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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7일 일요일

야만과 인간성 - 법과 도덕의 경계에 있는 전쟁 (위르겐 하버마스 99.4.29 디차이트 기고)

[철학]

하버마스의 코소보 관련 기고(99.4.29)

http://www.berlinreport.com/bbs/board.php?bo_table=germany&wr_id=506&sca=%EC%B2%A0%ED%95%99&page=10
작성일 : 1999/10/21  조회수 : 93

■야만과 인간성 - 법과 도덕의 경계에 있는 전쟁
(위르겐 하버마스 99.4.29 디차이트 기고)

독일군의 첫번째 참전과 함께 오랜 소극성의 시대가 지나갔는데, 이 시대는 2차대전 종전 후 독일인의 정서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제 전쟁이다. 물론 나토의 '공습'은 전통적 의미의 전쟁과는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실제로 공습의 '외과수술적인 정확성'과 민간인에 대한 계획적인 보호는 매우 높은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지나가는 20세기를 특징짓는 전면전으로부터 작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코소보 분쟁을 텔레비젼을 통해 매일 밤 지켜보는 '반쯤 참여자'들인 우리들도 공습 아래서 몸을 숨기고 있는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게 이는 전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다행히도 독일 여론에서 둔감한 말투들이 보여지지 않고 있다. 운명에 대한 그리움, 훌륭한 동지들을 위한 지식인들의 북치기 등이 없다는 것이다. 걸프전 당시에만 해도 긴급 사태(Ernstfall)라는 수사법, 국가적 파토스와 위엄과 비극과 남성적 성숙에의 주술들이 소리 높은 평화운동에 반대해 울려 퍼졌다. 이 양진영은 현재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쪼그라든 평화주의에 대해 약간의 심술이 여기저기서 보여지고 있으며 "우리는 도덕의 높은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라는 강력한 목소리들이 들려오고는 있다.그러나 참전에 대한 옹호자나 반대자 모두 매우 분명한 규범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말들은 별로 끄는 맛이 없다.

