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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0일 수요일

시민다움 - 시빌리테(civilité)

2011년 12월 통권 008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8회] 시민다움(civilité)
진태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를 비롯한 근대 철학에 관심이 있으며,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서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저서에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공저), 『서양근대윤리학』(공저) 등이 있다.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가 1996년에 발표된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서관모ㆍ최원 옮김, 『대중들의 공포』, 도서출판 b, 2007에 수록. 이 번역본에서 이 논문 제목은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 인륜」이라고 되어 있는데, 뒤에 제시될 이유 때문에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시민다움’라는 표현으로 대체했다)이라는 논문에서 반(反)폭력의 정치에 관한 자신의 사고를 표현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그 이후 점점 더 그의 철학에서 중요성을 지니게 된 개념이다.

   시빌리테(civilité)라는 프랑스어는 영어의 (civility)와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예절이나 공중도덕의식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령 길거리에서 흡연을 하지 않는다는지,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 등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든지 하는 것이 시빌리테의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발리바르의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은 이런 일상적인 용법과는 거리가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거스르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의미의 시빌리테나 시빌리티는 보수주의 정치에 의해 자주 전술적으로 활용되곤 하기 때문이다. 가령 현재 프랑스의 대통령인 니콜라 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 시빌리테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을 밀어붙인 바 있으며, 이는 결국 200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방리유 소요 사태의 원인으로 작용한 바 있다.

   (‘방리유 소요’는 2005년 10월 27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전역 274개 방리유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소요 사태를 가리킨다. ‘방리유’(banlieu)는 도시의 외곽 지역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로, 현재에는 주로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저소득층 거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된다. 방리유 소요 사태는 경찰의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두 명의 아프리카 이민자 2세 청소년이 송전소 변압기에 걸려 감전사하면서 촉발되어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와 충돌을 초래한 바 있다. 이러한 소요는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사르코지가 ‘톨레랑스 제로’라는 구호 아래 소요에 대한 강력하고 무자비한 대응을 주문함으로써 더욱 격화되었다. 이 소요에 관한 국내 학자들 및 발리바르의 분석에 관해서는 이기라ㆍ양창렬 엮음, 『공존의 기술—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그린비, 2007 참조.)

   발리바르의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1) 발리바르가 말하는 ‘정치의 세 가지 개념’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2) 시민다움의 정치의 필요성을 촉발하게 된 계기로서의 극단적 폭력이란 무엇인지 3) 시민다움이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극단적 폭력에 맞서기 위한 정치인지, 곧 반(反)폭력의 정치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정치의 세 가지 개념
 
   발리바르는 「정치의 세 개념: 해방, 변혁, 시민다움」에서 정치의 세 가지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해방과 변혁이라는 기존의 두 가지 개념 이외에 시민다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선 해방(émancipation) 또는 정치의 자율성이란 권리의 내포적 보편성에 준거하는 정치를 가리킨다. 이것은 좀더 쉽게 말하면 인간 집단(인민이나 국민 또는 인류 등과 같은)이 이제는 어떠한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 및 역량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을 통치한다는 정치의 권리 선언에 준거한다는 뜻이다. 발리바르는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흔히 『인권 선언』으로 약칭되는)에서 이러한 해방의 정치의 원칙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권 선언』에서 정치는 인민의 자기 결정의 전개이며,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이 향유하는 권리들을 집단적으로 쟁취하여 서로에게 부여하고 보장한다는 호혜성의 원리가 뚜렷하게 선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자율성을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치의 자율성은 ...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 없이는 인식될 수 없고,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이란 역으로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근본적 권리들을 서로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이외의 것이 아니다. 주체들이 서로를 위해 해방의 궁극적 원천 및 준거가 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정치의 자율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대중들의 공포』, 33-34쪽. 이하 모든 인용문의 번역은 필자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들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아무런 조건이나 제한 없이 그가 인간인 한에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율성의 정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을 자신의 본질적 목표로 삼고 있다.

