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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0일 수요일

권리들을 가질 권리 1,2 - 진태원

2013년 06월 통권 026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22회]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 I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 대륙에서 양산되었던 무국적자들과 소수민족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성찰하면서 제시한 개념이다(Hanna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73,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ㆍ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528쪽. 번역에 관해 한 마디 지적해두자면, 한글 번역본은 전체적으로 원문의 내용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무난한 번역이지만, 원문의 논리를 정교하게 이해하는 데는 꽤 지장을 준다. 이는 특히 번역자들이 nation, nationalism, nationality, tribal nationalsm, minority, people 등과 같은 2부의 주요 개념들을 일관성 없이, 또한 피상적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의 논의를 충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문에 대한 참조가 꼭 필요하다. 이하 번역본의 인용문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지만, 수정 사실을 일일이 지적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둔다). 이 개념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하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1990년대 이후 수많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이 속출하고 이들 역시 위의 경우와 유사한 인권의 역설을 겪게 되면서 다시 한 번 현대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1. 
인권의 역설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유럽 출신의 모든 유대인 및 특히 여성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복잡다단하고 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던 아렌트는 「국민국가의 쇠퇴와 인권의 종말」이라는 제목이 붙은 『전체주의의 기원』 9장에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기에 인권의 이념이 맞게 된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인권은 양도할/소외될(inalienable) 수 없다고 추정되지만, 주권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나타날 때면 항상—심지어 인권에 기초한 헌법을 보유한 국가에서조차—인권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1』, 528쪽)로 집약되는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난민들과 무국적자들, 망명자들, 이주민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아렌트는 1914년 8월 4일 이후, 곧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서술하기는 현재에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이 국제 관계의 기본 규칙을 와해시켰고,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수많은 중간 계급의 몰락을 낳았으며, 대규모의 “집단 이주”(Ibid., 267; 489쪽)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들(rightless)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Ibid., 267; 489~90쪽)
   이 때문에 아렌트는 영국의 보수주의자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면서 제기한 문제가 전간기에 사실로 드러났고, 이런 점에서 버크의 논리가 “아이러니컬하고 신랄한 형태”(Ibid., 299; 537쪽)로 확인되었다고 지적한다. 곧 버크는 인권이란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권리는 인권이라기보다 “영국인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지적했는데(에드먼드 버크,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이태숙 옮김, 한길사, 2008 참조), 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적을 상실한 소수 민족들과 망명자들, 이주민들이 겪은 사태는 그의 지적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의 권리 상실은 어떤 경우에든 인권의 상실을 수반했다. 최근의 사례인 이스라엘 국가가 입증하듯이, 인권의 회복은 국민적 권리의 확립이나 회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권 개념은 인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인권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다른 자질과 특수한 관계들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마주치는 순간, 인권 개념은 파괴되었”(Ibid., 299; 537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권이라는 것은 어떤 개인이 어떤 나라의 국민이나 시민이든 간에,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로 인해 지니게 되고 누릴 수 있는 권리이며, 따라서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임에도, 실제로는 어떤 개인이 이러한 인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특정한 나라의 시민 내지 국민의 자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인권은 시민의 권리와 독립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시민의 권리에 논리적으로 선행하고 그것을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이것이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이다.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는 세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첫째, 인권의 박탈은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의 박탈을 뜻한다는 점이다. “인권의 근본적인 박탈은 무엇보다 세상에서 거주할 수 있는 장소, 자신의 견해를 의미 있는 견해로, 행위를 효과적 행위로 만드는 그런 장소의 박탈로 표현되고 있다.”(Ibid., 296; 532쪽)