평화주의적 반대자들은 작위와 무작위 간의 도덕적 구분을 상기시키면서 정확한 군사 공격에도 불구하고 '감수해야 하는' 민간인 희생자들의 고통에 시선을 돌리려 하고 있다. 그 호소는 그러나 이번에는 국시를 중시하는 냉담한 현실주의자들의 양심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그 호소는 적녹 연정의 '법률적 평화주의(legal pacifism)'를 겨냥한 것이다. 우리들보다 이성법적 전통이 더 지배적인 전통적 민주주의 국가들 옆에서 우리 독일의 피셔와 샤르핑 장관은 국가들 간의 자연상태를 인권의 측면에서 문명화시킨다는 이념을 끌어오고 있다. 이를 통해 국제법이 세계시민의 법(ein Recht der Weltbuerger)로 전환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법률적 평화주의는 주권국가들 간의 잠재적 전쟁 상태를 단지 국제법 상으로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완전히 법률화된 세계시민적 질서 안에서 지양하려고 한다. 독일에서도 칸트에서부터 켈젠까지 이러한 전통이 존재했다. 그러나 독일의 정부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시민(Weltbuerger)의 연합체에 직접 가입한 한 국가의 국민(Staatsbuerger)은 이를 통해 자국 정부의 자의로부터 보호될 수 있다. 국가들의 주권을 초월하는 하나의 법률의 가장 중요한 귀결은, 피노체트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지도자들이 그들의 지배와 전쟁 행위에서 행했던 범죄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독일에서는 한편에서는 '신념 평화주의(Gesinnungspazifist)'와 다른 한편에서는 법률 평화주의가 공공의 토론을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현실주의자'들도 규범적 수사의 외투 아래로 숨어들었다. 찬반 입장들은 각각 서로 반대되는 동기들을 묶어내고 있기도 하다. 주권적 국가 권력에 대한 규범적 제어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힘의 정치 신봉자들이 평화주의자들과 연대하고, 다른 편에서는 순수하게 (나토) 동맹에의 신의를 중시하는 '대서양주의자'들이 인권에 대한 열광을 보여주는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불만을 억지로 감추고 있다. 이 정부 당국자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퍼싱 2 미사일 배치에 반대해서 가두 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이다. Dregger와 Bahr가 Stroebele 옆에 서있고, Schaeubler와 Ruehe가 Eppler와 손잡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독일의 좌파 정부와 이들의 규범적 논변의 선호는 본래적인 전투 대형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공적 토론과 분위기가 다른 서유럽 국가에서와 다르지 않다는 다행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다른 길'이나 '다른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 대륙과 앵글로색슨 간의 분열이 다소 보여지고 있는데, 적어도 유엔 사무총장의 자문을 구하고 러시아와의 협의를 추구하는 측과 주로 자신의 무기를 신뢰하는 측의 분열이 보여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는 미국과 EU 회원국들은 공동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랑부예 협상이 실패한 이후 그들은 코소보 자치를 위한 리버럴한 규정을 세르비아 내에서 관철시킨다는 목표를 선언하고 나서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적 처벌을 강행하고 있다. 전통적 국제법에서는 이를 주권 국가의 내정에 대한 개입, 즉 내정간섭 금지의 위반 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한편 인권 정책의 전제 하에서는 이번 공격은 국제사회로부터 (유엔 위임 없이도 묵인 하에) 권한을 부여받은 평화유지를 위한 군사적 행위로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서방의 해석에 따르면 코소보 전쟁은 고전적 국제법에서 하나의 세계시민 사회의 세계시민적 법률로의 도약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발전 양상은 이미 유엔 결성과 함께 시작되었으나 동서 냉전기간 중 정체되었고 그 이후 걸프전과 그 외의 군사개입에 의해 가속화되어왔다. 물론 1945년 이후 인도적 개입은 유엔의 이름 하에, (아직 국가 권력이 기능하는 한에서) 해당 국가 정부의 형식적 동의와 함께 이루어져왔다. 걸프전에서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 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설치하고 이라크 북부에 쿠르드 난민을 위한 '보호구역'을 설치함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한 주권국가의 '내부 문제'에 개입하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명시적으로 박해받는 소수파를 자국 정부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91년 4월 결의안 688호에서 유엔은 '국제 안보상 위협'이 있는 경우에 가능한 개입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상황이다. 나토는 유엔 안보리 위임 없이 행동하고 있으면서 이 개입을 박해 받은 민족적(그리고 종교적) 소수파를 위한 긴급 구조로 정당화하고 있다.