   그 다음 변혁(transformation) 또는 정치의 타율성이란, 정치를 규정하는 (물질적ㆍ상징적) 조건들, 특히 지배 구조 및 권력 관계들의 변혁을 정치의 중심적인 대상으로 삼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 푸코를 변혁의 정치의 두 가지 모델로 제시한다.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가 정치를 규정하는 본질적인 조건을 자본주의의 토대 내지 경제적 구조에서 찾았다면, 푸코는 규율 권력 및 생명 권력 같은 권력 관계들에서 변혁의 정치의 조건을 발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의 영역은, 그것을 조건 짓는 자신의 타자(마르크스라면 경제 구조, 푸코라면 권력 관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전혀 자율적이지 않고 타율적이라는 점, 따라서 진정한 정치는 정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또한 두 사람은 진정한 정치는 항상 새로운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본질적인 요소로 포함한다고 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적인 사회화 양식들의 갈라짐”으로 표현된다. 곧 “한편에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의 지배 하에서의 개인들 및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과] ... 다른 편에는 그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대중들의 공포』, 45쪽. 강조는 발리바르)의 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푸코의 경우에 주체화 양식의 문제는 “권력 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권력 관계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역전 가능성을 차단하는 ... 지배의 상태”에서 벗어나 저항의 가능성, 자유화(libération)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의 문제로 나타나며, 이는 궁극적으로 “자기의 기술”, 곧 개인들 각자의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실존의 미학)로 귀착된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지배의 조건이 강화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어떻게 그러한 조건을 변혁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두 사람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채 숙명론과 주의주의 사이에서 동요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 지배 상태의 강화가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주체 생산의 가능성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사람이 모델을 제공하는 변혁의 정치의 아포리아를 이루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한다. 다른 해방의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푸코는 지배 구조에는 일종의 변증법적 역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경우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기본적으로 모순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그것은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가정한다. 이처럼 경제결정론적 가정을 전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아무리 착취와 초과착취가 강화되더라도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촉진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결국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에 의해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푸코는 권력 관계와 지배 상태를 구별한다. 권력 관계가 다양하고 유동적인 힘들의 관계를 뜻한다면(따라서 권력 안에는 항상 저항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배 상태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계속 고수하고 그것에 함축된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한 관계를 강화하려는 상태를 뜻한다. 푸코는 지배 상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권력 관계가 함축하는 저항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며, 따라서 지배 상태를 벗어나거나 변혁할 수 있는 잠재력도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발리바르가 보기에 이 두 사람은 지배 구조의 강화가 저항이나 변혁의 가능성 자체를 잠식할 정도까지 강화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자본주의적 착취 관계가 전면화될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자본 관계 속에 완전히 포섭되어 자본 재생산의 기능적인 부품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규율 권력이나 생명 권력의 강화 역시 저항의 가능성 자체를 소멸시킬 정도로 심화될 수 있다. 사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비롯한 대중 집단이 파시즘 정치의 강력한 지지자로 돌변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절감한 것이 바로 이러한 가능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려 이것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표현한 바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착취 이후에도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도현실적으로 착취와 예속을 원할 정도까지 모욕과 착취를 감내하고 있는가? 대중의 무지나 환상을 파시즘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욕망을 해명할 수 있는 설명, 욕망의 관점에서 정식화된 설명을 요구했을 때,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사상가로서 가장 심원한 경지에 도달한다. 대중은 전혀 순진한 얼뜨기들이 아니다. 어떤 지점, 이떤 일련의 조건들 아래에서 그들은 파시즘을 원했으며, 해명될 필요가 있는 것은 대중의 욕망의 이러한 도착이다.” Gilles DeleuzeㆍFe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1972), trans. Robert Hurley et al.,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3, p. 29(강조는 들뢰즈ㆍ가타리).