   둘째, 이러한 인권의 역설이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에 고유한 세상, 인간이 자신의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장소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공적으로 구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세상, 인간의 정치적 삶의 공간은 자연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우발적이고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상호주관적인 토대, 따라서 토대 아닌 토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셋째, 그러므로 인권의 역설이 우리에게 드러내주는 것은, 인권에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정치 상황이 출현하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권리들을 가질 수 있는 권리(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의 행위와 의견에 의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하나의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다시 얻을 수 없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그러한 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특별한 권리의 상실이 아니라 어떤 권리이든 기꺼이 보장해주고 보장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상실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닥친 재난이었다.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근본 자질과 인간적인 존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른바 말하는 인권을 상실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오직 정치 조직의 상실만이 그를 인류로부터 추방한 것이다.(Ibid., 297; 534쪽)
   하지만 아렌트에 따르면 이러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한 번도 인권의 항목 가운데 언급된 적이 없는 권리”이며, 이것은 “18세기의 범주에서는 표현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권리가 인간의 ‘천성’으로부터 직접 생겨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같은 곳)
   아렌트는 인권의 역사를 두 가지 단계를 경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역사적 권리는 자연권에 의해 대체되었고 ‘자연’은 역사의 자리를 차지”한 것이 첫 번째 계기다. 이처럼 인권을 역사 대신 자연에 기초를 둠으로써, 각각의 민족이나 국민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적 권리를 통해 자신의 특권을 정당화하거나 불변적인 것으로 유지하려고 했던 지배 계급이나 특권 계급의 권리를 비판하고, 인간이 인간이라는 자연적 사실 자체를 통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역설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이제 역사만이 아니라 자연도 인간에게 낯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인간이 역사로부터 해방되었듯이 20세기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해방되었다.”(Ibid., 298; 535쪽) 따라서 이제는 인류가 과거에 자연이나 역사가 수행했던 역할을 떠맡게 되었는데, 이는 곧 “권리들을 가질 권리 또는 인류에 속할 수 있는 모든 개인의 권리가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Ibid., 298; 536쪽)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것이 과연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국제 관계가 여전히 주권 국가들 간의 상호 협정과 조약의 관점에서 작용하는 국제법에 따라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세계 정부’의 건설 역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법이 될 수 없는데, 그러한 세계 정부라는 것이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면 이상주의적 경향을 가진 조직이 촉구한 버전과는 상당히 달라지지 않을까”(같은 곳) 짐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의 많은 국적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이 겪은 인권의 박탈 경험에 입각하여 인권의 역설을 제기하고, 인권 속에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새로운 범주가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러한 범주에 걸맞은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한 해석들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의 역설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은 이후 아렌트 연구의 중심 주제 중 하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말에 수많은 이주민과 난민들이 생겨나면서 현대 정치철학, 특히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문제는 서양 학계에서는 이미 여러 권의 저서와 수많은 논문들의 대상이 된 바 있다. 이 개념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이 개념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석이 존재한다(특히 Michael Ignatieff, Human Rights as Politics and Idolat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참조). 앞서 말했듯이 한나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어떤 종류의 조직된 공동체에 속할 수 있는 권리”로 간주한다. 더 나아가 프랑스혁명의 『인권선언』에서 제창된 추상적 인권 개념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비판을 “실용적으로 건전한”(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299; 『전체주의의 기원 1』, 537쪽)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아렌트는 버크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국민국가에 소속될 권리만이 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권리들을 가질 권리는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이면서 강력한 국민국가에 소속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제정치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인권을 유린하고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국가나 집단에 맞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인권은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권력에 의존하게 되며 권리는 권리가 아니라 선물이나 시혜를 의미하게 되는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을 훨씬 더 가중시키며, 인권이라는 개념을 무력화(無力化)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James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American Political Science Review, vol. 102, no. 4, 2008 참조).