코소보에서는 이미 공습 수개월 전부터 약 30만명에 대해 살인, 테러, 추방이 가해졌다. 이제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로 향하는 난민 행렬의 충격적 장면들이 조직적인 인종 청소의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난민들을 인질로 쓰기 위해 붙잡아두는 경우도 있다. 밀로셰비치가 나토 공습을 자신의 정책을 쓰디쓴 종말까지 계속 밀고 나가기 위한 기회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난민들을 담은 장면들이 이러한 인과적 관련성을 거꾸로 인식하게 할 수는 없다. 협상의 목표가 바로 이러한 살인적인 인종 민족주의를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1948년 민족학살에 대한 협약의 원칙들이 지금 공습 하의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적용되고 있는지는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뉘른베르크와 동경의 전범 재판의 원칙에서 '인간성에 대한 범죄'로서 국제법에 포함되게 된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이다. 얼마전부터 유엔 안보리는 이러한 범죄도 경우에 따라서는 무력 조치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평화 위협'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안보리 위임이 없는 이번 경우에 군사개입하는 국가들은 오직 그들이 의무지워져 있는 국제법의 원칙들로부터만 이러한 원조 조치에 대한 권한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쨋든 코소보인들의 동등한 공존에의 권리와 불의한 폭력적 추방에 대한 분노는 서방의 군사 개입에 대해, 다양한 편차는 있지만 폭넓은 동의를 가능케 했다.CDU의 외교 대변인 Karl Lamers는 이러한 동의에 처음부터 수반되어온 이중성을 잘 표현했다. "이렇게 우리 양심은 진정될 수 있다라고 우리의 이성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감성은 이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많은 불안정의 근원이 있다. 무력 개입 외의 어떠한 대안도 허용하지 않았던 협상 전략이 현명했던가에 대한 회의가 강하게 떠올랐다. 왜냐하면 군사 공격의 목표에 대한 회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게서 야당에까지 밀로셰비치의 강경노선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전쟁의 위험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인근 국가인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불안정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핵 폭탄으로 강력하게 무장한 러시아에서는 여러 그룹들의 '형제 민족'과의 연대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군사적 수단의 적절함이 문제가 되고 있다. 모든 '불가피한 피해', 다뉴브강 교량 파괴로 강으로 떨어진 모든 기차들, 알바니아 난민을 실은 모든 트랙터들, 세르비아인 거주지를 비롯해서 미사일 공격의 희생이 된 모든 민간 시설들은 전쟁의 어떤 익명의 부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군사개입한 '우리들이' 양심에 거리껴하는 그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적절함의 문제는 결정하기가 어렵다. 나토가 국영 라디오 파괴를 30분 전에 고지해야 했던 것은 아닌가? 또한 의도적인 파괴- 불타는 담배 공장과 가스시설, 폭격받은 고층빌딩과 거리와 다리, 유엔 경제제재로 그렇지 않아도 타격을 입은 유고슬라비아의 경제 인프라의 폐허화- 역시 (공습에 대한) 동요를 더욱 크게 한다. 피난 중에 죽어간 모든 아이들은 우리의 신경을 찢어놓는다. 왜냐하면 파악될 수 있는 인과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이제 책임의 실마리가 엉클어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비참한 추방 속에서 한 국가 테러리스트의 무자비한 정책의 결과들은 그에게 피묻은 무기를 버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변명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는 공습의 결과들과 쉽게 풀어버릴 수 없게 엉클어지고 있다.

또한 이제 혼란스러워진 정치적 목표에 대한 회의가 있다. 물론 밀로셰비치에 대한 5가지 요구는 자유롭고 다문화적 보스니아를 위해 데이튼 협정이 상정했던 요구들과 동일한 원칙을 따르고 있다. 만일 알바니아계 코소보인의 세르비아 내 자치 요구가 충족된다면 이들은 전혀 분리 독립에 대한 권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대알바니아 민족주의는 나토 군사개입이 억누르고자 하는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다. 이제 하루 하루 인종 청소의 상처가 깊어질수록 여러 민족의 동등한 공존이라는 당초의 목표를 재고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코소보를 분단하는 것은 아무도 원할 수 없는 분리일 뿐이다. 게다가 보호위원회 설치는 전략의 변화를 요구하는데, 즉 지상전과 수십년에 걸친 평화유지군 주둔을 의미한다. 만일 이러한 예견치 않았던 결과가 나타난다면, 이번 작전의 정당화 문제는 사후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물어져야 할 것이다.

독일 정부의 발언에는 어떤 날카로운 음향이 섞여있다. 이는 논란이 되는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에 대해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것이며, 마치 피셔와 샤르핑의 강력한 수사와 함께 어떤 다른 목소리가 내부에서 들려오는 것과 같다. 이것은 군사 개입이 정치적으로 실패할 경우 이 개입을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몰아가게 되고 국가 간의 관계를 법제화하려는 노력을 수십년 후퇴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인가? 그렇다면 나토가 국제사회를 위해 짊어진 이러한 '경찰 역할'은 기껏 하나의 '전쟁', 그것도 발칸을 더 심각한 참극으로 몰아넣는 더러운 전쟁이 될 뿐인가? 그리고 이는 이에 대해서 언제나 잘 알고 있던 Carl Schmitt의 말처럼 될 것인가? 그는 "인간성을 말하는 사람은 속이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반휴머니즘을 유명한 말로 표현한 바 있다."인간성은 야수성"이라고. 법률 평화주의는 결국 잘못된 기획이 아닌가라는 회의가 이러한 불안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다.