   발리바르는 바로 이러한 아포리아에서 정치에 대한 세 번째 개념인 시민다움(또는 타율성의 타율성)의 필요성이 유래한다고 간주한다. “나는 정체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특징짓기 위해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을 시험해 보려 한다.”(『대중들의 공포』, 57쪽) 이러한 정치의 필요성은 바로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비롯한다. ‘일회용 인간’의 생산이나 외관상으로는 자연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재해나 전염병, 집단 학살 등과 같은 “‘비주체성의 환상적 압력’과 함께 우리는 분명 푸코가 그 이론화를 제안한 바 있는 모든 권력 관계의 정반대편에 와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에 대한 권리의 요구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 처해 있다. 인간 조건의 보편성이 거기에서 쟁점이 되지 않거나, 단지 지배적 합리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정치적 주체로 직접 자기 자신을 사고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같은 책, 58쪽)

   따라서 시민다움의 정치가 해방이나 변혁과 다른 대상을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정치의 개념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민다움이 문제 삼는 것이 “행위자들 사이의 인정과 소통, 갈등의 조절을 가로막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감소시킴으로써 정치적 활동(그 실행의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의 조건들 자체를 생산하는 것”(에티엔 발리바르, 『우리, 유럽의 시민들?』,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0, 224쪽)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
 
   시민다움이라는 개념은 폭력, 특히 ‘극단적 폭력’(violence extrême)이라는 개념을 전제한다. 극단적 폭력은 일차적으로 구조적 폭력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구조적 폭력이 “체계의 재생산과 양립 불가능한 저항들을 ... 파괴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본래적인 억압”을 의미하고 따라서 항상 모종의 ‘기능성’ 내지 체계적 합리성을 가정한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극단적 폭력은 “수백만 명에 달하는 쓸모없는 인간들의 전면적 제거”, 따라서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대중들의 공포』, 59쪽)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이것을 ‘초객체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더 나아가 이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대조적인, 극단적 폭력의 또 다른 양상으로서 ‘초주체적 폭력’의 양상도 존재한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폭력은 어떠한 변혁도 목표로 삼지 않는 희망 없는 반역, 목적 없는 폭력의 일반화 같은 현상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례 발생한 이른바 ‘민족 청소’나 대량 학살 같은 현상들을 의미하는 ‘증오의 이상화’ 현상이다. 곧 자기 내부에 있는 타자성과 이질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하려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그것을 구현하려고 하는 맹목적이고 (구체적인 개인들 및 집단들의 의지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초주체적인 의지 작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의 양상들은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발리바르가 여러 곳에서 묘사한 극단적 폭력의 사례들 때문에 이것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등과 같은 이른바 저개발 지역이나 치열한 민족적ㆍ종교적 분쟁이 벌어지는 특수한 곳의 문제로 한정하기 쉽지만, 발리바르의 논점은 오히려 극단적 폭력이 보편적이고 구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지정 불가능하며 어쨌든 고정되지 않는다는 관념으로 복귀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폭력의 초객체성은 지배 관계들의 자연화 속에(심지어 마르크스의 용어와 푸코의 용어를 결합하면서 우리가 비대칭적 권력 관계들의 자연화라고 부를 만한 것 속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항상 기입되어 있고, 폭력의 초주체성은 ‘죽음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로 충분히 잔인하고 불가해한 정신적 권위의 제국으로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지평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대중들의 공포』, 61쪽)