   칸트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도 존재한다(Jürgen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Suhrkamp, 1998; 위르겐 하버마스, 『이질성의 포용』, 황태연 옮김, 나남, 1998; 세일라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이상훈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8). 전자의 경우와 달리 이러한 해석에서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한 제도를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심적인 것이 된다.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영구평화론』을 비롯한 법철학 저술에서 칸트의 제안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좀더 발전시켜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세계시민적 정치체 및 정치 제도의 확립 속에서 아렌트가 말하는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려고 한다. 가령 벤하비브가 보기에 칸트 자신 및 아렌트가 국제관계에서 인권의 확립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지닌 이유는 그들이 주권적인 국민국가를 정치의 (자연적인) 토대로 간주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정치 공동체 및 법 제도의 가능성을 사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해 실질적인 해법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국제적인 법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특히 벤하비브, 『타자의 권리』 4장 참조). 특히 하버마스와 벤하비브는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서 이러한 세계정치적 인권 체제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보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첫 번째 관점과 비슷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의 역설을 해결하고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구체적인 법적 제도로 실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하버마스의 용어법대로 하면 세계적인, 적어도 국제적인 공론장의 형성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대량 학살로 인해 고통 받는 동료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인류의 도덕적 각성을 필요로 한다(J. Habermas, “Die postnationale Konstellation und die Zukunft der Demokratie” in op. cit.). 그런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여기에서도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법적ㆍ정치적 제도를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들의 권력에 의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역시 인권은 그 권리의 당사자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한 이들의 힘에 달려 있는 문제가 된다(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은 여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해석들보다 좀더 아렌트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다른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실제로 최근에 여러 이론가들이 아렌트의 이론에 관한 새로운 해석 및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아렌트의 저작들에 대한 좀더 면밀하고 충실한 검토에 입각하고 있을뿐더러, 자유주의적이거나 칸트적인 해석과 달리 인권의 문제를 정치 그 자체의 문제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É. Balibar, “Les universels”, in La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 「보편적인 것들」, 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 7장 「폭력과 세계화: 시빌리테의 정치는 가능한가?」,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Is a Philosophy of Human Civic Rights Possible?: New Reflections on Equaliberty”,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 2-3, 2004; 「인간 시민권의 철학은 가능한가?」, 『월간 사회운동』 2006년 11월호, 통권 69호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624;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A Reflection on the Coherence of Hannah Arendt’s Practical Philosophy”,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 “Arendt, le droit aux droits et la désobéissance civique”,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On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Constellations, vol. 20, no. 1, 2013; 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The South Atlantic Quarterly, vol. 103, nos. 2-3, 2004; J. Ingram, “What Is a “Right to Have Rights”? Three Images of the Politics of Human Rights”, op. cit.; Peg Birmingham, Hannah Arendt and Human Right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Theory, vol. 11, no. 1, 2011; Justine Lacroix, “Human Rights and Politics, 1980-2012”,Books & Ideas.net, 2012. http://www.booksandideas.net/Human-Rights-and-Politics.html).
   이 중에서 특히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해석이 주목할 만한데, 그 이유는 두 사람 모두 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라는 이론적 아젠다의 관점에서 인권의 정치를 강력히 옹호하면서도(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재정의라는 시각에서 두 사람의 이론을 검토하고 있는 글로는 진태원, 「랑시에르와 발리바르: 어떤 민주주의?」, 실천문학 2013년 여름호, 통권 110호 참조)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상반된 해석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아렌트 정치철학, 특히 그녀가 제기한 인권의 역설에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엘리트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발견해낸다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의 가능성을 읽어낸다. 더욱이 이는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과 매우 가까운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유사한 관점을 지닌 두 사람이 아렌트에 대하여 거의 상반된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꽤 흥미 있는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번 논의에서는 이 점을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2013년 07월 통권 027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23회] 권리들을 가질 권리(right to have rights) II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3. 랑시에르의 비판