현실정치의 모순

코소보의 전쟁은 정치학과 철학에서도 논쟁이 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민주주의적 법치국가는 정치권력을 법적으로 길들인다는 위대한 문명의 성취를 국제법상 인정된 주체들의 주권이라는 근거 위에서 이룩했다. 한편 '세계시민적' 상태가 이러한 민족국가의 독립성을 의문시하고 있다. 계몽주의의 보편성이 여기서 특정 공동체의 집단적 자기 주장을 가능케하는 정치권력의 고집에 부딪히게 되는가? 이는 인권 정책의 살에 박힌 현실적 가시이다.

현실주의 학파들도 물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등장한 독립 국가들 체제가 구조적으로 변동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는 1) 점점 복잡해지는 세계 사회의 상호의존성 2) 국가들이 서로 협력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의 등장 3) 초국가적 기관과 절차의 숫자와 그것이 가지는 권위의 증가(이는 집단안보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4) 외교의 경제화와 내정/외교의 고전적 구별의 혼돈 등등이다. 그러나 비관주의적 인간 이념과 본래부터 불투명한 '정치적인 것'의 개념 등이 상호 불개입의 국제법적 원칙을 고수하는 독트린의 배경을 이룬다. 국제적인 사냥터에서는 독립적 민족국가들이 가능한 한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이해 관계라는 잣대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다. 왜냐하면 이는 한 집단의 안보와 생존은 그 집단 구성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것과도 교환할 수 없는 가치이며, 합리적인 자기 주장의 당위성은 집단적 주체들의 관계를 가장 잘 제어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개입적인 인권정책은 범주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권정책은 자기 주장이라는 어느 정도 '자연적' 경향을 과소평가하고 차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규범이라는 기준을 규범화에서 벗어나는 권력 위에 배치하려고 한다. Carl Schmitt는 이런 논변을 자신의 정치적인 것의 '본질 규정'을 통해 끝까지 밀고 갔다. 원래부터 가치중립적인 국가 이념을 '도덕화'하려는 시도를 통해 인권 정책은 국가 간의 자연적 투쟁을 '악에 대항한 투쟁'으로 타락시킨다고 슈미트는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적절한 반론들이 있다. 즉 (인권 정책은) 이제 국가 시대가 끝났으며 국제사회의 규칙이 힘을 겨루는 민족국가들을 조종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개입을 부르는 것은 오히려 국가 권위의 침식이며 무너졌거나 권위주의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 국가 내의 내전과 종족 분쟁이라는 것이다. 이는 소말리아와 루완다 뿐 아니라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그러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의심도 별 근거가 없다. 현재의 사례는 보편주의적 정당화가 언제나 이해관계들의 특수성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공격에 있어 이러한 의심들이 지적하는 것은 매우 빈약하다. 경제의 세계화 때문에 국내정치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진 정치인들에게 외교적인 힘의 과시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공격에 있어 미국의 동기는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이고, 나토의 동기는 새로운 역할을 찾는 것이며, 소위 '유럽 요새'의 동기는 새로운 이민의 물결을 예방하는 것이라고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토록 어렵고 위험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개입에의 결정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주의'에 대한 반론은 무엇보다 국제법의 주체들이 20세기 참극의 역사에 있어 남겨온 피의 흔적은 고전적 국제법의 무죄 주장을 의심스럽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엔 창설과 유엔 인권선언, 그리고 침략과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처벌 위협, 또한 이의 결과로 일정 정도 불개입 원칙을 제한하는 것 등은 금세기의 중요한 윤리적 경험, 즉 전체주의와 홀로코스트의 경험에 대한 필연적이고 적절한 응답인 것이다.

