시절부터 자본주의적 요소가 발견된다. 하지만 중국은 그 자본주의적 발전을 완만한 과정으로 진행시켜 왔다. 이유는 천하의 질서를 중시한 것이었다. 콜롬부스의 대항해보다 앞섰던 중국 명나라 함대 ‘정화의 탐험’을 중지시켰던 것도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던 중국 조정의 선택이었다.
중국의 조정과 같은 질서유지의 주체가 없었던 유럽에서는 근대화가 급격한 변화로 치달았다. 물질 획득을 위한 무한경쟁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난 300년 동안 진행되어온 이런 근대화는 알고 보면 미숙한 근대, 일종의 가근대(pseuo-modern)로 판단한다. 안정된 사회, 정상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원과 환경의 한계에 부딪쳐도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이론에서는 장기간의 정상상태와 단기간의 패러다임 전환기를 설정한다. 사회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3백년은 안정된 근대로의 전환기였고, 정상적인 근대체제는 이제부터 펼쳐질 것이라 본다.
이런 관점을 이해하려면 원자론적 세계관과 유기론적 세계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자연과학에서의 원자론에 영향 받은 사회과학들이 있었다. 원자처럼 궁극적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개인의 자유를 중심에 놓았었다.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이런 원자론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천하 체제는 만국공법의 도전 앞에서 무너졌다. 천하체제는 ‘사대-자소’의 구체적 관계를 중시하는 유기론적 체제이지만, 만국공법 체제는 각국 주권의 평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원자론적 체제이다. 만국공법은 현실에서는 없는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강자의 이익을 실현하는 ‘정글의 법칙’이다. 일본과 조선이 맺은 강화도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독립국이다’로 되어 있다. 이 조항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을 중국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단절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각개격파하기 위한 논리가 만국평등, 만국공법이다.
초강대국 미국과 다수의 무정부상태가 그 동안의 세계체제였다.

2008년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중국은 이제 세계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했다. 지구의 자원과 환경의 한계에 부딪힌 중국은 미국과는 다른 발전방향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변화 발전을 바로 보고자, 나는 중국에서 3~4년을 살아 보았다.
《100년의 급진》이라는 책으로 중국의 현대를 성찰한 중국의 지식인 ‘원톄쥔(溫鐵軍)’을 보고 나는 놀랐다. 비서양식 발전방향을 제시한 그의 사상도 주목했지만, 그가 다양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분석하는 능력이 더 놀라웠다. 원톄쥔의 사상을 중국의 지도부도 받아들였다. 앞으로 중국이 안정된 근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느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0년의 급진》이라는 책으로 중국의 현대를 성찰한 중국의 지식인 ‘원톄쥔(溫鐵軍)’을 보고 나는 놀랐다. 비서양식 발전방향을 제시한 그의 사상도 주목했지만, 그가 다양한 학문적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물을 분석하는 능력이 더 놀라웠다. 원톄쥔의 사상을 중국의 지도부도 받아들였다. 앞으로 중국이 안정된 근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느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절대자유, 절대평등은 허구이다. 분수를 알고, 어느 정도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런 사고방식이 유기론적 세계관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일어난 근대로의 변화와 유사한 시기가 중국의 전국시대이다. 당시 철기의 전면적 사용으로 생산력이 급등했다. 생산력의 급등으로 초래된 근 300년의 전쟁 끝에 천하 체제가 완성되었다. 천하와 조정을 봉건적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 봉건적 전통이 이제는 오히려 학습의 대상이다. 산업화로 일어난 생산력의 급등을 안정된 질서로 만들어나갈 때 근대는 완성된다.
이웃나라 공략에 국력을 집중하는 정책이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원교근공은 소모적인 정책이다.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는 원교근공이 중심원리였다. 그러나 지금 세계정부와 문명권의 통합추세는 ‘근교원공(近交遠攻)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 가까운 이웃과 잘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도. ”

전체적으로 어려운 내용이고 다소 논쟁적인 언급들이 많았지만, 중국 중심의 관점과 세계질서로서의 근대를 보는 관점을 일관되게 전개하여 참석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는 강연이었다.
엘리트, 선비정신, 근대적 질서, 유기체적 통합 등을 강조하는 김기협은 과연 좌파일까, 보수주의자일까?
나우온 Ⓒ 하영권 기자 soopul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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