   랑시에르는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글에서 아렌트의 인권 해석 및 권리들을 가질 권리 개념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랑시에르가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에 주목하는 것은 현재 국제정치에서 나타나는 인도주의적 인권 개념과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제시하는 종말론적인 정치 사이에 모종의 연관 관계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특히 호모 사케르박진우 옮김새물결, 2008 참조). 그리고 이러한 연관성은 이론적으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인권의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이는 인권이야말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쇄적으로 몰락한 이후전지구적인 자유 시장 경제와 전지구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역사 이후의(posthistorical) 세계의 명실상부한 이념적 원리헌장이 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실제로는 민족갈등과 대량 학살종교적 근본주의의 분출새로운 인종주의 및 외국인 혐오증의 확산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의 증가 등으로 인해 세계는 여전히 빈곤과 불평등갈등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그리하여
인권은 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곧 자신의 집과 땅으로부터 내쫒기고 인종 학살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들의 권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인권은 점점 더 희생자들의 권리자신들의 이름으로는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주장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권리인 것으로 나타났고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권리는, ‘인도주의적 간섭에 대한 새로운 권리궁극적으로는 침략에 대한 권리가 되어버린라는 이름 아래 국제 권리 체계의 구조를 파괴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타인들에 의해 유지되어야 하게 되었다.(J. Rancière, op. cit., pp. 297~98)

   따라서 인권은 미심쩍은 것이 되었는데인권에 대한 이러한 의혹은 버크의 인권 비판을 다시 상기시키게 되었다곧 실제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국민 공동체 자체와 결부되어 있는 권리이며인권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한낱 추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이 생겨났다랑시에르는 아렌트가 말한 인권의 역설 역시 버크의 이러한 인권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인권은 단지 인간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권리다그들은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했다달리 말하면인권은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이며권리에 대한 조롱에 불과하다.”(J. Rancière, Ibid., p. 299) 
   이 대목은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 있다왜냐하면 인권이 인간이라는 것 이상의 특성을 갖지 못한 이들,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권리에 대한 조롱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랑시에르 자신이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권리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리로서의 인권은 해방 투쟁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하지만 랑시에르는 이것을 권리에 대한 조롱으로 이해하며더 나아가 인권의 역설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이야말로 “50년이 지난 이후, ‘인도주의적’ 무대에 나타난 인간의 권리의 새로운 난점에 딱 들어맞는”(J. Rancière, Ibid.) 것이라고 주장한다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아감벤 식의 의미에서) ‘예외상태에 대한 아렌트의 개념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권리를 상실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은그들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아무런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그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3; 전체주의의 기원, 531랑시에르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렌트의 말이 명백히 경멸적인 말투를 띠고 있다고 이해하는데그가 보기에 이 말은 마치 이 사람들이 심지어 억압당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심지어 억압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J. Rancière, op. cit., p. 299)음을 뜻하기 때문이다랑시에르가 아렌트와 아감벤 사이의 지적 계보의 근거를 발견하는 곳도 바로 이 대목이다