나아가 정치의 도덕화라는 비난은 개념적 불명확성에 근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시민적 상태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은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해 도덕적 관점에서 맞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국가의 법 체계에서 범죄행위를 처벌하듯이 처벌하려는 것이다. 국제 관계의 완전한 법제화(eine durchgreifende Verrechtlichung internationaler Beziehung)은 분쟁 해결을 위해 제도화된 절차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런 절차를 제도화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 문제를 법적으로 다루는 것이지 권리를 도덕적 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는 소위 '적'을 도덕적 측면에서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지탄하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또한 하나의 세계국가에 있어 폭력의 독점(Gewaltmonopol)과 세계정부(Weltregierung)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최소한 제대로 기능하는 안전보장이사회가 필요하며, 국제 형사재판소 판결의 기속력이 필요하며, 각 정부 대표자들의 회담을 '두번째 단계'의 세계시민의 대의 기구를 통해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엔을 이렇게 개혁하는 것은 아직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법제화와 도덕화 간의 구분을 지적하는 것은 적절하기는 하지만 두 날을 가진 칼과 같다. 왜냐하면 세계적 차원에서 인권의 제도화가 덜 이루어져 있는 한, 법과 도덕의 경계는 현재의 경우처럼 모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안보리가 봉쇄되어 있기 때문에, 나토는 국제법의 도덕적 정당성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데, 이러한 정당성에는 국제사회로부터 승인된, 효율적인 법 적용 및 집행 기관이 결여되어 있다.

세계시민 사회의 미비한 제도화는 예를 들어 평화 유지 및 정착을 위한 개입에 있어 정당성과 효율성 간의 간격에서 잘 나타난다. 유엔은 Srebrenica를 보호 항구로 선언했다. 그러나 그곳에 정당하게 주둔한 군대는 세르비아인의 진주 이후 잔인한 학살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나토는 이러한 유엔 안보리의 위임이라는 정당성 없이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인권정책의 딜레마

인권정책은 이러한 상황의 간격을 메꾸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인권정책은 세계시민법의 제도화 미비로 인해 단지 미래의 세계시민적 상황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러한 역설적 조건 하에서 필요한 경우에는 군사적 수단을 써서라도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정책을 어떻게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이 세계 전역 모든 곳에 쿠르드 민족이나 체첸이나 티벳을 위해서 개입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바로 우리의 문 앞인 발칸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인권정책을 이해하는데 있어 재미있는 차이가 미국과 유럽 간에 존재한다. 미국은 인권의 전세계적 관철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사명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목표를 힘의 정치라는 전제 하에서 추구한다. EU의 대부분의 회원국들은 인권 정책를 오히려 국제관계의 전면적인 법제화 프로젝트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프로젝트는 힘의 정치라는 변수도 변화시키는 것이다.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 유엔이 허약하게 규제하는 국제사회의 질서를 잡는 역할을 넘겨 받았다. 여기서 정치적 목표를 평가하는데 있어 인권이 윤리적 가치 지향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언제나 이와 반대되는 고립주의적 경향도 있으며 다른 국가들처럼 미국도 우선적으로 자국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데, 이는 언제나 앞서 선언한 규범적 목표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 잘 보여졌으며 이는 계속 미국의 '뒷 마당'의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울리히 벡이 "인도주의적 이타성과 제국주의적 힘의 논리의 새로운 혼합 형태"라고 명명한 이런 형태는 미국의 전통이 되어 있다. 1차대전 당시 윌슨 대통령과 2차대전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기들에는 실용주의적 전통에 깊이 뿌리박은 이상의 추구도 존재한다. 독일이 1945년 패전과 동시에 해방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이러한 것에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매우 미국적인, 즉 규범적 지향성을 가진 힘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유고슬라비아와의 전쟁을,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비타협적으로 밀고 나가고 필요한 경우 지상군도 투입하는 것이 매우 적절해 보인다. 이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장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아시아와 같은 다른 지역에서 군사동맹체가, 국제법이나 유엔 헌장에 대한 완전히 다른 그들의 해석에 근거해서, 군사적 수단으로 인권 정책을 진행시켜 나간다면 그때 우리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인권이 자신의 정치 행위를 윤리적으로 지향시키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법률적 의미에서 하나의 권리로 나타난다면, 상황은 달리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인권은, 그 윤리적 내용과는 무관하게, 기속력 있는 법률 체계 속에서 효력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개인의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권이 전세계적으로 하나의 민주주의 법치 체제 안에서 마치 한 국가의 헌법에서처럼 위치지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적 차원에서 이러한 권리의 수취인이 곧 이의 발신인으로 이해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엔의 기구들은 기속력 있는 법 적용과 민주적 입법을 완성시키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규범은 그것이 아무리 내용적으로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제한에 불과할 것이다. 코소보에 개입한 국가들은 물론 유고 정부가 인권을 짓밟은 사람들의 권리를 관철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베오그라드 거리에서 춤추는 세르비아인들은 Slvoj Zizek이 말했듯이 "민족주의의 저주에서 풀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변장한 미국인들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 질서가 군사력으로 강요되고 있다. 유엔이 회원국인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군사적 조치를 결정하지 않는 이상 이는 규범적 관점에서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19개의 의심할 바 없이 민주주의적 국가들 역시 그들이 스스로 개입을 결정한다면 한 정파에 머물게 된다. 그들은 오직 독립적 기관에만 주어지는 개입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 그들은 가부장적(paternalistisch)으로 행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적절한 도덕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적 가부장주의가 불가피하다는 의식 속에서 행위한다면 그가 행하는 폭력이 아직 민주적 세계시민사회의 틀에서 정당화된 법률 행위의 성격을 얻고 있지 못함도 알고 있어야 한다. 도덕적 규범들은 우리들의 보다 나은 통찰에 호소하지만, 제도화된 법률적 규범인 것처럼 강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힘의 정치에서 세계시민 사회로

