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통권 007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7회]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http://rikszine.korea.ac.kr/UserFiles/TitleImg/1322399281767.jpg)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국민사회국가(État national-social)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에티엔 발리바르가 최근 저작에서 근대 국가의 발전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이매뉴월 월러스틴과 공동으로 저술한 『인종, 국민, 계급: 애매한 정체성들』(Race, nation, classe: Les Identité ambiguës, Éditions La Découverte, 1988; 진태원 외 옮김, 그린비, 근간)에서 처음 도입된 이래 이 개념은 점점 더 발리바르의 정치철학 연구의 중심 범주로 자리 잡고 있다.
발리바르가 이 개념을 도입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2차 대전 이후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서유럽이나 북미의 국가들을 지칭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내지“사회국가”(Sozialstaat)라는 개념, 또는 프랑스에서 이 두 용어에 상응하는 용어인 “에타 프로비당스”(’État-providence)라는 개념(이것은 말 그대로 하면 “섭리국가”라는 뜻이다)를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왜 “복지국가”나 “사회국가”라는 말 대신 “국민사회국가”라는 생소한 용어를 도입할까?
그에 따르면 이 개념은 의도적으로 도발적인 함의를 내포하고 있지만(이는 나치즘의 약자가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zialismus)라는 점을 염두에 둔 말이다), 이는 최근 우리나라나 일본의 몇몇 지식인들(임지현, 김철, 권혁범, 니시가와 나가오, 또는 부분적으로는 사카이 나오키 등)이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서 주장하듯이 모든 국민국가는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이거나 파시즘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개념은 왜 2차 대전 전후의 정세에서 복지국가가 전체주의 국가의 대안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는지 해명하고, 왜 국민국가가 사회국가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는지, 또 반대로 왜 사회국가는 국민국가의 틀 속에서만 가능했는지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된 개념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복지국가 내지 사회국가라는 표현 대신 이 개념을 쓰는 이유는, 복지 국가나 사회 국가라는 개념이 서유럽의 특정한 국가들의 성격 및 정책을 표현하기 위한 한정된 개념인 데 반해, 이 개념은 19세기 이래 국민국가의 역사 전체를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곧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아니면 다른 주변부 국가들이든 관계없이 국민 국가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설명하고 더 나아가 국민국가가 20세기 후반 이래 직면한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국민사회국가라는 개념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국민사회국가의 정의
국민사회국가는 “사회정책이 정착되고 국민적 틀 속에 말하자면 녹아들었으며, 그리하여 국민에 소속되는 것이 사회적 권리들을 향유하기 위한 본질적 조건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역으로 이런 사회적 권리들에 대한 인정(이런 인정의 원리는 이제 헌법 속에 명문화되어 있다)은, 그런 인정이 힘을 중심으로 하고 국민주권을 긍정하는 정치 속에 구현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136쪽)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첫째, 이것은 19세기 말 이래로 국가의 “국민적 형태”, 곧 국민국가(사실은 국가 그 자체)를 보존하는 데서 계급투쟁의 조절이 결정적인 문제였다는 점을 의미한다. 자본에 의한 착취와 과잉착취에 저항하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내적인 위협)과 함께 식민지를 둘러싼 제국주의적인 경쟁과 전쟁(외적인 위협)에 맞서 국민국가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사회정책과 안전보장 제도를 마련하여 노동자 계급을 국민국가 내부로 통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의미다.