   그에게 아렌트의 위와 같은 진술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근거 짓는 고유한 인간학에서 비롯한 것이다사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볼 수 있듯이 활동의 세 가지 형식곧 노동(labor)과 제작(work), 행위(action)의 형식을 구별하면서삶의 필요에 관한 작업과 관련된 사적 영역(곧 오이코스(oikos)의 영역)에 속하는 노동 및 제작과 구별되는 행위야말로 본래적인 공적 영역곧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한다(H. Arendt, The Human Condition, Introduction by Margaret Canova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2nd Edition);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한길사, 1996 참조). 그리고 근대성의 특징 중 하나는 고대 세계에서는 유지되었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이러한 구별이 무너지고 사적 영역에 속하는 노동이 공적 영역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아렌트는 1848년 이후 공적 영역 속으로 노동운동이 등장한 것은 근대 정치의 주목할 만한 현상이지만노동운동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고유한 의미의 정치적 행위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일단 노동운동이 사회 속으로 통합이 되고 노동자들이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게 되면노동운동은 오히려 공적 영역 및 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정치적 행위의 가능성을 잠식하게 된다고 본다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아렌트 인간학의 특징을 생물학적 삶 및 사적 영역의 삶을 의미하는 조에(zoe)의 영역과 위대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고유하게 정치적인 삶의 영역인 비오스(bios)의 영역 사이의 엄격한 구별 및 분리에서 찾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감벤의 정치철학특히 그의 세계적인 출세작인 호모 사케르는 이 두 가지 개념의 구별에 의거하고 있다). “아렌트가 보기에 인권과 근대 민주주의는 이 두 가지 삶의 혼동이는 궁극적으로는 비오스를 순전한 조에로 강등시키는 것을 뜻한다에 의거한 것이다.”(J. Ranciè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op. cit., p. 299) 따라서 아렌트가 말한 억압을 넘어선 상태는 이 두 가지 삶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것의 이론적 귀결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아렌트 정치철학에 고유한 아르케 정치적 입장으로 간주한다아르케 정치(archi-politique)는 랑시에르가 불화의 4장에서 도입한 개념으로플라톤이 창설한 정치철학적 입장을 가리킨다아르케 정치의 고유한 특징은 정치적 활동을 소수의 집단에게만 할당하고데모스 또는 인민은 정치의 영역 밖으로 배제하고 오직 삶의 필요와 관련된 일에만 종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랑시에르가 아렌트의 관점을 아르케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순수한 정치의 영역과 삶의 필요와 관련된 영역을 구별하고 후자에 의한 오염으로부터 전자의 영역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렌트의 고유한 관심사라고 보기 때문이다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순수한 정치 영역을 보존하려는 의지는 궁극적으로 이 영역을 국가 권력과 개인적 삶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게 만든다는 점이며따라서 아감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정치를 권력과 같은 것으로점점 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존재론적 숙명(오직 신만이 우리를 여기에서 구원할 수 있으리라)으로 여겨지는 권력”(Ibid., p. 302)과 같은 것으로 만들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랑시에르는 이러한 아렌트-아감벤의 계보에 맞서 인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한다그는 이를 아렌트가 만들어낸 두 가지 진퇴양난의 딜레마와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길의 형태로 제시한다.
아렌트는 인권과 시민권(Rights of the Citizen)을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는 진퇴양난으로 만든다. (1) 시민권은 인권이다그러나 인권은 정치화되지 않은 사람의 권리다이 권리는 아무런 권리도 없는 사람들의 권리이며결국 무로 귀착된다. (2) 또는 인권은 시민권이이다이러한 시민권은 이러저러한 헌정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이는 이 권리가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권리라는 것을 뜻하며이는 결국 동어반복으로 귀착된다권리 없는 이들의 권리이거나 아니면 권리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공허한 것이거나 아니면 동어반복이라는 것그리고 양쪽 다 속임수라는 것이것이 아렌트가 조립한 자물쇠다이러한 자물쇠는 진퇴양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 번째 가정을 일축하는 대가를 치를 경우에만 작동하게 된다실로 세 번째 가정이 존재하는데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겠다인권은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다.(Ibid.)

   여기서 세 번째 가정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우선 그들이 가진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기록된 권리들”, 곧 성문화된 권리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자유롭고 평등한 것으로서의 공동체의 기입들(inscriptions)”(Ibid.)인 이러한 성문화된 권리들은 개인들이 이러한 권리에 기초하여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사회정치적 상황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근거들로 작용한다따라서 인권은 그들에게 부여된 성문화된 권리를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는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다둘째인권이 그들이 갖지 못한 권리를 갖고 있는 이들의 권리라는 것은이러한 개인들이 단지 이미 기입되어 있는 권리를 옹호하고 그러한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할 뿐만 아니라그러한 기입을 바탕으로 아직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권리들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권리 주체들을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와 평등은 한정된 주체들에 속하는 술어들이 아니다정치적 술어들은 열린 술어들이다그것들은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그것이 어떤 경우에 누구와 관계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열어놓는다.”(Ibid., p. 303)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인간과 시민의 차이또는 인권과 시민권의 차이는아렌트가 제시하는 진퇴양난에서처럼 공허하든가 동어반복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오히려 그것은 그러한 간격을 폐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치의 공간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생산의 장을 뜻한다정치적 주체들은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갖고 있는 권리를 실현하고 그러한 권리들에 기반하여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해내는 이들이다랑시에르는 이러한 주체들을 총칭하여 데모스 또는 인민이라고 부른다그리고 민주주의는 가난한 이들의 권력이나 벌거벗은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할 자격을 갖지 못한 이들의 권력으로 정의한다곧 민주주의는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빼고는 통치하는 데 필요한 어떤 특별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이들의 권력”(Ibid., p. 305)이다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불화를 비롯한 다른 저작에서 민주주의를 안-아르케(an-arkhe), 곧 아르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4.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발리바르의 해석