   특히 극단적 폭력의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 정체화(identification)(‘동일시’와 ‘정체성 형성’이라는 이중의 의미에서)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학의 본질적인 차원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보편적인 양상을 띤다. 극단적 폭력의 문제가 정체화의 문제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후자가 정치의 소재 자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정체성에 대한 발리바르의 관점이 두 가지 핵심적인 이론적 전제, 곧 정체성은 “개인들이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의 상상계 속에서 구성되며, 다른 한편으로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관(貫)개인적(transindividuel)인 것, 곧 “(순수하게) 개인적이지도 (순수하게) 집단적이지도 않다”(같은 책, 62쪽)는 전제에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특히 데리다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정체화는 자연적으로는 부재하는 것을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과정, 정체성의 형성/분할인 한에서 항상 이미 폭력적인 과정이며, 또한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이 모든 정체화 과정은 정상화의 과정인 한에서 역시 폭력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체화는 정의상 도덕과 문명 및 폭력과 야만의 가능성을 동시에 구성하는 양면적인 과정인 셈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정체화 과정은 두 가지 극단적인 상황을 항상 가능태로서 함축하게 된다. 하나는 개인성을 “‘절대적으로 균일하고 유일한 정체성”(에티엔 발리바르, 『정치체에 대한 권리』, 진태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1, 150쪽)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속류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이 예찬하고 또한 신자유주의적 시장의 명령이 강제하는 것처럼 아무런 고정되거나 본질적인 정체성 없이 그때그때마다 상이한 정체성들로 유연하게 전환하고 끝없이 부유하는 정체성이다.(『정치체에 대한 권리』, 152쪽)

   첫 번째 경우 “국민적 존재에 대한 절대적 정체화”가 나타난다. “그것은 ‘나는 프랑스인이다’라거나 유대인이다 또는 코르시카인이다라는 생각을 나타내며, 내가 하는 모든 것, 나라는 존재의 모든 것,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순전히 프랑스인, 코르시카인 또는 유대인‘이다’라는 사실의 한 가지 표현 내지 양상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러한 정체화는 훨씬 더 폭력적이다. 사실 이러한 정체화는 자기 자신 및 자신이 속하는 공동체로부터 모든 차이, 모든 타자성을 정화하고 추방하려는 시도로 귀착하게 된다. 그리고 추방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극한적으로는 절멸에 대해 말하게 된다. 하지만 절멸은 감당해내기 아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절대적으로 유일한 정체성의 제작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고 심지어 찬양하게 해주는 서사가 추가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서사는 타자와 적, 특히 내부의 적에 대해 사람들이 부과하는 증오의 이상화를 통해 그들을 악마화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절대적으로 유일한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곧 사람들이 지니고 있고 더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정치체에 대한 권리』, 151쪽)

   반대로 두 번째 경우는 정체성의 평범화 또는 완전한 탈인격화를 의미한다. “그것은 특별히 규정된 정체성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사실, 정체화들 사이에 아무런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절대적으로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곧 아무런 질서도, 아무런 중심축도, 아무런 특권적인 이름도 없는 가운데 만남과 결합, 융합, 섞임, 필요, 용도 내지 유용성에 따라 원하는 모든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의 인성이나 역할에서 다른 인성이나 역할로 부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포스트모던 유토피아 및 새로운 ‘가상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매혹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이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해방적이라고, 이것은 근대성의 거대한 성과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이상화한다. 우리는 아무런 역할에도 갇혀 있지 않고 어떤 특수한 정체성에 의해서도 정의되지 않으며, 계속해서 이러한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극단적으로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기쁨이나 유용성의 관계를 형성할 때마다 매번 우리는 또 다른 개인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게 될 상대방들이 세계 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고 갖가지 피부색을 지니고 있고 갖가지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차이를 지닌 이들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갖가지 피부색을 갖게 되지는 못할지라도 갖가지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한 유토피아가 시장 및 소비 사회, 세계화의 경향과 공명한다는 점이다.”(『정치체에 대한 권리』, 152-53쪽)

   세계화는 이 두 경향을 강화하면서 한 편에서는 극우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를 동반하는 초주체적 폭력을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제거할 수 있고 도구화할 수 있는 사물들의 지위로 환원시키는”(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Sur les limites de l’anthropologie politique”, in Alfredo Gomez-Muller ed., La question de l’humain entre l’éthique et l’anthropologie, L’Harmattan, 2004, p. 180) 초객체적 폭력을 낳는다.