제도화된 세계시민 상태는 앞으로 추구되어야 하는데 마치 그것이 이미 현존하는 것처럼 행위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이로부터 희생자들을 외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국가 권력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테러가 될 때 고전적 의미의 내전은 인민에 대한 범죄가 된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민주주의적 이웃국가들은 국제법적으로 정당화되는 긴급구조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세계시민 상태의 미완성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요구된다. 이미 존재하는 제도와 절차는 전체를 위해 행동하는 한 특정 정파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오해들의 한 원천은 예를 들어 정치적 정서들이 역사적으로 다른 시기에 있는 것처럼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나토의 공중전과 세르비아의 지상전에 엔첸스베르크가 말하는 것처럼 4백년의 시간차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있어서 내게는 그림멜하우젠보다는 에른스트-모리츠가 떠오른다. 그러나 정치학자들은 새로운 의미에서 '제1' 세계와 '제2' 세계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오직 평화적이고 부유한 OECD 국가들만이 자신의 국가적 이해관계를 유엔의 거의 세계시민적인 요구 수준과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새로운 의미에서의) '제2 세계'는 유럽 민족주의의 힘의 정치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다. 리비아, 이라크, 세르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국내의 불안정한 상황을 권위주의 통치와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책을 통해 보완하는데, 이들은 외부적으로 팽창주의를 펴고 있으며 국경 문제에 예민하고 주권 문제에 있어 신경과민을 보이고 있다. 이런 종류의 관찰은 서로 간의 교류에 있어 문턱을 더욱 높이게 된다. 현재 이러한 문턱이 외교적 노력을 더욱 강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주목할만한 정치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헤게모니를 움켜쥔 질서의 수호자로서 인권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려 하고 있다. 다른 한편 우리(유럽인)들은 전통적 힘의 정치로부터 현재의 무력 분쟁을 넘어 세계시민적 상태로 가는 과도기를 함께 풀어나가야 할 배움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장기적 전망을 볼 때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나토가 자기 자신에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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