   발리바르는 1990년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관해 논의한 바 있는데그의 성찰의 핵심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권의 역설론이다우리의 주제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발리바르가 아렌트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또는 권리들에 대한 권리’)라는 개념을 랑시에르의몫 없는 이들의 몫이라는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렌트의이러한 관점은 최근 랑시에르가 정치적 공간에서의 만인을 위한 실질적 평등의 척도는 민주주의라는 관념의 기원에서부터 몫 없는 이들의 몫에 대한 인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다시 말하면 배제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제이지만 또한 다른 차별의 범주들도 여기에 속합니다의 과정을 정치체 안으로의 포함 과정으로 전화시킴(이는 정치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킵니다)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재정식화하려고 시도했던 것과 가까운 관점입니다.”(에티엔 발리바르우리유럽의 시민들?, 232우리유럽의 시민들?이 프랑스어로 2001년에 출간되었고랑시에르의 인권의 주체는 누구인가?가 200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랑시에르가 자신의 글에서 발리바르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기는 해도그의 글은 발리바르의 이러한 (부당한?) 연결에 대한 반론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역으로 발리바르는 랑시에르의 글이 출판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인권의 역설론특히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대해 재고찰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좀더 분명히 드러내고 문제의 쟁점을 심화시키고 있다(인권의 역설론에 관한 발리바르의 논의로는 지난 호에 제시된 문헌 참조). 따라서 아렌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권의 정치 및 무정부주의적 시민성에 관한 두 사람의 논쟁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해석과 비교해볼 때 발리바르의 해석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먼저 그는 랑시에르의 해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둘째이 개념에 초점을 두고 인권의 역설을 고찰하게 되면아렌트 문제제기의 핵심에는 정치 공동체의 무근거성아르케 없음이라는 문제아르케 없는 정치 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그리고 셋째만약 이것이 아렌트의 인권의 역설론의 핵심 쟁점이라면그로부터 제기되는 또 다른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고유한 아포리아적 성격 또는 이율배반적 성격이라는 문제다.
   우선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발리바르는 아렌트의 핵심 논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권리들의 인간학적 토대라는 관념 및 정치적인 것의 토대로서 인권의 고전적 교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 중 하나를 전개하면서도 이 권리들 중 몇 가지를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극단적으로 옹호했으며이러한 권리들에 대한 무시는 인간적인 것의 잠재적인 또는 현행적인 파괴로 귀착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기본적인 인권이라는 관념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전형적인 인권의 정치를 정치적인 것 일반특히 민주주의적인 정치의 중심에 위치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É. Balibar,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op. cit., p. 728) 발리바르는 이것을 아렌트의 정리”(Arendt’s theorem)라는 수학적 용어로 표현한다. “시민의 권리가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É. Balibar, Ibid., p. 732)정리라는 표현이 뜻하는 바는인권과 관련된 이러한 역설적 사태가 일시적이거나 역사적 우연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함의를 지닌다는 점이다아렌트의 정리가 지니는 보편적 함의는 무엇보다도그러한 정리가 인간의 권리에 함축된 권리라는 것이 개인 주체가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말 그대로 양도/소외 불가능한 자연적 성질이 아니라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해주고 또한 서로에 대해 보증해주는 자격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는 점에 있다개인들이 지닌 인권은 이것 이외에는 다른 보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따라서 시민의 권리가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되는 이유는인권이 시민의 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랑시에르가 주장하듯이아렌트가 버크를 옹호하면서 인권은 국민의 권리의 부속물이라는 것국민 국가에 소속되는 것이 개인들의 역사적 숙명이며그러한 공동체 바깥에서는 권리라는 통념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고 개인들은 오직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자연적 성질만을 지닐 뿐이라는 점을 인정했다는 뜻이 아니다발리바르가 보기에 아렌트의 논점은 이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첫째아렌트가 말하려는 것은 행위의 상호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공동체의 제도/설립 바깥에는인간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0) “완전하게 조직된 인류와 더불어 고향과 정치적 지위의 상실은 인류로부터 배제되는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H. 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p. 294; 전체주의의 기원, 533또는 역으로 표현한다면인간 존재 그 자체는 개인들이 공동으로 형성된 세계 속에서 서로에 대해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권리들과 다르지 않으며그 권리들만큼 실존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따라서 둘째인간의 인간성 자체를 구성하는 이러한 공동의 세계 형성은 특정한 정치 제도나 공동체의 형식을 함축하지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아렌트가 명시적으로 말하듯이 인권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하는또는 이러저러한 구체적인 인권의 항목들을 보호하고 성립하게 해줄 수 있는 일차적인 권리로서의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뜻한다.