둘째, 반대로 이러한 계급투쟁 및 사회적 갈등을 지배 계급에 이익이 되도록 조절하기 위해서는 “국민”이라는 특권적인 공동체 형태를 부과하고 작동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개인에게 그들이 노동자이기 이전에, 농민이기 이전에, 부르주아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또 각종의 이데올로기 장치들을 통해 실제로 그들을 한 사람의 국민으로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민사회국가의 효과
이처럼 국민국가가 국민사회국가로 전환되면서 다음과 같은 효과가 산출된다. 우선 사회권이 시민권으로 통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곧 여러 가지 사회권들(무상교육, 의료보험, 실업수당, 양육비, 주거 보조비 ...)이 시민권 자체 속으로 통합되었으며, 각각의 시민 또는 국민은 개인적 권리와 정치권 이외에 사회권을 기본권으로 향유하게 되었다. T. H. 마샬의 고전적인 정식화에 따르면 이때부터 시민권은 사회적 시민권이 되었다.[T. H. Marshall,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in Citizenship and Social Class and Other Essays,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0. 마샬에 따르면 시민권의 역사는 18세의 공민권 내지 개인적 시민권(사유재산의 자유, 신체의 자유, 계약 체결의 자유, 언론ㆍ출판의 자유, 집회ㆍ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에서 19세기의 정치권(선거권, 피선거권 등)으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사회권(교육, 사회적 서비스 등)으로서 진화해온 과정이다. 마샬의 논문은 시민권을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 요소로 파악하고 그 역사적 전개과정을 최초로 이론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목적론적인 성격을 띠며 국민국가를 불변의 제도적 토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곧 사회권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시혜나 구제(이는 또 하나의 차별이 된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나라의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를 뜻한다. 따라서 사회적 시민권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진전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사회권을 기본권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권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에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 중 하나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발리바르는 사회권들이야말로 “시민권에서 가장 정치적인 부분”(E. Balibar, “Communisme et citoyenneté”, in La Proposition de l’égaliberté, PUF, 2010, p. 190)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사회국가의 또 다른 효과는 사회권의 귀속에서 국민이냐 아니냐가 기본적인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점이다. “시민권=국적”(또는 ‘국민됨’, nationalité)이라는 등식이 국민국가의 핵심을 이룬다는 발리바르의 말은 이를 가리킨다. 이는 각각의 국민 국가, 특히 발전한 국가들 내에는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 및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에도 이들에게는 시민권이 제대로 부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이들에게는 일체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민국가에서 국민사회국가로 전화된 것은 국민국가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진전을 나타내지만 그러한 권리를 국민에게 제한했다는 점에서는 새로운 차별의 전개 과정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민사회국가의 두 가지 효과는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가 전개되고 국민사회국가가 위기에 빠지면서 첨예한 갈등을 낳게 된다. 한편으로 사회권이 축소되고 사회적 시민권이 약화되면서 노동자 계급 중 다수가 “재프롤레타리아화”되고 빈곤이 확대되는 경향이 발생한다.[프랑스 사회학자인 로베르 카스텔(Robert Castel)은 새로운 종류의 빈곤 대중을 가리키기 위해 “프레카리아”(précariat)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는 “연약한”, “취약한”을 의미하는 “précaire”라는 말과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다.] 이는 단지 주변부나 저발전 국가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중심부 내지 발전된 국민국가들 내부에서 “중심-주변”과 “부유-빈곤”의 차이가 확대되는 현상으로 발전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시민권 자체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집단들이 출현한다. 유럽을 비롯한 발전된 국민국가들에서 이것은 이주자 및 이민자들이다. 그 근본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각 국민국가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집단들에게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권에 제일 많이 의존하는 이 후자의 집단들은 사회권의 보존 및 획득의 문제를 보편적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제로섬 경쟁의 문제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겪는 어려움과 불안은 자신의 경쟁자들인 이들 외국인 이민자들 및 이주자들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들에 대해 증오심과 배척감을 갖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이들과의 차별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 내지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얻게 된다. 유럽의 극우파 정당들이 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해나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사회국가의 위기 속에서 진보 세력은 단지 기존의 사회적 권리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차이와 불평등을 그대로 방치하게 되며, 이는 다시 그러한 차이와 불평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우월감과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사회적 취약 집단들이 극우파를 지지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불평등을 강화하고 사회적 차별을 구조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진보 세력은 한편으로 사회적 권리를 보존하고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국민의 차원을 넘어서 외연적으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외연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
이 점을 좀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사회국가 개념이 지닌 또 다른 의의에 주목해야 한다. 이 개념의 의의 중 하나는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를 보편적 시민권의 진전 및 확대 과정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물론 이는 국민국가의 역사가 아무런 문제점이나 모순도 없는, 순조롭고 평화로운 발전의 역사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발리바르와 프랑스 사회학자인 도미니크 쉬나페르(Dominique Schnapper) 사이의 논쟁을 검토해보면 이점을 좀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쉬나페르는 프랑스의 신공화주의를 대표하는 사회학자로서 국민국가의 위기 시대를 맞아 공화주의적 전통에 입각하여 “국민”(nation) 개념을 옹호하려고 시도한다.(D.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Gallimard, 2003) 그녀에 따르면 “시민들의 공동체”로 이해된 국민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삶에 대한 개인들의 능동적 참여라는 의미를 지닌 시민권의 본질적인 토대이며 또한 세계화 시대에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해법이다.