 
   반폭력의 정치로서 시민다움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우선 시민다움에 대한 발리바르의 원칙적인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 수록된 「국민 우선에서 정치의 발명으로」 끝부분에서 그는 세 가지 정치(해방, 변혁, 시민다움)를 구별하면서 시민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마지막으로 앞의 두 가지 수준으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의 또 다른 수준이 존재한다. 이것은 시민성도 아니고 우리가 의존하는 사회구조나 지배 형태의 변혁도 아니며, 내가시민다움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이다. 아마도 더 좋은 단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시민다움이라는 이 단어는 몇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예의바름(urbanité)이나 공손함(politesse)은 너무 약한 용어들이며, 나는 문명이라는 용어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그것은 이 용어가 야만인들 또는 미개인들이 존재한다는 관념과 한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타인들에게 문명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시민다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들에게 문명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문명화하는(civiliser) 것이다. 곧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사실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정체성들의 히스테리화와 관련해 우리가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주는 소통 및 삶의 형식들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정체성들 간의 갈등, (한 줌의 인도주의와 함께 자행되는) 정체성 중심적인 정책과 안전 중심적인 정책, 폭력 사이의 단락에 직면해 문제는 정체성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및 집단들에게 자기 자신을 정체화하고 탈정체화할 수 있는, 정체성 속에서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차이 및 평등의 권리와 동시에 연대와 공동체의 권리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 문제다.”(『정치체에 대한 권리』, 169쪽)

   시민다움의 기본 의미가 그렇게 난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반폭력의 정치를 실행하는 일은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정치가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의 경계를 넘어서 대중들의 정체화 과정, 곧 대중들의 가장 내면적인 삶과 물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 장치들 사이의 관계를 문제 삼고 그것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하며, 그것도 인민 대중들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정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극단적 폭력의 일반화와 더불어 세계적인 “예방적 반(反)혁명 내지 반봉기”(『우리, 유럽의 시민들?』, 225쪽)가 추구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반폭력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할지 사고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적 반혁명 내지 반봉기에 맞서 혁명적 대항 폭력을 추구하려는 유혹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이러한 해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한다. “예방적인 반혁명에 대해 대칭적으로 혁명을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반봉기에 대해서는 봉기를 대립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 본다면 바로 이런 논리야말로 20세기를 [...] ‘극단의 시대’로 만들어 왔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적인 ‘척도’조차 초과했던 또는 모든 대항 권력을 파괴했던 사회적 지배 구조들과 권력관계들을 변혁하는 것이지만, 저는 앞의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니 오히려 질문 자체를 전위시키고 복잡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우리, 유럽의 시민들?』, 247쪽)

   이러한 관점에서 발리바르는 원칙적으로 두 가지 정치의 결합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헌정에 내재적인 구성적 봉기의 역량을 복원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서 시민권의 정치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공동체의 자기 비판으로서 시민다움의 정치다. 발리바르에게 시민권의 문제가 중요하다면,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근대적 시민권이 내포적으로 보편적인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내포적 보편성은 한편으로는 정치에는 초월적(신 같은)이거나 자연적인 토대(민족이나 종족 같은)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는 시민들이 서로서로에게 호혜적으로 권리들을 부여하고 확장하는 일임을 뜻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정의상 국적이나 종교, 성별, 인종 등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시민권의 정치는 특히 국적 여부에 따라 시민권을 한정하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본 경향(발리바르는 이를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으로 표현한다)에 맞서 반(反)차별과 반배제 투쟁을 수행하는 정치임을 뜻한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말하는 시민권의 정치란 “‘인간적인 것’이 실현되는 유일한 형식으로서 시민들의 공동체”(É. Balibar, “Violence et civilité”, op. cit., p. 187)를 실현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시민다움의 정치란 이러한 정치 공동체를 실체화하려는 위험, 곧 이러저러한 실체적 토대 위에 정치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동체를 비실체화하려는 정치를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네덜란드의 정치철학자인 헤르만 판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n)을 따라 이러한 공동체를 ‘운명 공동체’(community of fate)라고 부른다. 여기서 운명 공동체란 보통의 용법과 달리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서로 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폐지할 수 없는 집단들이 서로 만나게 되는 현실의 공동체”를 가리킨다(『우리, 유럽의 시민들?』, 249쪽). 이런 공동체에서는 원주민(가령 한국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시민적 정체성을, 적어도 상징적으로라도 재검토해 보아야 하며, 다른 모든 이들 ― 곧 어디 출신이든, 선조가 누구든, ‘적법성’이 어떻든 간에 오늘날 지구의 한쪽에서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 ― 과 함께 그런 정체성을 현재 시점에서 재구성해야”(같은 책, 259쪽) 한다. 따라서 운명 공동체는 매우 급진적인 다원적 정치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구현하는 시민권은 역시 판 휜스테렌의 표현을 빌리면 “미완의 시민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폭력의 비판의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폭력 안에서 폭력에 맞서는 반폭력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는 오늘날 폭력의 비판을 위한 탁월한 준거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에 대하여
 