   발리바르는 이를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in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 72;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윤소영 옮김공감, 2003, 23)라고 바꿔서 표현하며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1789)의 한 가지 핵심(그가 인간=시민 명제라고 부르는 것)을 여기에서 찾는다하지만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에 대한 주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만약 그렇다면,권리선언은 인간을 시민으로인권을 시민권으로 환원하려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그리고 이렇게 되면 권리선언이 개인의 자율성개인적 권리의 영역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다 정치로 환원하며따라서 공포정치 및 전체주의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나 마르셀 고셰(Marcel Gauchet) 식의 수정주의적 프랑스혁명 해석 및 반()전체주의론적 비판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반대로 우리가 인간=시민 명제의 핵심을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 파악한다면인간=시민 명제는 인간을 시민으로 환원하거나 자유를 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나 개인적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란인간의 권리 및 시민의 권리를 인간의 본성이라는 불변적인 자연적 사실에 기초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23이 부분은 2010년 판본에는 빠져 있다)이라는 원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인권이라는 것이 시민적 권리에 선행하지 않으며이러저러한 시민적 권리들과 더불어 인권 역시서로에 대해 권리를 부여하고 보증해주는 개인들의 공동의 세계 구성 행위에 의존한다면그것은 정치 공동체의 자연적이거나 본질적인 기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정치 공동체는 공동의 세계를 구성하려는 시민들의 호혜적인 행위 이외의 다른 기초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이것은 달리 말하면민주주의적 공동체로서의 정치 공동체는랑시에르가 말하듯이 아르케 없는 것-아르케-정부적인(an-archy)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아르케 없는 것으로서의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성립 가능한가라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더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도 제기되는데그것은 이러한 아르케 없는 공동체로서의 민주주의 공동체에 본래적인 이율배반적인 또는 아포리아적인 성격이라는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한 가지 심원한 이율배반을 포함하고 있는데왜냐하면 권리들을 창조하는 동일한 제도들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인들이 그것들을 통해 서로에게 상호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함으로써 인간 주체들이 되는 그러한 동일한 제도들은그것들이 이 권리들을 파괴할 경우에는또는 권리들을 실행하는 데 장애가 될 경우에는 또한인간적인 것에 대해 위협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É. Balibar,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op. cit., p. 211)
   아렌트가 국민국가에 고유한 인권의 역설을 통해 표현한 것이 바로 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국민국가는 인권선언에 기초를 두고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호혜적인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 수립되었지만이러한 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평등과 자유를 제한할뿐더러그 성원들 중 일부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그런데 아렌트는 이것이 단순히 국민국가에만 고유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왜냐하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좀더 외연이 넓은 초국민적인 국가 및 일종의 세계정부를 구성한다고 해도그 국가나 정부는 정치적 통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체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축소하거나 심지어 제거하려는(곧 배제하려는경향을 지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더욱이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었던 칼 야스퍼스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제안한 세계 연방 국가’ 방안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바 있다왜냐하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그 국가는 고도로 강력한연방 치안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그러한 무력은 또 다른 억압과 폭력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 문제에 관해서는 Ayten Gündoğdu, “‘Perpexities of the rights of man’: Arendt on the aporias of human rights”, op. cit., p. 13 참조)
   따라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아렌트의 개념이 제기하는 문제는 정치 공동체에 대한 초월적이거나 자연적인 기초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정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아르케”, 곧 -정부적이다), 어떻게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인가,또는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실은 배제에 기초를 두고 있는 현재의 민주주의적 정치체(국민국가를 포함하는)를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곧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이 개념이 지닌 깊은 현재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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