그녀의 핵심 논거는 두 가지다. 첫째,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은, 특수한 신분이나 위계, 민족적(ethnique)ㆍ문화적 차이에 기초하지 않고 “개인들의 존엄성을 ... 그들이 지닌 보편적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연계한다”(D. Schnapper, La Communauté des citoyens, p. 106)는 점 때문에 다른 어떤 정치공동체보다 더 보편적이다. 둘째, 따라서 국민은 다른 집단들보다도 덜 배타적이며 덜 폐쇄적이다. 국민이라는 정치 공동체가 모종의 배타성을 지닌다면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서다. 하지만 이러한 배타성은 배척이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식별”(discrimination)을 뜻한다. 곧 모든 정체성은 불가피하게 타자들과의 차이, 타자들과의 거리를 통해 정의되듯이, 국민 역시 자신의 타자로서 외국인을 통해 정의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은 외국인이라는 타자에 대해 배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민족적이거나 문화적ㆍ언어적 실체에 기반을 둔 정치 공동체나 “헌법 애국주의”에 근거를 둔 하버마스식의 포스트 국민적 정치체보다 국민이야말로 여전히 현실적이면서도 민주주의적인 정치 공동체의 기초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발리바르는 국민국가가 보편주의적인 정치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국민국가가 배타성이나 배제성에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배제적인 성향을 띤다는 점, 따라서 정치 공동체의 보편적 형태가 지닌 모순을 첨예한 형태로 드러낸다는 점이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국민국가 또는 국민사회국가가 보편적이면서 배제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발리바르는 외연적(동화적) 보편주의와 내포적 보편주의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를 해명한다.외연적 보편주의은 『인권선언』에서 주장되었던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가 인종이나 성별,계급,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이러한 보편주의는 식민화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럽의 국민국가들의 형성 및 그들 사이의 패권 경쟁은 식민지 경쟁으로 이어졌는데, 식민화에 나선 각각의 국민국가들은 이를 보편성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식민화는 단순한 약탈이나 침략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선교의 사명 내지 인류 전체의 문명화라는 사명의 관점에서 수행되었으며, 더욱이 내면화된 신념에 따라 수행되었다. 하지만 식민주의가 내세운 보편주의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비유럽의 피식민지 인구들은 식민화를 통해 지배자들의 국적에는 포함되었지만, 식민지 본국의 시민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다. 따라서 같은 국적을 지닌 시민들이기는 하지만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비시민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이 외연적 보편주의의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은 내포적 보편주의를 통해 좀더 첨예한 형태를 띠게 된다. 발리바르가 내포적 보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인권선언』에서 주장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것, 곧 평등=자유라는 명제를 가리키며, 또한 모든 인간은 시민이라는 것, 곧 인간=시민이라는 명제를 가리킨다.(『인권선언』에 대한 발리바르의 해석은 E. Balibar, “Droits de l’homme et droits du citoyen: la dialectique moderne de l’égalité et de la liberté”, in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La Découverte, 1992; 「인권과 시민권. 평등과 자유의 현대적 변증법」, 윤소영 엮음, 『인권의 정치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참조)
내포적 보편주의가 함축하는 모순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다면, 그리고 각각의 개인들이 누리는 평등과 자유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는 한에서만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낳는다. “시민권의 배제 ... 는 인간성 또는 인간 규범 바깥으로의 배제와 달리 해석되고 정당화될 수 없다.”(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127쪽—강조는 발리바르)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은 그가 사람인 한에서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따라서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는 원초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만, 역으로 이러한 권리는 그가 시민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만, 곧 특정한 정치체, 특정한 국민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한에서만 실제로 향유되고 행사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가 어떤 국가의 국적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는, 곧 그가 이러저러한 국민이 아닌 한에서는 인간성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무수히 생겨난 국적 없는 사람들이 이러한 모순을 실제로 체험하고 구현했음을 보여준 바 있다(Arendt,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Harcourt, 1951; 『전체주의의 기원 1』,박미애ㆍ이진우 옮김, 한길사, 2006, 9장 참조). 또한 이른바 “보트 피플”이 바로 이러한 국적 없는 사람들=인간성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은, 보편적인 시민권의 체계로서 근대 국민국가에게는 항상 그것과 맞짝을 이루는 배제의 체계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뜻한다. 국민국가에서 국민사회국가로의 전환은 이러한 모순을 한층 더 강화한다. 왜냐하면 이미 국민국가 체계에서 시민권이란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커다란 특권(권리들에 더하여 누릴 수 있는 자격이자 심지어 신분. 미국 시민권을 얻기 위해 원정 출산을 떠나는 수많은 임산부들의 행렬은 시민권 내지 국적이 신분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권이라는 자신의 본래 의미와 모순되는 것이었지만, 국민 사회 국가에서 사회권이 기본권으로 포함됨으로써 시민권을 누리는 본래적 의미의 시민들과 그것에서 배제된 비시민들(소수자들 및 이주 노동자들) 사이의 차별이 훨씬 더 강화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정부는 이러한 차별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더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값싼 노동력의 수요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미등록(불법)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수입 제한과 고용 금지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의 (불법) 수입과 고용은 관행적으로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들을 합법화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비용과 법적ㆍ행정적 문제점 때문에 각 국가들은 이들을 계속 불법적인 상태에 놓아두려고 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이들의 노동으로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불법 행위를 조장하고 그것을 구실로 하여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사회적 치안을 강화하려는 국가의 기만적인 이중적 행태가 전개된다.