   이 개념의 번역에 관해 간단히 언급해두고 싶다.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를 번역한 서관모ㆍ최원은 이 번역서에서 ‘시민 인륜’이라는 번역어를 제안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번역어는 시민다움이 지닌 의미를 충실히 전달하기 어렵고, 어감 자체도 매우 어색해서 이 개념의 번역어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민 인륜에서 인륜이라는 말은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Sittlichkeit) 개념에 대한 임석진의 번역어 ‘인륜성’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이 근대적인 정치 윤리를 재구성하는 것을 겨냥하는 것인 데 반해, 우리말의 ‘인륜’은 봉건적인 윤리 질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인륜성이라는 번역어는 헤겔의 개념을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우며, 이러한 어려움은 발리바르가 제안하는 시민다움의 경우에는 더 가중될 수밖에 없다.

   필자의 비판이 제기된 이후 두 사람은 ‘시민 인륜’이라는 원래의 번역어를 포기하고 각자 상이한 대안을 제시한 바 있다. 서관모는 ‘시민 윤리성’이라는 번역어를 새롭게 제시한 바 있으며(서관모, 「알튀세르에서 발리바르에게로」, 진태원 엮음, 『알튀세르 효과』, 그린비, 2011, 656쪽 주 192)), 최원은 공식적인 제안을 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 ‘시민 공존’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겠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최원의 제안은 별다른 논거가 없고 아직까지 공식적인 제안으로 제시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논외로 한다면, 서관모의 새로운 제안은 ‘시민 인륜’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어색한 조어라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빌리테라는 말을 번역하기 위해 헤겔의 지틀리히카이트라는 개념에 굳이 준거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필자의 경우 이전에는 발음만 옮겨서 ‘시빌리테’라고 번역했는데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부터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이러한 번역어를 택하게 된 이유를 간략히 밝혀보겠다. 우선 발리바르는 시빌리테 개념을 citoyenneté 개념, 곧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말 번역에서도 이러한 긴밀한 연관성이 드러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가 이러한 상호 연관성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곧 ‘시민다움’이라는 번역어는 발리바르가 사용하는 시빌리테 개념이 시민(곧 정치적 주체)의 본성 및 그 법적, 제도적 틀을 뜻하는 시민성/시민권 개념과 관련하여, 시민의 정치 윤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말에서 ‘~답다’나 ‘~다움’은 본질이나 동일성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당위나 책임 같은 윤리적ㆍ규범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시민다움은 시민성/시민권이라는 개념과 맞짝을 이루면서 후자가 지닌 윤리적 함의를 드러내는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영어의 시빌리티나 프랑스어의 시빌리테라는 말은 철학적인 개념이기 이전에 일상어로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도 시빌리테라는 용어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용법과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시빌리티 내지 시빌리테의 번역은 일차적으로 이 용어들의 일상성을 살릴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에 사용된 ‘시민인륜’이나 ‘시민윤리성’이라는 번역어보다는 시민다움이라는 말이 좀더 적절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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