유럽 연합의 건설로 인해 이러한 모순은 한층 더 첨예해진다. 왜냐하면 유럽 연합의 건설은 지금까지 국민국가에서 이루어졌던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발전 정도를 질적으로 넘어서는 훨씬 더 진전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유럽 건설에서는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에게만 유럽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회원국 소속 국민들이 아닌 사람들, 곧 주로 이주 노동자들은 한편으로는 각 국가의 시민권에서 배제되는 것과 동시에 유럽 시민권으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중의 배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자처하는 유럽의 한 가운데에서 일체의 권리로부터 배제된 새로운 종류의 인구들이 또한 구성되는 셈이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배제 상황을 지칭하기 위해 유럽의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유럽이라는 초국민적 정치체가 내포하는 모순은 국민국가를 넘어선 시민권의 보편화 대 아파르트헤이트 사이의 모순으로 집약된다. “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와“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근대 국민국가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불가피한 양자택일로 인도한다. 사회국가 및 사회적 시민권을 완전히 해체하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국민적인 정의에서 시민권을 전진적으로 분리시키고 관국민적(trans-national)인 성격을 지닌 사회적 권리들을 보증하거나.”(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앞의 책, 221쪽)
모순의 역사로서 국민국가의 역사
따라서 국민사회국가 개념의 또 다른 의의는 그것이 국민국가의 역사를 모순과 갈등의 전개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국민국가 비판론자들은 국민국가의 역사를 분석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제시하는 사례들은 억압과 배제의 권력으로서 국민국가가 자신의 전일적 지배를 관철하고 자신의 힘을 증대해온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국민국가는 그 역사 전체에 걸쳐 동일한 본질과 동일한 기능, 동일한 효과를 산출해 왔을 뿐이다(이들의 주장에 대한 좀더 상세한 비판은 진태원, 「국민이라는 노예? 전체주의적 국민국가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민족문화연구』 51호, 2010년 참조). 반면 국민사회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국민국가는 역사적으로 동일하지 않을뿐더러, 국민국가의 형태들이 변화해온 것은 바로 사회적 적대와 갈등 때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이래, 특히 20세기 중엽 이래 서유럽 국가들이 사회보장 제도를 실시하고 노동자들에게 광범위한 사회적 권리들을 허용한 것은,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투쟁과 세력 확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의 성과는 헌법을 비롯한 사회적 제도들 속에 물질적으로 각인되어 있다.발리바르가 지적하듯이 사회적 투쟁이 강력하게 전개됐던 서유럽 국가들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노동자들의 사회권이 헌법 자체 내에 명문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사회권을 헌법 속에 명문화한 나라는 이탈리아인데, 1948년 헌법은 “이탈리아는 노동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1958년 프랑스 헌법은 “주권”이라는 조항에서 “프랑스는 분할될 수 없고 정교분리적이며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공화국이다”(제 2조)라고 명시하고 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1949년 기본법(오늘날에는 독일 전체로 확장되었다)은 “독일연방공화국은 민주주의적이고 사회적인 연방국가”라고 명시하며, 28조 1항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를 좀더 정확히 명시한다. “각각의 주에서 헌법적인 지위를 지니는 조항들은 이 기본법이 정의하고 있는 공화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이며 사회적인 법치국가의 근본원리와 일치해야 한다.”(에티엔 발리바르,『우리, 유럽의 시민들?』, 앞의 책, 360쪽)
이처럼 사회권이 명문화되었다는 것은 첫째, 사회권이 인권 및 기본적인 정치권 등과 동등한 인간의 기본권으로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보장과 교육권, 의료권, 노동권 등은 단순히 빈자들에 대한 시혜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또 시민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권리로서 확립되었다. 따라서 둘째, 이는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누리고 더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물질적 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지난 1990년대 이후 유럽에도 강하게 밀어닥친 신자유주의적인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광범위한 사회권이 영위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물질적 토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국민국가 내에서 확립된 사회권이 여전히 모순에 빠져 있음을 잘 보여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권리를 누릴 자격은 해당 국가의 시민들 또는 국민들에게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 각국의 시민들 내지 국민들이 누리는 사회권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은 배제한 가운데, 특히 유럽 각국에 거주하는 비유럽(및 비서유럽) 지역 주민들에 대한 차별을 함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민사회국가 개념은 앞으로 사회적 투쟁의 방향과 목표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 시사해주는 지표의 구실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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